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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후기 <20170402> * 참석자 (12명) 정혁현목사 이신정전도사 정한결 공은주 안태형 서선미 정명수 이샛별 이수정 박성호 박영기 하동우 * 예배 - 말씀 : 정혁현목사 로마서 14:17 - 시 기도 : 공은주 ( "패닉" 백무산 ) - 대표기도 : 이수정 - 헌금기도 : 이신정전도사 - 공동식사 : 정명수 * 알림과 나눔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 5.18 광주항쟁 기념 예배를 위한 성서 세미나 진행했습니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3-4장 ,발제는 이샛별 교우가 맡았습니다 다음 순서는 5-6장 발제자: 이수정 교우입니다. 3. 오늘 공동 식사는 정명수 교우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준비한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일 예배 담당표 -점점 솜씨를 더해가는 정명수 교우님이 맛있는 카레를 준비해주셨습니다. 노란 개나리와 노란 카레가 기쁨을 주는 봄날 오후입니다. -사이좋게 설거지를 하고 계신 서선미 교우님과 정명수 교우님 고맙습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부엌에도 피었네요. -박성호 목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이야기도 못 나누고 급히 가셨지만 오랜만에 오시면서도 교인들을 위해 풋마늘과 물김을 가져오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민하시는 일 잘 선택하시길 기도합니다. -박연옥 교우님의 삿포로 맥주 공장 방문 소식을 듣자 하니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지네요. 즐겁게 여행 마치시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박연옥 교우님과 이신정 전도사님이 김치를 기증해주셨습니다. -파린 지붕과 개나리가 황홀합니다. 부활절을 위해 하루하루 곱게 단장 중인 매화나무 가지가 개미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얼루기를 부르니 마지못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올라옵니다. 황송할 뿐이죠. 제 앞에 벌렁 눕더니 개나리 그늘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폅니다. -식사 후 이수정 교우님과 목사님 방 쪽 계단을 내려와 마을버스 길 쪽으로 한 바퀴 돌아보고 왔습니다. -개미 마을을 돌아보고 있으니 전도사님이 올려주신 오늘의 시가 생각납니다. 조금 바꾸어 올려 봅니다.
어쩌다 한낮의 봄, 좁은 길에서 /내려다본 개미 마을/ 오밀조밀한 지붕들이 패닉처럼/ 검게 쏟아지는 우주/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 *말씀 후기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서 14:17
<그들의 빈자리>
박근혜 탄핵과 촛불집회 6개월. 최고 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낮은 자리로 전락했다. 박근혜 탄핵과 구속이 최근 세월호 인양 과정과 중첩될 때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혀 별개의 사건이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놀랍다. 과거에 사라졌던 순간이 현재 전개되는 사건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이런 겹침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그림의 구도가 구성되는 순간이다(벤야민의 성좌). 여기에는 역사적 시간을 중지시키려는 억압당하는 이들의 의지, 즉 지배자의 승리로 점철된 그 시간을 중지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의지이다.
세월호는 참사의 압도적 규모와 그 많은 사람이 그 짧은 시간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전 국민이 목도한 충격적 사건이다. 처음에 우리는 그 숫자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사고의 규모에 충격받고 죽은 이의 가족이 애도하는 것에 동일시하며 그 사건에 휩싸였다. 그리고 몇 개월간 우리는 우울 상태에 빠졌다. 인간의 한계를 생물학적 죽음과 연결하는 시대적 풍조 속에서 그들의 빈자리가 국민 가슴속에 각인되었을 때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온 허무로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국민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계속 우울한 상태에 침잠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월호가 끌고 들어간 ‘304명 인간의 빈자리’를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절하게 또 충격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계속 말할 것이다. 그들이 남긴 빈자리는 이 세계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은 그 빈자리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사망과 실종 304명의 숫자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분향소에 사진이 놓여 있었던 장면이다. 그 얼굴들은 300여 명의 희생자라고 통칭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안치된 영정들은 1+1+1…=304명의 희생자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들은 각자 하나다. 전혀 다른 하나하나의 얼룩들이다. 그 누구와도 교환 불가한 단독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이다!
보편성은 공통성이 아니다. 차이를 부각하려는 욕망이 드러난 보편성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동네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아파트에 사는 한 개인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주장할수록 그는 보편성에 빠진다. 이때의 보편성은 공통성이고 교환 가능하다. 그것은 아파트 삶이라는 보편성 안에 규제되어 있다. 그러나 보편성으로 규제할 수 없는 것으로의 보편성은 모두 하나! 각자 하나! 교환 불가하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
서울역 신관 유리 건물 아래 바람 메마른데/ 그 계단 아래 차가운 돌 벤치 위 종일 뒤척이다 저 고속 전철을 타고 천국으로 떠나간다/ 이름도 없는 몸뚱이를 거기에다 두고 예약도 티켓도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구나 /마지막 객차 빈자리에 깊이 파묻혀 어느 봄날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
모던한 투명 빌딩 현관 앞의 바람 살을 에이는데 지하철 어둔 돌계단 구석에서 종일 뒤척이다/ 저 고속 전철을 타고 천국으로 떠나간다 바코드도 없는 몸뚱이를 거기에다 두고/ 햇살 빛나는 철로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통곡같은 기적소리도 없이 다만 조용히 /어느 봄날 따사로운 햇살에 눈처럼 그 눈물처럼 사라져 주듯이 /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
-정태춘, 박은혹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중 <서울역 이 씨>
서울역 어느 노숙자의 죽음은, 그저 숱한 죽음 중 하나였을 그 죽음은 정태춘의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세월호는 사람들이 보는 세계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우리에게 결여를 구체화했다.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구호처럼 마치 그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듯이 아니 살아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관계를 사람들은 맺었다. 단원고 학생들의 삶과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었다. 정태춘이 ‘서울역 이 씨’를 노래한 것처럼 말이다. 촛불집회에는 분명 아이들이 와있었다. 또한 광주항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민주 투사들이 와있었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 그들과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했고 그 삶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평소에 무관심한 것에 관심을 두고 평소에 부러워하던 것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관계에서 바로 보편성, 단독적 보편성이 드러난다. 세월호를 애도하며 죽은 자의 단독성을 발견하고, 그 빈자리와 관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단독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박노자(오슬로 대학교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을 ‘최순실을 지원해 그 열매를 공유한 이들이 이해관계가 틀어지자 최순실로 대변되는 국정농단 세력을 일제히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신권위주의가 망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드러나 바뀐 건 딱 하나라며 ‘삼성/JTBC와 조선일보 등이 박근혜호에서 내려와 박근혜호를 상대로 집중포화를 하기 시작해 권력의 이너서클 안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비선 실세 관련의 천기를 평범한 백성들에게까지 누설시킨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는 삼성의 중국에서의 사업에 극히 불리한 사드 배치 결정을 했다가 삼성계열의 언론에 의해서 결국 치명적 결정타를 입고 만 셈”이라며 신권위주의 체제가 대기업이 아닌 (펜타곤의 현지 지부 같은) 국방부의 주장대로 했다가 대기업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해체를 당한 셈이 된다. 그는 한국을 실제로 누가,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극명하게 잘 보여준 사태라고 말했다.
자본이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사건은 늘 통제력을 벗어난다. 이때 억눌린 자가 어떻게 주도권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적폐청산을 가장 원하는 것은 삼성이다. 87년 6.29선언은 자본에 포섭된 사건이다. ‘전두환 독재’는 대기업엔 걸림돌이었으며 독재 타도는 자본이 누구보다도 가장 원한 것이었다. 6.29 이후 민주정권 하에서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국민의 소비욕망이다. 주체로서의 욕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단독 존재로서의 우리의 욕망을 어떻게 저들의 욕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향후 야권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사람들의 이런 독자적 분노 의지가 단지 위로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욕망의 해방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이 시기에 무언가 해낼 수 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중 헤겔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희는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라. 그러면 하느님 나라도 곁들여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바울의 말이 뒤집혔다. 인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생물학적 필요 이상이다. 동물은 먹지 못했을 때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인간은 마음속에 칼을 품는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에너지를 보충하는 차원이 아니라 ‘기표’다. 벤야민의 말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구하라. 그 조건을 구하는 행위는 가진 자가 배타적으로 소유한 이 시대에 생물학적 만족의 요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의라는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받게 될 것이다. 억눌린 자들의 투쟁은 정의를 요구한다. ‘왜 너만 고기를 먹냐?’고 묻는 행위는 중요하다. 본문에서 바울은 먹고 마시는 일에 하느님 나라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 깨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바울은 먹고 마시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거기에 제한시키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은 예수 공동체를 밥상공동체라고 했다. 평등, 우애를 나누는 공동체. 모두가 함께 예수의 살과 피를 동일하게 나누는 행위! 그러나 기독교는 이를 나눈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것을 금하며 뚱뚱한 몸을 부끄럽게 만든다. 더 먹는 행위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구강 충동의 만족을 위해 먹는 것이며 씹는 과정이 만족을 준다. 가난한 자는 만족을 위한 다른 것들이 제한되어 있기에 가장 쉽게 접근 가능한 먹을 것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들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먹는다.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기에 그 행위를 통해 ‘나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충동의 존재이다. 영원히 사라진 것은 어머니와의 합일 관계 상태의 완벽한 만족이다. 거기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 노동하면서 인간이 된다. 낙원은 죽음이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상실이 빈자리로,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충동은 늘 그것을 겨냥해 움직이나 충동의 목표는 죽음이다. 충동은 욕망의 대상에 접근한다. 그 대상을 돌고 올 때 충동은 만족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늘 부수적 만족이 있다. 세월호 촛불은 투쟁이나 그 과정 자체는 우리에게 기쁨이었다. 이것이 없는 자들이 끊임없이 승리하는 이유이다. 지배자들에겐 이런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불가사리처럼 새 영토를 계속 확장하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은 늘 이겨왔다. 지배자의 삶에 기꺼이 종이 되는 것을 해방시켜라! 성령에서 의와 기쁨은 충동의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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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기부장님 예배담당표가 제대로인지 확인 좀 해주세요~ 제 시기도가 16일이 맞는지도 확인부탁드려요.
네 ~ 샛별 교우님이 그날 하실수 있으면 그대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까만콩 넵^^ 저 16일이요.
풍성한 일기처럼 봄날의 정취가 물씬한 예배후기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 카메라 들고 또 돌아요~
깔끔한 설교정리 감사합니다.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라..."는 헤겔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벤야민이 테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신학자'는 '민중신학자'입니다.
네~수정했어요^^
사진도 쥑입니다.
사진이 정말 눈부십니다. 황홀해요. 개미마을이 샛별씨 사진을 통해 다시 발명되는 순간입니다. 중간에 끼어든 시적 변용도 잘 어울리고요. 성실한 설교 후기도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진은 아닌데...더 노력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