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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인 시모음
그림자 / 송재학
가끔 내 그림자가 앞뒤 둘이다 그들은 진하고 연한 색으로 나누어진다 앞 그림자는 언구럭스러워 그늘에 들어가면 실루엣처럼 봉곳하고 뒤 그림자는 무거워 우울증과 비슷하다 흩어지고 모이니 벌거숭이 저들을 쉬이 호명하지 못하겠다 그림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난간은 순간 비틀거리며 그림자의 빈혈을 붙들지만 그림자도 계단을 놓칠세라 육신보다 먼저 이지러진다 잊었던 통증 여럿이 그림자를 으깬다 발목이 뭉개어져도 참아내자 그림자는 흔들리더니 겨우 하나가 된다 등의 육신을 떼어내지 못하니까 자세히 살피면 윤곽이 매끈하지 않다 그림자가 두통을 만지다가 병실을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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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그림자는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육체를 숨길 수 없고 그것이 투명하지도 못하기에 그림자는 엄연한 현실이 된다. 이 그림자를 버릴 수도 치울 수도 없다. 날마다 마주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약간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림자는 나라는 존재와 행위를 빠짐없이 지상에 그려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 속에서 취소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림자를 보며 날마다 깨닫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 시에서는 그림자가 먼저 보이고 먼저 움직인다. 그림자가 마치 나보다 주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나타나지 않고 그림자만 계속 묘사되는 것이다. 그림자는 둘이 되기도 하고, 둘은 앞뒤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그림자는 “육신보다 먼저 이지러진다.” 이뿐인가. 그림자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내가 없거나 생략된 세계에서의 그림자들의 혼재. 그리고 그들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은 신비하고 서늘하다.
이수명(시인)
단풍 기차 / 송재학
내가 마셔야 할 독의 양만큼
단풍 화물을 실은 기차가 오긴 했다
내 눈동자 안쪽 미로의 갱도에서 서행하는 기차는
증기열차
여정을 단축하는 기차가 있다면
피를 토하는 기관사도 있다
커브에서 덜컹거리는 게 너무 깜깜하여
붉은색과 노란색이 서로 치명적인 줄 알겠다
멀어져가는 선로가 흑백으로 바뀔 때쯤
간이역이 마중 나왔다
잡목림이 말끔하게 하역한
붉은색과 노란색 음역(音域)은
간이역 확성기의 힘을 빌려
번질 대로 번졌다
단풍 화물차에게
붉은색과 노란색 땔감은 더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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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을 찾아 가보았다. 멀리 떠나지 못하는 소심함으로 가까운 장안사쯤으로 가서 단풍 화물차를 만난다. 내 눈동자 안쪽 미로의 갱도에서 서행하는 증기열차는 시월 중순의 남부라서 아직 속도가 느리다. 사람도 단풍드는지 이때쯤 붉어지는 마음이 있다. 붉어지는 마음만 있으면 또 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노래지는 마음도 있다. 맞불이다. 치명에 드는 줄 모르고 치명에 드는 계절. 그렇게 가을은 사람을 살짝 폐허에 들게 한다. 폐허에 든 마음을 땔감으로 쓰시라 단풍 화물차에 던져넣는다. 기온이 내려가면 기차는 점점 더 속력을 낼 것이다. 번질대로 번져서 재가 될 내 마음이 거기 있다.
김종미 (시인)
민박 / 송재학
툇마루의 놋요강에 오줌발을 내린다
막 개칠을 시작하는 소나기는 미닫이부터 적신다
비안개의 아가미조차 숨겨왔던 새벽이다
추녀의 숫자만큼 뒹구는 빗방울
느린 시간의 뒤에 좀벌레처럼 머무는 빗방울
머위잎을 기어이 구부리는 빗방울
빨랫줄의 참새가 방금 몸살을 터는 중이다
자주달개비 혀에 보랏빛이 번지는 중이다
질펀해질 마당이 막 소란해지는 중이다
자세히 보니 모두 알몸이어라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헤 이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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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인의 시 ‘민박’에는 ‘나그네의 잠자리’라는 ‘민박’(民泊)의 통상적 의미와 함께 ‘애가 타도록 걱정스럽다’는 ‘민박’(憫迫)의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서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비오는 날 낯설은 민박집 지붕과 창가와 문틈으로 스며드는 빗소리와 함께 나그네 인생들의 젖은 삶의 무게들을 노래하는 듯하다. 빗방울은 ‘느린 시간 뒤에’ 머물러 머위잎마저 구부리고 질펀해질 마당을 소란케 하는 나그네의 젖어드는 풍경의 주어(主語)다. 민박 같은 생애 어느 멈춰진 시간, 빗방울 소리에 둘러보면 모두 알몸이었다는 소스라치는 발견! 이것이 삶의 민박(民泊)에서 만나는 민박(憫迫)의 어스름한 아침 같은 것 아닌가. 무엇이든 씻겨지고 말갛게 벗겨지는 투명한 알몸, 어떤 거짓도 칠하지 않는 알몸을 지니고 싶다.
김윤환 (시인)
별과 별의 직선 / 송재학
별이 잠드는 곳은 별들의 숫자만큼 물웅덩이가 널렸다는 서쪽밤하늘에 별보다 더 많은 손금을 남기는
별의 잔상은 지상에서 건너간다는데
그게 위독인가 싶어 별과 별 사이
가장 빠른 직선을 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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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잠들면 별이 된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별들이 잠들면 어디로 갈까요? 지는 별이 남기는 잔상을 따라서, 밤하늘 한쪽으로 별들이 몰려가 잠드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어릴 땐 유성우를 보고 재빨리 소원을 빌거나, 오리온자리를 찾아 손가락으로 이어 보는 시시한 장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엔 사상 최초로 블랙홀의 존재가 관측되었지요. 잃어버린 우산과 지갑과 사람이 꼭 거기에 다 묻혀 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민현 (시인)
드므라는 말 / 송재학
드므라는 말, 심심하지 않은가 수면 위의 ‘드’와 거울이라는 ‘므'의 부력을 생산하는 후설 모음이다 물을 마시고 저장하는 낮고 넓적한 독이라는데, 찰랑거리는 물소리 대신 말을 잘 구슬리지 못한 혀가 앞장서면서 계면쩍다 드므의 손잡이를 잡는데, 물냄새가 훅 다가오면서 브라운 운동 하는 물결의 수화문이 어지럽다 다시 물드므 라고 들었기에 눈꼬리가 올라갔다 부적을 붙였기에 제 몸피보다 열 배 천 배 되는 물의 둥글고 모난 부피가 부풀었다 물이 물을 삼키듯이 물도 꾹꾹 쟁여놓을 수 있다 물의 입에 물을 퍼 담거나 물이 물을 쥐어짜거나 물은 물의 체온조차 외면하고 있다 불귀신의 얼굴을 요모조모 비추는 거울 같다는 드므, 물드므이기에 결국 가장자리는 개진개진 젖었다 하, 그렇게 불을 해찰하던 드므, 내 눈물이 필요하다는 드므,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를 지그시 누르는 평생이 있다 드므라는 말, 무거운가 가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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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火魔)는 머리가 좋은가보다. “물드므”에 비춰진 자기 모습에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니!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임을 판단하는 것은 고도의 인지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생후 15개월이면 거울 속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인지 인지한다.
동물들의 경우 유인원, 코끼리, 범고래, 돌고래 등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알아본다. 포유류 외에도 까치, 앵무새가 거울을 인지하고, 곤충 중에는 개미가 거울을 인지하며, 최근에는 시클리드라는 물고기도 자신의 모습을 인지한다고 보고되었다. 거울을 보고 자기를 자각(self-awareness)하고 알아본다면 그는 자아가 있는 생명체이다. 이런 생명체를 ‘비인간 인격체’라고 부른다.
“드므”는 궁궐의 중요한 건물 네 모서리에 방화수를 담아두는 그릇이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청동이나 돌로 만드는데 모양은 원형과 방형이 있고 솥 모양도 있다. 세 개의 손잡이 고리가 달린 드므는 방화수 용기 외에도 화마가 제 모습을 인지하고 도망가도록 하는 주술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국민의 안위를 위해 일해야 하는 곳에서 마구 쏟아내는 ‘말의 불똥’들이 불귀신처럼 어른거린다. 그 불똥들이 자칫 커다란 불씨가 되면, 막상 화상을 입게 되는 것은 국민들이 아닐지 불안하다. 화재를 조심해야 하는 계절이다. 개미도 물고기도 거울 앞에서 자기를 자각한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재앙의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마음속에 “물드므” 하나씩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려다 보면 어떨까.
서대선 (시인)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 송재학(1955~ )
종일 비가 와서 바깥은 경극의 배경과 잘 어울렸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먹구름과 싸우면서 제 높이를 슬슬 키웠던 능선 그림자도 한 움큼 불러 물에 담갔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양철 주전자가 물의 온도에 접근하면서 마침내 쇠붙이까지 물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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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어서 날씨는 마치 경극의 극적인 장면을 보는 듯하다. 찻잎을 우려 차를 마실 때에 시인은 푸른 찻잎에서 고요의 가느스름한 눈썹을 본다. 찻잔에는 능선의 그림자도 비쳤다. 시인은 맑은 물을 찻주전자에 부어 끓인다. 끓으면서 물과 주전자가 격해지는 것을 바라본다. 찻주전자 주둥이에서는 김이 몰아쳐 나오고, 뚜껑은 들썩들썩하며 곧 말처럼 멀리 달아날 기세다. 이 펄펄 끓는 물과 몹시 요동하는 찻주전자를 보면서 시인은 말한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속내를 숨기지 말고 모두 털어놓으라고. “사물의 안에 원래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발견 이상의 것을 시인은 해야 한다”라고 송재학 시인은 말한 적이 있다. 내년에는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잘 살펴야겠다.
문태준 (시인)
앰뷸런스 / 송재학 (1955~ )
앰뷸런스는 사자(死者)에게 빌린 옷을 입고 지나간다
바꾸지 못한 시트에는 잔설이 묻어난다
붉은 빛이 내 몸 뒤에서 토악질을 한 건 피 때문이었을까
앰뷸런스는 하나하나 불빛으로 바뀌는 울음의 슬로우 모션이다
폭우 사이를 뚫고 달리는 앰뷸런스 쫓아가 문 열리는 시간까지 기다린다
늦은 밤 냉장고 문을 열 때 당혹스레 쏟아지던 불빛처럼
두 손이 잠기는 늪이 내 눈알의 뒤쪽인지 알고 싶다
금방 터져 버려 퍼 담지 못할 양수 같은
산성(酸性)의 육체는 별을 기다리는가
앰뷸런스는 구겨지는 길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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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 울음이 쏟아지고 불빛이 섬뜩섬뜩 위급하게 빛날 때. 육체가 터지고 찢어지고 아픔으로 나동그라질 때. 인간은 때로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유롭다’는 것은 긴 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 줄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는 희랍인 조르바의 말이 떠오를 때. 죽음을 예행연습할 때.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천남성이라는 풀 / 송재학(1955~ )
꽃의 색깔이 잎과 같은 초록색인 천남성은
외할머니의 남은 것 중 몸에 가장 가깝지만
그 몸이 더 맑다
비 그친 하늘가에서 팔십 년을 보냈다면,
옆구리에 패일 찬샘처럼
잎이 변해 깔때기같이 길게 구부러진 초록 꽃잎은
이제 뻣뻣해지는 손이나 발이 생각해내는 젊은 살결처럼
저 피안에서나 다시 사용할 노잣돈처럼
숨은 노래를 다시 감추고 있다, 그 노래는
초록 꽃잎 안의 노란색 암술, 놀랍게도
꽃이름은 별의 이름, 알고 보면
잎이나 꽃이나 초록인 것처럼
외할머니는 사십 년 전 내 어릴 적에도 할머니였다
—시집 『기억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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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성(天南星)은 2월경에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서 잠깐 볼 수 있는 별이라서 남극성(南極星), 남극노인성이라 한다. 사람의 수명을 관장해 수성(壽星)이라고도 하는데 이 별을 보면 장수하고 이 별이 나타나면 태평성대 한다고 믿었다. 이 별 이름이 붙여진 풀꽃이 있다. 꽃이 초록인데 잎이 변해 꽃잎이 되었다. 독성이 있는 데다 뱀 머리나 호랑이 발바닥을 닮은 데서도 알 수 있듯, 꽃 같지 않은 꽃이다. 그 꽃에서 시인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자신으로 인해 할머니가 되었던 사십 년 전부터의 외할머니를 본다. 기다란 물주머니처럼 생겼다니 옆구리에 찬샘 파이듯 살았을 것이다, 외할머니도, 천남성꽃도. 젊은 살결을 숨기고 저승 노잣돈을 품은 듯 시리고 푸르게 살았을 것이다. 그늘지고 습기 찬 곳 어딘가에 천남성꽃 피어 있겠다.
정끝별 (시인, 이화여대 교수)
달맞이꽃 / 송재학
내가 짐작하는 달은 지상에만 제 짝이 있다 달빛이 쌓아 올린 저녁 너머 달의 일부였던 꽃이 있고, 달을 따라가지 않고 지상에 남았던 꽃은 삭망(朔望)을 되새김질하는데, 그게 슬프지만은 않다
달빛은 꽃이 되지 못하지만 꽃잎에 가깝고, 하염없이 늙어 가지만 죽지 않는 달을 기억하는 꽃의 노란색 발묵은 기어이 휘발하고 만다
달빛이라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다면 젖은 송연먹이 떠받치는 성청(聲淸) 고요도 있다
달맞이꽃은 달빛의 농담(濃淡)에서 비롯된 속삭임을 사용하고, 몇 가지 달맞이꽃의 수화를 익힌 밤의 이목구비가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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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만약 내게 재주가 있어 허공에 글씨를 쓸 수 있다면 한밤 내내 새벽이 올 때까지 옮겨 적고 다시 옮겨 적고 싶은 시다. 옮겨 적을 때마다 달빛은 그저 조금 짙거나 조금 옅은 속삭임으로 "꽃이 되지 못하지만 꽃잎에 가"까운 속삭임을 들려주리라. 그 속삭임은 맑고 향기로워 송연먹 향이 온 밤하늘에 가득할 것이고. 그러나 "달을 기억하는 꽃의 노란색 발묵은 기어이 휘발하고 만다". 애잔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시인은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게 슬프지만은 않다'고. 이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달맞이꽃은 "달을 따라가지 않고" 일부러 "지상에 남"은 "달의 일부"다. 그래서 이 지상의 밤들은 또 하늘하늘거리는 "달맞이꽃의 수화를 익"혀 "이목구비가 또렷해"지는 것이고. 그러니 이 밤이 온통 경탄스러울 뿐이다.
채상우 (시인)
기척 / 송재학
가을 숲에서 툭,
두리번거리던 알밤이 떨어진다
청설모 그림자가 먼저 다가선다
내 시선에도 그림자가 생긴다
서로 닮아가는 무게이니
고요의 눈썹을 달고 있다
참나무잎이 낙하하여
풀숲에 떨어진다는 것이
내 안에 눕는다
숨소리가 마중 나간다
그 짝짓기에는 높낮이도 없이
서로의
손가락이 가지런히 닿아서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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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은 남겨주세요’ 하루에 세 번이나 올라와 밤과 도토리를 주어가는 이웃들에게 부탁했다. 처음에 이웃들은 그깟 땅에 떨어진 밤과 도토리인데 뭐 그리 까칠하게 간섭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산속 식구들인 다람쥐와 청설모, 산토끼, 꿩, 고라니, 쥐와 두더지 그리고 곧 도착할 철새들이 겨울을 나야하기 때문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웃은 내가 그깟 밤과 도토리로 유세를 떠는 줄 안다. 그 이후 나는 동네에서 아주 까칠한 사람으로 따돌림 당했다. 그러기를 여러 해가 지나서야 겨우 뒷산 밤과 도토리를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웃의 뒷 담화를 견디며,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보리쌀을 준비해 산속 식구들의 모자란 겨울 양식을 보충하고 있다.
빨래를 널 때, “툭”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마치 ‘안녕’하고 인사하는 것 같다. 유월의 늦은 밤 밤꽃 비린내로 메슥거리던 시간이 떠오른다. 누가 다녀갔던 것일까. 저리도 실한 밤송이를 떨구며 인사를 건네다니. 몇 십 년은 족히 된 밤나무를 올려다보며 말을 건넨다. ‘밤알이 큰 것은 이웃과 조금 나누어도 괜찮겠지? 산 속 식구들이 올 겨울에도 네 품에서 배 고프지 않겠구나.’ 그러자 건너편 참나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후드득 도토리를 건네준다. 서로 상생하는 법을 보여주는 자연 앞에 마음이 낮아지는 가을이다.
서대선 (시인)
적막 /송재학
빙하가 있는 산의 밤하늘에서 백만 개의 눈동자를 헤아렸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별과 나를 쏘아보는 별똥별들을 눈부릅뜨고 바라보았으나 별의 높이에서 나도 예민한 눈빛의 별이다 별과 별이 부딪치는 찰랑거리는 패물 소리는 백만 년 만에 내 귀에 닿았다 별의 발자국 소리가 새겨졌다 그게 적막이라는 두근거림이다 별은 별을 이해하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별은 서로 식구들이다
- 시집 『날짜들』 (서정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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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인은 2012년 이 시를 포함한 5편의 작품으로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주관하는 제5회 이상 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미 40회를 넘긴 소설부문의 '이상 문학상'과는 별도로 시인에게 주어지는 이 상은 지금까지 8명의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며 상금도 2천만 원으로 천재시인 이상의 이름을 얹어 주는 상에 걸맞게 비중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권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상 시문학상은 ‘이상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며 선불교적 감성과 사유를 지향하는 시인’에게 주어지며, 그동안 이승훈, 정진규, 송찬호, 박의상, 김언희, 이수명, 전기철 시인이 수상하였다. 제9회 수상자 배출을 앞두고 있는데 이상의 실험성에 선적 사유가 결합된 어떤 작품이 선정될지 기대된다. 이 상은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상의 취지와 선정 기준에 부합하여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문한 나로서는 어림짐작도 불가하지만 아무쪼록 시대를 앞서간 이상 시인의 아방가르드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시인이 그 영예를 얻기를 바란다. 아방가르드는 본래 군사용어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을 뜻하였으나, 후에 전위예술의 의미로 폭넓게 쓰였다. 즉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가는 예술경향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우리 문단에도 미래파 등 아방가르드를 지향하는 유파가 없지 않다.
하지만 난해한 시를 구사한다 해서 덮어놓고 그 부류에 편입시킬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서정시 죽이기에 앞장섰다고 하여 아방가르드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의 세계에서는 특별한 지적 능력으로 펼쳐놓은 두근거리는 서정의 진경도 충분히 아방가르드라 불릴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선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사유로 정교한 언어를 세공해내는 송재학의 지성에 이 상이 돌아간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그의 시세계에는 어슷비슷한 상투적인 서정시와는 확연히 변별되는 혁신적인 미학이 엿보인다. 아울러 여러 시편들에서 선불교적 몽상이 깃들여져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 역시 송재학의 아방가르드한 감성의 산물이라 하겠는데, ‘적막’은 ‘빙하가 있는 산의 밤하늘’을 치어 올려다보고 그린 화엄의 진경이다. 낭패스럽지만 우리가 그리는 시적 상상의 범위가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 반면에 송재학의 스케일은 확실히 남다르다.
고흐가 밤하늘에 출렁이는 별빛을 보고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듯이, 이상이 봉건과 시대의 통념을 철저하게 거부했듯이, 그는 드높게 비상하여 서정의 물길을 저어 고독한 내적 정점의 세계로 나아갔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흙으로 도자기를 빗지만, 모든 도자기가 다 예술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도자기는 생활소품이 아니라 물을 담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소수만이 아방가르드적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방가르드가 된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의 표층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거나 훨씬 높은 곳에서 활자를 펼쳐 보여야함을 의미하고 미적 진보라는 과업을 이룩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권순진(시인)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 송재학
1센티미터 두께의 손가락을 통과하는
햇빛의 혼잣말을 알아듣는다
불투명한 분홍 창이
내 손 일부이기 때문이다
국경이 있는 손바닥은
역광을 움켜쥐었다만
실핏줄 같은 종려 이파리는 어찌 얼비치는 걸까
구석구석 드러난 명암이기에
손가락은 눈이 없어도 표정이 있지
햇빛이 고인 손톱마다
환해서 비릿한 슬픔
손바닥의 넓이를 곰곰이 따지자면
넝쿨식물이 자랄 수 없을까
이토록 섬세한 공소(空所)의 햇빛이 키우고,
분홍색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꾸는,
인동초 지문이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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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투과하는 햇빛을 보며, 투명한 손가락에서 자라는 나뭇잎 잎맥을 읽으며, 시인은 투명한 몸을 꿈꾸는 모양이다. 엑스레이를 찍듯이, MRI 영상을 찍듯이, “인동초 지문”과 “손가락뼈의 고딕”이 보이는 몸을 완상하는 모양이다. 햇빛을 비추면 “불투명한 분홍 창”이 되는 몸을 잠시 동물적인 육체에서 해방시켜 보려나 보다. 고작 칠팔십 년 사는 몸에서 고생대, 원생대의 지층을 탐사하려나 보다. 식물에서 동물로 갈라져 나온 진화의 시간을 감상하려나 보다. 실핏줄을 잎맥으로 바꾸어 보고 뼈를 뿌리와 가지로 바꾸어 보려나 보다. 그래서 내 몸에서 피어날 꽃과 열매가 어떤 모양일지 상상하려나 보다.
햇살에 온몸을 비벼보고 싶은 5월이다. 들숨을 크게 쉬면 하늘이 통째로 몸으로 들어올 것 같은 5월이다. 이 푸른 5월에 할 일. 생각과 욕심과 스마트폰 정보가 가득한 몸에 햇빛과 바람을 넣어 주기. 햇빛이 투과시켜 몸을 한껏 투명하게 하기. 내 몸에서 넝쿨식물의 줄기처럼 뻗어가는 식물성 뼈와 핏줄과 신경을 느끼기. 털구멍마다 가지와 뿌리가 돋아나는 식물성 육체 되기. 그래서 육식과 잡식으로 생긴 동물성 비린내 대신 풋내와 향기가 나게 하기.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해안선 /송재학
자기만의 해안선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기만의 고독이다 해안선이 챙겨두었던 고독과 고독을 대신하는 리아스식 해안이 뒤엉켰다 잎이 넓은 후박나무 서랍에서 뒹굴던 고독이다 해안의 오래된 비석을 읽을 때 더듬더듬 끊어지면서도 따라가는 건 돌과 글의 고독을 닮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따라 해안선을 걷다가 알기 힘든 옛 글자가 나올 때쯤, 긍휼(矜恤)이 있고 빈집이 있다 납작한 지붕이 있다면 고독이 딱딱해진 글자를 삼킨 것이다 먼바다에서 금방 떠내려온 섬이 그 집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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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시작된 슬픔이 몸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와 옆구리에 닿는다. 몸 반대편 쪽을 쓸고 이쪽 옆구리로 쓸려온다. 옆구리에도 해안선이 생길 것이다. 몸을 돌던 해안선은 몸 구석구석 안 닿아본 적이 없다. 절벽과 낭떠러지에 옆에도 있어보았고, 뼛속까지 내려가도 햇볕이 닿았다. 눈물이 나면 더 살고 싶었다. 아무도 산책하지 않는 길을 몸을 돌면서 떠내려 온 해안선은 옆구리에 쌓여 있다.
당신도 이 시처럼 ‘자기만의 해안선을 가진 사람이다.’ 한때 우수수 꽃잎들이 떨어지던 자신의 옆구리를 따라 조용히 걷는 자이다. 그건 당신에게 있는 가장 위대한 고독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오래 몸을 돌고 온 것들이 마음을 밀고, 옆구리로 쓸려왔다면 긍휼히 여길 일이다.
김경주 (시인)
습탁(濕拓) / 송재학(1955~ )
전날 밤은 흐려서 습탁이 맞춤이었다 달은 이미 흥건히 젖었다 권층운의 아귀를 슬며시 들추니 젖는다는 것은 달의 일상이다 구름의 일손을 빌려 달빛 몽리면적까지 화선지를 발랐다 달이 그새 참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한 마장 훌쩍 미끄러진다 잠 이루지 못하는 새들도 번갈아 달빛 속을 들락거린다 물이 뚝뚝 묻어나는 부레옥잠 대궁으로 화선지를 두들기자 달의 숨결이 잠시 멈춘다 그 위에 달만큼 오래된 유묵을 먹였다 뭉툭한 솜방망이를 가져온 것은 뭉게구름이다 다시 살살 두드리고 부드럽게 문지르고 공글리자, 먹을 서 말쯤 삼킨 시커먼 월식(月蝕)이다 칠흑이다 달이 탄식하기 전 화선지를 떼어내 새들의 긴 빨랫줄 항적에 널었다 아침부터 달의 탁본이 걸렸다 모서리 없는 습탁이다 먹이 골고루 묻지 않아서 속빛무늬로 얼룩덜룩하지만 잘 말랐다 건탁(乾拓)의 때깔도 보고 싶다
—송재학 시집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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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를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그리고 그 시인이 내 앞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는 일은 질투 나는 일이긴 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기도 하다. 시인으로부터 직접 시집을 건네받고 이 시를 펼쳤을 때 나는 뭔가 분위기 있는 그림을 받아든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시를 수십 번 읽고 나서야, 마치 이 시의 제목과 내용처럼 탁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촘촘하게 짜여진 그림. 시인은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이제 우리는 보다라는 이 하찮은 낱말의 뜻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그것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부재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수단이다”고 말 한 적이 있다. 이 봄은 나의 부재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혹은 세계의 눈이 되고자 하는 작업이 아닐까?
시를 따라가 보자. 흐린 밤, 검은 먹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다. 달은 검은 구름 사이를 벗어났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새들이 그 풍경 위를 날아간다. 부레옥잠이 떠 있는 연못 옆에서 오래 달을 올려다본다. 다음 날 아침 그 달이 아직도 떠 있다. -이것이 이 시가 자연적 시선으로 보는 풍경이다. 그런데 시인은 달을 보기 위해 자연적 시선이 아니라 탁본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현상학적인 방법을 전개한다. 달을 습탁하면서 달을 보는, 스스로를 지우면서 스스로 달이 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달은 물의 상상력이 되고 물은 달의 거울이 된다. 시인은 그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든 달은 칠흑의 달이다. 그것도 먹이 골고루 묻지 않아 얼룩덜룩한 달이다. 그러나 그 얼룩덜룩함이, 그 부재가 존재를 존재답게 한다. 그 부재의 틈이 바로 세계의 눈이기 때문이다.
노태맹 (시인)
검은색은 먹의 빛이다. 먹의 빛은 정신의 빛이요, 글씨(문자)의 빛이요, 말의 빛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먹으로 달의 탁본을 뜬다 했다. 비석문도 아니요 희멀건 덩어리 같은 달의 육체를 먹빛을 머금은 솜방망이로 두들겨 종이에 찍어낸다는 것이다. 달이 검어지는 월식의 장면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말의 빛이었던 먹의 빛은 이제 말없는 신비체인 달의 몸의 빛이 된다. 지금까지 했던 어떤 말들도 능히 지워버릴 수 있을 만한 먹에서 말의 빛으로 달의 몸은 찍혀 나오는 것이다. 말을 지우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몸이다. 그 ‘뉘앙스’를 대신하느라 그 몸자국이 “속빛무늬로 얼룩덜룩하”다.
안서현 (문학평론가)
닭, 극채색 볏 / 송재학 (1955~ )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추(錘)이다
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
—시집『기억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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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 의하면 닭의 볏은 머릿속에 있어야 할 정신이 좁은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몸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신의 극한에서 머리를 뚫고 나왔기에 그것은 피가 터져 나와 굳은 것처럼 붉은색이며 터져 나올 때의 형상 그대로 톱니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정신의 현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계관(鷄冠)은 계관(桂冠)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기택 (시인) 2004.11.21
새벽의 여명 속에서 우는 수탉의 울음소리는 웅장하고 생기로 넘칩니다. 새들은 사람의 후두(喉頭)외 비슷한 울대라는 음성기관을 이용해 노래를 한다죠. 울대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그 벽이 관악기처럼 떨리면서 소리가 난답니다. 새의 뇌에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영역이 따로 있답니다. 그 노래들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고 '결정화crthstallized'된 것이랍니다. 언젠가 시골에 살면, 닭 몇 마리를 키우며 새벽마다 수탉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죠.
이 시는 첫줄부터 압도적입니다.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정신이 번쩍 납니다. 수탉의 머리 위에 맨드라미꽃처럼 멋들어지게 늘어져 있는 볏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라고 합니다. 닭은 날개를 가졌으나 날지 못하는 비운의 조류입니다만, 그 볏의 위용은 뇌수에 미처 담지 못한 그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드러난 것으로 늠름하고 아름답죠. 초야 이곳저곳에 무명의 존재로 묻혀 사는 이들에게 뜻밖의 위안을 주는 시죠.
장석주 (시인) 2014.6.23
튤립에 물어보라 / 송재학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차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 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와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보라
—시집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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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다. 이 때 투기의 대상으로 튤립의 광풍이 불었다. 튤립의 소유는 곧 부와 교양의 상징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광기와 어리석음은 파국을 맞기까지 거의 30년간 지속되었다. 튤립 하나만 잘 키우면 대박이 터지고 인생 역전이 실현되는 ‘폰지게임’의 광풍에 뛰어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암스테르담은 예술과 사랑, 야망과 욕망으로 뒤얽힌 도시였다. 튤립의 소유가 부와 교양의 상징이라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던 비슷한 대형 음모는 그 후 영국에서도 한 차례 더 있었다. 이런 광풍이 휩쓸고 간 유럽의 한 도시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세살 때 화음을 감지하고 다섯 살 때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일곱 살에 교향곡을 작곡하고 열한 살 때 오페라를 작곡한 천재 음악가는 서른다섯 살인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튤립만큼이나 난해하고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비엔나 스테판 성당의 첨탑에 걸린 태양 속으로 빨려들었다.
정신과 의사는 끔찍한 충격을 평범한 경험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지만 시인은 평범한 경험을 짜릿한 충격으로 바꿔놓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치과의사이기도 한 송재학 시인에게 튤립은 어떤 의미이고 모차르트는 누구일까. ‘리아스식 해안 같은’ 생각 많았던 사춘기에 그 꽃을 처음 받았고, 시인이 ‘걷던 휘어진 길’에 ‘모차르트와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을 가진 걸 보면 꽤나 짜릿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짚이는 심증은 있지만 확증은 없다. 아무래도 ‘사랑의 고백’이란 꽃말을 가진 빨강색 튤립에게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할까 보다.
권순진 (시인)
마흔 살 / 송재학(1955∼)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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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시에서는 뭐 하나라도 배우는 게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미나리아재비가 삶아 먹어도 되는 식물이라는 것, 햇빛 잘 드는 습지에 무리 지어 자란다는 것, 번식력 왕성한 여러해살이 풀이라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그런 미나리아재비를 불러내 마흔 살 고비를 넘어가는 사람, 남자의 감상을 담았다. 의미를 산문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이어가는 이 솜씨! 은근하고 깊은 맛이 있다.
마흔 살, 젊음의 경계를 막 넘긴 나이. 이 대외적 나이로 우리는 실제 제 상태와 상관없이 한 생명체로서 강등당한 기분으로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된다. 어제오늘 가난했던 게 아닌데 제 가난이 더 부끄러워지고. 어째 세상이 자기를 편히, 달리 말하면 만만히 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담담히, 혹은 당당히 대면하기 퍽 힘든 마흔 살을, 시인은 미나리아재비에 비유한다. 이름부터가 남의 이름에 아재비로 더부살이인 잡풀 같은 마흔 살. 열정도 매력도 없어져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별 볼 일 없는 나이. 앞으로는 계속 이런 삶이겠지. 그래도 마흔 살, 아직은 좋을 때. 쉰 살이 넘으면, ‘젊은이를 만나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를 명심해야 한답니다.
황인숙 (시인)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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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의 소통
생의 바깥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다. 생사의 경계가 지워지면서 산 자와 죽은 자는 가까이서 대면하고 감각한다. 호흡과 호흡이 섞이고 유무의 실체는 하나의 덩어리로 현존한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에는 이승의 절벽에 홀로 서 있는 유한자의 고독한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상 끝에서 극단의 고뇌와 처절한 절망에 휩싸여 있는 수도승이 본 것은 바로 죽은 자의 웅얼거림이 아니었을까. 생사를 넘나들며 죽음의 숨결을 감각하고 사자의 큰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던 것은 아닐까.
황량한 배경에 비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 수도승의 모습이 이 시의 화자와 겹쳐진다. 수도승은 죽음을 살고 죽음을 넘어선다. 그러나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해변의 수도승”에 비해 이 시의 분위기는 새틋하고 아름답다. 시의 화자에게도 죽음은 낯설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이에게 몸을 열어 자신을 허락한다. “그”와 “나”는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서로 연민하는 관계이다.
잠결에 찾아온 고인은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는 존재이면서 아름다운 옛 추억의 행로를 되짚게 한다. 눈뜨지 않고 화자는 계속 꿈의 공간에서 거닌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소통의 순간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 전체에 죽음의 이미지가 드리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이별과 만남은 유구한 시적 소재로서 대부분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로 채색되는데 이 작품은 통상적 정서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점이 이 시의 특징이고 빛나는 부분이다.
또한 부력이 강한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시어들이 죽음의 묵중한 이미지를 가볍게 하고 화자의 걸음새를 활달하게 한다. “나비 떼 가득찬 옛날”을 다시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덤가에서 비롯된 시의 행보가 아름답고 화려했던 사랑의 시간에 도달하면서 생사의 경계는 가뭇없이 사라진다.
추억을 음미하며 거닐던 “그”와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산 자와 죽은 자로서 상면한다. 죽음의 대해를 건너 그들은 불후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다. “새 순” “갯버들” “뾰루지” 등의 시어는 미완의 사랑을 완성으로 견인하는 시의 중심축이다. 발돋음하며 다가가는 사랑이 등불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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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시로 여는 세상》 주간.
몸 없는 그가 얼굴을 만지네. 그는 계곡물에 치자 향을 묻히며 잠결로 왔네. 내가 간절히 정신 놓으면 그는 불현듯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네. 그의 휘파람이 이승 쪽 출구를 포근히 잠그면, 밤도 낮도 아니며 꿈도 생시도 아닌 곳에서, 죽은 그와 몸 섞는 나는 결코 눈뜨고 싶지 않으리. 죽은 이를 여전히 사랑하는 죄로, 눈뜰 힘조차 없으리. 햇빛이 여기저기 기둥을 세웠다간 흩어지듯 나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울 수 있겠네. 나비 날개를 달고, 그 숨결에 이 숨결을 포개어 반드시 소리 죽여 울어야 하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때로 젖먹이처럼 때로 강아지처럼 나는 자꾸 돋아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네. 아무렴, 자꾸만 발돋움해서 그의 허공을 살처럼 만져볼 수도 있다네.
이영광 (시인)
소래 바다는 / 송재학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시집『푸른빛과 싸우다』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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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은 이미지에서 몸의 통로를 발견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풍경과 내면은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뒤덮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스며들어 안으로부터 변화시키는 관계이다. 그는 아름다운 연시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에서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사랑의 신체적 감각과 풍경의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여행 풍경과 식물의 이미지는, 이렇게 대상과 내면의 관계를 파고드는 정밀한 감각의 운용으로 빚어진 것들이다.
시 ‘소래 바다는’은 그의 세 번째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송재학의 시적 어법이 난만하게 꽃을 피워낸 하나의 절정에 속한다. 이 시집에서 내면의 언어와 신체의 언어는 세밀하고 중층적인 이미지의 짜임 속에서 안으로 격렬함을 감춘 시적 깊이에 도달한다. ‘소래 바다’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고 싶어 했던 장소이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실존은 소래라는 공간에서 동시대의 인물로 환생한다. 중요한 것은 그 아버지의 삶을 재생하는 감각의 형식이다.
“홍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은,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것으로 압축된다. 표랑으로서의 아버지의 삶을 현재화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는 ‘젊은 새댁’의 이미지이다. 새치 많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 여자의 배추 살결”과 함께 배치함으로써, 아버지의 ‘늙은’ 젊음은 살아 있는 욕망을 가진 실존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만난 아버지의 모습은 “내 낡은 구두 뒤축”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협궤의 시간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흐린 기억과 내 낡은 구두 뒤축의 나날들은 함께 떠밀린다. 오랜 기억이 현재로서 살아있는 공간에서 아버지는 배추 살결을 가진 젊은 여자와 영원히 살 것이다. 그곳, 소래 바다에서.
이광호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마중물 / 송재학
실가지에 살짝 얹힌 직박구리 무게를
으능나무 모든 잎들이 하늘거리며 떠받들듯이
펌프질 전에 펌프에 붓는 마중물로
내이內耳의 비알에 박음질하듯 우레가 새겨졌다
마중물은 보통 한 바가지 정도
그건 지하수의 기갈이었지만
물의 힘줄로 연결되었으니
물에게도 간절한 육체가 있다
물의 몸이 가져야 할 냉기가 우선 올라오고 있다
정수리에 물 한 바가지 붓고 나면 물의 주기가 생긴다
마중물 아니라도 지하수 숨결은 두근거려서
마중물 받아먹으려는 물의 짐승들이 붐빈다
물의 손을 잡아주니 알몸의 물이 솟구친다
물의 등 뒤에 부랴부랴 숨는 알몸이다
물이 물을 끌고 오는 활차와
물이 물을 생각하는 금관악기가 저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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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이라는 말 참 다정하다. 펌프질로 물을 퍼 올릴 때 압력 차이로 새물이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 한 바가지 정도 퍼붓던 물이라 한다. 새물을 맞이하기 위한 물이어서 마중물이라는 것이다. 실가지에 얹힌 직박구리와 나뭇잎들의 균형 감각처럼 서로가 받치고 있다가 힘이 쏠리는 순간 콸콸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진다. 펌프 밑으로 낮게 흐르던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마중물을 부어 물의 육체가 지닌 간절한 힘줄을 이어주면 기어이 물과 물이 들러붙으며 솟구쳐 올라온다.
물의 육체가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물이 지닌 힘줄과 숨결, 손, 알몸이 기운찬 짐승처럼 움직임을 드러낸다. 손만 대면 저절로 흘러나오는 수돗물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물의 활력이 싱싱하게 느껴진다. 활차와 금관악기의 역동적인 느낌과도 잘 어울린다. 활차의 연동장치처럼 긴밀하게, 금관악기에 고여 있던 공기를 밀어 올릴 때처럼 박력 있게 마중물은 물의 몸을 이끌어낸다.
이혜원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환승 / 송재학 (1955~ )
고물이 통통한 배가 꼭 제 덩치만 한 배에 접근했다 배꼽 근처에서 낭랑한 입이 열리고 물컹한 다리가 걸쳐지자 통통의 승객들이 덩치로 옮겨 탄다 환승이다 하지만 내 시선에 붙잡힌 것은 눈꼬리가 샐쭉한 주선강(舟船綱)의 포유류이다 엉덩이가 더 큰 엉덩이에 들이대는 다정다감, 저들의 짝짓기에서도 쇠냄새는 없다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혀 같은 환승이 끝나고 엉덩이를 돌려 헤어질 때까지 이 뚱뚱하고 오래된 짐승들은 멈칫멈칫 젖은 살을 부빈다 물 위의 그림자들 포개지며 일렁거리며 마지막까지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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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양과 “덩치”씨가 만나서 부비부비 연애질을 하더니, 기어이 짝짓기를 하네. 아이고, 쑥스럽고 민망해라. 예쁘기도 해라. 계문강목과속종(系門綱目科屬種)은 생물을 분류하고 상세화하는 분류체계다. 모든 생물이 분류표 안에 자리를 잡고 산다. 이를테면 인간은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유인원과 호모속 사람’에 속한다.
그런데 저 다정다감한 시인 덕분에 이제는 사물들도 한자리 초대를 받았다. 아마도 저 배들은 ‘사물계(事物系) 용골사물문(龍骨事物門) 주선강(舟船綱) 수상목(水上目) 부유과(浮游科) 머린속(marine屬) 배’ 정도 되리라. 이런 시를 읽으면 수사법이라는 게 끝내 사랑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혁웅 (시인)
송재학의 「혀」감상 / 서대선
혀 / 송재학
입술 안쪽 유일한 짐승인 혀는
눈도 손발도 없이
온몸으로 꼼지락거리는데
그 몸 어딘가 꿈틀꿈틀 천 개의 활주로가 있다는데
그 많은 공지 위로 수생의 버짐꽃이 피고 진다는데
혓바닥 빌려 한켠에서 쟁기질한다는 이야기는 또 무어냐
혓바닥에 자주 돋는 뾰족한 가시 울타리 잘라내고
단순해지자
내 입속에 혀가 있는 게 아니라
혀 아래 내가 기대어 쉰다는 느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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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tongue)는 음식을 먹고 치아가 씹어 줄 때, 골고루 씹을 수 있도록 음식물을 섞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우리가 말을 할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발음을 낼 수 있도록 조음기관 역할을 하는 중요한 부위랍니다.
'혀'에 대한 속담에는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혀는 몸을 베이는 칼이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등처럼 혀가 말을 만들어 내는 조음기관의 역할을 할 때,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파멸 시킬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군요.
<탈무드>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말하는 것을 배우지만, 침묵은 커서도 배우기 힘들다”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답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 지혜가 늘어나지만, 말은 하고나서 아니함만 못한 후회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음을 경고하고 있어요.
침묵도 일종의 언어이지요. 말을 안해서 후회하는 경우 보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그러므로 묵언(黙言)수행의 훈련을 통해서 살아있는 참말을 할 수 있어야 겠지요. 참말을 하려면 세 개의 황금문을 통과해야 한답니다. 제 1의 황금문은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진실 된 참 말인가?”, 제2의 황금문은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이 상황에서 꼭 필요한 말인가?”, 제3의 황금문은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사랑에 기초한 말인가? 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묵언(黙言)이라고 한답니다. 먼저 “혓바닥에 자주 돋는 뾰족한 가시 울타리 잘라내고“ ”내 입속에 혀가 있는 게 아니라/혀 아래 내가 기대어 쉬“는 마음으로 묵언(黙言)수행부터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신구대학교수 dsseo@shingu.ac.kr)
붉은장(葬) / 송재학 (1955 ~ )
늙은 상인의 찌푸린 미간은 나를 닮았다
그의 붉은색 염료거래량은 확장 중이다
석 달 열흘쯤 나를 붉은색으로 물들여주겠다
는 미농지의 계약서를 보라
혀의 부적도 바꾸겠다고 속삭였다
우리는 붉은 궐련을 나누어 피웠다
우선 내 피를 보았다
확실히 묽은 핏방울은
세상의 통점에서 너무 멀어져왔다
그런데 붉은색이라는 것,
갇힌 방에서 사납게 북을 두들기는 발화(發話)의 슬픔과
가장 어둔 곳을 통과하는 일출과
제 뼈를 파고들며 불 밝히는 백열등의 전율과
마주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붉은색에 풍덩 뛰어들 때
붉은색만으로도 생은 쏜살같다
는 염료설명서를 그가 내밀었다
붉은색이니 모두 아가미 호흡이다
붉은 땀 흘리는 불수의근도 따라왔다
혹 남은 붉은색은 배롱나무 아래 묻으면 되리라
오늘 염료상인의 장기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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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장이란 붉은색을 장사 지내다라는 뜻일 텐데 시인이 만든 조어인 것. ‘붉은장’이라는 전대미문의 장례의례에 난생 처음 참가해볼 수 있는 건 순전히 언어창조 기술자 시인 덕분. 이 시는 시인의 분홍, 하양, 노랑, 초록 등 색깔과 죽음에 대한 탐구시 중 붉은색 편인 것. 늙은 염료상인과 붉은색 염료 거래 장기계약을 맺는다. 붉은색 염료만이 아닌 그 양에 대해서까지다. 피도 혀도 붉은색. ‘숨 쉬는 아가미’ ‘가장 어둔 곳을 통과하는 일출’, 마지막 계약서 도장의 인주도 붉은색. 붉은색과 장기계약 맺지 않으면 우리 살 수 없다. 살 수 없으면 죽을 수도 없다.
이진명 <시인>
사물 A와 B / 송재학
까마귀가 울지만 내가 울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날 것이 불평하며 오장육부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까마귀의 희로애락을 흉내내는 것이다 까마귀를 닮은 동백숲도 내 몸 속에 몇 백 평쯤 널렸다 까마귀 무리가 바닷바람을 피해 붉은 은신처를 찾았다면 내 속의 동백숲에 먼저 바람이 불었을 게다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다 내 몸에도 한 없이 개울이 있다 몸이라는 지상의 슬픔이 먼저 눈물 글썽이며 몸 밖의 물소리와 합쳐지면서, 끊어지기 위해 팽팽해진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 내 안의 모든 개울과 함께 머리부터 으깨어지며 드잡이질을 나누다가 급기야 포말로 부서지는 것이 콸콸콸 개울물 소리이다 몸속의 천 개쯤 되는 개울의 경사가 급할수록 신열 같은 소리가 드높아지고 안개 시정거리는 좁아진다 개울물 소리를 한번도 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개울은 필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시집『진흙 얼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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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는 무언가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대상은 결국 내 몸으로 들어와 몸과 하나가 되어 자국으로 남게 되지요. 이를테면 이 시의 까마귀 소리 같은 것. 까마귀 소리를 듣는 순간 그동안 몸속에 저장되어 있던 다른 모든 까마귀 소리도 깨어나는 것. 까마귀가 있던 동백숲, 그 숲에 이는 바람, 개울물 소리도 일시에 함께 깨어나는 것. 시인의 귀는 온몸에 퍼져있는 모양입니다.
인간이 사물을 내려다보는 인간-사물의 수직적 관계라면, 나와 까마귀 소리는 아무 관계가 없겠죠. 내가 사물처럼 낮아져 사물A-사물B의 수평적인 관계가 될 때, 귀 밖의 까마귀 소리와 내 몸속의 까마귀 소리는 서로 합쳐지면서 사랑스러운 울림이 되겠지요.
김기택 (시인)
모래葬 / 송재학
사막의 모래 파도는 연필 스케치풍이다 모래 파도는 자주 정지하여 제 흐느낌의 像을 바라본다 모래 파도는 빗살무늬 종종걸음으로 죽은 낙타를 매장한다 모래葬을 견디지 못하여 모래가 토해낸 주검은 모래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모래 파도는 음악은 아니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빌려 사막의 목관을 채운다 바람은 귀가 없고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 어떤 바람은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모래가 건조시키는 포르말린 뼈들은 작은 櫓처럼 길고 넓적하다 그 뼈들은 모래 속에서도 반음 높이 노를 저어 갔다 뼈들이 닿으려는 곳은 모래나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이다 고요조차 움직이지 못하면 뼈와 櫓는 증발한다 물기 없는 뼈들은 기화되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너무 가벼워 사라지는 뼈들은,
― [문학과사회],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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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물질적 기초 / 이현승
들보도 지붕도 없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수직의 기둥만 남은 그리스의 신전에 서면 신神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듯이 사막은 어쩐지 공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래와 바람이 주인인 사막의 단조로운 풍광은 처참하다고 해야 할 만큼 생략적이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 나아가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니멀한 세계를 드러내 비현실적인 느낌을 만들어 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처럼, 사막이 지니는 극도의 생략적인 풍경은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이데아의 복사물이 아니라 이데아 자체처럼 보인다고 할까? 아마도 관념이나 추상에도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면 사막과 같으리라. ‘생략’과 ‘건조함’은 사막의 형식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기와 건기가 미만한 이 세계는 너무나 이 두 힘(열기와 건기)에 충실한 나머지 ‘풍경’처럼 느껴진다. 죽음이, 인간이 시간을 경험하는 최대치의 사건이자 그 자체로 색色을 벗는 일이듯 사막의 주인이 모래와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행위’의 주체를 지시한다. 죽음이라는 관념이 형상을 얻는 장소는 사막이며, 극한의 열기와 건조한 바람은 이 무대의 주인공인 셈이다. 삶의 색이 천태와 만상을 벗고 유유히 음악으로 기화할 수 있는 장소, 삶이 끝나자 곧바로 죽음이 노래로 전신하는 장소, 신화와 관념이 오로지 물질로서 완강하게 날리는 참혹의 존재공간이 사막인 것이다. 만상의 색과 소리가 모래와 바람에 묻히는 사막에서는 ‘죽음’이나 ‘삶’, ‘의지’ 같은 관념이 물질적으로 경험될 것 같다.
이 사막이 “연필 스케치풍”으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하리라. 연필 스케치의 거칠고 앙상한 선, 어두운 단색의 선들은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사구의 능선을 닮았다. 주검이 어쩔 수 없이 부패와 풍화에 몸을 맡기듯 ‘여기’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서의 시간만이 모래로 황황히 나부낀다. 관념의 투사물이나 이데아의 복사물이 아니라 이데아 그 자체가 사막이라는 발견은 송재학의 ?모래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풍경’에 예민한 체험자였으며(풍경 속으로 들어가), 치열한 생존의 방식이자 상처로서 꽃과 식물지를 완성한 사람이며, 그의 마음의 첫 순례지가 ‘얼음(차가운 사막)’이었지 않았던가? 그가 섭렵해온 풍경들, 그가 살아낸 상처들이 핏빛 물기를 머금은 ‘꽃’이었다면 아마도 그 꽃의 최종적인 모습은 모래유적이 될 법하다. 모래와 바람을 횡단하며 생을 이어가는 존재들은 모조리 “모래에 묻힌다”(?樓蘭에의 기억?) “양을 몰거나 모래소금을 찾”아 바람을 통과하던 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구부렸던 “등(을) 펴고” 눕는 곳이 그가 목격한 생존의 공간으로서의 사막이었다면, “모래파도”와 “음악”으로 가득 찬 이곳은 죽음이 완성되는 사막이다.
이 모래벌판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눈을 뜰 수 없는 모래바람과 살갗을 찢을 듯한 건기와 맞닥뜨려야 한다. 삶의 어떤 물기조차도 증발시켜 버리는 극도의 건조함 앞에서 위력적인 ‘죽음’과 만날 수밖에 없다. 홀로 있어도 그것(삶)은 교교하게 다른 짝을 지시하는 말이다.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인 사막은 삶과 죽음이라는 사실과 벡터를 거느리는 영역이다. 두 개의 상반된 힘이 경합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다른 두 힘의 충돌과 경합이 없다면 음악(그의 시론에 따르면 “긴장”)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음악을 통해 시인은 죽음이 완성되어 가는 세목을 물질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리를 통해서 공간의 실존을, 모래와 바람을 통해서 이 음악을 번역하는 말의 경제 위에서 죽음의 한 형식이 완성된다.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단조롭고 간헐적이지만 한 옥타브의 음역 전체를 메우는 주체는 모래의 파도이다. 주검을 묻는 매설자이자, 조심스런 붓질로 주검을 끄집어내는 고고학자이고 살과 색을 뼈와 모래와 공으로 변환하는 연금술사인 모래 파도. 시인은 이 모래 파도가 정지하는 순간을 “제 흐느낌의 상像을 바라”보는 행위로 묘사한다. 이 묘사는 ‘바람에겐 귀가 없다’는 구절과 통한다. “바람 소리 또한 귀없이 들어야 한다”는 구절은 매장과 풍화의 주체로서 모래파도를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바람의 이 덧없는 나부낌조차 음악이 되고 모래가 파도가 될 때 매설과 증발이 반복되는 주검과 뼈는 배가 되고 노櫓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뼈들이 “반음 높이”로 “노를 저어”가는 곳은 “모래와 사람이 무릎으로” 닿으려는 곳, 고행의 형식으로만 가닿을 수 있는 곳이며 마침내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곳이다. 모래가 사막의 성분이자 모든 삶의 물질적 결정체인 것처럼, 그것은 풍화의 주체이자 풍화의 결과물이다. ‘나’를 버리는 화학적 변화의 최종 심급이 모래이다. ‘죽음’ 이후에도 운동과 저항이 존재하며 여전히 다다라야 할 목적지와 여행이 남은 세계가 사막이다. 살과 뼈가 없어도 흐느낌이 있고, 귀가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는, 느리고 완강한 운동들은 음악과 구도의 형식으로 죽음 이후의 내밀한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모래葬의 ‘모래’와 ‘葬’은 동어 반복이 아니다. 결과와 관념 속에서 그것은 동의어지만, 물질과 운동으로서 다른 벡터를 지닌다. 그리고 이 다른 힘의 경합과 저항이 이토록 경쾌한 음률로 죽음을 그릴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이 내밀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산다는 것은 다만 제 흐느낌의 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자주 움직임을 멈추고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며 소리를 잊음으로서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귀 없는 음악에 이르는 길이다. 제 뼈를 노櫓로 삼아 삶의 소리들이 파묻혀 버리는 고요를 견딜 수 있을 때, 마침내 바람과 뼈와 모래는 파도처럼 부드러운 일렁임과 출렁거림으로, 마침내 한없는 가벼움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죽음이 막연한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물의 외양과 사물의 본질”을 상관하게 하고 일치시키는 언어의 경지라는 점이 중요하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저항하는 일이고, 상처가 꽃이 되는 일이며, 그러한 역정의 궁극에 음악과 시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 의미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이고 음악일 수 있을 때 시와 삶의 영역은 한계를 벗고 무한히 나아간다. 그러니 왜 사막이냐? 왜 죽음이냐? 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죽음 같은 삶이 삶보다 치열한 죽음이 여기 놓여 있지 않은가. 장葬은 어디까지나 삶의 방편이다.
비명 / 송재학
그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발자국을 보려면 밤새 눈이 내려야 한다
그의 발자국은 너무 힘들어서
함박눈도 함부로 지우지 못한다
대설주의보에 귀 기울이면
모든 길이 천산북로로 향했음을 알리라
얼마나 많은 밤이 그를 따라왔는지
체념한 그의 흰옷을 갈아 입었다
봄이 오기 전에 피는 꽃의 향기가 진한 것은
눈의 무게를 이겨낸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것은
울음을 디딘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육체가 되어버린 낭떠러지 아래
길은 커다란 비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송재학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 시집''푸른빛과 싸우다'등.
여기 보이는 시 '비명'에 대한 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교수의 감상을 옮겨봅니다.
-- 발자국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그>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이름없이 출몰하고 그 형체가 쉽게 붙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떤 종류의 관념일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것이 <천산북로>의 신비롭고 먼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절대적인 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라고 가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절대는 불가능의 이름이므로 의지는 결국 <체념>하여 저 백설의 흰빛이라고 하는 무를 선택한다. <꽃의 향기>와 <휘어진 나뭇가지>는 그 많은 고뇌의 밤을 보내며 얻은 흔적이거나 소득이겠지만, 의지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가 상정한,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의 절벽에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그렇더라도 이 시가 그 진한 향기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내가 이 시를 고른 것은 다음과 같은 시행들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대설주의보에 귀 기울이면/ 모든 길이 천산북로로 향했음을 알리라"
"울음을 디딘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기 때문이다"
'천산북로'의 강렬한 발음과 의지, 처절하고 절망적인 울음 같은 것이 주는 처연한 느낌...
2월 5일 강인한.
저녁의 어두워지는 입 / 송재학
저녁의 숲은 상한 짐승을 거두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사나운 나무며 바위인 채
점점 붉어지는 울음
절의 풍경 소리가 그 짐승의 상처를 하품으로 바꾸기도 하네
잎을 떨군 활엽수림의 휘파람 소리
괴로움만으로도 나무들은 가파른 번개를 따라가고
계류의 물은 번쩍거리네
별빛보다 먼저 닿는 저녁비 뒤로
슬픔은 다시 돋아날 어린 잎을 찾아 입맞추네
짐승의 마음 안에도 이미 나무들은 풍경을 잃고 벌목 당하네
탱자 울타리의 푸른 가시가 저녁의 허기에 돋아나네
금방 물에서 건진 흰 빨래처럼 숲이 갑자기 고요해질 때,
때아니게 넘치는 계류의 황톳물과 짐승의 식욕은 흉포해져
제 살을 뜯어먹는 입과
죄를 헤매는 마음과
저녁의 어두워지는 입들……
풍금 / 송재학
풍금 소리가 유리창을 깬다
그 뜰은 개망초로 덮였다
약한 내 뼈는 굽었고
나는 그늘만 골라 다닌다
슬픔조차 없는 집에 풍금이 울린다
깊은 잠을 기웃거리는 明暗의 건반을 거슬러 가면
아직 어린 내가 있다
거미는 누추한 머리 속과 무덤을 집으로 만든다
빈 방의 영혼마저 불태우는 날들이 지나가고
희게 부서지는 저 햇빛 사이 먼지들이 나의 밥이던 때!
쓸쓸함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그 집까지의 발자국 소리를 위해 어둠은 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검고 흰 건반은
푸르고 맑은 물소리를 찾아낸다
그 집의 방들은 늘 비어서 나를 기다린다
神들의 높이 / 송재학
야자수 나무의 높이에 神들의 집이 있다
그 높이에서 몸 씻고 신탁을 듣는다
그 높이보다 더 올라가지 않는다,
고 들었다 그 높이라면 내가 일하는 사무실의 층수이다
아직 나는 신들을 외면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의 새 식구를 맞이했다
삼층 창문까지 까치발로 닿는 백합나무 잎새들이다
참 사소한 식구들이다
매번 눈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초록 위에 덧칠한 초록을 밥상에 올린다
태양을 닮은 잎의 문양에는 제법 햇살이 한 움큼 고여 있다
새가 남기는 허공의 발자국처럼 초록 손자국은 내 몸에 綠璽(녹새)를 찍는다
십만 룩스의 햇빛을 먹어치우는 광합성의 식욕도 놀랍지만
창문 근처 나의 초록 의자를 준비한 초대도 있다
아직 신들의 性別조차 느끼질 못하지만
초록 미열은 매일 나의 피돌기를 도와준다
슬픔의 식구 / 송재학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 건 내 몸이 먼저다
미열이 그 식구이다
섭씨 39도의 편두통은 지금 염료를 섞고 있다
내 발열은 치자꽃대궁 같은 것
치자꽃 노란색 열매는 종일 위염을 생각하고 있다
햇빛의 양철 지붕에 세운 내 미열 학교에서
아픈 위도 명치에서 질문한다
붉은색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쓰라린 위를 향한 몸의 집착은
슬픔의 입성을 꿰차는 것이다
식구 없는 슬픔도 참조하도록!
자꾸 속삭이는 적나라한 열꽃,
자꾸 넘치는 치자꽃물의 강우량에 물드는 쪽으로
미열은 운동한다
어깨도 등도 치자꽃 가득 핀
슬픔驛의 악보여
西行 / 송재학
타클라마칸까지 가기 위해 배가 필요할 때가 있다
홀아비꽃대가 흰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모든 잠의 도움으로 홀아비꽃대는 돛대를 뿜어올린다
넉 장의 잎으로 이물과 고물을 삼고
마흔 살만큼 기다렸던 작은 돛으로
서쪽의 수로를 죄다 열어본다
내가 외로우면 서쪽까지 온통 바다
혼자라는 느낌은 멍에의 운명, 홀아비꽃대의 군락지에서
오직 한 송이만 꽃대를 올린다
돛대 아래는 일평생을 저어도 아직 수평선
사랑이여, 저 돛은 손짓발짓이 세운 갈빗대인 것
짓무른 살갗을 보라
꿈만으로 쉽사리 돛은 부풀지 않는다
내 울음에 좌초하다 만 중년의 서행은
다시 홀아비꽃대 근처 되돌아오고 마는구나
사막의 발자국들 / 송재학
며칠 내내 사막을 돌아다녔지만 새는 없다
모래 위의 새 발자국을 자주 만난다
새가 없기에 조류의 흔적은
상형문자에 가깝다
공중에 남기지 못한 발자국들이다
그 옆의 내 발자국마저 문자라면
사막의 서사(敍事)에 대하여 나는 부리로 설명해야겠다
어제 새겨진 물결이지만 오래된 운명인 것은
내 뼛속을 거쳐 사막을 맴도는 바람이
제 앞날을 알기 위해 지우는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새 역시 사막에서 떠돌기에
발자국의 길흉을 엿보는 중이다
바람 또한 발자국 없는 발자국을 남긴다고 적는다
사막의 발자국을 기억하여 연결하면
사막을 최초로 날아다녔던 시조새의 뼈가 만져진다
두통의 역사 / 송재학
한 번도 머리를 비우지 못했다
얼굴 속 두개골을 씻을 수 없으니 머리가 맑긴 글렀다
눈이 창이기도 했지만 제 죄의식만으로도 바빴으니
미로형 창으로 다닐 바람의 여유는 없겠지
그 속을 텅 비워 보았으면
결가부좌로 채워 보았으면
사막을 헤매며 소실점에 닿아 보았으면
신기루의 경첩 소리 같이 들었던 낙타에게 물어 보았다
그 혹에 채웠던 것이 처음부터 물이었으니
머리를 헹굴 수 없으니
시렁에 머리만 뚝 떼어 얹기 힘드니
내 머릿속 지층의 빈혈을 따라가 본다
처음 발견된 구름이라는 엑스레이 진단을 받았다
두통의 해발에 걸린 구름들,
모두 숙주에 매달리는 구름이다
성층권에서 머리를 건져 바닥에 눕혀야 사라지는 고소 고통이다
발톱이 빠지는 고통이다
내 두개골의 항로를 고집하는 새 떼들이 아니라도
두통은 늘 구름 속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도 늙어간다 / 송재학
울 어머니 매년 사진관에 다녀오신다
그곳에서 아버지 늙어가시니
어머니 미간의 지층을 뜯어내면
지척지간 아버지 주름이다
굵은 연필이라면 머리카락 몇 올 아버지 살쩍에 옮겨
늙은 목탄 풍으로 바꾸는 게 어렵지 않다지
그때마다 깃 넓은 신사복은 찡그리면서
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신다
하, 두 분은 인중 닮은 이복남매 같기도 하고
오누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고민은 할미의 얼굴로
어떻게 젊은 남편을 만나느냐는 것이지만
하, 이별의 눈과 입도 한 사십 년쯤 되면
다정다감하거나
닳아버리고
걱정하면서도
설렌다,
라고 되묻는 식솔들이 생기나보다
집이 생긴 별의 식솔들도 따라오나보다
늪의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 송재학
너가 인편으로 붓틴 褓子에는 늪의 새녘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믈 우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웅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곡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잇다 수면의 믈거울을 걷어낸 褓子 솝은 흰 낟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눈엽처럼 하늘거렸네 褓子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머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內簡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대되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한 소솜에 遊禽이 적신 믈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만한 고요의 눈씨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褓子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을 늪을 褓子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어름이 너무 차겠지 向念
주)
1. 언니가 여동생에게 보내는 내간체의 느낌을 위해 본문에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을 참고로 고어 및 순우리말과 한자말 등을 취했다.
2. 현대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네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움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 간 발자국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있다 수면의 물거울을 걷어낸 보자기 속은 흰 낮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새순처럼 하늘거렸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游禽이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向念
수평선이라는 직선 / 송재학
수평선의 직선은 표정이 좋다 곧장 아침에 일어나서 지평선 시렁 위에 반듯이 개어 쌍 희(囍)자가 보이도록 올렸더니 구름처럼 가볍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에 속셈이 깊은 다락도 있겠군 지난여름에 보아 둔 물웅덩이를 시계와 함께 다락에 옮겼다 어김없이 점심 무렵 여우비가 흩날렸다 수평선의 직선이 구불구불해졌다 수평선 위로 속이 훤히 보이는 시베리아행 기차가 오래 정차해서 눈이 부셨다 수평선이 멀어 이별의 모서리는 생략되었지만 직선이 파르르 떨린다 옛 책의 바스러지는 일몰이 번지기까지 직선은 짐짓 침묵이다
여수와 여수 사이 / 송재학
여수와 여수 사이*
남자가 가려는 옛 여수는 지도에 없는 곳,
여자는 여수의 입술에서 맴돌았다
여수 생각에
남자의 체온이 바다의 수온만큼 내려간 장면에서
여자는 울고 있다
남자가 찾는 여수와 여자가 기다리는 여수는
서로 傷하고 있다
긴 그림자가 뱃고동 소리를 물고 있는 여항,
여수는 저물고 있다
낡은 필름 속이니까
화면에 늘 비가 오고
여수는 주저앉아 다정다감하다
위로가 없으니 감정이다
바다와 비의 여수는 흑백 눈동자를 깜박거린다
늦은 불빛을 따라 해안을 이끌고 여수는
여기저기 떠도는 중이다
여수와 여수 사이
그 많던 여수의 내실 어디에서도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여윈 두 손 사이
갈라터진 손금마저 여수 옛 길의 골목을 닮아가는
엔딩
————
*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가상의 영화.
소파 / 송재학
철교 아래 가죽 소파이다
돌아갈 집이 있는 듯 반짝 얼굴 단장으로 며칠 반질거렸다
고양이 낮잠에 기대어 하품까지 하더니
결국 궁티로
소파는 쓰러지면서 네 발을 허공에 올렸다
발가락이 먼저 문드러지기에
가을 땡볕의 생활이거니 짐작한다
바다거북처럼 괴로운 자세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우스꽝스런 물구나무 서기로
오지의 터진 실밥자욱이 다 보였다
몇 발자국 더 가면 강물이지만
거북 걸음으로 평생이 걸리겠구나
자해가 아니라지만
민망한 스프링이며 스폰지가 꾸역꾸역 밀려나온다
소파의 행려 주위로 풀이 무성해지면서
비만도 부끄러움도 초록은 동색인 양 묻혔다
작은 풀들이 조잘거리는 동안
개망초의 키는 신통하게 소파와 비슷해졌다
소파는 난생 처음 막대사탕을 빨고 있다
코스모스의 꽃배달을 받았다
꺼림칙한 외래종인 자리공이 마을 오기도 했다
다시 뚱뚱해진 소파의 등짝이
꽃들과 어깨동무할 만큼 얼추 편안해졌을 때
가을의 인부들이 부산하게 소파를 트럭에 싣고 떠났다
관절 하나를 버려두고 갔다
검은 창고 / 송재학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는 색조 때문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무엇이던 쌓아두기에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족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느리게 엎드렸는데 귀가 없다 먹거리만 쟁여놓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몸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한 검은색은 위로의 손바닥이 만지는 시간의 늙은 표면이다 산을 넘어야 하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에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오래된 말이다
울고 있다 / 송재학
장례식장 입구 골목에서 여자가 울고 있다 좁은 골목은 몇 번이나 차들이 뒤엉키면서 비린내를 반복했다 여자의 소복은 가로등에 부담이었다 희부염한 가로등 불빛이 그 울음을 두 손으로 다 움켜쥐지도 못했다 울음이 점점 길어지자 가로등은 한숨 쉬며 등불을 켰다 껐다 반복하면서 여자의 주위를 맴돈다 골목의 그림자가 인중이 더 길어졌다 그 울음 곁에 굴건 쓴 사내가 다가갔다 그리고 금방 여자의 울음이 그쳤다 당신은 당신을 찾는 사람과 닮았다는 말이 얼핏 귓가에 맴돌았다 그 울음이 골목을 벗어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당신의 울음이거나 당신이 내 울음이란 요철이 골목에 생겼다고 들었다
달의 가게 / 송재학
달의 가게를 채웠다
광물질의 재고가 넘쳐서
음력을 사용하는 점원은
달의 주문을 받고 있다
마른 달과 젖은 달이 보름 간격으로 섞여 있기에
달의 분류는 늘 셈본이 필요하다
건탁보다 습탁이 많은 달이다
오늘은 푸른 색에서 흑백 사이를 권한다
가게가 번창한다면 다른 장르의 달도 확장하려 한다
남쪽에는 음악하는 달이 있다고 들었다
노래하는 달의 공명이 궁금하다
제 몸을 삼키는 달이 있다면 애소리의 달도 있다
구름의 부록도 제공된다
내가 매매하는 달들은 모두 은화나 금화의 테두리를 가졌다
봄날 / 송재학
봄물이 질퍽거리는 밭에서 포클레인이 작업 중이다 봄의 연근밭에는 쉬이 상처받는 숨쉬기가 있다 흙을 털어내며 조바심내는 것은 일당을 챙기는 포클레인 기사가 아니라 삽날이 먼저이다 연근을 구별하는 늙은 쇠의 손가락이 잠시 봄날의 시렁에 닿았다 그곳까지 아지랑이의 키가 닿고 있다 왜가리가 봄날의 수묵 속으로 활짝 날아갔다 먹이 튀었다 무료한 나는 내가 좋아져서 봄의 종아리를 만졌다 키가 낮았기에 무심히 개구리밥을 헤적이었다
부리 / 송재학
미꾸라지를 삼키는 황새의 젓가락질은 부리로 시작한다 다리의 길이만큼 늘어난 부리, 부리가 딱딱해지면서 긴 상감(象嵌) 젓가락은 얻었지만 황새의 성대는 퇴화하였다 부리를 부딪쳐 내는 소리, 그게 이두문자처럼 천천히 읽혀진다
육자배기 젓가락 장단과 비슷해진 황새의 노래를 떠받치는 자음의 숫자를 헤아려보는데 따악, 딱 길고 짧은 장단어조 둘뿐이다 외침과 노래, 슬픔과 기쁨 따위 마주보는 두 마디, 성조도 음색도 없지만 무리 짓고 짝지으며 새끼 키우는데 필요한 두 마디, 된소리의 검고 흰 머리 밟고 날아가는 황새의 날개는 십 척(尺), 그 말마저 생략하고픈 희고 밝은 날개이다
팡세, 말의 고고학
—말을 찾아서 1
송재학
입술까지 닿았던 말이 굳어버렸다
목젖과 혀가 떠밀어서 거의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입술의 온도를 넘지 못하고 엉거주춤 지층 일부가 되었지만
훗날 고고학자들이 엉켜버린 입술과 말을 조심스레 나누면서
筆寫의 유물을 찾았다
감정의 발굴이었다
벌리다 만 입술 안
죽은 사람의 노래는 이미 딱딱해서
과연 말이었는지 의심스럽지만
팡세의 아름다운 구절과 겹치는 중이다
죽은 자가 남긴 두터운 팡세이기에
말의 섬모운동을 찾아서
섬세한 프린트를 시작할 것이다
환지통에 가까운
그 말의 떨림도 이제 잦아들었으니
또 누군가 말을 주검의 바구니에 담았다
절벽 /송재학
절벽은 제 아랫도리를 본 적 없다
직벽이다
진달래 피어 몸이 가렵기는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본 적 없다
움켜쥘 수 없다
손 문드러진 천형(天刑) 직벽이기 때문이다
솔기 흔적만 본다면
한때 절벽도 반듯한 이목구비가 있었겠다
옆구리 흉터에 꽈리 튼 직립 폭포는
직벽을 프린트해서 빙폭을 세웠다
구름의 풍경(風磬)을 달았던 휴식은 잠깐,
움직일 수도 없다
건너편 절벽 때문이다
더 가파른 직벽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말하는 법 / 송재학
나무는 무엇을 속삭이는가
꽃의 숨소리 공기의 숨소리 나무의 숨소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섞이고 있다
발자국을 감추는 데서 나무의 말이 시작되었다
바스라지는 가랑잎에는 나무의 말이 같이 흩어지는 중이다
무성한 잎새 속에서
나무의 말은 바람에 스며드는 게 익숙해졌다
나무라는 움직임에도,
森이란 글자에도 나무의 말이 건너가 있다
나무의 말이 죄다 음각화이니까
나무의 말은 점자가 우선이다
소리라 부를 공명통은 망각했지만
입을 닮은 귀의 흔적은 예민하게 남았다
나무의 말은 숲의 모든 그림자를 물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나무 속으로 걸어 들어간
옹이를 더듬자 입말이 준비되었다
나무의 말은 숲의 소리 앞쪽에 있다
저 혼자 소리 내지 않는 말이기에
오래전 사람도 나무의 말을 배운 적이 있다
공중/ 송재학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란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목덜미와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 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샛과 곤줄박이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 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占)을 배워야겠다
고딕 숲 / 송재학
전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숲 속
습한 고딕체의 나무가 훌쩍 자라서
연등천장의 내면을 떠받치는 중이다
고딕 숲에서 내 목울대는 하늘거리는 풀처럼
검은색 너머 기웃기웃,
수사복 사내들의 검은색이
나무의 뼈라면
검은색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죽음/자살이다
누군가의 메마른 입술에서 나뭇잎이 꾸역꾸역 자랄 때
내 안팎에서도
열리고 닫히는 새순 아가미들의 연쇄반응들,
숲을 떠다니는 부레족(族) 나뭇잎들 만나도 놀랍지 않다
고딕 숲의 부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관습들에거 열거되는 투니카와 쿠쿨라*의
수도복 입은 발자국이 모여들겠다
오래된 불빛이 울울(鬱鬱) 침엽수를 밝히려 한다면
내 묵언은 닫아야 할 입이 너무 많다
*가톨릭 수도승의 고유 의복.
달의 궤도 / 송재학
강에서 가져온 돌 속에 달이 갇혀 있다 그건 달의 문양일 뿐 달빛이 없다 달이 되지 못하는 돌들은 달의 궤도가 필요하다 돌에 박힌 달은 무표정하고 살짝 찌푸린 근시이다 돌 속의 달에게 중력이 생기는 순간, 가면의 얼굴조차 간절해 보이는 또 다른 가면을 달의 눈이 찾았다 애면글면 달빛이다 움푹 꺼진 기억마다 수면이 생기면서 물을 머금고 선명해지는 달, 인중이 긴 달, 여전히 달의 뒷면은 돌에 박혀 보이지 않는다 달은 어디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가 뱉지 못하는 것을 삼킨 달이 문득 밝아질 때가 있다 그게 사무치는 일이 될 때, 달의 표면은 거칠다 달을 받들고 있는 허공이다
불가능의 흰색 / 송재학
불쑥 흰색의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에는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 흰색의 목마름이 색깔을 지운다면 지평선은 얼음을 지운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솟구치는 선혈과 찢어지는 피륙마저 희고 붉기에 금방 얼어버리면서 흰색이 아니었지만 흰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흰색이 되고 만다 가까스로 흰색 너머 낮달의 눈가가 짓무르다면 유빙을 떠도는 드라이아이스는 유령이라는 단막극을 되풀이한다 용서를 구하는 북극황새풀이 흰색 앞에 엎드린다 사랑한 것들로부터 상처받는 흰색이다 흰색의 손과 내부가 서로 등 돌리고 있다 하루 종일 환하거나 어두운 여기 흰색이라는 귀 없는 해안선이 자란다
목판화로 듣는 개의 울음소리 / 송재학
수십 마리 개의 울음소리,
통점을 기억하려는 송곳니의 적의가
목판화의 산벚나무 한 겹을 뜯어내고 여백마다 숨어들었다
사육장이 가깝다
뾰족한 나뭇가지는 무심코 허공을 찌르다가 허공에 박혔다
낮달마저 음각된 박제로 멈추었다
다시
개 짖는 소리가
핏물을 버리듯 엎질러졌다
바람이 불어도 도꼬마리 일가(一家)는 뻣뻣하게 흔들린다
퀭한 겨울은 거울 속과 다름없는
목판화의 독백 속으로 이동했다
생과 짝을 이루려는
거울은 이미 산산조각 났지만
단색의 강추위 때문에
함부로
깨어지거나 흩어지지 못하고 이 앙다물고 있다
먹물을 가득 묻힌 겨울이다
저녁 7시가 걸어온다 / 송재학
물고기가 떠다니는 눈동자를 가진
저녁의 시간 속으로 손을 넣어 헤집듯 초점을 멈추는 건
또한 저녁이다
들리지 않거나 듣지 못했던 것들이 움직이고
보이지 않거나 보지 못했던 것들의 점자를 익힌다
손바닥의 수화가 낯설지 않다
목소리의 절반은 침묵이지만,
누군가 손가락을 베어 피의 글자를 쓴다지만,
저녁 7시는 ㄱ과 ㄴ을 나눈다
ㅏ와 ㅓ의 뼈를 발라 흰 접시에 담는다
갑자기 창을 두들기는 빗방울에
저녁의 귀가 길어지면서
몽환의 감정이 생긴다
걸어오는
저녁 7시의 기억을 멈추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섬세해진다
청색이라는 어스름의 갈피를 만지고
직립하는 빗방울마저 헤아릴 수 있다
저녁 7시의 등불을 켜고
누가 죽고 살았는지 살펴보렴
신체와 콘트라베이스 / 송재학
잠들지 못하는 밤의 손발로 나무를 깎아 떠나는 사람을 베꼈더니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온몸을 내어주었더니 누군가 아가미만 남긴 채 속을 헐어내고 뉘엿뉘엿 편서풍에 헹구었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섞이고 마주치는 음역 사이 인기척이 더디면서 생의 잎새는 한 뼘 더 길어진다
그때 떨림은 온몸을 몇 차례 돌아다닌 핏물과 다름없다 그게 급기야 슬프디슬픈 입구가 되었다 사람은 저녁을 되풀이하는가 보다
꽃을 보아도 후회가 맨 앞, 약음기를 통해 체온이 부풀면서 공명통을 채우는 억양들
입이 부르튼 통점 그리고 멀리 떠나는 사람이기에 얼룩은 남는다 속삭임은 기어이 모든 나뭇잎의 입말이고 말지
무언가 삼켜야 어딘가 시큰거려야 토해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다면 적층 대신 깎아서 이루어진 소리 또한 있다
죽음처럼 불가피해야만, 불가촉의 저음이 고이지 않을까
왼쪽 금동 귀고리
⸺순장(殉葬)
송재학
1500년 전 열여섯 살 소녀의 왼쪽 금동 귀고리는 찰랑거렸다 귓불에 부딪치는 패금의 귀엣말은 달콤했다 누가 건네주었을까 바꽃의 독즙은 쓰디쓰다고 소녀의 금동 귀고리 하나는 진자 운동 하면서 누군가의 오른쪽 귀로 건너갔고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건 언젠가 나타날 아지랑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환(耳環) 모양의 아지랑이는 아직 없다 처음 소녀가 설렘으로 귀고리를 감추었을 때 미열 봉지로 친친 감쌌겠다 왼쪽 금동 귀고리가 꿰찬 빈혈의 몸은 열두 줄 가야 하늘의 속청처럼 푸르다 그래서 봄이란 이름에는 허공으로 올라가는 아지랑이 발자국이 있다 아, 가야금의 기러기발과 비슷하겠다 여름에는 여름 또는 초록이라고도 불렸다 눈이라는 이름에도 고개 돌려 하하 웃었다 별이라는 이름도 실팍했다 금이라는 이름으로도 냉큼 달려갔다 지금 소녀의 명찰은 22-01. 고고학이 만든 숫자이다 아직 부식이 끝나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너라는 조문 / 송재학
계단마다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는 생각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는 내 척추 엑스레이 사진과 다르지 않다
1층부터 빼곡한 벽의 낙서조차
수신자 불명의 편지처럼 흘게눈이다
길 건너편 불빛을 불빛이 물어다 주고
멱살과 잇몸이 딱딱해진 이유는
너의 중력이 무거워진 탓이 아닌가
이제 겨우 2층, 웃자란 내 그림자가 나를 덮는다
무릎 연골에 물이 찰랑거린다는 결과는 아직 호주머니에 있지만
어떤 명암은 흑백만으로도 화사하다는 거야
3층은 왁자지껄, 웃음을 흉내 내고 있다
여기까지 올라온 앰뷸런스 소리
몸은 뚱뚱해지고 숨소리는 급해진다
천 개의 철근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환청 위에
4층의 잠
하릴없이 욕지기가 고인다
후회는 없다는 난간은 날숨과 잠시 연결되었다
5층의 복도에는 화장이 번진 노을이 잠들었다
저녁의 비린내가 싫기도 하지만
계단을 딛고 탄생한 계단의 되새김질
그 위에 쪼그려 앉아 으레 토악질한다
구석에 근조 등의 외눈이 불그스레하기에
너의 왼쪽 눈은 잘 때도 감기지 않았다는 독백과 겹쳐졌다
너의 死因은 왜 불분명한가
그랑제떼 / 송재학
발레복은 희고 가볍지만
토슈즈를 벗어던지고픈
맨발의 얼룩과 같은 마음이던
은빛 종소리는
검은 잉크를 가득 품고
발레리나가 도약할 때
허공에서 순간 더 높이 치솟아
몸의 선을 고스란히 옮긴
층층 꽃봉오리와 닮은 소리를 열었다
몸의 자국을 세공한
금은의 잎들도 따라왔기에
빈 무대 구석에서
등뼈를 구부리지 못한 그림자마저 아름다움과 섞이면서
두려운 숨소리까지 합쳐서 한 송이 꽃이다
지하실을 데려가는 지하실 / 송재학
스투키*의 초록은 문의 손잡이 형태다 내 손도 저렇다 지하실 틈새에서 물새의 발자국이 젖은 채로 발견된 건 그 안이 부글거리는 저수지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발등 위에 시계 소리를 올려도 아프지 않겠다는 스투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덩굴식물 같은 물비린내를 삼키고 있다
불행 대신 나를 기다려주는 초록이 있다는 건 아직 읽지 못한 사막에 대한 소설이 몇 권이라는 의미, 잎새의 빈혈 속에 버성긴 열 손가락을 적셔본다
물속에 화분을 담그기도 했지만, 초록이라는 그림자는 적도 근처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귀가 입을 통과하는 모래 너머의 지하실, 물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사막의 면적이 필요한 것을
누군가에게 건네준 자신의 눈동자이기에 너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식물의 지하실 입구, 어제의 책을 읽기 위해 그곳에 간다
일 년 내내 궁리하였던 세로의 문장들
시름시름 건기의 이중생활에 대한 질문은 백 가지이지만 숨이 찬 대답은 하나
꽃은 언제 피는 거니
시는 언제 쓰는 거니
유리창의 세계사 / 송재학
유리에 처음 금이 갔을 때
창 너머
빈 화단에 꽃을 심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음이 소거된 계단처럼
창 너머 흑백 무늬가
소년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유리창의 균열이 더 커지면서
손아귀에 우연히 붙잡힌 참새의 심장을 움켜쥔 셈입니다
부서지려는 유리가 지금 산산조각 나는 유리의 소리를 냅니다
파편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이유 중에 괴로운 얼굴이 있습니다
나도 얼굴 중에 조각난 혀를 붙잡았습니다
언젠가
유리창이 새 것으로 바뀌면서
잘 보이던 것들조차
원경이 되어 나와 무관해집니다
다시 유리에 금이 가면
창 너머 나와 가까워지려는 풍경들이 항상 탄생하는 걸까요
어쩌면 유리 너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리 안쪽이 아닐지,
부서진 유리와 부서질 유리만이
유리의 세계라고 믿었습니다이어도 좋을 겁니다
밤을 위한 정물 / 송재학
지붕의 눈을 핥으면서
고양이 몇 마리 엎드려 있다
처마 아래로
눈과 고양이처럼 기묘하게 뭉친
어둠
데생을 위한 정지 화면이지만
얼굴은 어딘가 기웃거리고 있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눈이 더 내리고
고양이도 눈도 아닌
얼룩들이
손바닥이 조금씩 살찐 후에
정물화가 시작되었다
달에 닿기 위하여 / 송재학
달에 닿으려는
수많은 발자국
밀물과 함께
달빛은 어디에도 스며들지만
달빛과 함께 알아가는
달의 표면들
달까지의 계단이기에
달빛이 일렁이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처럼
날이 저물고
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
달과 연결되는
잔별의 모습
달에 남겨진 저 슬픔은
지상의 악기
스타더스트 / 송재학
스타더스트*는 스스로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
별빛이 중얼거리기 전에
별빛에 닿기 전에
너무 많은 밤낮이기 전에
몸을 바꾸는 밤낮이라고 하네
그림자를 숨긴 거리의
불빛을 연결하면 별자리
스타더스트는 휘어지는 해안
창백한 입술로
내 안의 위로처럼 달려드는 파도이기에
느려지는 시침들
스타더스트는 블루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별자리를 나비 문신으로 새겨가는 노래
스타더스트는 맥박
피 흘리는 유성이
내 손금을 새기고 지나갔다네
나라는 먼지를 기억하면서
* Stardust, 재즈 스탠더드 곡.
유령 / 송재학
그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다식도 먹으면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설레는 거울 이야기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섬이거나 바다이거니 했다
해안의 커브 길처럼
그는 옛날이다
자신이 사용했던 이름이 행성인 것을 고백하고
언제부터 혼자라는
음영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침묵을 이해한다면
그는 나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와 조금 비슷하다
그가 먼저 떠나고
테이블을 정리하던 종업원이 물었다
그분이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는데
맛이 별로여서 그러신가요?
나와 함께 다과를 먹었는데
그의 몫은 그대로 남았다
하나를 씹어 보니
단맛이 죄다 빠져나가고 푸석푸석하기만 했다
그가 마셨던 찻잔 속 향은 사라졌지만
허브의 높이는 그대로 찰랑거린다
그가 남긴 명함에는
낯설지만
이물감이 없는 이름,
어느 시절
그는 나의 속도가 아니었을까
다시 만난다면
내 비밀 쪽지를
그의 손바닥에 쥐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해변의 모습 / 송재학
머나먼 곳, 도착할 리 없는 물결, 딱딱한 파도는 오래되어 모서리부터 바스러진다 해변이 사라지고 있다 파도의 높이를 피해서 새떼들이 잠 속으로 날아가던 중 스케치 자국처럼 정지해 버린다 화면을 확대했더니 유화의 안팎은 곰팡이 흔적과 불면이 번지는 중이다 도톨도톨한 암청색 바다 위에는 누낭*으로 항해 중인 배 한 척과 저녁, 죽은 새의 깃털이 고정되어 있다 흰 뼈의 그림자가 쌓여 조류의 골격을 세우는 해변에서 머리카락 휘날리는 바람이 불어서 갈라 터지는 유화의 지층 위로 다시 덧칠을 반복하여 무채색이 되는 18세기 네덜란드의 해변을 얻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 송재학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
먼 곳은 사라지고
별의 숫자가 지척이다
슬픔과 기쁨이 서로 응시한다는 불빛
이곳을 지켜보는 눈동자와 비슷해진다는 불빛
해변 b / 송재학
직선 대신 점과 점이라는 항로는 새에 대한 의문의 형식이다 세계라는 말을 생략한 직각을 찾아가는 새 떼에게 표정이 있다면 비행의 높이라는 건 짐작이지만, 부글거리고 있을 해변 b의 이정표는 정지화면을 되풀이한다 낯설어하는 해안선의 커브 길은 대체로 역광의 목소리,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 사용하는 날갯짓, 어디를 날아가도 빛의 산란 속으로 잠기는 새 떼이다 늘어나는 사구와 더불어 먼 곳까지 연속사방무늬로 이어진 해변은 반복해서 읽고 있는 단편소설*의 페이지처럼 모두와 비대칭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새들의 주검은 차라리 투명하다고 믿을 수밖에, 홀로 파도에 젖어가는 리아스식 해변 b는 앞으로도 지도에 없는 곳이다 떠내려온 섬을 한사코 붙잡아야 했던 해변 b의 성정은 점차 사납고 고독해졌다 다시 도착하는 새들에 의해 어떤 해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로맹 가리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차용.
가슴팍이 움푹 뜯겨나간 신체에 대하여 / 송재학
내가 응시하는 나처럼
허수아비가 품은 허수아비라는
잔기침을 멈출 수 없다
허수아비와 허수아비 사이
몇 개의 얼굴 중에 내가 먼저 젖고
붕대를 감은
마지막 얼굴은
발목을 다친 바람이나
소심한 당나귀 생각 따위로 바뀌다가
잔상인 양 흩어지기도 한다
주목받지 못한 독백이지만
걷는 것만이 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허수아비의 결심
잠들지 않겠다는 마음
돌아오는 길에 의하면
들판의 넓이라는 광막한 기억만 있고 허수아비는 없다
자웅동체
허수아비의 살이나 뼈도 만져보지 못했지만
내가 수신한 신호 중에
이목구비라는 결말은
조금씩 신비해지면서
어디론가 사라진
허드레
허수아비 이야기이다
킬리만자로에 가기 위하여 / 송재학
유칼립투스 나무 그림자
백 미터 높이의 수피에는 오래된 상형문자가 빼곡하다
하지만 나는 비염 때문에 작은 화분을 들여놓고
낡고 오래된 책을 정리했다
피를 잉크로 사용했다는 서문, 광합성에 가까운 독후감, 꺾어버린 책등의 이름, 청춘을 자극했던 세로쓰기, 모래로 쌓은 둑 안에 해일처럼 가둔 마흔 살, 게으른 늙은 책, 글자가 너무 작아 낮달에 갇힌 문고본까지
언젠가 이 책들을 다시 읽겠다는 표정에는 초식동물의 긴 목이 있다
『시인학교』(김종삼 시집, 신현실사, 1977)와 『한국전후문제시집』(세계전후문학전집 8권, 신구문화사, 1961)을 함께 묶은 비닐 끈이 초현실주의에 매달린 것처럼
어디서나 우후루봉이 잘 보인다는
킬리만자로의 공허에 휩쓸려서 종일 책을 뒤적이다가
유리창의 사각형을 닮은 메모를 보았다
‘세계의 모서리에서 언제부터 은유로 남게 될 오늘’
튤립의 모스 부호 / 송재학
봄의 튤립,
아르메니아에서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을 건너가는
꽃의 색깔
정교와 이슬람 사이의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다
꾸밀 필요가 없는
햇살이라는 고양이들
꽃대의 높이에
성층권이 이주했다고 짐작하는 순간
발돋움부터 찌르르하다
너무 화사하여
앞자리이거나 뒷자리도 서툴다는 튤립이
나를 위한 암호를 빌려준 것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