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엠은 리베라위스키 한 가지만 파는데도 명동식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술값이 싼데다 안주
가 공짜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코주부 김용환은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포엠에
출근했다. 마담은 김용환이 들어오면 그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슬쩍 손에 쥐어주곤 했다.
밤의 황제 이화룡 패거리는 명동을 장악하고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자릿세를 뜯어갔는데, 여러 술집
이나 음식점 가운데 문화예술인들의 단골집인 포엠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술이 취한
채 지나가다가도 유명한 문화예술인을 만나면 깍듯하게 인사까지 했다. 요즘과 달리 깡패들에게도
문화예술인들을 존중하는 낭만적인 풍토가 있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명동파 행동대장 신상사, 두목 이화룡, 2대 행동대장 구달웅
어느 날 시인 김종문이 후배 시인 세 사람을 데리고 위스키 바 캣으로 들어섰다. 마담이 6‧25전쟁 때
납북된 경향신문사 편집장 부인이라 언론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들리는 집이었다. 마침 이화
룡이 부하 몇 명과 함께 한쪽 꾸껑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참 뒤 술에 취한 젊은 시인
한 사람이 이화룡의 부하와 말다툼을 하다가 술잔을 집어던졌다. 술잔은 공교롭게도 이화룡의 어깨
에 맞아 흰 양복에 위스키가 튀면서 여러 군데 얼룩이 져버렸다. 부하가 당장 요절을 낼 기색으로 자
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이화룡이 잡아 앉혔다.
“저 분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저 분들을 안다. 다른 곳으로 가자.”
이화룡은 양복에 묻은 위스키를 툭툭 털어내더니 김종문 일행의 좌석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카운터로 가서 술값을 계산한 뒤 그 집을 나갔다.
1955년 12월 26일, 명동에 새로 지은 3층 건물 동방문화회관이 여러 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한 가운
데 성대한 개관식을 가졌다.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명동을 드나드는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차린 문화
교류공간이었다. 1층에는 동방싸롱이란 다방을 차려놓고 영업을 했으며, 2층에는 몇 개의 집필실, 3
층에는 회의실을 꾸며 문화예술인들이 출판기념회 등 필요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했다.
정부에서도 못하는 일을 젊은 실업가가 대신했던 것이다. 모나리자다방이 각중에 문을 닫는 바람에
잠시 갈 곳을 잃었던 문인들은 희색이 만면한 채 동방싸롱을 새 아지트로 삼았으며, 영화인들도 소
문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염색한 군복차림의 배우 김승호와 주선태가 아침부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동방싸롱에 죽치고 앉
아 있었다.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주머니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배우 이봉래‧
정화세‧최남현 등과 함께 영화계의 ‘주당 5걸’로 꼽히고 있었다. 김승호는 한창 잘나가던 때 다섯 사
람이 불고기 48일분과 소주 다섯 상자를 비운 영웅담을 얘기하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했
다. 곧이어 배우 김동원‧박암‧장민호‧최남현, 극작가 유치진, 연출가 이해랑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섰다. 이즈음 유치진은 시공관에서 박인환이 번역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
차》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해랑은 연극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처럼 영화 쪽에는 눈길
도 주지 않고 오직 연극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점심때가 되자 이해랑은 일동을 데리고 경상도
집으로 찾아가 푸짐하게 술을 대접했다.
그날 밤, 동방문화회관 3층의 한 회의실에서는 박인환의 『선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평
론가 백철의 축사 낭독에 이어 노경희가 축시를 낭송했으며, 가수 현인이 굵직한 목소리로 샹송을
불렀다. 박인환에게는 짧은 일생을 통틀어 최고의 밤이었다. 그는 이해랑의 청탁으로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비롯하여 서양의 여러 희곡을 번역했으며, 시집도 계속 내고 있었다. 모든
문화예술인들에게 1950년대 중반은 명동시절의 하이라이트였다.
12월 31일, 동방싸롱과 3층 회의실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송년회를 벌였다. 시인들
은 일찌감치 동방싸롱 절반을 차지한 채 가장무도회를 벌여 춤솜씨를 과시했다. 술과 노래와 춤으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미남‧미녀 선발대회가 열려 미남으로는 김종문이, 미녀로는 이명온이 뽑혔다. 김
종문은 예비역 육군준장이었다. 일동은 무용가 김백봉 여사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2차를 가졌다. 거
기서 미남으로 뽑힌 김종문을 다시 한 번 축하해준다며 헹가래를 쳤는데, 실수인지 장난인지 방바닥
에 그대로 떨어지면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가장무도회 복장이 하필 의사의 흰 가운이어서 간호부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
다나? 1955년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특이한 바닷 바람과 비가 몰아친 며칠간의 부산 나들이, 그 좋은 해파랑길 한번 걷지 못하고 왔습니다. 도착한 서울의 한파추위 또한 잰걸음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집만큼 편한곳은 없다는 말이 실감나듯 제자리한 일상이 순조롭습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