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가을은 詩문학도 현숙의 자살로 시작되었다. 예쁘고 말귀 잘 알아듣는 현숙이 명동에 나타
나면, 시인들은 서로 시작(詩作)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곤 했었다. 그러던 현
숙이 각중에 어느 유부남과 배가 맞아 동거를 시작했다가, 부인이 나타나 길거리에서 개망신을 시키
자 애인이 보는 앞에서 키니네 200환어치를 한 알 한 알 삼키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자는 왜 현숙
의 자살을 말리지 않았는지, 혹 자살방조죄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
지만 무정한 작가 이봉구는 일체 설명이 없다.
한참 뒤에야 소식을 들은 시인 박인환과 조경희는 롬바다방 옆 중화원에서 청요리도 시키지 않고 다
꽝을 안주삼아 독한 빼갈을 맹물 들이켜듯 마셔댔다. 비련의 책임은 항상 시인들의 몫이었다. 이윽
고 대취하여 길거리로 나선 그들의 발길이 저절로 모나리자다방 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은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건만, 명동식구들은 술만 취하면 너도나도 순례코스처럼 모나리자 앞으로 찾아오곤
했다. 박인환은 럭키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자작시를 읊조렸다. 이제
막 떠올라 아직 제목도 붙이지 않은 날 시였다.
가을에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스카치위스키의 애달프고 가냘픈 향기
오드리 햅번과 같은 목소리로 부르는 샹송을 들으며
우리는 위스키를 마신다.
한 잔은 과거를 위해
두 잔은 오늘을 위해
내일을 위해서는,
그까짓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술병에서 꽃이 쏟아지고 별이 흘러나온다.
가을은 위스키를 부르며 우리에게 망각을 고한다.
‘내일을 위해서는,
그까짓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때 이미 박인환에게는 내일이 없었던 것이다.
시인 조병화는 명동극장 옆에 있는 왜식집 미락에 앉아 혼자서 회를 곁들여 따끈하게 데운 정종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챙이 긴 베레모에 끈 넥타이를 맨 채 담배도 채우지 않은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그는 다섯 번째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를 냈는데, 전후(戰後)라 경제사정
이 좋지 않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3판이 나가는 이변을 일으켰다. 조병화의 시집을 출판한 정
음사 사장 최영해는 한꺼번에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모두 지급한 뒤, 중국집 아서원으로 시인들을
대거 초대하여 청요리를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 무렵 퇴계로 2가에 門다방이라고 하는 별난 다방이 문을 열었다. 門다방은 이름에 걸맞게 출입문
을 한껏 우아하게 장식해놓았다. 옛날 대갓집 대문처럼 널찍한 통나무 송판으로 육중한 문을 만들어
세우고는, 양쪽 문짝에 팔뚝 굵기의 무거운 무쇠 손잡이를 달아 그걸 잡고 문을 열도록 했다. 육중한
문짝을 밀고 들어서면, 안에서는 무테안경을 쓴 지적인 생김새의 마담이 화사한 미소를 띠며 명동식
구들을 맞이했다. 딱 가을꽃 코스모스를 닮은 청초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다방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단골손님으로 마담의 환심을 샀던 바람둥이 유부남 송지영과 딴살림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송지
영은 소문난 마담 킬러였다.
또 다른 마담 킬러 공초 오상순은 위스키 바 포엠의 단골이었다. 그는 마시지도 않을 리베라위스키
한 잔을 시켜놓고 두 손으로 연신 마담의 손을 주무르며 수작을 걸고 있었다. 마담은 위스키 바와 어
울리지 않게 자주색 끝동을 단 노랑저고리에 자주색 치마를 집고 있었다.
“손이 이렇게 부드러우면 속살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오상순은 음흉한 눈길로 마담의 가슴께와 사타구니 부근을 쓰윽 훑어봤다.
“정 궁금하시면 한 번 만져보시어요.”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마담의 대꾸에 공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오입질에
이골이 난 남정네라도 정복하기 전의 여인 앞에서는 항상 설레는 법이다. 마담은 손만 부드러운 게
아니라 그윽한 눈길이나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모든 게 다 부드러웠다.
아동문학가 마해송도 포엠으로 아지트를 옮기더니, 수요일 석양 무렵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위스키
를 마시곤 했다. 누구보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박인환은 술이 취하면 카운터 위로 펄쩍 뛰어올라가
춤을 추곤 했다. 훤칠한 키에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박인환의 술주정은 언제나 일정한 금
도가 있어 마담도 손님들도 박수를 치며 함께 즐겼다. 후배 시인 박인환을 유난히 좋아하는 오상순
도 이때만큼은 마담의 손을 놓고 따라서 박수를 쳤다. 마담은 술도 못 마시는 오상순이 매일 찾아와
수작을 거는데도 싫어하기는커녕 이따금 담배도 한 갑씩 사주곤 했다. 오상순은 시인 양명문의 집에
공짜 방을 얻어 부인과 살고 있었다. 오상순의 부인은 양명문의 텃밭에서 오상순의 팬이 선물로 사
준 닭 100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