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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묵상글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 그런 사랑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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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23 05:18
- 그런 사랑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친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 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덕들은 그저 귀부인이라고 하고,
지혜를 덕들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잖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저의 가난 역시에서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만 해도
가난을 제일 중요시하는 우를 범했고
가난하지 않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미워함으로써 가난 때문에
더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놓치는 큰 잘못을 범했었지요.
그리고 실로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싸웁니다.
시비(是非)를 많이 가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비의 시(是) 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옳다. 바르다’라는 뜻이 기본이지만
‘옳다고 하다’라는 뜻과
‘바르다고 인정하다’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옳다고 인정해주면 싸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가 옳다고 하기에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의(義) 또는 정의(正義)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옳기 위해서는 남이 한 것은 그른 것이 되어야 하고,
나의 주장이 옳기 위해서는 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분쟁적인 공동체에는
같이 옳은 것을 찾아가는 사랑의 정의는 없고,
서로 자기가 옳다는 독선적 주장만 있으며,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긍정은 없고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이 ‘자기(自己)’는 없고,
사랑을 사랑하는 참 ‘자아(自我)’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이기에 하느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라는 뜻도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란 나와 하느님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합일적이고
공존적인 나 또는 자아이어야 하는데
나만 있고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분열적이고 공멸적인 자기(Ego)이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지도 못하고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아무 사랑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 없이 나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홀로 장군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지요.
훌륭한 병사들 없이 훌륭한 장군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네가 있기에 나도 있고,
너를 긍정하기에 나도 긍정 받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도 사랑 받는 그런 사랑,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를 포함하는 하느님의
모든 조물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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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느리고 힘없어 보이는 나무늘보는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무늘보는 한 시간 내내 움직여도 200여 미터밖에 못 가는데,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기에 숫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느리다는 것은 야생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적을 만나도 재빠르게 도망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퓨마와 독수리 같은 동물은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어 재빠르거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은 쉽게 알아보지만,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동물은 오히려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약점인 줄 알았던 느린 움직임이 야생에서 살아남는 데 큰 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무늘보는 나무와 구분하기 어려운 보호색을 갖추고 있어 다른 동물들이 알아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무늘보는 빨라지려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살아남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비결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 속도에 맞춰서 우리도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빠른 결과를 원하고, 자기 모습도 빠르게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자기 모습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느리게 움직이는 이 나무늘보도 지그시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똥 눌 때입니다.
우리도 행복의 순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할 때는 바로 사랑할 때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삶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하는 율법 교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삶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실천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바람을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속도에 지쳐 사랑을 포기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의 속도를 바라보십시오. 빠르기보다 천천히 그 속도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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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그대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그대의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기쁨과 행복의 순간에 그대 위에 축복이 넘치기를!(표도르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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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고,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마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 곧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학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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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초청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초청장은 유효기간이 있지만 신용장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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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부터 33년 전, 1991년 8월 23일 금요일입니다. 저는 교구장인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설렘과 감동은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의 책장에 묻혀있습니다. 보좌 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 교구청에서 8년을 살았습니다. 해외에서 9년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포근하게 감싸 안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목의 열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33년을 사제로 지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게 이정표가 되었던 신부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당에서 2명의 사제와 교구청에서 2명의 사제와 함께 지냈고, 이곳 댈러스에서 1명의 사제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먼저 사제가 된 선배로서 이정표가 되어야 했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8년간 본당 신부로 지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아시고, 이미 성당이 완공된 곳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적성에서는 초대 신부님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습니다. 저는 2대 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초대 신부님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저는 교우들과 함께 말씀의 공동체를 반찬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당 교우는 작았지만, 관할 구역은 넓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2번째 본당인 시흥 5동 성당도 전임 신부님이 성전 신축을 하고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아시고, 좋은 봉사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교우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보여 주었습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왔습니다. 서울 시장도 와서 피해 상황을 살폈습니다. 저는 산의 높이를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서울시와 관할 구청에서도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당 뒷산의 높이를 낮추니 성당에 큰 마당이 생겼습니다. 교우들은 마당에 잔디를 심었습니다. 철쭉과 유실수를 심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아늑한 마당이 생겼습니다. 함께 하면 위기는 기회가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뉴욕에서 5년을 지냈고, 지난 2월부터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뉴욕에서는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사제들이 함께했기에 팬데믹 중에도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캠핑도 다녔고, 함께 사목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뉴욕에서 제가 했던 일은 신문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여파로 신문 홍보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문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가톨릭 평화신문은 팬데믹의 파도를 무사히 넘을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들 함께 했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팬데믹 중에 미국에 더 머물 수 있도록 영주권 신청을 해 보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2년이 안되어 영주권이 나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의 전임 신부님이 저의 동창신부님입니다. 동창 신부님이 있던 곳이라서 마음이 편하고,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느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삶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제서품 33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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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바리사이들의 악성 취미는 바로 주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면 주님께서 세례 후 광야로 나가셨을 때 마귀에게 말씀하셨던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는 유혹하는 마귀에게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꼭 주님은 이런 광야의 유혹 이후에도 같은 유혹을 받으며 공생활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주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계명입니다. 아니,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계명은 절대 쉽지 않은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 계명부터 보겠습니다.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늘 산란합니다. 세상 걱정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늘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와 같습니다. 이런 바다 한가운데서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자기 목숨을 쉽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두 번째 계명은 쉬울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이 어려운 사랑의 길을 주님께서는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입니다.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걸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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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만에 바뀌는 삶
얼마 전 몇 없는 사회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늘 밝았고 차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물었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와이프가 암이래!’
그르고 그는 울먹였습니다. 터져 나오는 울음, 와이프 앞에서 울 수 없었던 그 울음을 친구는 힘을 다해 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입니다. 이 말을 듣기 1초 전과 들은 후 삶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아.’
‘모든 삶의 중심과 걱정과 주제들이 바꿔버렸어. 1초 사이에.’
우리 삶은 단 1초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친구를 위해, 그리고 모든 환자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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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공부
사랑의 이중계명
“하느님
좋으시다 찬미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자주 되뇌는 물음입니다.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눈먼 맹목적, 광신적, 이기적 탐욕의 사랑도 많기에 공부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바로 평생 배워야 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우리들에게 졸업은 없습니다.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동안 수도사제로 서품후 35년 동안 해온 강론 주제도 아마 대부분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도 참사랑에는 영원히 초보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인생에는 무지와 허무, 무의미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소설이나 대중가요 역시 사랑은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밖에는 길이 없다는, 답이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제 졸저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 첫쪽에 나오는 나오는 글의 인용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온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주신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우리를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의 기적이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요즘 뒤늦게 진가를 발견하고 독료한 책이 생태사상의 선구자 ‘토마스 베리(1914-2009) 평전’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1915-1968)에 버금가는 동시대 미국의 예수고난회 수도사제인데 크게 알려지지 않다고 최근 각광을 받는 분입니다. 토마스 베리가 한 살 더 먹었고 95세까지 살았는데 토마스 머튼은 53세까지 살았고, 굴지의 영성가 두분간에는 생전 어떤 교류도 없었습니다. 토마스 베리가 얼마나 사랑이 충만해 있던 매력적 인품의 사람인지 다음 묘사가 입증합니다.
“토마스는 언제나 품위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두눈은 항상 빛났으며 여차하면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다정함을 보여주었고 한없이 자애로웠다.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이 넘쳐 누구를 만나든 환대하였다. 그래서 그를 처음 만난 사람도 그가 매우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평전; 293쪽)
사랑해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란 말마디가 하나로 이어지니 흡사 같은 어원에서 시작되는 말마디 같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할수록 충만한 생명이요 사랑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망의 실종된 사람들, 말그대로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에제키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말그대로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마른 뼈들 같은 인생에 주님의 생명의 영, 사랑의 영이 주입될 때 비로소 산 인간이 됨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고무적이요 우리에게 샘솟는 희망과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언하여라.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대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영, 사랑의 영이, 주님의 은총이 작용하여 마른 뼈들같은 우리가 다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나는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주님의 끊임없이 주어지는 생명의 사랑, 용서의 사랑이 우리의 마르지 않는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613개 율법의 요약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구별할 수 있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입니다.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의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바로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끊임없는 사랑이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원동력이 됨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경외의 정신으로 사랑할 때 옛 어른의 말씀도 자발적으로 실행할 수 있겠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잘못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삼가라.”<다산>
“군자는 보지 않은 것도 경계하며 삼가고, 듣지 않는 것도 두려워한다.”<중용>
얼마전 집무실 게시판에 붙인 경구(警句)도 생각이 납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이 신독(愼獨)이라 한다. 어느 자리에서든 누가 보든 안 보든 인간의 존엄, 품위, 분별력의 지혜를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신독의 바탕에는 하느님 경외(敬畏)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이유요 우리의 모두가 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평생 배워 훈련하고 익혀 습관화 해야 하는 평생공부가 경천애인의 사랑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사랑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경천애인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시편107;8,15,21.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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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하느님께서
늘 그렇게 또렷이
나의 하느님이시듯이
나는
늘 그렇게 또렷이
하느님의 나이겠어요
벗님께서
늘 그렇게 또렷이
나의 벗님이시듯이
나는
늘 그렇게 또렷이
벗님의 나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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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마음과 정신과 목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과 지식의 등불로 환하디환한 빛을 받는 영혼과 하느님 말씀으로 가득 찬 정신을 지니고서 하느님의 지혜안에서 즐거워하는 사람, 자신이 받은 모든 은사에서 확인된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실로 이런 모든 은사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서와 예언서 모두가 하느님께 관한 지식과 지혜의 일부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서와 예언서는 모두 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원칙 위에 서 있으며 그것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과 신심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 나라의 요소와 복의 요소는 서로 겹친다. 하느님 나라의 요소는 은총이다. 우리의 복도 운총이다. 하느님 나라와 복은 모두 은총이다. 하느님 나라는 제도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개인의 감정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만물 속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우주적인 현존과 동일시된다. 하느님 나라는 맑고 투명하게 비치는 나라다. 엑카르트는 에제키엘서의 비유를 빌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존재를 끌어안은 그물의 나라라고 했다. 엑카르트가 설교 9에서 말한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아는 복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알 것이다. 은총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사람은 하느님처럼 행복해진다. 깨달은 - 회개한 - 사람이라면 지신이 왕의 핏줄임을 깨달을 것이다. 왕의 재화는 모두 나의 것이 펼 것이고, 왕의 재화가 아닌 것은 나의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설교 36에서) 엑카르트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왕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것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자리,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본 설교의 맥락에서 지적할 것은,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왕이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왕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사람이 왕인 까닭은, 사람만이 자신이 왕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왕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나는 왕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왕다운 자손이 길이 살아가기를!(226)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기도
기도의 의미
어느 날 형제들이 아가톤(Agathon) 아빠스께 여쭈었다.
“신심 깊은 생활로 나아가려면 어떤 덕행을 가장 열심히 닦아야 합니까?"
아빠스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셨다.
“내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용서하게나. 그런데 내 생각에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더 열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없는 것 같네. 우리를 유혹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존재들은, 특히 사람이 기도를 하려고 할 때마다 못하게 하려고 날뛴다네. 그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가장 많이 방해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네. 신심 깊은 생활을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선택하여 꾸준히 실행해 나가면 마침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네. 그런데 기도는 최후까지 투쟁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라네.”
나일로 아빠스께서 말씀하셨다
“기도는 슬픔과 낙담을 거슬러 자신을 지켜 갈 수 있는 도구라네.”
몇몇 형제들이 마카리오 아빠스께 여쭈었다. “저희들이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 백발이 다 된 그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네(마태 6,7 참조). 다만 두 팔을 펴 들고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게.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아시는 대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시련이 하나 다가오면 그때는 ‘주님, 도와주소서!’ 라고 말씀드리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알맞은 자비를 베푸실 것이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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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
여러분 혹시 우리나라 헌법은 몇 장 몇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처음 알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제10장 130 조문과 부칙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유대교의 율법은 무려 613가지나 되는데, 그 가운데 248가지는 ‘~해야 한다.’는 명령이고, 나머지 365가지는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금령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은 이렇게 많은 계명을 어찌 다 지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하고 물었듯이, 그들 전통에 의하면 탁월한 율법 교사들은 이토록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논하곤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기회를 맞아 예수님 또한 당대 경건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생활화된 신앙고백문의 첫 부분인 신명 6,5절을 인용해서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이웃 사랑’으로 응답하시면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40)라고 답변하십니다. 결국 어느 분의 표현처럼 구약과 신약이라는 약(?)을 약탕기 잘 달여 꽉 짜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의 첫돌 판에 새겨졌던 전반부의 네 계명은 순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둘째 돌 판에 새겨진 여섯 계명은 순전히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두 돌 판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자연히 이웃과의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마련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도 동일한 음조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4,20)
제가 알았던 한 분은 늘 언제나 제게 동일한 질문을 몇 년 동안 계속 물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제게 주님을 믿습니까?, 도 아니고 늘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으셨는데 이제야 그분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원 신부님이 방문객에게 묻기를, 혹시 이 세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고 하자, 그 방문객이 되묻기를 수도자들도 어기는 법인가요?,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이 대답하시기를 수도자들도 어기지요. 특히 수도자들이 더 많이 어긴답니다, 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치 제게 한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제가 자주 많이 어기는 법, 그것은 알면서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고 말한 만큼 실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나 모택동처럼 온 인류를 변화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동은 결국 사랑의 운동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그가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딱 하나면 됩니다. 오늘 나는 사랑하며 살았나! 성 아오스딩은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 심판을 바탕으로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25,31~46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매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결국 내가 엄청나게 큰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곧 선행을 베풀고,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13,3) 다시금 오늘 하루도 사랑하면 살았나?,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족하리라, 믿습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멘.”(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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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오로지 사랑 /
박윤식 [big-llight] 2024-08-22 ㅣNo.175275
‘한 바리사이인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첫째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 속을 떠보려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묻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 사랑뿐이란다.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생각했을 게다. 그래서 율법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이들도 쾌나 있었단다. 그런데 그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이민족이 침입해 종교를 훼손하였다. 이에 순수성을 지키려 바리사이가 등장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려고 애썼다.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경건할 수 없었고 직업에도 충실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을 나타내셨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단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나. 이렇게 너무 율법에만 집착하다 보니 율법 근본인 사랑을 잃어버리곤 했다. 자칫 잘못하여 기계적인 신앙생활에 빠져 큰일 나는 줄 여겼다.
그러나 큰 틀에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전례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자칫 글자 그대로 그 사랑에만 집착한다면, 그만 본래의 순수성을 놓치기 일쑤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께서 이르신 그 사랑 정신을 스스로 자문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으면 한다. 오늘 나의 이 선택들이 당장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연할지라도 다시금 숙고를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게다.
어쩜 마음은 모든 걸 담는 그릇이라나. 마음은 늘 비워 두는 게 아닌 줄곧 사랑을 채우는 곳이란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 금방 다른 게 채워질 게다. 시도 때도 없이 온갖 게 다 담기리라.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빈 마음 한 구석에 이 사랑을 채우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만나는 이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선물‘하려는 거다.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사실 세상에는 사랑을 받아야 할 이들이 참 많다.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외면당하는 것 같다. ‘도대체 이 많은 이를 어떻게 사랑합니까?’라고 질문에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대답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이를 결코 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 앞에 있는 오직 그 이만을 죽도록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이기에, 당장은 내 앞의 그것만 사랑하면 될 게다. 그이에게만 주어도, 그게 또 다른 선물로 될 터이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사랑이신 그분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오직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사랑이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 받아서 그분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바로 이 사랑이다. 이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사랑이신 그분만이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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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심판을 선고하던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심판 선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자들이 막상 멸망하고 나니 절망에 빠지는데, 심판을 선고하였던 예언자는 오히려 희망을 선포합니다.
희망이라는 것, 쉽지 않은 덕목입니다.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전보다 더 간절히 희망을 이야기합니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에제키엘에게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선포하는 희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에제키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아십니다”(에제 37,3). 다른 많은 사람이 그러하였듯이 에제키엘이 보기에도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하느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제키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합니다.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리라고 예언하라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여기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라고 에제키엘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이 완고하여 듣지 않으리라고 하시며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선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2,5). 모두 절망하고 있을 때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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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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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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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가 청소년 교육을 위해 창안한 교육 방식을 ‘예방교육’이라고 칭합니다.
예방교육을 한 마디로 ‘마음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용어를 접하고 마음의 교육학?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살레시오 회원으로 연륜이 조금씩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마음의 교육학에 대해서 수긍을 하게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수많은 교사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교사들도 계시더군요. 마음이 없으니
열정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아이에 대한 기대도 없고, 그저 때되면 월급 나오고, 일년 지나면 헤어지고...마음이 없는 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있는 선생님들, 스승님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관심을 지닙니다.
그의 미래에, 그의 성적에, 그의 내면에 신경을 씁니다.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자식 같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목자들도 만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이 늘 다른 데 가 있습니다.
양들의 영혼, 그들의 건강과 행복, 구원과 영생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헌신도 희생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삯꾼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 자리 잘 보전하고 자기 한 몸 지키는데 급급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이나 쇄신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 건성건성 바치는 봉헌, 습관처럼 해치우는 미사, 그저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입니다.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이라고 다 같은 목숨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파리목숨 같은 목숨도 있고, 너무나 어이없고 하찮은 목숨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이 목숨,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말입니다.
가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할 기회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왕꼰대’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 시편 말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뭐 그리 아끼고, 애지중지하고, 그렇게 목숨 걸고 관리합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 줄 수 있을 때, 아낌없이 팔 걷어붙이고 움직이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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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가장 큰 계명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으로 입증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재물이나, 자식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자리하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가치관이 서 있을 때,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방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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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애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가오 친빠오였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정말 대단한 아기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사랑은 정말 순수할까요? 아기가 무슨 정신으로, 어디서 배워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나아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 줄 때 아기는 자신이 투자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게 작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아픈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잎새를 벽에 그려 넣은 나이 든 화가는 정말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한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랑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을 ‘연애’라고 하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많은 이들은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연애는 모기 두 마리가 하는 거지만, 사랑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오히려 싸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연애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둘 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복하다면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줘야지!’
결국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입니다. 연애는 투자입니다.
투자는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벌어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로 연애하게 된 이상 이전보다 더 열심히 투자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미 이웃에게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더라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랑은 기필코 하느님 사랑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던 동안 가족이 있는 다른 수감자와 교환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성 막시밀리안의 사랑은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도, 오히려 나는 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칼을 주더라도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그러면 언제 연애에서 사랑이 될까요? 하느님께서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연애에서 사랑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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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4-40).”
1) 여기서 ‘시험하려고’는 ‘함정에 빠뜨리려고’입니다.
이 말은 앞의 15절,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의논하였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논쟁에서 무엇이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앙인들을 공격하려고, 또는 시빗거리를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성경이나 교리에 관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 2,11-15).”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믿는 대로 사는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항상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말을 잘하면 논쟁도 잘하겠지만, 논쟁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감과 적대감만 더 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겠지만 개의치 않으시고,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으로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자체로 ‘사랑’이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일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당신의 목숨을 다하고 당신의 정신을 다하여 너를 사랑하시니 너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이 말을,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드님만 세상에 보내서 희생시키셨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께서 외아드님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사랑이란, 내가 원해서, 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해야 한다.’ 라는 계명으로 정해서 명령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여기서 ‘계명’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뜻은 ‘하느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15,12).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4) 신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사랑’도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삶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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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바리사이면서 율법교사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으로써는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들의 내용을 글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한다고 해도 고된 세상살이에 치여 하루 하루를 사는 것만해도 버거운 일반 백성들은 각각의 규정들을 일일히 다 지키기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한 규정의 내용의 다른 규정의 내용과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모든 규정을 다 지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 계명 몇가지라도 제대로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에 따라 어떤 계명이 가장 크고 중요한지를 가려내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중이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그분을 그 논쟁 안으로 끌고 들어가 트집 잡고 비난할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커먼 속내를 모르실 예수님이 아니지요. 그가 원하는대로 율법 규정들을 그 중요성에 따라 순서매기는 대신,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과 굳이 다 안지켜도 되는 부수적인 계명을 구분하는 대신, 율법 규정에 담긴 근본 정신이 ‘사랑’임을 상기시키십니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주신 이정표가 바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그분께 받은 큰 사랑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나만큼이나 사랑하시는 존재인 나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언급하신 ‘하느님 사랑’의 내용은 그다지 새롭거나 특별할 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는 신명기의 내용을 인용하신 것이었을 뿐이지요. 또한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그 신명기의 구절이 담긴 ‘쉐마 기도문’을 날마다 두 번씩 바치고 있었기에 모두가 그 내용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잊어버리고, 거기 담긴 ‘글자’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율법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기가 구원받을 생각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규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이기심만 남다보니 나아갈 길을 잃고 오해와 미움, 시기와 질투 속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첫째 계명인 ‘하느님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할 세부적인 사랑들의 ‘기준’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은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기회이자 장이 됩니다. 이웃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가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가짐을 준비시키고, 이웃사랑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완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개별 항목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이자 핵심이 되는 두 얼굴인 셈이지요. 그러니 전례에 거룩하고 엄숙하게 참여하는 것만 신경쓰며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인 미사에도 참여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면 되는거 아니냐’고 말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우리 믿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다리가 있어야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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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첫째가는 계명 ”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배 중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계곡 바닥에 있는 마른 뼈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것들에 숨을 불어 넣으시니 생명이 되돌아와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5-6)
인간의 어떤 것도 사라지고 또 제한 되어 있지만 지치고 암울한 미래에 절망하는
바빌론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꼽는 세명의 대표적 랍비로 힐렐(기원전 1세기 후반-기원후 25년),
요한난(기원 후 1세기 후반), 아키바입니다(기원후 1세기).
힐렐은 산헤드린 대표로 활동하면서 일곱 가지 방법 정립하여 탁월한 성서해석에
적용하였습니다.
요한난은 기원 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야브네(얌니아)라는 도시에
에수바라는 랍비학교를 세우고 성경공부의 본산지를 만들어 제이의 예루살렘을 만들었습니다.
랍비 요하난과 후대 랍비들은 성서해석학 자료들을 수집하고 발전시켜 이를 집성한 것이
AD.5-6세기의 탈무드가 된 것입니다.
아키바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법규와 규정을 세웠고 후에 미쉬나의 근간을 조성하였습니다.
기원후 132년에 로마를 거슬러 유태인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는 유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 후에 그는 로마군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그의 업적은 후대 성서연구의 바탕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의 특징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비싼 학비의 랍비 학교에서
공부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랍비학교에서 교육방법은 끝없는 토론을 통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랍비란 성경에서 나타나는 율법교사들을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명석한 랍비로
알고 있는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여 토론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
마태오는 이런 이스라엘 랍비의 배경에서 율법교사의 질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5-36)
그 당시 랍비들은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제사에 관련된 것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려고 했고
그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중요한 계명에 대한 토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오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계명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에 근거를 두시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전해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이 계명을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신명기와 레위기의 가르침의 계명을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는
주님께 “휼륭하십니다. 스승님.”이라며 다시 이 계명을 반복하며, ‘무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다시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코는 이어서 그 후의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34절)
복음서의 원문으로 통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사가는 랍비들의 토론관습의
분위기를 전해주며 랍비로서의 주님의 절대적인 권위도 비추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침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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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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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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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덧입는 삶
<2024.8.23>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1:54~64절)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덧입는 삶❞
❚ 하나님의 자녀인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습니다.
✔ 어떠한 은총을 얻게 됩니까?
➲ 구원의 능력 안에서 영원함을 얻습니다(54~56절).
바벨론의 멸망의 날에 울부짖는 소리와 파멸하는 통곡이 들려옵니다(54절). 하나님은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어 자랑하는 바벨론의 교만한 소리가 대적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므로 잠잠하게 하실 것입니다(55절). 이는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멸망시키는 자’에 의해 공격이 시작되면 바벨론의 용맹스러운 군사들은 적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게 사로잡힐 것이고, 그들의 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멸망시키는 자’의 주체이신 ‘보복의 하나님’은 바벨론에게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심판으로서의 멸망을, 그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당연히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56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여 자녀 삼으신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반드시 선악에 대한 책임을 그에 상응한 대가로 치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특별히 큰 은혜를 주심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시기까지 베푸신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요? 구원받은 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고백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구원의 능력 안에서 영원한 삶이라고 하는 특별한 은총을 덧입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생의 약속 안에서 만족함을 얻습니다(57~58절).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지방 관리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시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57절). 그리고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바벨론 성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높은 성문들도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성의 둘레가 약 70km에 달했고,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벽의 두께가 6.5m, 외벽의 두께가 3.7m에 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 주위에는 강과 연못이 있어서 견고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견고함은 바벨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짐으로써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58절).
모든 인생에 참된 왕이신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공의를 행하심으로 악한 자들을 쇠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 자신들에게 허락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 특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무너질 것이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제공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생의 약속만으로 만족함을 얻는 특별한 은총을 덧입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능력의 말씀 안에서 인도함을 받습니다(59~64절).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한 사본을 스라야를 통해 바벨론에 있는 유다 포로들에게 전달함으로써 회복에 대한 소망을 심어 줍니다. 이때는 유다 왕 시드기야 제 사년에 바벨론으로 갈 때입니다. 스라야는 ‘병참감’이었는데, 왕의 잠자리를 돌보는 관리의 수장으로 ‘왕의 수석 보좌관’(새번역)이었습니다(59~62절). 스라야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두려움과 의문에 휩싸여 있던 바벨론 포로민들에게는 구원에 대한 명백한 소망을 가지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에레미야는 스라야에게 이 책을 낭독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63절).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이 곳에 내리는 재앙 대문에 바벨론이 이렇게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고 쇠토할 것이다’라고 말하라고 명합니다(64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은 바벨론이 당할 운명은 완전한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그 말씀을 읽고 또 읽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는 것에만 그치게 되면 변화를 받고 회개하는 데 이르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라앉는 책처럼 멸망으로 빠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떠한 환난과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 안에서 다시 일어나 인도함을 받는 특권을 얻는 특별한 은총을 덧입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시기까지 베푸신 사랑을 힘입어 나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말씀을 통해 위로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자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51:54~6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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