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가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몇가지 사례를 되새겨보자.
# 1998년 8월 미국 국방정보국(DIA)발 ‘북한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에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가 겹쳤다. 한반도 정세가 급랭했다.
그러나 출범 첫해인 김대중 정부는 유연한 위기관리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금강산관광선의 첫 출항(98년 11월18일)에 이어 마침 지명된 미국의 대북정책조정관을 설득했다.
94년 1차 북핵위기 때 ‘북폭’을 주장한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북-미 간) ‘상호 위협 감소’를 핵심으로 한 ‘페리 프로세스’가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통찰을 “표절”한 것이라고 훗날 밝힌 바 있다.
‘김대중·임동원·페리 프로세스’를 토대로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그해 10월엔 북-미 상호 특사 방문을 통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됐다.
# 2005년 9월19일 동북아 탈냉전의 청사진이라 할 6자회담 9·19공동성명이 채택됐다.
당시 회담장에선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경수로 제공) 문제로 설전이 심했는데, 한국은 중국과 협력해 북한과 미국을 압박·설득해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미는 서로를 말이 안 통하는 외계인으로 여긴다. 사고체계가 워낙 다르고 불신의 골이 깊어서다.
당시 6자회담 북-미 대표단은 서로를 만난 뒤 한국 대표단을 찾아 상대방의 외계어를 풀이해 달라고 요청하기 일쑤였다.
원만한 남북관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통념과 달리, 남북관계가 나쁘면 북한뿐 아니라 미국도 한국을 중시하지 않는다.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좁아지고 좋아지면 넓어지는 게 한국의 외교 공간이다.
# 2006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배출은 한국 외교의 빛나는 성과다.
분단국이자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세계정부의 대통령’을 배출하리라 누가 예상했겠나.
국제정치의 대주주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유엔총회의 만장일치 지지, 특히 한국전쟁의 교전 당사국이자 북한의 후견국으로 불리는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낸 사실이 중요하다. 한국이 균형외교를 펼치는 중견국이라는 국제적 공인이나 다름없다.
지난 일을 떠올린 계기는 두 가지다. 우선 3월22일 <뉴욕 타임스>의 만평. 한국 지도가 그려진 도박판에서 미국은 미사일을, 중국은 현금 뭉치를 판돈으로 거는 그림이다.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한반도 배치,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연상시킨다.
이 만평에 지도 빼고는 한국을 상징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문제적이다. 아프다.
한국 외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3월30일 재외공관장회의 개회사에 실마리가 있다.
윤 장관은 사드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문제 등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행보를 두고 나라 안팎에서 쏟아진 비판을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
이라 맹비난했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를
“고래를 길들인 새우”
라 자찬했다.
심지어 동북아 최대 안보·평화 이슈인 북핵 문제는 딱 두 번 스치듯 언급하고 끝이다.
이 낯뜨거운 ‘유체이탈 연설’의 지정 수신처가 외교 상대국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임을 따로 논증할 필요가 있을까.
외교는 배신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