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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 것인가, 열심히 쓸 것인가?
-강동수 시의 특질에 대한 고찰
이동희
프롤로그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좋은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항상 운동만을 생각하는 것, 자나 깨나 축구 선수는 축구를, 야구 선수는 야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축구 선수가 잠을 잘 때에도 축구공을 안고 잔다거나, 투수가 항상 손에서 야구공을 놓지 않은 채 기량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향상된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리하여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만큼 보수도 더 받고, 향상된 실력만큼 팬들의 사랑도 더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스포츠뿐만 아니라 연예계 스타들도 팬들의 사랑이 모여서 팬클럽이네, 팬덤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 프로세계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요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찌 보면 프로 세계에서 팬들의 사랑은 스타들이 생존할 수 있는 절대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사코 자나 깨나 기량의 향상,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는 필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시인들이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스포츠선수들이나 연예계 스타들처럼 자나 깨나 시만 생각하고, 앉으나 서나 시 쓰기만을 연습하고 애를 쓰는 것은 어떨까? 이런 현상도 상찬 받아 마땅할까, 하는 의아심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선량)들이 자기를 국회에 보내준 유권자들의 권익 옹호는 외면한 채, 패거리 작당에 휘말려 적폐를 양산하는데 열성을 부리며 의원으로서의 의무를 외면한다면, 이런 국회의원을 선량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비유가 좀 생뚱맞지만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자나 깨나 시를 생각하고 시 쓰기를 연습하는 일은 창작의 기본이다.
그러나 시는, 시인은 그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기교적으로 잘 다듬어진 시, 시대적 흐름을 적절히 반영한 시, 대중의 취향이나 평단의 입맛에 들어맞는 시를 쓰기 위해서 노력하고 열성을 부리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시를 생산해 낸 ‘사람됨’이 빠지고서는 진정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먼저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좋은 시’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러니까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자나 깨나 ‘열심히 쓰기’보다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 ‘열심히 살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흔히 글 쓰는 사람이라고 다 똑같이 부르지는 않는다. 문학의 세계에서 다른 장르는 ‘~가’를 붙여서 글 쓰는 이를 호칭한다. 작가, 소설가, 극작가, 수필작가, 시나리오작가, 평론가 등으로 호칭한다. 그러나 시를 쓰는 사람만은 유독 ‘시가’라고 하지 않고 ‘시인’이라고 부른다. 사람 인자를 붙여서 호칭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먼저 사람됨을 자각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만이 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까?
<예전에는 가슴 아픈 사랑을 안고/ 살았다. 예전에는 내 눈을/ 인생에 고정하고 수정으로 된/ 작은 페이지를 간직했다./ 친절을 샀고, 탐욕의/ 시장에서 살았다./ 인간과 가면의 적대감,/ 질투의 가장 소리 없는 물을 숨 쉬고 살았다.-후략->(파블로 네루다 「시인」 부분 『모두의 노래』 526쪽) 시인이 되기 전에는, 시인으로 살기 전에는 그렇게 살았다고 네루다는 고백한다. 시인이 된 뒤에야, 시인으로 살기로 작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산 뒤에야 <그렇게 해서 쐐기풀에서 가까스로 구해낸 시,/ 하나의 벌罰 같은 고독을 움켜쥔 내 시가 태어나거나,/ 가장 비밀스러운 꽃을 부패의 전원에서 유리시켜/ 땅속에 묻히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시인으로 살기 전에는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고 했다. 시인으로 살기로, 사람살기의 참된 길에 대한 안목을 바로 하기로 한 뒤에야 비로소 삶의 길이 보였다는 것, 사람이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시는 시를 열심히 쓰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으로 열심히 산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기 전에 열심히 살아온 사람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프로스포츠계 선수들이나 연예계 스타들의 삶뿐이겠는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나, 그런 분야에서 일정한 삶의 몫을 담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의 비유는 유효하다. 운동선수로서의, 스타로서의, 정치인으로서의, 기업가로서의 됨됨이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저들의 행위와 성과물이 유성처럼 사라진 예[두 전직 대통령이 영어의 몸이 된 사례는 국가적으로 창피한 일이지만 반면교사로의 교훈은 크다]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람은 각 분야에서 기량을 연마하기 위해, 인기를 얻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람됨의 그릇을 갖추기 위한 노력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노력보다 먼저 사람됨을 갖춘 ‘시인’에게서 비로소 좋은 시가 우러나오는 시인처럼…….
체험적 진실의 세계
강동수의 대표작 다섯 편과 신작 다섯 편을 보았다. 열심히 살아온 결과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한다. 삶의 전선을 치열성의 그것에서 비켜서지 않은 결과물로 보였다. 문학적 진실은 곧 체험적 진실에서 유래한다. 상상력의 비중 또한 체험적 산물의 변형 아닌 것이 별로 없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형상화의 실타래를 풀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시인이 살아온 삶의 족적이요, 시적 상상력은 그 시인의 체험의 변주가 될 수밖에 없다.
생전에 어머니가 가꾸었던 앞밭에서
감자를 캔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싹을 틔우던 어린것들
주인을 잃고 시들어진 줄기를 걷어낸다
호미가 지나갈 때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어머니의 세월
감자도 이력이 있어 모양을 갖추었다
작은 근심 큰 근심이 같이 매달려 나온다
가끔 검게 타들어간 어머니의 가슴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암 덩이가 몸속에서 자라듯이
해를 보기 전 알 수 없는 감자의 이력
어둠을 안고 땅거미가 몰려올 때까지
눈물 같은 세월을 캔다
- 강동수 「감자의 이력」 전문
시적 대상인 어머니는 이미 ‘생전의’ 인물이 되었다. 시적 화자는 ‘감자를 캐며’ 어머니로부터 체득한 진실을 캔다. 감자는 이미 주인[어머니]을 잃었지만 어머니로부터 육화된 화자의 삶을 반영한다. 그렇게 해서 ‘감자의 이력’이 갖추어진다. 생전의 어머니는 결국 ‘눈물’이었다. 어머니에게서 체화된 비극적 삶의 인식이 이 시인을 시인됨의 삶으로 인도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게 작동하는 어머니에 대한 상상력은 형상화의 옷을 입고 독자의 식탁에 이런 사유를 펼쳐 보인다. 삶은 근심의 덩어리를 안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안으로 키운 근심으로 검게 멍이 들고 타들어간다. 특히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가슴은 더욱 그렇다. 이런 삶의 간고함이 자라서 악성 종양[암]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서정적 화자의 어머니는 그런 불치의 병을 앓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감자의 이력’서를 작성하는 시인의 가슴 떨림이 손끝에 느껴지는 듯하다. 어머니가 키우고 계셨던 근심 덩어리를 좀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 서정적 자아는 후회 막급하지만 감자를 캐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긴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권태웅)라는 동심으로야 알 수 있었겠지만, 서정적 자아는 뒤틀리고 검게 타들어간 감자를 파보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삶의 내력을 안다.
그래서 감자의 이력은 곧 어머니가 앓았던 삶의 이력이다. 그런 자각에 이른 화자는 ‘어둠을 안고 땅거미가 몰려올 때’까지 비극적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추모한다. 그럴수록 시인의 삶은 시를 잘 써내는 일보다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비극적 삶의 인식에 투철하게 된다.
“시인은 우주와 인생에 대하여 반드시 그 안에 들어가야 하고 또한 그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써낼 수 있는 것이고,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적 자아가 어떻게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이력을 밝힐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어머니가 겪으셨을 비극적 삶을 온전히 써낼 수 있는 것이며 감자를 캐냄으로서 비로소 어머니의 삶의 고뇌와 투병의 실상을 온전히 살펴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렇다. 시인은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열심을 부리는 일 못지않게 자신의 삶을 우주와 인생의 본질 안에 들어가 보는 실천적 삶, 체험적 삶이 먼저 실행되어야 가능하다. 감자의 이력은 서정적 자아가 우주(어머니) 안으로 들어가 써낸 이력이며 시라는 형상화 작업은 우주(어머니) 밖으로 나온 뒤에야 기록한 이력서가 된 셈이다.
시적 대상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좋은 시를 쓰기 이전에 시인됨에 충실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이어지기도 한다.
길을 나서면 도시는 거대한 사막
신기루 같은 잿빛 가로수를 지나면
만날 것 같은 문명의 도시
실크로드로 길을 떠난다
이천 년 세월을 넘어 모래사막에 묻힌
누란왕국에 도착하면 꿈꾸던 오아시스
그 곁에 내가 묻어둔
청춘의 푸르른 꿈이 자라고 있을까
방황하는 로푸노르 호수가
두고 온 고향 누란으로 발길을 돌리듯이
길 잃은 발걸음이 사막에서 길을 찾는다
- 강동수 「누란樓欄으로 가는 길」 전체 3연 중 제3연
이 작품의 1연에서는 고비사막을 찾아간 시적 화자가 길을 잃는 상황을 보여준다. 고비사막이라는 우주로 들어간 자아가 모래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낙타의 울음소리에서 혼을 깨운다. 그러나 모래바람으로 눈뜨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자아는 ‘길을 잃는다’. 시적 자아가 지향하는 곳은 바로 비단길이다. 잃어버린 도시, 이상향으로 통하는 생존의 길이었던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시적 자아는 결국 자아를 찾는 길에 선 셈이다.
2연에서 시적 배경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바뀐다. 흉노족의 말발굽을 피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던 것처럼 시적 자아는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도시의 모래성’을 목격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도시는 결국 모래성으로 쌓은 신기루인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도시의 퇴락을 살피면 시적 자아의 꿈도 허물어져 갔을까?
그런 다음 3연에 이른다. 1연에서 잃었던 ‘하늘’도, 2연에서 허물어져 갔던 도시의 모래성도 결국 3연에 와서야 비로소 ‘청춘의 푸른 꿈’이 자라고 있는 곳에 이른다. 그곳이 바로 ‘누란’이다. 이곳에 이르러 두고 온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듯이, ‘길 잃은 발걸음이 사막에서 비로소 길’을 찾았다고 선언한다. 무엇이 시적 자아에게 이런 선언을 가능하게 했을까?
사막(고비사막·타클라마칸사막)이라는 우주에 들어가서 잃어버리고 허물어져 가는 자아와 문명의 실상을 발견했다면, 사막에서 나옴으로써 비로소 길을 찾게 된다. 우주와 인생의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써낼 수 있으며, 그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우주와 인생을….
인간의 삶은 누구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꿈꾼다. 청춘의 푸른 꿈이 자라는 곳도 바로 우주 안에 존재한다. 누란으로 형상화된 우주는 그러므로 이 시적 자아에게는 그의 우주와 인생의 전량을 표상하는 시간이자 공간이 된다. 누구든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체험적 진실을 발견할 수 없으며, 누구든 그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단 한 마디도 발설할 수 없다.
누란을 상상하며 그려낸 인간의 꿈이 여기에 담겨 있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 열성을 부리기 이전에, 시를 잘 살기 위해서 열성을 부려야 하는 이유다. 누란에 닿기 위한 치열한 삶의 몸부림이 결국은 그에게 ‘묻어둔’ 청춘의 꿈을 자라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렇다. 시인은 우선 쓰기보다, 살기에 주력해야 하는 이유를 발설한 셈이다. 누란을 그려낸 상상력의 힘 역시 그의 치열한 시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일 뿐이다. 그렇게 독해할 수 있다.
체험적 변주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을 그의 대표작에서 한 편 더 보기로 한다.
수시로 쳐들어와 소금기를 뿌려놓고 가는
해안가에서 조금씩 늙어가는 집
목쉰 바람이 불어와 집의 뿌리를 돌아나가면
오래 기억되던 아궁이의 잔불과 새벽에 졸음을 내려놓고
불 밝히던 어머니의 부엌
항아리 속 묵은쌀을 한숨처럼 퍼 올리던
쌀되박의 기억은 망각의 바람을 따라 길을 떠난다
폐선처럼 허물어져가는 외딴집 감나무에
까치밥 하나 바람에 흔들리면
뿌리를 따라 흔들리는 늑골의 아픔으로
다시 깨어나는 늙은 집
열리지 않는 아침을 가불하여 길을 나서던
아버지의 새벽 기침 소리를 듣고 싶다
- 강동수 「폐선」 전체 2연 중 제2연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가족사의 음영이 짙게 내려앉은 풍경을 그려낸다. 물론 폐선으로 형상화된 ‘아버지’의 이미지가 1연에서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강줄기를 막고 누워있는 늙은 아버지”라고 진술하는 화자의 세계는 2연에서 드러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사전 장치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은 1연과 2연이 대조를 이룬다. 이를테면 ‘폐선’의 이미지를 1연에서는 ‘늙은 아버지’로 형상화하는데 반해, 2연에서는 ‘늙어가는 집’으로 그려낸다. 또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갈매기’의 이미지에 대립해서 2연에서는 ‘폐선처럼 허물어져 가는 외딴집 감나무’ 이미지로 대응한다. 그리고 1연에서 ‘키를 키우는 직립의 꿈’이 2연에 와서는 ‘다시 깨어나는 늙은 집’으로 대응한다. ‘폐선’은 그래서 시적 자아의 삶에서 부모님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독특한 미학구조를 형성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노화의 길을 가고 있거나, 일찍이 명운을 달리했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생동하는 그리움을 ‘폐선’에 실어냄으로써, 우리의 삶이 어쩔 수 없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실과 별리의 아픔을 담담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담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안에는 척박했던 궁핍과 어려웠던 삶의 애잔함이 짙게 묻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해를 마치고 임무를 완수한 뒤에 낡아갈 수밖에 없는 배의 운명에 의탁한 삶의 진실일 뿐이다.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와 숲’을 덮었지만, ‘아버지의 새벽 기침 소리’를 듣고 싶다며 결구한다. 시적 자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폐선은 한 편으로는 망각의 저편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시적 자아의 서정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은유는 물론 시적 자아의 내면에 충만한 체험적 진실의 회고일 수 있다. 치열하게 쓰려는 창작의 욕구가 먼저가 아니라, 열성적인 삶이 지배했던 사람됨의 진정성에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은유된 세계, 아버지 어머니에 관한 가족사적 삶이 바로 ‘폐선’으로 형상화된 셈이다.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작품의 역동성, 다시 말해서 작품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작품이 은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운동에 충실히 따르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폴 리쾨르의 ‘은유이론’에 나온 말이지만, 우리가 독자의 입장에서 한 편의 시를 받아들이는 방법론적 일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즉 ‘폐선’에 담겨 있는 은유의 세계를 통해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가족사적 단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은 결국 어떤 과정을 통해서 오늘에 이르렀건, ‘낡아가는 집’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강동수의 작품은 그럼으로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적 산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미학적 표현의 세계
앞에서는 강동수 시인의 대표작 다섯 편에서 그의 세계를 살펴봤다. 이제는 그가 최근에 완성한 신작시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동음이의어를 통해서 뜻밖에 거둔 소소한 수확의 기쁨을 맛본다.
고구마 밭을 갈다가
한쪽에서 숨죽이고 있는
달래 한 무더기를 보았다
든든한 뿌리를 달래가며
삽으로 뿌리까지 뽑아 올린다
내년을 기약하며 잔뿌리를 심으며
흙을 다독여 주었다
오늘 저녁은 고라니도 지나치고
산토끼도 찾지 못한 달래무침을 먹으며
날마다 키를 키우느라 다녀간
아침이슬과 몇 번의 소낙비를 생각하며
게을러진 생각과
느슨한 마음을 달래본다
- 강동수 「마음을 달래다」 전문
이 작품은 일상이 얼마나 많은 소소한 즐거움과 삶의 보람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가늠케 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구마 밭을 갈다가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는 달래 무더기를 발견했다. 이를 캐서 잔뿌리는 내년을 기약해서 다시 심어두고, 수확한 달래무침을 먹으며 “게을러진 생각과/ 느슨한 마음을 ‘달래’본다”고 하였다. 이 단순한 진술 속에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사유의 맛이 있어 즐겁다.
봄철 야생나물의 대표격인 ‘달래’는 잃었던 입맛을 찾아주는 봄나물로 많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 <봄맞이 가자>라는 동요에는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라고 노래할 정도로 선호되던 나물이다. 그런데 요즘 농산물이 다 그렇지만, 모두가 인공적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어 나온다. 달래 역시 이 유통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고구마 밭 구석에서 (야생으로 자라는)달래를 찾았다는 것이다. 어찌 반갑고 귀한 손님이 아니겠는가.
‘달래다’는 기분을 맞추어 가며 구슬리거나 타이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동사다. 명사인 봄나물 달래를 동사인 달래다로 중첩시키면서 화자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행간의 시적 진술 속에 함축된 것으로 보인다. 중의법을 원용하면서 동시에 시적 사유의 세계를 은유하고 함축시키기에 마땅한 시어를 포착해 낸다. 그게 ‘달래와 달래다’이다.
명사 ‘달래’는 제목과 ‘달래무침’으로 두 번 등장한다. 동사 ‘달래다’ 역시 ‘든든한 뿌리를 달래가며’와 ‘느슨한 마음을 달래본다’로 두 번 등장시킨다. 중의적 대칭으로 독자의 감상안을 사유의 깊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시적 발상 역시 그런 말맛에서 유발되었을 것이다. 다만 열심히 시를 쓰려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인생을 경작하지 않고서는 거둘 수 없는 말맛이다.
그러므로 그렇다. 시인됨의 전제가 없이 좋은 시의 생산은 연목구어일 뿐이다. 이런 사유의 깊이를 미학적으로 변용시키는 두 개의 시적 진술에 주목한다. 하나는 “오늘 저녁은 고라니도 지나치고/ 산토끼도 찾지 못한 달래무침을 먹으며”이고, 다른 하나는 “날마다 키를 키우느라고 다녀간/ 아침이슬과 몇 번의 소낙비”에 닿아 있다.
앞의 진술에는 근래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농산물에 해를 입힐 정도라는 시대상을 담아낸 진술로 보인다. 숲이 울창하여 야생동물들이 증가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비록 인간의 간섭으로 개체수를 조절하여 농가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자연의 생태계는 사람의 간섭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과 삶의 행태에 대한 시적 사유의 일단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라니도 산토끼도 지구별의 한 식구다. 그들도 마땅히 생을 구가해야 하며, 그들이 먹고 남은 일부를 인간이 소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지라도 시적 사유, 시인의 생각은 그런 방향으로 치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뒤의 진술에는 인간이 간섭하지 않아도 자연은 스스로 알아서 자라고 거둔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닐하우스네 인공작물재배네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때가 되면 비가 내리고, 아침이슬과 저녁안개를 맞으며 달래와 냉이와 씀바귀(꽃다지)를 키워낸다. 그런 과정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에둘러 성찰하는 표현의 미학이 조촐하다.
바로 “게을러진 생각과/ 느슨한 마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연생태적인 자연의 순환에 대하여, 지구별의 온전한 균형과 조화로운 삶에 대하여 현대, 현대인들은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것을 게을리 한다. 그런 일에 부지런을 떨면 유별난 생태주의자나 자연회복 운동가로 치부하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이것이 세태다. 시인이, 시인된 사람됨이 어찌 이것을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불편한 시적 정서를 ‘달래본다’며 결구한다. 시인의 고뇌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깊은 사유도, 철학적 성찰도 미학적 표현과 만나지 않고서는 빛을 발할 수 없다. 강동수 시인은 평범한 진술을 통해서도 사유의 깊이를 천착할 수 있는 방법을 구사한다. 달래무침을 먹는다는 진술은 앞에서 언급한 생태주의적 관점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표현으로, 결구로 삼은 게을러진 생각과 느슨한 마음을 강조하면서 결구로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앞에서 대표작을 언급하며 사막 이야기를 봤는데, 신작시에서도 사막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곳도 한때는 바다였다지요
그래서 불가사리의 떠돌던 기억이 밤마다
별이 되어 소금사막에 내려앉지요
이곳에서 바다는 하얀 눈꽃의 추억을 남기고
사라진 전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오래전 바다를
끌어다가 사막에 심어놓았지요
소금을 먹고 자라는 선인장도 어쩌면
밤마다 제 몸을 불사르던 등대
소금으로 지어진 호텔도 한때 이곳에서 좌초된
난파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시름을 잊으러 날마다 소금사막으로
찾아오지만
이곳의 오래된 아픔들은 깊이 가두어
염장해 두었지요.
당신도 이곳을 다녀갔나요
이곳의 이야기는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이곳은 소금사막이니까요
- 강동수 「소금사막」 전문
이곳이 어디일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생로병사의 고뇌가 가득한 세상을 사바세계裟婆世界라 했다. 사바세계란 곧 온갖 고통과 번뇌가 들끓는 인간의 세계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소금사막이라는 비유가 더 적절한 모습으로 변질된 듯하다. 황금만능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과 이념의 뒷전으로 밀려난 세상, 과도한 물질의 낭비와 훼손으로 망가져가는 자연과 생태계가 소금사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작품의 소재와 시적 상상력의 유발점이 실재하는 소금사막이라 할지라도 강동수 시인의 시적 사유를 거치고, 그의 미학적 표현의 의장을 걸친 소금사막은 현대인이 현존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부패한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사막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은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가혹한 환경으로서의 현세를 암유하려는 진술로 일관되어 있다.
소금은 빛과 함께 양면성을 기본으로 하는 원형의 이미지를 지닌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격언은 영원히 썩지 않고 어둠을 밝히는 지혜로운 존재가 되라는 덕담이다. 기독교에서 자주 인용하는 빛과 소금 역시 인류가 저지르는 죄악을 어둠의 편에 놓고, 그로 인하여 부패한 양심을 또 한 편에 놓았을 때 성립한다.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소금이라면, 썩는 것이 없을 때는 소금은 그저 소금일 뿐이다. 빛도 마찬가지다. 태양이 빛나는 곳에서 등불을 드는 것이 무용한 행위이듯이, 빛은 어둠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어둠을 밝히려 할 때 빛은 비로소 빛을 낸다.
우리 사는 세상이 처음부터 소금사막이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의 곳간이랄 수 있는 바다였다. 생명의 시발점이 바다였듯이. 그런 바다세계를 소금사막으로 만든 자가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바다였던 때의 세상과 소금으로 바뀐 뒤의 세상을 비유하는 진술들이 병치되어 나타난다.
이를테면 “이곳도 한때는 바다였다지요”라는 첫 시행이 소금사막으로 변질되기 이전의 세계가 있음을 직설한다. 그런 증거로 등장시킨 시어들이 바로 ‘불가사리, 등대, 난파선 …’ 등이다. 생명이 약동하던 바다가 죽은 소금사막으로 변질된 사례들로 이어진다. “사라진 전설”이라는 진술이 바다의 자리가 소금사막으로 변질되었음을 밝히는 전환점이다. 그렇게 변질된 자리에 ‘별이 된 불가사리, 하얀 눈꽃의 추억, 소금을 먹고 자라는 선인장, 소금으로 지어진 호텔…’이 등장하며 소금사막의 실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소금사막은 어떤 곳인가. 시름이 가득한 사람들이 그 시름을 잊으려 소금사막을 찾아온다고 했다. 역설이지만 이 진술이 가능한 것은 ‘염장’에 있다. 소금에 절여 저장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어느 아픔도, 어떤 슬픔도, 그 어떤 고통과 번뇌도 사라지지 않고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바로 잘못을 망각하는 데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사막을 “당신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했다. 이 (바다가 소금사막으로 바뀐)이야기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다고 했다. 이곳은 생명이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소금사막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 방법으로 소금사막을 극복해야 한다는 시인의 진단이 공명을 얻는 이유다.
에필로그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소론의 모두에서 언급했듯이, 사람됨의 구현 말고 다른 길은 없다. 그렇다면 그 길은 바로 ‘시인다운 삶’에서 가능할 터이다.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인의 삶처럼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만이라도 간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강동수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보여준 것처럼 열심히 쓰려는 노력보다 매사 열심히 살려는 노력을 앞세울 때, 그런 세상은 숨통이 트이게 될 것이다.
시가 그런 효용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얻으려는 노력이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 끝에 온다는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시를 만난 것도 독서인생의 멋진 일이다. 이런 시들이, 이런 시인의 삶이 세상에 빛과 소금처럼 자리할 때 우리 사는 세상이 소금사막이 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강동수 시를 통독하며 그런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 또한 시를 읽는 또 다른 재미다.
강동수의 신작시에 이런 작품이 있다.
슬픔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
형제들이 모여 추억을 주고받는다
백수를 넘겼으니
오래된 기억들이 넘쳐나는 밤
울음대신 웃음이
문상객이 떠난 자리에 퍼져나가고
재단 위 사진 속에 박제된
오래된 얼굴이 내려다본다
자정을 넘겼으나
잠들지 못하는 밤
오늘은 어둠도 길어진 날이다
- 강동수 「호상好喪」 전문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어떤 호상에 문상 갔던 일이 생각났다. 백수白壽에 이르신 어머니 친상을 당한 친지에게 건넨 내 조문은 “얼마나 애통하십니까?”였다. 돌아오는 상주의 응대에 내 말이 갈 길을 잃었다. “사실만큼 사셨는데요, 뭘!” 얼마나 사시면 사실 만큼 사셨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상주의 마음가짐을 알아챘다는 듯이 상청은 마치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여기저기에서 비통하는 울음 대신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했다.
사람됨의 진정성을 알아보는 시금석이 될 만한 작품을 강동수 시인의 신작시에서 발견한 일은 뜻 깊었다. 아무리 ‘살만큼’ 살았어도 한 인간의 죽음은 한 세상의 종말일 수밖에 없다. 코란에는 한 사람의 죽음은 인류의 종말과 같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호상’이라는 어휘에 강동수 시인처럼 이의를 제기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마저 살만큼 살았으면 떠나도 무방하다는 생각과 마음가짐이 우리 사회를 소금사막으로 만드는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는 “노인 하나가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버린 것과 같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죽음을 어찌 호상으로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강동수 시인은 “자정을 넘겼으나/ 잠들지 못하는 밤/ 오늘은 어둠도 길어진 날”이라며 깊은 고뇌에 든다.
이런 마음가짐과 깊은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좋은 시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사람됨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은 쐐기풀에서 가까스로 시를 구해냈으며, 하나의 벌罰 같은 고독을 움켜쥔 채 시의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영원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열심히 쓸 것인가, 아니면 열심히 살 것인가? 대답은 스스로 찾은 작품 속에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