정선아리랑 발상지, 거칠현
거칠현동(居七賢洞) 유래
평화롭고 순박하고 궁벽한 정선 땅에
역사의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고려가 망했을 때
문을 닫고 절의를 지킨 마을이 있었다.
이름하여 두문동(杜門洞)이라 했다.
송도 두문동에 은거하던
전오륜(全五倫)등 7인이
정선 서운(瑞雲) 산중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고려의 부흥을 고대했다.
그러나 한 번 바뀐 역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세월에 망국한을 곱씹었다.
그러나 정선에는 정작 이들이
옮겨오기 이전,
그리고 고려가 아직 망하기 이전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려던
장본인이 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유명했던
이(彛) 초(初)의 옥(獄)을 일으킨
이초(李初)였었다.
정선인 이초는
이성계의 세력을 제거하고
고려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파평군 윤이(尹彛)와 함께
명나라에 건너가
명나라의 힘을 빌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
이때 고려에서는
왕방(王昉), 조반(趙반)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저간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명나라 예부에서
고려 사신에게
윤이와 이초라는 사람이 와서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성계가
요(瑤, 공양왕)를 세워
임금을 삼았으나
요는 왕실의 종친이 아니고 인척이다.
요가 이성계와 더불어
장차 중국을 침범하려 하는 것을
이색 등 재상들이
옳지 않다 하였더니
이색, 조민수, 이림(李琳) 등
10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 우인열(禹仁烈),
정지(鄭地) 등
9인을 귀양보냈다.
귀양간 재상들이 몰래와서 아뢰고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기를 청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사신이 고하자
명단에 올랐던 사람들 일부를
순군옥에
일부는 청주옥에 가두었다.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의 힘을 빌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한 것은
외세를 빌리려했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고
고려왕권을 부흥시키려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된다.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 표수현, 지금의 강소성에
유배되어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집현전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전오륜(全五倫)은
고려가 망하자
송도 두문동(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개경 동남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회 때 쓰는 관과 조복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흩어지므로
‘조회하지 않는 재’라는 뜻으로
부조현(不朝峴)이라고 칭하며,
부조현(不朝峴)을 지나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不朝峴碑)를 세우게 했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인 것은
1751년(영조 27년)에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에
은거하다가
동지 김중한(金仲漢), 고천우(高天佑),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遂), 김위(金瑋) 등과 함께
정선 서운산중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켰으니
여기가 바로 거칠현동이라는 이름의
한 많은 고장이 되었다.
한 많은 마음을 한시로 읊었다.
망국한의 가락은 그리하여 정
선 산골의 마을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울어
정선의 거칠현동 백이산은
점차 송도와 멀어져 갔지만
정선아라리 가락은
그 마음만을 더욱 간절하게 했다.
구슬픈 가락은 그리하여
위대한 카타르시스를 이루는 것이었다.
낙동리 거칠현동은
망각의 시간에 싸여
고려 망국한의 슬픈 고장이 되었다.
이들의 고사리 캐는
구슬픈 노래 소리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그 가락은 민중 사이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민중의 가락이 되었다.
거칠현동의 충절은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듬뿍 담게 되었다.
송도의 마음은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 남면지
거칠현은 낙동1리에 위치해 있는
명실상부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다.
어떤 이는 아우라지가 발상지라고 알고 있으나,
백이산에 귀양 온 일곱 충신이
세월을 한탄하면서
망국의 한을 가락에 담아 부른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며,
이 곡조에 여러 가사가 붙여져
정선아리랑이 된 것이
정설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잃어버려 한탄하였듯이
이제 우리 낙동리 주민들은
그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거칠현의 성터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림으로
한탄하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석회석 광산의 희뿌연 먼지와 물이,
순결한 그들의 깨끗한 마음과는
너무나 다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마을의
유일한 역사유적이요,
문화유산인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를
복원은 아니더라도
더 이상 훼손하지 못하도록
마을주민, 그리고 무엇보다
군의 의지가 절실할 “때”이다.
매년 정선아리랑의 개막식에 앞서
이곳 거칠현공원에서는
정선아리랑 발상지를 기리는 뜻에서
내빈 및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아리랑 제전을 열고 있다.
카페 게시글
일반 게시판
거칠현동(居七賢洞)
靑山 노승렬
추천 0
조회 22
20.11.06 19:45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