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17-22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에서는, 청년, 관원, 부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종합하면 이 사람은 청년이면서도 부자였고 권세 있는 관원이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사람인데 본문은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먼저는,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부자 청년이면서 관원이었다면 조금 교만할 것 같기도 한데 이 청년은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 꿇어앉는 겸손을 보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의 이름 없는 랍비 정도로 알려지고 있었고 높아지는 인기로 배척을 받는 처지였는데 이 청년은 그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겸손까지 했다면 얼마나 고귀한 인품을 가진 사람입니까?
②또 한 가지, 이 청년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를 질문합니다.
사회적인 위치가 대단한 사람이고 거기다가 겸손까지 했는데 거기다가 영생의 질문을 할 정도로 신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주어진 축복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영생의 문제를 갈구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사람을 오늘날에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③그 사람의 모습을 보신 주님이 그를 사랑했다는 말씀을 보면 이 모든 일에 그는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생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했고 그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을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보여준 이러한 모습은 당시나 지금이나 누가 보아도 괜찮은 것을 넘어서는 훌륭한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이요 인정받고 칭찬받을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구했던 일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아주 중요한 영생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부터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당시 유대교가 가르쳤던 영향이 컸습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야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지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괜찮은 청년도 그런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십계명에 나오는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그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을 때 청년은 ‘그것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던 청년의 생각 속에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생각이 철저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가르침이나 생각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가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고 인간이 무엇을 행해서, 율법을 지키거나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유대교의 가르침대로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면 영생을 받았다는 확신과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확신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더 행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착하고 옳은 일을 행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서 영생을 얻는다고 하면 이 청년을 포함하여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르게 산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올바로 산 것이요, 인간의 입장에서 율법을 지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년도 이러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너무나 허점이 많은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는 계명을 보면, 부모공경을 빼고는 다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명이었습니다.
그런 계명을 다 지켰다는 말은 자기는 이웃을 해하지 않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상처를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웃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가진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반쪽 사랑이었고 반쪽의 계명만을 지킨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사랑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청년에 대하여 주님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기에서 주님은 이 청년이나 오늘 우리들이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삶의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으로 성장해가는 신앙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1. 먼저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청년을 향하여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 영생을 얻는 것에 비추어볼 때 주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영생은 무엇을 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데서 얻게 됩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내가 더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청년과 같이 무엇을 행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을만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볼 때는 크게 잘못하는 것 없이 올바르게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착각은 자유다. 왜 그렇게 착각을 하면서 사느냐고 핀잔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겠습니까?
구약의 욥이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크게 다투었습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죄 값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우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을 때 욥은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42:4,6절)
지기는 올바른 것 같았는데 그래서 조금도 지지 않고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무엇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이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고 행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으로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빨리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여러모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갖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청년에게 아킬레스건이라고 하는 이 청년이 갖고 있는 최대의 약점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재산에 대한 몰두이며 물질에 대한 애착과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청년이면서 부자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재산을 귀한 줄 모르고 허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람은 재산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했습니다.
재산을 자신의 삶에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재산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재산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청년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이 너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을 버리고 포기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는 주님을 믿고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물질에 대한 사랑, 물질에 대한 애착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었고 목표였고 주님을 믿고 따르기에 방해가 되는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를 따를 수가 없었고 따른다고 해도 형식적이고 반쪽짜리의 따름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나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나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을 버려야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민족을 구원하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모든 자랑거리를 분토와 같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요구받았을 때 흔히 ‘여기까지가 내 한계입니다. 나에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는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하는 말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이 신앙생활에서도 보여 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한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요구하면 교회 안 나오겠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도 ‘나의 한계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나는 그것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그가 강렬히 원했던 영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비극은 충분히 구하지 않는 비극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영생을 구했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데 까지 충분히 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만’ 한계를 둔 구함이었습니다.
내 형편을 망가트리지 않는 선에서의 구함이었고 현재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의 구함이었습니다.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 극복해야 하고 넘어서야 할 한계점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한 가지 부족한 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발목 잡히지 말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체면치례의 신앙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에 얽매이면 신앙은 절대 성장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 가운데 정말 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 언급될 수 있는 그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영원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면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버리는 것은 얻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남미의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원숭이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목이 좁은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바나나를 넣어둡니다.
그러면 호기심이 많은 원숭이들이 다가와 항아리를 살핍니다.
그러다가 그 안에 바나나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손을 집어넣어 바나나를 움켜쥡니다.
그런데 항아리의 목이 좁아서 원숭이가 주먹을 쥔 상태에서는 절대로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자기를 잡으려고 인디언들이 몰려오는데도 바나나 잡은 손을 놓지 않다가 결국에는 인디언들에게 붙잡힌다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에게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놓아야 내가 삽니다.
나를 포기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때,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때 내가 살고 자녀들이 살고 가족들이 살고 영생을 누리며 더 좋은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가는 청년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