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에서 광덕 사형님과 보낸 시절 각원선과(覺園善果) | 부산 범어사 법사 4. 광덕스님의 어른 모시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광덕 사형님은 화합의 견인차였다. 사형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디든 질서가 있고 자애가 있고 위엄이 있어서 모든 법도가 살아 숨 쉬었다. 그러한 사형님이 범어사에 계실 때는 상하좌우로 막히는 곳이 없었다. 어른의 뜻을 받들 줄 알았기에 어른의 영(令)이 섰고, 어른을 모실 줄 알았기에 집안의 질서가 섰다. 또한 아랫사람들에게는 자애와 책임감으로 출가의 바른 길을 제시했고 그래도 안 되면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도를 닦기 위해서 모인 특수한 집단이 바로 출가대중들이다. 그들은 자칫 과격해지기도 쉽고 어긋날 수도 있고 개인적 성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그들을 한테 묶어 원만한 화합을 이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비록 세 말은 몰고 가도 중 셋은 몰고 가지 못한다’는 우스개 말이 있을까! 그런데도 사형님은 범어사의 화합을 위해 밤낮으로 도량을 뛰어다니다시피 살았다. 부목방에서 처사방으로, 대중방으로, 독방으로, 소임자 방으로, 조실스님 방으로, 바쁘게 아래 위를 오르내리면서 경책하고 의논하고 모범을 보이고 또 문안을 드렸다. 그런 사형님의 노고 덕분으로 범어사 대중들은 일상의 법도를 따로 세우지 않아도 법도가 섰고 청규를 말하지 않아도 청규대로 살았다. 사형님은 그때도 몸이 몹시 허약했지만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범어사를 위해 온갖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정진력과 수행 분위기가 어울려 그 당시 범어사는 한국불교 청백가풍의 법도가 살아 있는 체통 높은 수행도량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대중들이 마냥 가위눌리듯 억눌려 산 것도 아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기를 못 펴고 눈치껏 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때 범어사는 일상의 수행을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그런 억눌리고 시시한 분위기의 도량이 아니었다. 당시 출가자라면 누구나 범어사 도량에 한 철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모범 수행처였다. 그것은 일상생활 언제나 무슨 일에나 어른께서 앞장섰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셨기 때문이다. 삼천위의(三千威儀) 팔만세행(八萬細行) 어느 한 가지에도 선지식은 예외를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범어사에는 그러한 어른이 계셨고, 그 어른을 예경하고 따르는 일에 사형님의 대중의 전범(典範)이 되어 주셨으니 어찌 아래 위의 법도가 자연히 서지 않겠는가. 상경하애의 수행질서가 이루어지고 화합이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저절로 도량 내에 그 빛이 낭연하였다. 사형님의 이러한 어른 모시기의 일은 비단 범어사에서만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그러한 정신은 충일하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사형님의 본색이었다. 우리나라의 뛰어난 고승대덕을 청하여 범어사에 주석하시게 했고, 또 조실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법거량을 하도록 자리를 만든 것도 바로 사형님이셨다. 당대의 큰어른이셨던 효봉 큰스님, 금오 큰스님께서 범어사를 다녀가셨고, 전강 큰스님께서는 범어사에서 한 철을 주석하셨고, 석암 큰스님께서는 이웃 선암사에 계셨기에 무시로 오셨다. 문중의 어른이신 자운 사숙님과 고암 사숙님께서도 빈번히 다녀가시기도 하고 주석하시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어른들에 대한 공경과 시봉은 바로 조실스님을 모시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형님께서 주선했던 것이다. 조실스님께나 범어사로 본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일보다는 나중의 일이지만 사형님께서는 석주 큰스님이나 청담 큰스님도 두 손으로 연꽃을 받들고 걷듯이 모셨다.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 광덕스님은 우리 불교계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원력과 신심의 보살화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실로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사형님과 같이 살면서 그 모든 것을 다 보았으니, 그러한 사실을 눈으로 다 보고도 어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형님은 남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자기의 일신을 돌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기뻐할 일이라면 밤낮의 구분도 없었고, 부처님 가르침을 펴는 일이라면 목숨도 초개같이 여겼다. 나는 그러한 사형님을 한국불교의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보살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사형님의 인간적인 특장을 말하는 것은 그분이 절에서 수행하면서 억지로 살거나 눈치보며 살거나 또는 계산하여 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수행에서 드러나 덕성과 천성에서 비롯된 꽃처럼 아름다운 양심,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천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다. 누구나 스스로의 체험에서 비롯된 삶은 무척 자연스럽고 또한 자비스러운 것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평범 가운데 빼어남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보통 범부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또는 아득하게 생각하여 그냥 세월 속으로 밀어 넣고 마는 것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
첫댓글 참 정확한 큰스님 모습 지적이십니다. 큰스님은 정말 계산하지 않으시고 사셨지요. 그리고 공경 그 자체이셨습니다. 보현행원 공부를 하는 저는 그런 것을 제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보현행을 공부하면 계산 같은 걸 잘 못하게 됩니다. 나를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거든요. 오로지 상대방의 아픔, 상대방의 이익만 생각하는 습이 생기므로 자기 일은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이런 걸 일반인들, 일반 수행자들은 모릅니다. 당신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의 분들이시거든요.
그리고 이런 큰스님을 나중에 불자들이 이용(?)한 면도 있어요. 그래서 큰스님은 한없이 쇠약해져 가시고, 당신 말씀대로 도시 속에서 소모품처럼 쓰러져 가셨지요.
이렇게 댓글로 가르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나를 계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큰스님께서 하신 공경의 행을 부지런히 배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