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몇몇 지역에서는 전형적인 회색 나방이 감소하고 검은 나방이 급격히 증가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검은 나방은 지역에 따라 많게는 90%나 급증했다.
산업화와 함께 공기오염으로 나무에 이끼가 자라지 않으면서, 회색 나방이 오히려 눈에 잘 띄어 잡아먹히기 쉬워진 탓이었다. 변하는 환경에 나방이 기가 막히게 적응한 것으로, 자연선택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을 것이다.
눈을 돌려 나방의 색깔 같은 개체간 차이를 낳는 유전자를 살펴보면 어떨까. 오늘날 잘 정립된 분자유전학에 따르면 이런 차이는 유전자 수준에서의 돌연변이에 의한 것인데, 개체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는 수많은 DNA의 변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대상은 유전자일까, 개체일까, 종일까? 진화의 주체인 생물체와 배경인 환경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진화론과 자연선택의 현대적 변화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진로를 예상해보자.
19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창한 진화학설의 핵심 중 핵심은 '자연선택'의 개념이다. 자연선택이란 개체들끼리 차이가 존재하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환경에 잘 적응하면 그 개체가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함으로써 퍼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얼마 안 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진화의 개념과는 달리, 진화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아이디어는 의심과 반박이 잇따랐다. 20세기 이후에야 발전한 유전학이 1930~50년대에 다윈주의와 결합하면서(이를 '진화적 종합' 또는 '현대적 종합'이라고 부른다) 자연선택은 진화를 이끄는 거대한 동력임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자연선택의 원재료인 개체변이의 정체가 단백질과 유전자의 변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뒤 상황은 오히려 복잡해졌다. 1960년대 중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1970년대 말에는 단백질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유전자 수준에서 진화의 근본 원리를 탐구할 수 있게 됐다.
정작 유전자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자 자연선택의 작동이 모호해 보이는 사실들이 발견됐다. 즉 작은 DNA 돌연변이는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변이가 모두 나방의 색깔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형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되든 표현되지 않든)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영향을 정말 주는지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확증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말 최고의 이론유전학자였던 일본의 모토 기무라 박사는 유전적 돌연변이 대부분이 생물의 생존과 생식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래서 자연선택에서 중립적이라는 중립적 대립유전자 이론을 정립했다. 유전자의 변이가 중립적이냐 아니냐와는 별개로, 개체 수준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과 유전자 수준에서 유리한 것이 상이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한 사람이 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는 머리카락 색깔부터 스트레스에 강한 면모, 성실성과 같은 특질들이 영향을 끼친다.
어떤 유전자들은 이러한 유리한 특질을 만들어서 개체의 자손의 몸에서 자기 자신을 영원히 존속시키려 한다. 반면 대응되는 유전자를 찾기 어려운 특질들도 있는데 후천적으로 습득한 특질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또한 유전자 수준에서는 개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와 경쟁을 벌여 자신을 퍼뜨리려는 지상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심지어 개체에는 치명적인데도 이기적으로 생존하는 유전자도 있다. 어느 초파리에는 난자와 수정할 때 경쟁하는 정자들을 모두 죽이는 유전자가 있다. 보통 세포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가 짝을 이뤄 두 벌씩 존재하지만 정자나 난자는 감수분열을 통해 한 벌의 염색체만을 갖는다.
그런데 2번 염색체에 존재하는 이 킬러 유전자는 대립되는 2번 염색체를 지닌 다른 정자에 독성 효소를 방출하고 자기는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방어 유전자를 가동시켜 경쟁자를 말살해 버린다.
결국 이기적 유전자는 개체에겐 아무 이득도 안 주지만 자신에게만 유리한 작용을 하는 약아빠진 전략 때문에 더 잘 살아남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저명한 진화유전학자인 마이클 린치는 고등생물로 갈수록 유전체의 복잡성이 진화한 것이 이러한 이기적 환경에 생물들이 수동적으로 적응한 결과라는 도발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유전자와 개체가 챙기는 이익이 다르듯이 집단과 종의 수준에서 유리한 것도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줄줄이 물에 빠져 자살하는 쥐 레밍은 먹이가 부족하면 종의 존속을 위해 개체가 자발적으로 희생되는 사례로 종종 꼽혀져 왔다.
그렇다면 과연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는 주체는 종일까, 개체일까, 유전자일까? 현대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모든 수준에서 일어나지만 유전자와 개체 수준의 선택이 가장 근본적이다.
흔히 집단이나 종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이타적인 특질들도 사실은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의 번성에 봉사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자연선택의 결과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거시적인 생물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진화에는 어떤 방향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방향이나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환경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자연선택은 때에 따라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작용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던 돌연변이가 어느 순간 유리하거나 불리한 형질이 되기도 한다.
프린스턴대 교수 피터 그랜트와 로즈메리 그랜트 부부는 다윈이 진화의 신비를 발굴해낸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지속적으로 핀치 새를 관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관찰은 환경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연선택의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독한 가뭄이 맹위를 떨친 1977년 핀치 새 1,200마리 중 1,000마리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살아남은 종류는 큰 씨를 깨먹을 수 있을 만큼 부리가 큰 새들이었다.
다음 해 태어난 핀치의 평균 부리길이는 앞 세대보다 4% 길었다. 반면 비가 많이 내린 1983년에는 씨가 풍부해 작은 부리를 가진 새들이 살기가 더 좋았고 이후 핀치의 평균 부리는 2.5% 줄어들었다.
부리의 크기는 정해진 방향이 없고 진보의 증거도 아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누가 더 잘 살아남느냐의 문제이며 이것이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과정이다. 중립이론에서도 환경이 변하면 중립적이던 돌연변이들이 유리해져서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특성은 자연선택에서 상충되는 효과를 갖는다. 존 엔들러는 구피(송사리과 민물고기) 수컷의 반점무늬가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했다.
원래 포식자가 있는 환경에서 서식하던 구피 수컷 200마리를 포식자가 없는 지역으로 옮기자 작고 희미하던 반점무늬는 2년(15세대)만에 훨씬 크고 진해졌다. 포식자의 눈을 피하려 흐릿한 무늬를 지녔던 구피가 암컷과 짝짓기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화사한 무늬로 갈아입은 것이었다. 엔들러는 다시 이 구피들을 몇 개 연못으로 나눠 일부에는 가장 포악한 포식자를, 일부에는 덜 위협적인 포식자를 넣고, 나머지는 포식자 없이 유지했다. 10세대 후 가장 포악한 포식자 연못의 구피는 다시 무늬가 희미해졌지만, 덜 위협적인 포식자가 있는 환경에서는 여전히 밝고 많은 무늬였다.
구피의 반점무늬라는 형질은 잡아먹히기 쉽다는 불리한 압력과 암컷을 유혹하기 쉽다는 유리한 압력 사이에서 어떤 선택압이 더 강하냐에 따라 진화한다.
21세기에는 생물의 유전자 정보 전체가 밝혀지는 단계로 생물학이 발전하고 있다. 예견해보건대 19세기 중엽 싹튼 자연선택이론은 DNA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자연선택과 적응의 흔적을 찾아낼 미래 게놈연구의 시대에서도 근본 개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