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호일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200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나나의 웃음』(문예중앙, 2014)이 있음.
새가 되는 법 / 최호일
매일 하늘을 날면서 밥을 해 먹을 것 새의 목소리와 성격으로 수술하고 천장과 바닥을 없애버릴 것
일주일에 두 번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고 너무 캄캄해서 울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듯 잡았던 손을 놓고 흔들며 인간의 마을에서 잊혀질 것
새장을 만들어 놓고 새장을 부술 것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 될 것 어둠이 묻어 있는 바람을 끌어다 덮고 자면서 오월이 오면 오월을 등에 지고 다닐 것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갈 것 시를 쓰고 짝짝 찢어서 바람에 날린 후 가장 멀리 날아 갈 것
자신이 새인 줄 모르고 새처럼 날아가다가 깜짝 놀랄 것
냄새 나게 새는 왜 키우니 하고 돌을 던지면 맞아서 죽을 것 죽어서 매화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
---------------------------------------------------------------------------------------------------------
뒤통수를 치거나 뚜껑 열린 시가 맛있다. 단정하게 뚜껑을 닫아놓은 시는 왠지 답답하고 지루하다. 응축도 생략도 없고, 광기나 도취도 없이 뜻 없이 지루하게 중얼거리는 시는 재미가 없다. 언어의 평면적 서술만 있고 언어의 미학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들은 아무 맛도 없이 가짓수만 많은 음식 같다.
언어의 광휘가 있는 시, 사유의 날이 번쩍이는 시는 읽는 이를 긴장시키고 몸을 떨게 한다. 상식적인 내용을 상투적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많은 시들 앞에 아주 특이한 어법을 가지고 나타난 시인이 있다.
최호일, 그의 시는 미래파와는 또 다른 외계의 언어이다. 단순한 현실 재현적 시도 아니고, 현실 바깥으로 멀리 달아난 시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그의 시가 놓여 있다. 미래파 이후 새로운 시적 활로를 열어가고 있는 신인이지만 아직 그에 대한 조명은 충분치 않다.
최호일 시인은 시단의 아나키스트이다. 기존의 시문법으로 접근했다가는 낭패하기 쉽다. 그의 시는 늘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 그의 전복적 사고는 작품 도처에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발목이 잘리기도 하고 머리통이 날아가기도 한다. 시를 읽다 말고 내 다리 어디갔지 하고 중얼거릴지 모른다.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하여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다.
나는 지금 친절한 처방전을 쓰고 있는 셈이지만 시로 들어가기 전에 내 처방전은 버리는 것이 좋다. 주저하지 말고 일단 입에 넣고 씹다 보면 묘한 향기와 맛이 마리화나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혼몽해질 것이다. 그 혼몽함 속에 자신을 놓아버리면 그의 시와 함께 망망대해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한 순간이 행복할 것이고, 몸과 마음을 묶던 생의 경계 밖에서 한 사나흘 어슬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새가 되는 법」은 비루한 일상을 뛰어넘는 비법을 묘사하고 있다. ‘새의 목소리와 성격’을 갖고 ‘새장을 만들어 놓되 새장을 부’수는 것이다. 그리고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되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훨훨 날아가다가 냄새 나는 새를 왜 키우냐고 돌을 던지면 기꺼이 돌을 맞고 매화 그림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이 시의 전언이다. 새는 자유이고 일탈이고 영성이다. 숨 막히는 일상의 삶을 관통하는 큰 구멍이고 안팎이 소통하는 창문이다. 새를 키우고 마침내 새가 되는 것은 존재의 혁신이요 완고한 사유의 외피를 벗고 날아오르는 일이다.
존재의 도약과 비약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의 화자는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가는 일과 시를 찢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활달한 이미지의 전개가 막힘이 없고, 자유자재하며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면서 불꽃이 튄다. 연과 연으로 이어지는 낯선 시의 문법이 신선한 정서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시의 매력이다.
새로운 시의 짐을 짊어진 그의 어깨가 무겁다.
장지동 버스 종점 /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황인숙 (시인)
바나나의 웃음 / 최호일
바나나를 오전과 오후로 나눈다
바나나를 밤과 낮으로 나눈다
바나나를 동쪽과 서쪽으로, 만남과 사소한 이별로, 여자의 저녁과 남자로
나눈다
바나나로 세계를 나눈다
불안해지는 바나나
드디어 생선이 되는 바나나
왼쪽 바나나가 사라지고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
아 바나나 하고 웃는 바나나
바나나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줘
.......................................................................................................................................................................
‘바나나’라는 대상의 속성을 해체하면서 이 시는 자유롭고 사유는 깊어진다. 화자의 연상 작용이 뻗어나가면서 바나나는 거듭 나누어지고 있다. ‘오전과 오후’, ‘밤과 낮’, ‘동쪽과 서쪽’, ‘만남과 이별’, ‘여자와 남자’ 등등으로 환기되고 유추된다. 흥미로운 것은 바나나라는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끄러져 내리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안해지는 바나나’와 ‘아 바나나 하고 웃는 바나나’를 통해 바나나가 감정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생선이 되는 바나나’에서는 물활성을 지니기도 하며 ‘왼쪽 바나나가 사라지고’나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에서는 바나나라는 존재의 새로운 의미부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확장하여 읽으면 어떤 존재의 해방이란 수면 아래 가려졌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듯이 은폐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해 ‘주변부’가 느끼는 소외의식까지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여 감상할 수 있다.
박수빈 (시인)
아는 여자 / 최호일
모르는 여자가 아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녀 몸에는 광화문 연가가 저장돼 있다
또 다른 모르는 여자는 구멍 난 가슴을 부르는데
너무 솔직한 치마를 입고 있다 저쪽의
바람이 불어오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지하에서
노래가 끝날 무렵 누군가 술잔을
잘못 건드렸는지 세상 밖으로 넘어지고 별이 흔들린다
밤이 젖었네 미안해요
유리잔에 금이 자라기 시작하고
바닥이 멀리 갈라져 나머지 시간과 부르던 노래와 가사까지
지진이다 하면서 땅속에 들어가 백 년 동안 묻혀 있다면
저들은 아는 여자가 될까
그곳에 가을이 오고 아는 여자가 떠난다고 해도
밖에는 비가 내리기도 할 것인데
노래가 땅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어느 날 구조가 되어도 모르는 새처럼
우리는 지상의 노래를 다시 부르지 못할 것이다
—《시안詩眼》2009년 가을호
춤추는 신데렐라 / 최호일
바퀴가 보이는 호박을 타고 가는 밤
명왕성 불빛이 켜지고 마차가 하늘 있는 쪽으로 달린다
제 몸이 어른처럼 싫어질 때
어떤 아이들은 달빛에 빠진 음악을 건져 먹고 있다
달즙은 빨아먹을수록 어두워진다
신데렐라는 그곳에서 겨울나비처럼 죽었고
나비는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어둠은 쉽게 깨져서 발을 찌르기 때문에
유리구두는 밤에 춤추기 적합한 신발
이름표를 바꾸어 달지 말아요 나는 동화 나라의 입주민
신하들은 사용이 금지된 구름을 띄우고
체계적이고 다양한 기쁨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나는 유리창 같은 당신을 모른다
불빛은 어두운 부분을 골라서 바라보고 있지만
몸에서 빠져 나간 담배 연기처럼 당신의 화장은 관념적이고
밤은 독극물을 마신 것처럼 관능적이다
이제 춤을 밖으로 내 보낼까요 당신
내 몸이 빠져 나오면 공주가 될 수 있나요
그대가 그대 몸을 잠시 바꿔 입고 나온 것처럼
—《시와 반시》2009년 가을호
7월 여자 / 최호일
이 동네에는 바라볼 때만 지나가는 옥탑방 구름들이 살고
7월의 여자가 있지
그녀는 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얼굴로 시간을 널고 있지
저 악보는 6월이 찢어 놓은 바람의 달력 같다
빨래는 그녀를 안는 자세로 두 팔을 벌리고
축축해진 그림자를 조금씩 꺼내 먹고 있다
어쩌다 세상을 뒤집어 입고 있는 그림자들
하늘 저쪽을 바라보다 마주치면
동전을 줍는 척 고개를 숙이고
또 마주치면 떨어진 동전을 두 개 줍는 시늉을 한다
난간의 용도는 다양해서
스티로폼 박스가 위험하게 앉아 있기에 적합하다
저곳은 흙냄새를 맡아도 어떤 눈물이 자란다 꽃이 피면
동전이 굴러가는 방향으로
파꽃을 핑계 삼아 어느 날은 오래 어두워질 수 있겠다
아픔은 저마다 색다른 의상을 입고 있지만
푸르게 난간을 넘어오는 저 여자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기 때문에
이 계절은 소리가 지워진 채 떠내려가는데, 거기 가면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7월의 여자들만 사는 섬이 나올지 모른다.
—《詩로 여는 세상》2009년 가을호
너무 많은 이해 / 최호일
너는 자루 속에 든 공기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공중에 사라져버린 공기의 어제와 깍지 낀 손바닥을
궁극의 벽이란 닳아서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벽이란 기댈 수도 있지만 스며들 수도 있다는 걸
어두운 곳을 빠져나와
팽팽하게 발기 된 자동차 바퀴처럼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군
새소리에 잠이 깬 날은
밤의 날갯죽지가 흥건하게 죽어 있는 걸 보았겠지
그것이 아침이야
잠은 밤을 오해하지만 밤은 잠의 모습을 잘 이해하지
이를테면
옆구리에 칼이 빠르게 스며들 때
너는 그것을 칼이 다른 나라의 농담처럼 몸을 오해했다고 생각하니
그건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이해야
사과를 깎다가 마음의 뼈가 부러진 사람을 알고 있지
사과를 깎는 법은 지루해
참혹한 욕설로 사과껍질을 바라볼 수 있는 밤은 없을까
칼을 들지 않은 시간으로 나를 이해해 줘
귤처럼
—《문학청춘》 2010년 봄호
흩어진 말 / 최호일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질 때 아니,
공중으로 흩어진다는 말이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좋았을 때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해도 될까요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어제 산 장난감처럼 꺼냈다 그 말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갔다
흩어지고 내렸다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그 계절의 비가 왔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으로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
혁명을 꿈꾸기도 했으나 불길한 색상 때문에
머리가 가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말은 어디로 갔을까
오후 다섯 시에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시간은
녹슬어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같이
문득 활짝 열리는 그 말은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았다
가장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
—계간《작가들》 2010년 봄호
노란 모자를 조문하는 법 / 최호일
꿈을 꿀 때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지 노란 모자라고 불렀던 그 여자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크다
곱창과 소주 생각이 나서 곱창에 소주 마시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고
밤은 덜 익은 곱창처럼 질기고 소주는 너무 써
물방울무늬의 암세포가 시간의 덩굴처럼 아름답게 자라는
누우면 젖과 젖 사이가 멀어지는 여자
서른여섯이니까 하늘을 봐요
같은 병실에서 잠이 드는 게 지루하고 미안해 별을 보고 말했다
별은 단순하고 쓸쓸한 쪽에서 빛난다
먼 부부처럼 밥을 따로 떠먹으며
그녀와 함께 바람 부는 날 소주에 곱창을 먹을 확률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형광등 불빛으로 멀리 새 나가
더 먼 곳에서 사라진다
안녕, 노란 모자
노란 모자가 불이 켜지는 냉장고 위에 놓여 있다
죽음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모자를 벗어야지
누가 내 혀를 잘라서 가지고 있는지
요즘 소주는 싱거워
—《미네르바》2010년 여름호
엑스트라 / 최호일
이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 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문장 웹진》2010년 9월호
물방울에 대한 기억 / 최호일
멀어지는 물방울무늬를 보았나 물방울무늬는 물방울처럼 아래는 한없이 둥글고 위가 없는 그런 무늬
그림자도 그렇게 생긴 무늬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길들은 끊어지고 여자라는 말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한쪽 다리는 붉고 나머지 다리는 푸른 말굽자석처럼
손끝으로 잠깐 대본 듯
모든 별과 해와 달의 순서가 바뀌고
세 번째 감정을 지닌 여자를 지나 자전거처럼 홀로 남아 있을 때 커다란 바퀴를 돌리면 우주 밖으로 떠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지난밤이 되었고 그림자는 시계방향의 기차를 탔다
푸른 물감을 들고 물방울을 바라보면 수세기 전의 사람과 삼분 동안 악수했던 저녁이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래 어느 시간의 게으른 관리인처럼 흘러 다닌다 등에는 여자가 두고 간 손같이 하얀 지느러미를 달고
—《시안》2010년 가을호
연기자들 / 최호일
나무는 직업적으로 아이를 낳고
아이의 엄마가 그것을 어린 새로 만들어 즐거운 코끼리로 키운다
우리 앞으로 하마가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막대사탕을 보이며 지나간다
물고기처럼 아이가 웃을까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이가 부러질까
고민하는 오후
두 시가 광장을 어제보다 조금 더 빨리 빠져나가
세 시의 어두운 표정을 한다
가을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를 맞고 모르는 콩으로 흩어지고
빗소리로 분장한 배우가 사람들을 철창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운다
비가 그치고
동물원의 모든 것이 사라진 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청소부들이
바닥에 떨어진 어린아이의 웃음을 쓸어 담고 있다
그것이 낙엽인 줄도 모르고
붉고 성실하게
—《열린시학》 2010년 겨울호
내 입속은 / 최호일
내 입속은 하지 않은 말로 가득하다
타인의 어금니 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으며 가볍고 경솔하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치약처럼 짜내고 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 입은 내 입속을 먹지 못한다
당신이라는 말은 과자 같다
질기고 캄캄한 입술로 당신을 개미처럼 뜯어 먹는다
참새 떼에게 새 쫓는 법을 가르쳐 줄까하고 말하면
서쪽 하늘 색깔로 입안이 환해진다
서쪽은 어느 곳에 있나
천개의 해가 천개의 가위를 들고 혓바닥을 잘라서 버린 저쪽
나의 입안은 약간 미쳤다
사람의 부러진 갈비뼈를 끼우고 태어난 천 번째의 생일
허공에 진열 된 옷으로 당신을 입을 수는 없다
내 입속은 당신의 입속에 두고 왔다
—‘시인회의’ 제10합동시집 『꽃의 박동』
사라지는 오렌지 / 최호일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
사람의 투명한 옷을 입고 의심하고 이해한다 오렌지가 되려면 오렌지의 크기와 색깔과 색다른 구두가 필요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당장 필요하다
만일 당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면
그건 오렌지의 감정
문을 열고 들어가 비와 사람의 단추를 누르면 주렁주렁 열리는 팔과 다리들 오렌지는 사람들을 박스에 넣어 선물한다
당신과 나 사이를 주고받는 어느 선물
상자 속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옆구리처럼 걸어 다닌다
뒤돌아보았을 때
일정한 높이와 냄새와 수만 개의 눈을 가지고
오늘 계단은 몇 개의 기분일까
백만 년 전 우리는 허리를 숙이다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진 노을이었지 그걸 주우려다 또 떨어뜨린 노을빛
저녁은 가장 오래된 물질
죽은 척하고 놓여 있는 이 오렌지는 지워진 안개와 강물이 다 사라지는 오후와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거쳐 여기 희미하게 굴러온 것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천천히 다녀온 사람들같이
아는 얼굴로
—《시와 사상》2012년 봄호
두 개의 수요일 / 최호일
수요일엔 행복해지고
수요일엔 불행하다
수요일 속에 수요일이 쑤셔 박혀 있다
나는 매일 내 마음을 혼자 사용하는 걸 허용하고 있다
저녁을 생각하면 눈에 들어온 이물질처럼 저녁이 오고
그래서 나무와 풀, 모르는 꽃들의 이름을 외우고 잊지
풀빛의 왼쪽 젖가슴은 어떤 색 피가 흐를까
두 개의 긴 팔과
투명한 팔이 하나 더 달린 복싱 선수처럼
비가 오는데
저녁이 한 가슴을 여러 사람이 더듬는 것처럼 야비해진다
어두워지기 때문이지
수요일이 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을 살자
이런 방법을 기뻐하진 않지만
아주 어두워지자
저녁과 저녁 사이의 모든
죄 없는 바퀴벌레와 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미안해 질 때까지
수요일의 스파링 상대처럼
수많은 얼굴을 너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현대시학》2012년 5월호
비누 / 최호일
비누가 손을 빠져나간다
비누가 손을 지나 바닥을 빠져나간다
비누가 조금 전 한 말들이 말풍선을 터뜨리고 띄우며 강으로 빠져나간다
바다로 사라지는 어떤 결의들
하염없는 비누들 비누의 이웃들
새와 나무와 사람과
거미의 하루와 기린의 무늬가 거품이 될 때까지
비누의 손으로 살아가는 비누들
비누가 손을 잡을 때
비누는 부피와 피부가 없고 다른 생각이 없다
우리는 날마다 괜찮고 조금씩 하루를 없애고 있네
어떤 말들은 눈송이의 친구처럼 커지고, 내리는데
세계와 나 사이에 투명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불안을 머금은 유전자들
비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오른손을 펴보렴
날마다 우리들의 손에서 다른 손들이 빠져나간다
—《詩로 여는 세상》2012년 가을호
당신들의 취향 / 최호일
오른발에는 빨간 장화를 신고
왼쪽에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자
오래 궁리하듯 굽이 낮은 쪽으로 먼저 가을이 오고
우리는 절뚝거리며 희미해진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빗방울은 거리의 튀김처럼 튀네
나무가 불안해 초록색을 흔드는 나무들
나무 아래에 앉아
타인의 방향에 대해 입을 다물고
한 사람이 만들어 낸 두 사람의 생각에 대해 저녁은
최초의 기분을 발견해 낼 것이다
장화를 신은 쪽의 발목에서는 아무래도 피가 흘러
질척거린다는 사실을
이런 생각이 하수구를 타고
지구 저편의 해변에 가 닿고 피로 물들 때까지
아무도 없는 아침이 오고
설탕이 없는 커피를 마시고
옷을 다 벗고
당신이 혼자 소파에 앉아 실없이 웃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를 멈추지 않는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어제 죽은 고양이를 목에 두르고
—《다층》2012년 가을호
조용한 손 / 최호일
조용한 손은 조용하다 어제의
약사는 약을 조제하느라 상처를 건드릴 뿐 조용하다
일요일의 거짓말처럼
약국에는 어제의 약이 없다
문틈으로 끼어든 정적도 정적 때문에 고요하고
끼어들 틈이 없다
두 번째 꽃집이 길을 건너오고 있다
모든 골목은 각별하고 추운데
사람들은 개처럼 첫눈이 오는 걸 좋아한다
눈송이가 머리를 만지고 걸어다닌다
주부들은 주부가 되기 위해 바쁘다 말없이 그릇을 깰 때도
그릇을 깨지 않을 때도
개와 주부 사이에 조용히 눈이 온다
소년들은 소녀의 예민한 손으로 빚어 만든 얼굴로 웃는다
잠시 너를 놓쳐야 할 텐데 만져야 할 텐데
내 소리를 받아 줘
개와 주부와 소년은 눈으로 뭉쳐 만든 시간인데
모두 옷을 입고 있을 뿐인데
손으로 약을 잡았으나 눈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손이 나를 놓고 있는 것 같다
—《시인수첩》2013년 봄호
일 분 동안 우산 / 최호일
비가 그친 줄 모르고
일 분 동안 쓰고 걸어간 우산을 음악이라 하자
검은 우산의 딸처럼
우산을 접으면 주르륵 흐르는
첫 번째 가로수의 두 번째 전생과 검은 발자국 소리
꽃의 노란색 바깥이라고 부르자
불가능한 저쪽이 따라온다
나뭇가지 사이에 스무 살 적의 새와 서른 살의 젖은 새가
새가 되기 위해 앉아있다
나는 늘 없고, 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너를 이해해
가수가 넘어지고
놀이터에서는 수많은 공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현재는 발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아주 잊어버리자
삼천 년 후의 목요일이 도착할 것이다
비와 시간으로 깎아 만든 식탁 위에
음료수가 놓여있고 누가 입술을 놓고 갔다
머리핀을 꽂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우산이 생겼다
—《시와 표현》2013년 여름호
마야 / 최호일
토마토 같은 것이 붉게 터진다 마야의 손에서
방안에서 죽은 잠자리를 손에 들고 버리지 못한 채 버릴 곳을 생각하다 잠자리가 날아가고 그것이 손가락으로 변할 때
입이 있는 것들의 하얀 이빨이 박히고 있네 아직 사과가 열리지 않은 사과의 등에
목 깊숙한 곳에서 어둠이 찢어진 곳에서
다른 생이 건너오네
오늘 붉은색을 누가 모두 가져간다면
나는 붉은색 옷을 버리게 될까
누가 내게 말을 건다면
붉은색으로 목을 조른다면 붉은색 쪽으로 걸어갈까
월요일과 화요일 오후가 서로 뒤바뀌고
문이 혼자 열리고 닫힐 때
누구나 그것을 백 명의 마야가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열매가 떨어진다
처음 보는 나라의 하얀 손이
토마토를 으깨면서
—《시와 세계》2013년 겨울호
안쪽 / 최호일
세상의 가장 안쪽을 보여주려는 듯 미개한 부족의 언어처럼 보이지 않는 곳의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모든 빛의 옷자락이 제 모습을 감추고 몸을 형광펜으로 칠한 사람들이 그 소리를 소리 없이 듣고 있다
어둠을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뼈처럼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밤이 오고
평생을 죽고 있다가 들킨 사람의 표정으로
몸이 살 밖으로 빠져나온다
슬픔의 유래 / 최호일
우리는 대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만난다
어릴 적에는 스물 네 가지 색 물감 속에 들어 있다
손으로 잡으면 사라지기도 했고
얼굴에 묻히고 들어와 혼나기도 했다
천 마디 사랑 이야기를 새겨 넣은 쌀 한 톨을 들여다 볼 때가 있었는데
그는 사랑의 배면을 풍선껌처럼 부풀려서 어느 날
빵 터뜨린 다음 바람을 얻은 것이다
육체 안에 절망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비누로 닦아보기도 하고
벽에 걸린 그림이 희미해 질 때까지
손목을 긋기도 하면서
우리는 항상 나란히 넘어진다
밤이 끝난 뒤 이별의 솜씨가 없는 사람이 라면을 끓일 때
그걸 본 사람은 알지만
멀리 있는 고양이 울음이 냄비 속으로
스프 대신 빠져 들어갈 때
우리는 라면이 몹시 끓고 있는 아침이라고 부른다
혹시, 그것을
다른 사람이 데리고 온 슬픔이라고 말하면 안 되나
포도송이처럼 둥글고 흔한
고양이 색깔의 슬픔이라고 기록하면 안 되나
오늘 그림자 / 최호일
햇빛 말짱한 대낮에도 그림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림자
열 살이 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아이도
깨지지 않은 유리창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사실 그림자도 다가가 옷을 벗겨보면
양파 껍질처럼 냄새나는 그림자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태양은 본질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땐 우리 집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먼지를 털다
가끔 혼자 넘어진다
그러면 그림자도 같이 일어난다
땅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 그림자 없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가 신문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자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늘은 문이 잘 열리지 않아
그림자 도둑놈이 그림자를 한 개 훔치러 왔다가
제 그림자를 벗어놓고 갈지도 모른다
내가 종일 걸치고 다닌 옷의 팔다리에 달라붙어
질긴 곱창 그림자를 씹고 있는 그림자들
—시집『바나나의 웃음』(2014)에서
착시 / 최호일
사람을 반으로 접으면 상자가 된다 운동화 끈이 풀리면 갑자기 가을이 오고 포도와 스무 살이 된다 그대가 단추를 잠그면 알몸이 보이듯
차 앞에 사람 있어 통과했는데 시체가 없다
시체와 시체를 버릴 곳 사이에서 시간은 서성인다
둘둘 말아서
하나씩 펴서
하늘이라는 평평한 말을 불판에 구워 먹는다
눈의 말을 불판에 구워 먹는다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래도 죽은 사람의 눈이 살아 있어 우리는 문자를 주고받는다
가을과 여자와 운동화와 나는 버스를 타고 간다
버스가 도착한 곳에서
개와 딸과 아들의 성분이 바뀐다
—《시와 표현》2014년 여름호
아직 빠져나오지 않은 긴 골목 / 최호일
골목이어서 공이 튀어 나왔다
조금 전에는 어둡고 양심적인 고양이가 빠져나왔다 원래 거기 없었던 오전이 장미 덩굴처럼 따라 나와 멈춰 있기도 했지만 장난으로 알았다
토요일에는 튜브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일주일 후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국의 탤런트처럼 생긴 개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기도 했는데 눈동자가 가보지 않은 아일랜드처럼 신비로웠지만
모두 밧줄에 묶여 있었다
수소 풍선과 어린 여자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노을이라 불러서 외로웠다
돼지고기를 두 근 사가지고 왔으나 비계가 너무 많아 슬피 울었다 밤에는 소녀들이 던진 수소 폭탄에 맞아 견딜 만했다
무더운 여름이어서 아무도 죽을 수 없었다
아프고 고요했으나 노란색으로 미안했다
—《현대시》2014년 8월호
이스탄불의 까만 숲 속 / 최호일
갈치는 두 마리 만 원 홍옥은 만 원에 다섯 개
이스탄불에 가고 싶다
사과를 살짝 밀면 하늘 아래 쌓아 놓은 성과 같아서
갈치와 사과는 섞일 것 같다
사과에서 우르르 비린내가 날 것 같다
사과가 아닌 것까지 모두 사과가 되다니
너무 잘 닦아 놓아서
빨간색으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사과가 태어나기 전 나는
검은 보자기를 쓰고 누군가에게 한없이 끌려갔다
보자기 안의 세계는
보자기 바깥의 세계보다 훨씬 더 넓고 크다
보자기를 벗으니 사과가 둥둥 떠다녔다
그동안 내일이 지나갔고
바늘로 꿰매 놓은 비눗방울같이 빛을 무한히 사용했다
왜 하필 그곳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과가 어떻게 거기까지 굴러갔지?
이스탄불의 깊은 숲속이었고
손에서 비린내가 났다
—《현대시학》 2014년 12월호
볼펜이 떨어질 때 / 최호일
볼펜이 책상 위에서 굴러 바닥에 떨어질 때
툭 소리를 내나
그리고 이상한 여름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이 생겼다
이미 바닥이 있었던 곳에서
떨어진 나뭇잎과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사이에서
우리는 천천히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볼펜이 떨어져 낙엽이 되었다
떨어지는 것 때문에
루즈를 바르는 사람과 루즈를 보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 거리에는
신체의 다른 부위는 사라지고
붉은 입술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궁금한 다리가 보일 때까지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주말이 오고
짐승들은 두 마리 세 마리씩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양철 지붕을 두드리면 비가 왔다
그리고 이상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열두 시가 되었다
이미 시간이 있던 곳에서
—《시와 표현》2015년 8월호
고등어의 건너편 / 최호일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만 걸어간다면
군중이 되겠지
토요일에는 싱겁게 약속을 하고
일요일에는 생선가게에서 고등어를 샀다
긴 막대기의 길이는 평균 얼마나 되는 걸까
다른 곳을 가리킨다고 말할 때
다른 곳이란 어디를 말하나
계란 프라이는 토스트에 야채와 함께 넣을 건데
서양 사람이 만들어도 모양이 다 똑같다
너무 태우지 않아야 해
사람과 고양이의 건너편이 나는 좋아
솥뚜껑을 열고 여러 번 젓가락으로 찔러보며
끓는 물의 평균에 대해 생각하네
노을은 아직 익지 않았는데도 익은 척을 하고 붉다
그릇을 바라보다 구름을 떨어뜨렸다
계속 날아오르기만 한다면 풍선이나 신선이 될 거야
갑자기 고등어가 될 거야
아가미를 자주 헹궈 비린내가 나기 전에
얼굴을 흔들면서
뜰에 있는 해바라기는
손이 없는데도 킥킥 웃을 수밖에 없다
—《발견》2015년 가을호
전국의 날씨 / 최호일
전국의 날씨가 한 곳에 모인다면
모두 무슨 표정이 될까
만일 시청 앞 광장에 한꺼번에 서 있다면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
빚에 쫓겨 숨어 있는 사람
깊은 산 속에서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까지도
빛이 찢어지고,
우산이 찢어지고,
바람이 불고 우리는 오갈 데가 없겠지
모두가 집을 그리워하며
각자 왔던 길로 되돌아가겠지
나는 내가 혹시 아닐지도 몰라
다른 사람의 엉덩이를 가끔씩 만져보며
서로 얼굴이 뒤바뀐 사람도 있을 거야
빚에 쫓기면서
누군가 꿈에 산삼을 발견할 때까지는
비를 맞으며
눈을 맞으며
다시 전국으로 흩어지겠지
내일 다시 전국의 날씨가 될 때까지는
—《시와 정신》2016년 가을호
못 / 최호일
연못 속에는 잉어가 들어있다
연못 속에는 꽃, 태양, 바람 같은 것이 들어있다
읽은 적이 있는 책이 들어있으며
오래된 가옥도 들어있다
잔잔한 소리도
시끄러워 잠 못 드는 소리도
연못 속에는 사람이 들어있다
착한 사람
조금 삐뚤어진 사람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도
아무튼 사계절이 거느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한 연못의 한가운데에
아주 길고 커다란 못을 박으면
사람들이 놀라고
연못의 반대편 지구에는 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아주 긴 못을 박았다 빼면
—《리토피아》2017년 여름호
매우 복잡하지 않은 옥수수/ 최호일
옥수수를 따 강물에 던졌다 껍질을 벗겨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던졌다 두통이 심한 여름의 오후여서 내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옥수수는 강물을 모르고 나는 푸른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살다 보면 유일한 일은 흔한 일이다
세계는 어디로 헤엄쳐 가고 있는지 강물은 어디까지 한없이 따라가는지 알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옥수수는 멀리 헤엄쳐 갔다
나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아야 했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 강물에 넣어 두었다는 얘기를 나는 믿지 않기로 했다 아기는 옥수수가 아니라 벗어 놓은 오래된 구두이거나 구두를 닮은 물고기였으므로
삼백 년이 지난 후 어느 어부가 물고기를 잡았다
아빠 물고기에서 옥수수 냄새가 나요
그럴 리가 있니 아기 냄새겠지
식구들은 둥근 식탁에 앉아 구두를 발라 먹었다 그것이 삼백 년 전에 누군가 강물에 던진 옥수수인 줄도 모르고
나는 삼백 년 동안 집으로 왔다
밤이 오고 두통이 씻은 듯이 나았다
—《현대시》2017년 10월호
수국이 어렸을 때 / 최호일
봄이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닌다 두 손에 수갑을 차고 날이 밝으면 우는 우리의 날씨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고양이의 잠 A가 Z에게 다가갈 때 다수의 용서 끝에 가끔은 슬퍼지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조그만 틈새로 들어간다 물의 스타킹을 신고 밤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새가 우는 날 신발끈을 고쳐 매고 홀수로 된 날을 피해서 전생에 갔다 짝수를 데리고 갔다 꽃이 피면 머리에 앉은 나비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전생은 코스모스가 해바라기 같고 꽃잎은 시계를 보는 원숭이를 닮았다 시계가 바람에 나부낀다
나는 밤마다 손이 없는 너의 손바닥을 잡았다 얇고 가벼운 잠 속에서 아직 그림이 되지 않은 누드모델의 오후 오늘은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날씨 수국이 되기에 알맞은 날씨
사람들은 수국을 그린다
⸺계간 《미네르바》 2018년 가을호
나의 과학 / 최호일
저 허공은 사물이 없는 곳에 두 번 나타난다 소년과 소녀들은 발레를 하고 나는 발레를 피한다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가 없다
스포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렌지를 반대하고
치통을 앓는다
아직도 역사의 선반 위에서 불타는 사과
저녁이 유리 형제들처럼 투명한 과녁을 모두 빛낼 때
빗나간 바람은 달그락거린다
누군가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두 발은 항상 위험한 폭탄으로 떠 있다
곧 날아오를 것이다
불행은 가끔 장밋빛이며 영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할 줄 모른다
열한 마리의 고양이와
열한 명의 축구선수들
공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벽의 세계에서는 벽을 들고 가
벽지에 붙인다
나의 과학은 소리가 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불을 끄고 그 벽에 몸을 기대면
슬퍼진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해바라기 / 최호일
해바라기의 뚜껑을 닫았다
해바라기의 관심이 사라졌다
해바라기의 아내와 아들과 구두가 사라졌다
오후 세 시에 쏟아지는 햇빛 10번 버스는 그냥 지나간다 101번 버스는 그냥 지나간다 작은 불편함과 큰 불편함 사이를
여름과 아직 오지 않은 가을 사이를
만일 헤어지는데 사용하는 노란 기구가 있다면
친절하고
둥글고 납작할 것이다
문을 꽝 닫을 것이다
아내와 아들과 구두와 버스와
해바라기가 없어 불편하다
뚜껑이 없어 불편하다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잠 / 최호일
어떤 배경은 은박지처럼 만지는 대로 구겨졌고
어떤 소리는 너무 얇아 쉽게 찢어진다
새들은 늘 땅에 떨어지고 난 후에도
후회하며 검은 옷을 입고 다시 새가 된다
비가 오는 날에도
가본 적 없는 골목들은
크고 둥근 공들을 계속 따라다닌다
나는 어디쯤 있을까
두리번거리면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다 잡아볼 수 없어서
돌 위에 앉아 있다
백조가 있다면
세상의 검은 호수와 호수의 물결들이 하나하나 모여
아주 큰 호수가 되고
검은 물이 다 흘러내려
하얗게 될 때까지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나는 혼자 살아온 것 같다
손을 다 잡아보았다면
나는 그곳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월간 《시인동네》 2019년 11월호
계란학 강의실 / 최호일
누구나 그 강의를 들으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먼 구름 사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계란을 굴리거나
마법같이 사라지거나
아무리 추워도 봄이 오면
봄을 그대로 둔다든지
가까이 보면
사람이 아닌데 누구나 사람이 된다든지
계란학 강의를 들으면 신이 난다
아무 데서나 봄이 올 것 같다
날마다 버스는 오고 가지만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우리들의 몸에서
끈끈하지도 않게 떨어지지도 않게
어느 날 강의실에서
계란을 떨어뜨리지 않는 강의를 듣다가
떨어지지 않는 계란이 되었다
ㅡ시 전문 계간 《발견》 2020년 겨울호
방어흔 / 최호일
불빛은 항상 말이 없다 몸의 어두운 구석 어디쯤에 숨어 있었을까 그런
그를 두드려 누군가 끄집어냈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창밖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꽃의 비명소리 뿐 꽃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악마 같은 얼굴이 되었다
비가 오고, 바람 불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는 늘 어둡다
누구나 창 안에 있거나 창 밖에 있는데,
누구보다도 길고 오래 산 다수의 삶처럼
자신의 눈과 코는 물론 장기와 성기와 아가리 같은 쓸데없는 것을 버린
다 물을 마시고 싶지만 치마를 다른 색으로 바꾸고 싶지만 이제 태어난 아
이처럼 우선 손이 길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가 지문처럼 남겨져 있다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
사과의 약속 / 최호일
어디쯤 오고 있어? 응, 창세기 교회 앞을 지나는 중이야 행복한
부동산을 버스가 막 지났어 지금은 김인자 헤어숍을 지나가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희망은 김인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이
야 들어가 보지 않는 푸른 철문처럼 아니, 질문처럼
토요일의 농협에는 토요일로 가득하다 오늘은 메뚜기가 날아
다녀도 되는 날 같다 조금만 기다려 오토바이 두 대가 죄책감도
없이 제트기처럼 날아갔다 내일은 개에게 잘해 줘야지
사람의 잠옷을 입고 숲속으로 노루가 뛰어간다 꿈속은 두 사
람 중 한 사람이 죽어야 만나는 장소다 버스가 있고 대문이 있고
대문 앞에 두 개의 칫솔과 두 개의 해골이 놓여 있다면
돌 속에서 줄넘기를 하고 오는 사과
강을 건너는 사과
의자가 세 개의 다리로 걸어온다
손목이 없는 사람이 껍질을 깎는다면
생각보다 얇게 깎아질 것 같다
- 《시인동네》2018년 1월호
라라의 모자 / 최호일
유리창을 끼우기 위해 시공업자는 라라를 밖에 두고 어느 보이는
집으로 들어간다 풍경을 잘 드는 칼로 가운데를 잘라 놓고
안에서 보면 바깥이
밖에서 보면 안쪽이 더 가까운 친구처럼
꽃과 나비 사이를 부지런히 건너가는 자동차
언제 저런 것들이 저곳에 있었지?
나비를 따라가는 더 많은 허공
유리창 속으로 밖에 있던 모든 세계가 네모 난 모양으로 들어간다
먼 곳에서 수련이 필지도 모르는 일
더 먼 것에서는 해변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
흥미로워
라라는 귀머거리 구름과 고장 난 비행기를 띄우고
그리고 손으로 벗길 수 없는 투명한 공기들
아직 공기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구나
라라가 유리창 안에서 멀리 사라지는 시공업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쨍그랑 유리창이 깨진다
라라는 화장을 하지 않고
라라는 모자를 쓰지 않고
스크럼 / 최호일
의사는 샴쌍둥이를 나누기 시작했다 불이 켜지고 수술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정교하게 라인을
그리고, 이른 아침을 새로 만든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식빵 냄새에 무척 감동한 사람처럼
섬세한 손으로 메스를 대고 가슴에서 구름을 꺼낸다 둥근 사과 껍질을 깎아 둥근 엉덩이를 만들
때 어둠 저쪽에서 다정하게 다가오는 손이 있다 그 손을 따라갔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메스를 긋
고 곡선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잘록한 곳에 허리를 만들고 허벅지를 만들고, 여자를 섬세하게 애무하는 섬유
질 같은 남자의 첫 경험처럼 슬리퍼를 끌고
인류를 향해 걸어갔다
사과가 있는 곳에서 빵이 있는 곳까지
짜장면 여자 / 최호일
나무젖가락을 쪼개서 짜장면을 비볐다
비비다 보니 그 속에서
나체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여자를 짜장면 속에서 꺼내놓았다
우리는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짜장면을 먹었다
정치문제라든지 북한의 핵미사일로부터
연예인의 스캔들
그녀가 숨겨놓은 깊은 곳까지
젖가락과
세계의 깊이가 조금씩 뭉개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나무처럼 이동하기 시작한다
주방장이 짜장면을 공중에 띄워 올릴 때
왜 여자를 집어넣었을까
몹시 부끄러워해 옷을 입혀주었는데
삼백개의 단추가 달린
푸른색 옷이었다
마야의 바람 / 최호일
붉은 양탄자 위에 마야의 검고 긴 머리칼이 선명하다 머리칼이 없어지고 깊고
검은 눈이 보인다 봄이나 여름, 가을, 겨울 따위의 계절들이 동일한 이름의 골목
을 다녀가고
검은 눈이 지워지고 붉은 입술이 보인다 붉은 입술이 지워지고 붉은 옷에 검은
벨트가 보인다 검은 벨트가 보인다 앞의 글자가 하나씩 지워져야 써지는 어제의
문장처럼 몸이 있거나 없는 것들의 기억을 따라서
우연히 돌아보면 모르는 여자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저녁이 있다 열
매를 따라서 숲으로 들어가 숲이 된 검은 여자도 있다는데 걷잡을 수 없는 밤은
아침보다 먼저 태어난다 어둠을 손에 켜서 들고 다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노랗고 질긴 고무줄처럼 시간의 얼굴이 두 배로 늘어날 때
그 사이에 바람이 불지 않는다 머리칼과 눈과 입술과 붉은 옷 사이에 바람이 불
지 않는다 사이가 사라지다 드디어 어두운 뱀이나 의자 따위가 된다 뱀을 따라가
보니
바람이 불고 있다 마야의 손이 흔들리고 있다
그곳에 소파는 놓여있고
0의 연인들 / 최호일
날씨가 흐리고 펑펑 눈이 온다 조금 전의 거리로 조금 전의 풍경으로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그리운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풍경은 조금씩 조금 전의 풍경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다
쌓이는 것은 눈이 아니야
먼 미래에 죽은 사람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일 눈의 연인이 있다면 그는 외투를 입고 있지만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시간의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조금 전 지나온 골목은 미끄러운 언덕이어서
우리는 미끄러지고 있다
이런 것도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두 같은 신발을 신고
각자 미래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사람이 아니어서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세 발짝 / 최호일
동쪽으로 간 닭의 시를 쓰는 일은
동쪽으로 간 닭의 시를 쓰지 않는 것보다 쉽다
가령, 모퉁이를 돌아가버린 이름에 대해 또는
장미꽃이거나 거미, 아버지에 관한 시를 쓰려고 할 때
꽃은 시들고 거미는 구멍으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죽는다
그러므로
만일 닭이 시를 쓴다면 틀림없이
계란에 대해 쓸 것이다
어떻게 하나, 처음엔 굴러보기도 하고 삶아서
저녁별을 찍어 먹으며 생각에 잠길 것이다
이별을 경험한 닭들은
어제는 그와 헤어졌는데 슬퍼요라고 썼다가 지우고
싱싱한 닭의 삶에 대해 삶은 닭에 대해
깊이 천착할 것이다
한여름이라고 하지만 내가 닭이라면
동쪽으로 세 발짝 걸어가 뜨거운 냄비 속으로
질기지도 않고 푸석거리지 않을 정도의 마음이었을 때
더운 몸을 식히면서 나올 것이다
동쪽으로 간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고
해 질 무렵에 잡아먹은 닭이라면
일반인들 / 최호일
그 여배우가 눈부신 피부를 입고 저만치 걸어간다
그녀가 멈춘 곳에서부터 파도가 걸어간다
숫자를 세다가 다음 숫자가 생각나지 않았다
손바닥은 뒤집으면 다시 나타나겠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간단한 일
좋은 사람을 좋아하면 되니까
투명한 옷을 입은 가늘고 긴 바람이
해변의 카메라보다 빠르게 따라간다
미리 만든 웃음과
미리 만들어 놓은 바다가 웃으면서
숨겨 놓은 거짓말을 꺼내놓는 건 즐거운 일
피부를 혀로 핥아봐 친절한 사람이 될 테니까
음료수는 시원하고 친절하다
빛이 있는 곳에서
세상이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다음 숫자가 생각났고
어제보다 조금 더 미래에 가까워졌다
7월 여자 / 최호일
이 동네에는 바라볼 때만 지나가는 옥탑방 구름들이 살고
7월의 여자가 있지
그녀는 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얼굴로 시간을 널고 있지
저 악보는 6월이 찢어놓은 바람의 달력 같다
빨래는 그녀를 안는 자세로 두 팔을 벌리고
축축해진 그림자를 조금씩 꺼내 먹고 있다
어쩌다 세상을 뒤집어 입고 있는 그림자들
하늘 저쪽을 바라보다 마주치면
동전을 줍는 척 고개를 숙이고
또 마주치면 떨어진 동전을 두 개 줍는 시늉을 한다
난간의 용도는 다양해서
스티로폼 박스가 위험하게 앉아 있기에 적합하다
저곳은 흙냄새를 맡아도 어떤 눈물이 자란다 꽃이 피면
동전이 굴러가는 방향으로
파꽃을 핑계 삼아 어느 날은 오래 어두워질 수 있겠다
이름은 저마다 색다른 의상을 입고 있지만
푸르게 난간을 넘어오는 저 여자
음악을 크게 틀어놓았기 때문에
이 계절은 소리가 지워진 채 떠내려가는데 거기 가면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7월의 여자들만 사는 섬이 나올지 모른다
이상한 그늘 / 최호일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간다 발로 배를 걷어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간다
그늘은 말이없고 성실하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진 그늘 같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밷듯 꽃이 피었다 꽃은
참을성이 없고 당신은 태연하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짜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래된 약속 / 최호일
약속 때문에 바다에 간다
약속 떄문에 삼십 개의 사과가 호두나무에 열리고 전쟁이 터지고
조용한 저녁이 된다
약속이 있어 겨울과 까만 구두를 만드는 중이야
깊은 밤과 삼백 가지의 기분을 만드는 중이야
이것은 사과다
구름과 비와 해가 헤어진다
토요일을 만들어놓고
오후를 만들어 놓고
나무 그늘 아래 얼굴이 땅에 떨어져 뒹굴고 있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의 나비들
한 마리 두 마리 백마리의 나비가 가까운 가위처럼 나네
공을 잃어버린 방향으로
여름이 오고 나무가 자란다
나무와 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온다
우리는 발자국처럼 정확하구나
땅에 떨어진 얼굴을 주워 흙을 털고
잊어버린 듯 웃고 있는 것이
7월 14일의 알리바이 / 최호일
종일 혀가 길어졌고 종일 집에 있었다 무척 더웠고 동쪽 창문으로는 바람이 칼을 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밥을 먹었는데 카레냄새가 났다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약속이 없는 날이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티브이와 초인종과 집 전화와 문자를 꺼내놓고는 꺼놓고 있었다
갑자기 바닥이 평평해졌다
생각이 나지 않지만 300년 전 대나무 숲속의 7월 14일 같았다
종일 혀가 자라고 있었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인과 사기와 배신과 음모가 대나무 숲의 소문처럼 출렁거렸다 그날 대나무를 세 그루 베어내고 나를 땅에 묻고 왔는데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바람이 대나무의 이파리를 찌르고 있었다 나는 한꺼번에 바람으로 거기 있었다 모든 세계가 사라졌고 밤이 돼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7월 14일이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수와 꽃과 다리 / 최호일
수수꽃다리를 발음하면 수수꽃다리와
수수와 꽃과
다리가 떠오른다 누구의 다리인지 성냥을 켰는지
움직이는 지네의 두뇌보다 더 많은 다리들
만져본 적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들
계단을 오르면 있는 다리들
나는 너무 늦거나 바빠서 너를 보지 못하네
수수와 꽃과 다리를 다 보지 못하네
힘차게 라면이 불어서 터지고 있다
여기는 입이 없는 세계구나
수수꽃다리가 수수와 꽃과 다리가 되지 않으려고
잠깐 말을 멈추고 있다
민달팽이 / 최호일
너는 밤과 동일하구나 고개를 들어 우리는 학자처럼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기이한 서적을 읽듯
인생이 명료해지도록
천 개의 단어를 넣고 뚜껑을 닫아놓은 나무 상자처럼 그것을 다시 뒤
적이는 손처럼 잠을 커피에 찍어 먹는다
빛을 어둡고 축축하게 보관한다 너는 태어나다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달고 있구나 먹다 남긴 과자 봉지 속에는 지나간 시간이 들어 있을까
야구 선수들은 베이스를 지나 정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 구멍 사이로 밤이 온다 어둠을 빛의 오른쪽 얼
굴로 이해한다
나로부터 한없이 늘어나는 것이 너는 밤보다 조금 더 길게 어두워지
고 있다 몸에 들어온 조용한 고무줄같이
스위치 / 최호일
어린 나비 한 마리가 바위의 가슴에 앉는 찰나 바위는 금이 갔다
찬란한 생성의 힘 어둠의 몸통이 흰 뼈를 내보이며 망설이고 있다
천년의 침묵은 보람도 없이
쩡
깨져 버린다 금의 틈새에 마악 도착한 햇빛이 묻고 이제 싹 틔울
씨앗 하나 즐겁게 접속된다
꽃이 피고 그것은 언제나 환한 중심이 되었다 꽃의 얼굴은 늘상 개폐의 원리를 따른다
신나게도
그리움의 회로를 타고 와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그
필라멘트 / 최호일
여러 종류의 꽃이 어우러져
하나의 꽃으로 보일 때, 그리하여
스무 개의 손가락으로 변하고 싶을 때
손을 들고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자가 나선형으로 빠져나가
비행기와 부딪쳐 공중에서 폭발할 때
소심한 뒤꿈치를 들고
무쇠의 팔을 완강하게 느낄 때
나의 가족은 유리컵과 의자와 진부한 뭉게구름
동일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일제히 사이좋은 사물이 된다
모든 꽃 사이에 어제 그친 비가 오네
포커를 할 때의 무한히 사라지는 얼굴이 되어
하나의 꽃을 꺽어 들 때처럼
스무 개의 손가락으로 정교하게
정전 / 최호일
액수가 지워진 동전이 굴러가다 멈춘 지점에서는 늘 정전이 된다 검고 큰 것이 눈을 때릴 때 우리는 한없이 하얗게 되고 끝없이 커진다
그림자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유일하게 되고
가깝고 선명한 모습으로 당신과 건너편이 보인다 태초의 바위가 마침내 내 앞에 멈춰 섰다 책은 어제보다 두꺼워지면서 세계는 한 걸음 난해해지고 마지막까지 남은 어둠이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폭파될 때 살점과 뼈의 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서진다
길을 가다가 문득 우산을 잃어버린 나무처럼 어느 비에 젖기도 한다
몸통은 공중에 정지해 있고 날개만을 움직이는 새처럼
마침내 사라지는 몸통처럼
누가 모르게 바라보고 있나
가장 잊을 수 없는 나를 만들어 놓고
34번/최호일
원주 어느 대학 구내식당에서 비빔밥을 사 먹었다 젓가락을 대학생처럼 분질러 보았다
입에 맞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 몹시 싱그러운 여학생을 본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녀
는 삼십 분쯤 후에 차에서 내려 종아리만 남겨 놓
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정거장에는 비를 막기 위해 플라스틱 모양의 천장을 해 놓았다
비가 오지 않을 때에도
마음은 구부릴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마음이 내게 말했다
오늘 아침과 분홍색을
바꾸어 버리면 검은색이 될 거야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가니 참외는 위태롭고
수박은 어디론가 굴러갈 것 같다
수박이 없는 곳으로
지구보다 조금 작은 푸른 토마토가 바구니에서 툭 떨어지고 있는 걸 보았다 지구가 땅에
떨어지다니
지금 타고 가는 버스를 벼랑 아래로 밀어 버린다는 것은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버스가 나비처럼 날아오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마다 비빔밥과 여학생과 과일들이
버스에서 떨어져 나갔다
비가 쏟아진다
비는 웃으며 조금 열린 문틈 사이에 끼어 가고 있다
물에 가라앉으며
물고기들이 비옷을 뒤집어쓰며
가면놀이/최호일
얼굴이 없는 사람들은 빛으로 된 가면을 쓰고 있네
빛이 없는 사람은 얼굴을 처음 본 사람 것으로 바꿔 끼우네
마음은 마음에 드는 도둑고양이의 성기로 바꾸는 게 좋지
고양이가 없는 마을은 셋째 주 일요일의 첫 번째 구름
들국화의 다섯 번째 꽃잎을 함부로 들춰봐
비가 내리면 한 손을 자르고 우산을 써
웃음은 구름 뒤에 감추기 좋은 가장 안전한 우산
우산이 아니고 위선이라 발음해
비가 오는 날은 우산적이지
밤의 표지는 팔만 장의 어둠으로 만들어졌고 어둡다고 쓰여 있지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커다란 빵을 훔치는 방법 같이 즐겁고
편견처럼 아름다운 정면을 가졌지
노을이 백 년 동안 이 골목길을 지나갈 땐 왜 눈물이 나죠
이 거리도 저녁의 냄새가 어두운 가시에 찔려서 태어났네
저녁이 스타킹을 벗으면 한 번 더 어두워지지
더 어두워지기 위해서는
발등으로 불이 떨어지면 발등을 오래 만난 사람처럼
친절한 불로 오해할 것
손에 관하여/최호일
손은 몸의 맨 처음 시작이며 그 맨 끝에 있다
처음 만날 때 악수했던 손은 오른손이고 헤어질 때 흔들며 사용했던 것도 오른손이었다
그 사이, 당신을 안았던 것도 그 손의 짓이었다
매 순간을 축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동작과 깊게 끌어안으려는 마음의 궤적 때문에 우리 몸은
둥글다
나는 사실 기성품인 이런 손을 매일 씻고 말려서 가지고 다닌다 심장과 혀 사이에 와 박혀 모
든 거리를 기억하는
보라색 시/최호일
시켜먹는 음식은 편리해 딴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맛이 없으면 버리면
되니까 그러니까
남이 쓴 시는 편리해 잘 못 들어간 식당처럼
욕을 해 버리면 되니까
지난밤에 써 놓은 시는 껍질이 질기고 우울하다
국물은 짜고 건더기는 싱거워
다른 사람의 봄비를 입고 어색하게 출근하는 아침
당신은 제비꽃을 못 본 채 책을 보네
그러니까 잠깐 바람이 불기도 하지
비는 남의 젓가락으로 당신을 집어 먹네
국물과 봄비를 따라 버리고 건더기도 건져 버리고
빈 그릇에 구멍을 뚫고 제비꽃과 흙을 떠다 심어 놓으면
그것이 잘못 배달 된 시가 될지 몰라
보라색으로
계란 / 최호일
만일 내가 커다란 사람이었다면
떨어지는 비행기를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비행기가 바닥에 곤두박질한다
나는 애매하고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비행기를 손에 잡자마자 계란처럼 떨어뜨렸다
계란이 죽었다
점액질로 흘러내리는 승객들 승객들 승객들의 비명소리들
비행기를 하늘에서 놓치다니
나는 작은 사람이 되어 계란을 닦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놓여 있었다
계란처럼
아무렇지 않아서 슬퍼졌다
낙천주의자/최호일
그는 그림자를 샀다 비싼 것으로, 색깔이 환한 것으로
밥을 먹거나 심지어 운동을 할 때도 데리고 다녔다 그는 특이한 거미를 수백 마리 키우거나 자살
을 시도하는 게 취미였다
그러나 잘 죽어지지 않았다
팔을 자르고 몸의 안쪽을 뜯어 내 조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로 제
목을 달았다 그런 복잡하고 불편한 자세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엎드려 책을 볼 때는 혹시 잠든 뱀이 아니었을까
뱀의 배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얼굴이 없었으므로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다녔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그를 원망하며 멀리 달아
나려 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도박에 빠지고 취미가 바뀌어 머리가 두 개거나 귀가 어두운 원
숭이를 수집하고 시집을 읽으며 지식인이 되기 시작했다
점점 그가 되어 갔다
원숭이가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보리밥에 상추를 싸 먹으며
어느 날 커다란 망치로 그를 때려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낙천주의자가 되었다
죽는 것을 잊어버리고
기린/최호일
아파트 화단에서 노인이 어느 모과를 따고 있다
어디서 구했는지
긴 대나무 막대기 끝에 갈고리를 잘도 붙여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그걸 피하느라
나의 인생이 조금 휘어졌다
모과에 맞아 죽으면 어떻게 하나
노인의 침묵 뒤에는 홀로 전장에 남겨진 병사처럼
노랗게 변한 시간과 두려움과
다급한 냄새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과나무는
잘못 떨어진 모과에
노인이 맞아 죽기를 바라는 눈치는 아닌 듯했다
노인이
어서 빨리 기린이 되기를 바라는 듯 했다
기린과 노인의 곤란하고 유기적인 관계 때문에
모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우아하게 길을 걸어가려고 하던 여자들도
모과 속에서 나와
벌레처럼 기어다녔다
흘러간 잉크/최호일
나무 그늘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여름 샤워를 하다 물빛이 너무 맑아 잉크를 물에 타면 물은 어떤 짐승으로 되돌아올까 피부의
느낌은 어떤 색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흘러간 물은 푸른색이어서 이미 푸
른 느낌이 지나가 버렸으므로
수건이 있었기 때문에 한 장의 여름이 초록색으로 지나갔다
전쟁을 준비한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횡단보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손을 흔들며 어색해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을은 떨어진 것이 많아서
연필심처럼 누구나 줍거나 부러뜨릴 수 있었다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가을날의 사진에는 반드시 여름의 기록이 필요하니까
모두가 모자를 눌러 쓰거나 벗고
이제 세상과 내일을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을이 찍힌 사진에는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날 버린 푸른 잉크를 탄 세숫물이 하수구를 지나
모두 지워져 있을 것이므로
기분으로 된 세계/최호일
다섯 장의 종이를 오려 기분을 만들었다
다섯 장의 종이가 되기 위해
팔과 다리가 모호해진다
아홉시가 되려다가 아홉시 이후가 되는 시곗바늘들 모든 밤이 저녁을 이해하고 아홉시를 용서했다
빗방울을 세기 위해 열 개의 손가락이 생겼고
맥주를 따다가 손을 발견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손목에
백합이 피어 있다
음료수 병을 지나 꽃과 부딪친다 나는 이 거리예요
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의 기분이 된다
기분이 필요한 다리를 건너
기분으로 만든 기둥에 대해
조금 춥다면 기침을 하자 겨울이 올 때까지
밤을 말하려다가 공을 놓치고 손이 으깨어졌다
컵이 깨져 잡을 수 없을 때
컴은 배경 음악이 없고
당신과 낭떠러지와 자동차 바퀴는 한통속이다
저기 날아다니는 것은 작은 벌레인가 시간의 눈인가
밤을 말하려다가
건반 위로 뛰어오르는 고양이를 이야기했다
고양이를 만나려면
고양이의 기분과 피아노가 필요하다
낙지를 던지다/최호일
산 낙지를 자르면서 심장을 찾는다
낙지의 심장은 어디에 있지
머리통에 들어 있나 발밑에 있나
다리가 되어 다리의 기원을 찾아 기어갔나
구름으로 가다가 구름을 잃어버리고 되돌아오고 있나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듣는다
분홍이 건너온다
심장이 없으면 노래가 없을 텐데
낙지를 던지고 분홍색 구멍을 만들었다
심장이 없는 곳으로
노래가 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배꽃 탄생에 대한 데생/최호일
A는 B를 그리려다가 배꽃을 그린다
어두운 곳에서 배밭을 그리고, 그리고 꽃잎을 그린다
어둠을 자세히 그려 넣는다
손과 발과 발바닥이 소리의 가운데를 밟고 건너는 소리를
배꽃이 A를 뚫고 지나간다 배나무 아래에 있던 자전거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발과 굴러가는 바퀴
가 그대로 있었으면
배꽃이 멈춰있으면 좋을 텐데언덕 아래로 사라진 자전거와 그림자를 놓치다
스위치를 켜자 배꽃을 놓치고
배꽃은 모든 사물의 B가 된다
경제적인 일/최호일
콜라를 사러 간다
콜라를 사기 위해 먼 아프리카로 간다
당신과 이 거리와 잠시 헤어지기 위해 그곳에 간다
손잡이가 없는 컵에 콜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컵이 없으면 그냥
다시 돌아오기 위해
시간이 잠시 남아 있으면 남아 있던 콜라를 다 마시고
비행기를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구름 속에 묻힌 채 잠을 자자
여기가 어디지
밤에는 왼손을 벌레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고
간판이 떨어진 병원에 들러
앓다가 돌아오자
병원 벽에는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낙서
내리는 빗방울
친구들은 웃고 또 웃겠지
콜라를 사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다니
비행기를 타고 가다 졸다니
나는 조금 웃는다
그곳에서 콜라를 마시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산다고
아프리카는 그러기 위한 장소
콜라를 그리워하며
콜라를 사러 아프리카로 가자
청춘/최호일
그는 어느 부대에 배치되었다
봄이 온 날
복싱 선수처럼 상급자에게 안면을 맞고 있다
무수한 주먹이 얼굴에 날아온다
운동장에 세 개의 네 개의 이등병이 생긴다
화창한 날씨가 생긴다
멀리서 보면 꽃 같다
군화를 신은 발이 그의 안면에 햇살처럼 쏟아지고
멀리 함성이 들린다
이대로 누워 있으면 봄이 다 지나가 버릴지 몰라
기차가 물을 빠져나와 쇠로 만든 물같이 흘러간다
그는 점점 궁금한 사람이 되고
구름이 된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먹을 환청처럼 내 뻗는다
주먹은 정확하고
어리석다
와 와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찹쌀로 만든 떡과 사이다를 먹던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이다와 떡과 구름 같은 것들이 배치된다
사이다는 달고 시원하다
봄은 뒤죽박죽되어 느린 그림으로 봐도
꽃 같다
컵/최호일
바닥에 쏟아진 물같이
죽은 사람에게 봉투를 주고 돌아설 때
컵은 실패하고
누가 이십 층에서 뛰어내려 구 층을 지나간다
그는 조금 전의 이십 층을 기억하고 있다
구름을 불러 잊고 있다 층과 층 사이에는
많은 계절이 있다
지금 이곳은 안전해
아직 컵은 시원하고 견고하다
안녕, 하고 웃었으면 좋겠는데
바닥이 나를 배신하고 애인으로 안는다면
비싼 컵이었다면 아까워라 파편은 어떻게 치우지
컵의 세계에서
손이 없다면 어떡하지
구름을 지나 컵이 잠시 후 팔 층으로 떨어질 때
너무 잡기 어려워
아래의 컵을 놓치고
컵의 아래를 잡고 있을 때
의자 이야기/최호일
의자가 어느 것을 뱉어낸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남자를 분홍색 여자의 분홍색 엉덩이를
모르는 할머니를 도둑놈을 불편한 가방을 뱉어낸다
새가 날아가고 분홍색이 날아간다
파인애플과
도둑놈의 코가 날아간다
별이 지고
천 년 동안 강물이 지나간 흔적들이
의자가 없다면 분홍이 없겠지
도둑이 없겠지
모든 이야기가 없겠지
우리는 이야기가 없어서 웃을 수가 없다
의자가 날아온다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열한 시 반/최호일
열한 시 반에 누가 보내준 것 같은 봄이다
누가 버린 것 같은 열한 시 반이다
잠깐이면 돼
빵을 먹고 손을 뒤에 감추고
시간이 다가와 검은 비닐봉지 같은 것을 놓고 갔다
그것을 주웠고 손에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시간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물이 되는 시간
나이를 알 수 없는 염소가 이쪽을 보는 시간
바다 깊은 곳에서
비가 내리고
멸치가 시간을 발명하고 담겨있던 접시를 버린다
멸치가 멸치의 머리를 버린다
백 년 후의 기차를 예약하고
껌을 씹으며 그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갈 때
열한 시 반이 완성된다
봄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니고
그때 맡았던 기다랗고 둥근 빵 냄새거나
빵이었던 기억이 난다
개 끈/최호일
빈 봉지로 배불러 가는 라면 집 쓰레기통처럼
늦은 폭설이 허기진 개밥그릇에
허드레 눈덩이를 곱배기로 던져 넣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내 발목을 물어뜯던 것들
개는 싱겁게 하늘을 보고 짖어대지만
라면은 죄송하게 젓가락까지 짜다
내 호주머니가 그런 것처럼
개밥그릇도 짭짤한 하루를 좋아할 것이다
쭈글쭈글한 공복이 개밥그릇 속에서
찬밥덩이를 흘리면서 받아먹고 있다
한 숟가락만, 감나무 가지가 손 내민다
땡볕이 주렁주렁 달라붙는 여름날에는
감나무는 그늘을 깔고 개를 달게 키울 것이다
눈 더미가 쌀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가
뼈까지 녹아 버릴 때
개는 밥그릇을 엎고 부들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내 따뜻한 끈이었던 시절처럼
개 끈은 당분간 개를 보호할 것이다
개가 끈을 끌고 가기도 하고
끈이 개를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개 끈의 길이만큼 간섭하고
개 끈의 길이만큼 용서할 것이다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넥타이들을
눈보라가 하나씩 잡아끌고 지나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 하얗게 지워지는 동안
라면은 국물과 뼈다귀까지 주름지고 있다
멍멍, 하고 밥이 다가 갈 때쯤
개의 절반이 꼬리라는 걸 처음 알았다
마당의 절반쯤, 희망에 묶여있다는 걸
웃음의 포즈/최호일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입이 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눈이 온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사랑한다고 말 하거나 욕을 하고 싶은데 아침이 사라진
것
당신과 커피와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생각이 삼각관계처럼 아무도 모르는 쪽으로 기우뚱한다
커피를 대신 마셔드립니다
대신 웃어드릴게요
스케이팅을 하는 광고 모델이 빙판 위에 넘어져 이상한 자세로 웃고 있다 사라진 입속의 다른 입이
티브이 속에서 관람용 입술로 웃는다
이 웃음은 아무것도 없는 공기 같은 거
드라마를 보고 토크쇼를 본 후 머리가 다쳐서 자작나무와 눈 오는 거리가 궁금한 사람들
스무 발자국의 숲속을 걸어가면 이상한 겨울이 끝날까요
새를 털면서
자작나무 색깔로 앉거나 서거나 걸어 갈 때
나무는 저쪽이 없지 하고 웃으면서
웃음도 손바닥을 찌르면 피가 날까 생각하면서
귀/최호일
귀는 귀고리처럼 궁금하고 구멍이 나있다
차가운 금속성 재질로 돼 있으며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귀고리를 걸기에 적당한 크기다
누가 밤의 창문 쪽으로 죽은 사람의 손을 잘라서 조용히 내밀 듯
귀는 막상 고요하다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는 고요를 먹고 산다
손에는 컵도 없이 아무런 공중도 없이
컵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이상한 물체도 없는
손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먹고 큰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여러 사람이 차례로 무어라고 속삭일 때
머리칼이 수초처럼 위로만 나부낄 때
물속에 잠겨 한 없이 물이 흘러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둥근 귀고리처럼
우리는 매일 사무적이다
벌레 먹은 시/최호일
이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이걸 봐
열무김치가 놓여있네
길모퉁이에서 가늘고 여린 열무김치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제품
정직하게 말하면 김치가 아니라 벌레 먹은 열무지만
열무김치로 소리 내어 읽네 아무려면 어때
시니까
벌레가 먹다 남긴
이걸 롯데 껌처럼 씹어 봐
아이들은 종국에는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나고
장난감을 만지며
거짓말을 습득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저 나뭇가지는 그림자를 복사하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골목에서 사람의 말을 버리고
발목을 자르고 노란 풍선을 날리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오후엔 담배를 끊고
모퉁이를 돌아 나와 열무 구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아무려면 어때 이 구멍으로 보면 모두
벌레 먹은 시 인걸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눈을 가졌을 뿐
코발트 블루/최호일
커다란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당신과 내 눈 사이에는 코발트 블루가 있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그곳에 오래 빠져죽고 싶은 색깔이 산다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지?
아냐,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야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 없이 긴 생각처럼
눈이 한 개 씩 더 있는 날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장 먼 길을 돌아서
물방울을 닦고 한쪽 눈이 없는 색처럼
아파트/최호일
깊은 산중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살지 않았다
오래 된 순서대로
계절마다 꽃이 피고, 눈이 왔다
음식 냄새가 사라지고 속도가 사라졌다 소파와 부부싸움이 문으로 사라
졌다
옷을 벗고 아침과 저녁이 부부처럼 살았다
계단이 사라지고
어제가 매일 사라지고
마침내 조용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골의 눈을 쪽쪽 빨아먹으며
시간이 살았다
사랑해
천사와 악마가 아주 귀여운 형태로 태어났다
바닥이 조금 갈라진 틈으로
깊은 산중이 사라졌다
귀여운 아이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위험하다/최호일
아침을 굶으려는 예수처럼 돌을 들어 사기 밥그릇을 깬다
둘러보면 위험한 물건은 더 많은 듯
나는 오 분 후에 태어나기로 한 유리컵
비오는 날 육백 번째 행성 베고니아 아침 찻집의
목이 긴 꽃병이다
누가 나를 돌로 찍어라
다른 곳 말고 말이 자꾸 새 나오는 정수리와 입을
그렇지 않으면 모든 존재는 당신의 양말을 뚫고
발바닥을 찌를 수 있다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았는데 꽃이 핀다
이것은 아주 오래 된 질문
나로부터 떠나 갈 나를 오 분 전에 지우겠다
당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내 몸과
위험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깨질 그릇을
등이 가렵거나 매일 아침이 오고
내가 예전처럼 태어나다 죽었더라도 돌을 들고
저녁엔 조개구이를 먹으러 몰려가는 사람들처럼
주저 말고 어서
밤의 남쪽/최호일
여기에 있다
오초 후에 터지는 다이너마이트처럼 생긴 그것은, 멀리 던지면 적의 손아귀에서 다시 돌아오는 그것은, 둥글고 길고, 지금 내가 말아서 가지고 있다
장난감으로 만들어 던지면 터질 것이다
공중에 칼을 자꾸 휘둘러도 밤이다
문서를 위조해 이름을 바꾼 첩자의 표정으로 국경을 빠져나오는 시간
어둠주의자의 손에는 커다란 솜사탕이 들려져있고
그것이 녹을 때까지 한없다
입술과 입이 없는 시간은 왜 선명하고 깊어지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밤은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한 장의 노을이 사라진 노을 속으로 페이지가 겹쳐서 넘어가듯
목구멍을 뚫고 들어와 마음과 뒤꿈치와 다음 마음에 끼워진 꼬치처럼
사과 껍질을 통과한 벌레처럼
우리는 예측하지 못한 세계에 들어와 있다
정자가 난자에게 처음 얘기하듯 조용히
그래, 하듯이
오늘은 밤이 남쪽으로 조금 걸어간 것 같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최호일
그곳에서 코고는 소리가 난다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도 섞여있다
벗은 여자가 들어있고 밤이 조금 전 보다 조금 더 깊었고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어지는 밤이다
그는 귀가 없는 사람이 되어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된다
코와 입과 눈과 머리통이 눈으로 변해버린 사람이 된다
갈비뼈를 새것으로 빼 여자를 만들어야하는 사람이 된다
뱀이 제 꼬리를 대가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먹어치우듯
시간이 제 몸을 삼키고 있는 걸 못 보는 사람이 되고
커다란 태아처럼 벗은 여자의 몸이 조금씩 벗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드디어 배경이 사라진 숲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코와 눈과 음부를 더 크고 아름답게 찢고 싶어 웃고 있는 여자다
모든 어둠은 불빛에서 태어나듯
그는 밤을 새것으로 바꿔야 되는 사람으로 환원된다
코와 가래침을 뱉지 않고 있는 여자를 꺼버리는 사람이 된다
밤이 눈을 크게 뜨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다 삼키고 조금 난감해하는 눈동자같이
자판기/최호일
만 원짜리 지폐를 밀어 넣으니 이른 아침이 튀어나왔다
국밥이 튀어나오고 악어가 튀어나왔다
도망을 다니는데
뚱뚱한 사랑이 튀어나왔으므로 갑자기 왼쪽이 없어졌다
서른 살 이후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시계가 먹통이 됐으며 핸드폰이 울렸다
가끔 감기에 걸렸지만 노란 모과를 물에 끓여 먹었다
공원의 별처럼 들국화를 오래 바라보기도 했는데
보라색 국화꽃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이면
누군가 호주머니를 털어갔다
어제는 오백 원짜리 달빛이 드나들었다
인류에게 끝없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쇠로 된 갑옷을 입고 깊은 바다에 홀로 들어가
커피를 쏟는 꿈을 꾸기도 했다
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땅땅 누가 몸을 자꾸 친다
참 재미있겠다
죽음의 저 너머를 들여다보는 맛이
허공/최호일
허공을 걸어 다닐 수 있다면
모든 계단은 지워지고
계단을 청소하는 사람들도 실직할 확률이 높다
5번과 6번 계단 사이에 넘어진 저 여자도
나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하늘을 날던 새가
어느 계단에 부딪쳐 울 것이다
우린 왜 아빠가 없어요?
어린 새가 물었다
하늘 모서리에 부딪쳐 죽었단다
너도 허공을 조심해라
감은 눈/최호일
감은 눈 속에는 우리나라의 소가 있고 풀밭이 들어있다 구름이 떠 있을 수 있으며 느리게 이별하는 장면도 방영되고 있다
감은 눈 속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들 피아노를 듣는 사람들은 담겨 있지 않고 다리가 없는 사람들의 옷을 흔드는 바람이 보인다 다시 볼 수 없는 텔레비전이 켜 있는 곳 잠시 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는 죽었으리라 본질적으로
세상의 헛간을 잠시 들여다 본 이후로 그는 영원히 죽었겠다 다정하게 죽은 사람들이 슬프게 조문할 수 없는 수법으로
어린 미나리 밭에는 어린 미나리 아닌 것 뿐 이렇게 채색 된 하늘은 어떻게 푸르게 삶아 먹나
그림이 가장 잘 보이는 저쪽으로
누가 감광 된 필름을 오늘 쪽으로 갖다 대나 오월의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여러 군데 부러진 사람의 생각처럼 바람과 바람이 드나들며 꿰매 놓은 형이상학적 시커먼 망막 속으로
아쿠아리우스/최호일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 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 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https://naver.me/xY45beB 당선취소
구월이 오는 법 / 최호일
칠월과 팔월 사이에 이월을 끼워 넣는다
호랑이띠 짜장면 곱빼기 빠져서 아직 자라지 않은 새끼발톱
시월과 십일월 사이에 사월을 끼워 넣는다
완벽한 청소부 고장 난 시계 우는 베짱이 매캐한 모기향
일월과 이월 사이에 삼월을 끼워 넣는다
교통사고 맛있는 티브이 우울한 노을 감수성 예민한 아기 기린
사월과 오월 사이에는 무얼 끼워 넣을까
덜 매운 양파 목포의 눈물 늙은 오소리 어금니 듣다 꺼버린 음악
오월과 유월 사이에는 아직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염소처럼 멀리 달아나는 칠월
십이월과 일월 사이에 식은 커피 냄새를 넣고 저으면
뱀과 의자가 나타나겠지
염소를 몰고
곧 구월이 올 거니까
제19회〈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최호일
저 곳 참치 / 최호일
참치를 보면 다른 별에 가서 넘어지고 싶어진다
동그란 깡통 참치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녔는지 깡통 속에서 살이 통통하게 쪘는지
지느러미와 내장이 없다
참치는 좀 더 외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온 듯하다 먼 훗날
비행접시를 타고 바닷가에 내린 어느 외계인처럼
사람들은 내용물을 버리고 깡통을 구워 먹을지 모른다
다 먹고 버린 참치를 차고 노는 아이들
참치를 숭배하는 자세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오다가
덜커덩 자전거가 어느 돌에 넘어졌다
저 곳으로 넘어지는 참치
저 돌은 어느 별에서 날아 왔을까 돌은
그곳에서 가시를 발라낸 비교적 딱딱한 참치일 수도 있고
저녁 어스름의 근원적인 고독일 수도 있다
아가미가 없는 참치
다낭, 단양 연가 / 최호일
혀가 짧은 사람이 발음하지 않으면 두 도시의 공통점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잠 안 자는 고양이, 한국계의 붉은 태양 사이로 옷 벗은 나비가 나비 옷을 걸치고 날아오고, 모르는 척 나이를 마음대로 꺼내 먹는 사람들이 안개 옷을 사 입고 다니는 곳
마음에 새겨진 뜨거운 얼음 문신처럼
방금 사라진 곳
긴 머리 달력이 거기 펄럭 웃고 있을 때, 바람이 늦은 고양이 울음으로 마을에 내려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잠깐 여는 것처럼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 다녀간 이름. 단양을 다낭이라고 발음하면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캄캄하게 지워지지
입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다시 아득해지지
그곳에서 밥을 짓고 첫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밤이 지나도록 나를 추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나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 다낭, 하고 불러보는 혀가 짧은 사람
왜 그곳을 늘 널리 떠나온 것일까? 집을 나온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구름의 아래쪽을 바라보는 게 취미생활. 멀리 습관성 구름이 떠가고 있다. 저 애매한 문장은 노을빛으로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어둠에 쌓이는 빛처럼, 사랑이 너무 짧아 혀가 꼬인 사람이라면 단양에 가면 다낭 팔경을 볼 수 있다. 들키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어도 태양의 속살과 야자수 옷깃이 선명하게 보인다. 마음 그늘 속으로 이봐요, 얼굴 없는 사람이 웃으며 오고 있다. 비가 그칠 때처럼 너의 이름을 쓴다. 검정색으로 붉게
다낭과 단양 사이에 핀 들꽃에 대해
그리고 나이를 알 수 없는 태양에 대해
당신은 참 붉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음부꽃 / 최호일
장다리꽃 밭에는 장다리꽃의 오후가 가득하다
장다리꽃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허공에는 나비가 가득하다
키가 큰 장다리꽃을 일부러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키가 큰 장다리꽃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먹은 계집애가 장다리꽃 노란 쇠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 둘 바람을 세며 오줌을 눌 때도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을 셀 때 보이는 꽃
바람 열 장이 들추어내고 있다.
시간을 얇게 저미다가 좀 더 크게 썰린 시간은
어금니로 씹으면 약간 소리가 난다
열두 살에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
나비는 날개가 고장난 것처럼 수십 년을 날아다닌다
보았다 장다리꽃
보았다 나비
내 머리에 바람이 분다고 나는 바람 밖에서 말했다
밤이 오고
달빛 아래라면 몰라도 어느 오후는
도화지에 그려놓고 잡아 다니면 주욱 찢어질 것이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 / 최호일
1
쓸쓸한 당신은, 배가 고프면 가까운 하늘을 비벼먹으세요. 날마다 처음 보는 세상처럼 외로운 날이면, 머리칼이 가장 푸른 바람을 잠깐 집어넣고, 깔깔 웃는 진달래도 따 넣고 벅벅 비비세요. 이 개성 있는 식당은 요즘 성업 중이라 당신의 개성은 무시해 버려요. 꼬리를 잘라버린 도마뱀의 짧은 인연도 그 상처도 아,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되지요. 머리를 감싸거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더라도 마지막 질문처럼 허기는 찾아와요. 거울도 깊이 잠드는 밤이면 내 마음을 뚝뚝 팔다리도 뚝, 머리통도 뚝, 한 통 속에 비벼 넣어요. 자폐증의 월요일과 싱싱한 주말도 살짝 하루를 속여 넣어주세요. 압정을 밟은 듯 묵직해서 만져보면 돌아누운 한밤의 앙상한 등줄기. 저런, 저 기사 아저씨는 배고픈지 막말도 잘해. 욕도 싱겁지 않게 섞어서…… 상처도 비벼놓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서 하느님도 못 알아볼 거예요. 정말 저 찬란한 아파트 불빛도 뻔한 거짓말이죠. 즐겁게 비벼드릴까요? 자동차와 당신과 즐거운 낭떠러지! 꽃피는 아침에 문득 꽃이 피었군요.
2
은하수 단지 분리수거 하는 날은 꼭 비만 오는 날. 비 오는 날 웃기는 정치인은 이쪽, 호주머니가 커다란 재벌은 저쪽 마대 자루. 아 참, 시인도 순서대로 분류해서 여기다 넣는 거 맞죠? 빈 깡통은 어디였더라…… 국물이 흘러요. 이렇게 낡은 생각도 한번 비에 젖나요. 그런데 갈수록 자루가 모자라네. 최신형 우주인이 쓰다버린 첫사랑과 그곳을 거닐던 오솔길과 새로운 농담은 버릴 데가 없어요. 이 그림은 앤디 워홀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돼 격리해야겠군요. 지식은 갈수록 다리를 절어서 돈을 주고 버려야지. 아주 오래 된 어둠은 밤에 살짝 버리면 감쪽같아. 불륜은 가져오지 마세요. 아파트 주민이 아니잖아요. 저 빗줄기 아저씨, 왜 발등을 자꾸 밟으실까. 개성도 좋지만 그렇게 급하시면, 화장장으로 해서 강물에 공짜로 띄워 드릴까요? 저런, 화단 위에 당신이 당신의 몸을 우산 없이 가끔 버리기도 하는군요. 비가 오는 날은 이쪽, 비가 오고 분리수거 하는 날은 은하수 저쪽.
그 겨울의 氣象圖 / 최호일
신용불량의 날씨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공터에는 늙은 개가 전단지를 훑어보면서
사건을 파헤치고 있었고
첫눈이 현장을 덮치고 있었다
자주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려서인지
노파의 목도리는 첫눈이 아니라
오래된 가난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극에서 무작정 실려온 곰의 행렬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문을 열어놓고
눈길을 핑계삼아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확성기를 통해 분양사기단의 비리를
부풀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불고 있고
현수막이 눈송이를 자꾸 털어내면서
저 혼자 검붉은 혈서를 써놓고 있었다
마음의 혈관을 후끈, 면도날이 지나간다
아픔이 선명하게 빠져나간다
이제, 시장 입구에 신문지 같은 하루를 펴놓고
어둠이 저벅저벅 걸어올 때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눈물로 다듬어 파는 일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비교적 짧게 노파의 소식이
첫눈 소식에 묻혀 광고 문구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화면 위로 뱉어낸 가래침이
밥상 위에 하얗게 튄다
눈 그친 공터에는 개의 발자국이
그 해 겨울, 눈이 내린 기상도를 그려놓고
어디론가 개를 데리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