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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의 몰락 속편 3부 (5개의 에피소드)
#예수회 #공산주의 #러시아에 대한 복수 #카발 FRB로 미국과 세계 금융 장악 #히틀러에게 랩틸의 피가 흐른다.
3-1. 예수회, 공산주의를 만들어 러시아에 복수하다. 러시아 혁명.
앞서 우리는, 카발이 유럽을 파괴하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카발의 복수는 러시아 혁명,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카발은 러시아에 대한 복수에 착수했다. 다시 한번, 카발의 범죄 파트너인 로스차일드의 자금으로 카발은 러시아 혁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레닌이 꼭두각시이자 대리인으로 쓰였다. 그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레닌은 칼 마스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공산주의의 창립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독일인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인이었으나 오랜 망명 생활 탓에(핀란드, 스위스, 영국, 독일)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레닌은 이미 러시아 인이 아니었다. 레닌은 완벽하게 서구화되어 있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책자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1848 Communist Manifesto) 레닌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뿐 아니라, 그의 예수회 배경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예수회' 학교에서 훈련 받은 후 영국 대영 박물관에서 공산주의 교리를 교육 받았다. 이는 예수회 성직자였던 알베르토 리베라의 내부 고발이다. 독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예수회 학교의 보조 주교였다. 비스마르크는 '북독일의 관보'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예수회 성직자 겸 '예수회 모임'의 수도회장인 Peter Becks의 지시를 받는다".
레닌에게 예수회의 영향을 준 사람이 더 있다. 그의 오른팔인 펠릭스 주진스키이다. 주진스키는 소비에트의 비밀 경찰의 수장이었으며 예수회를 열렬이 칭송하는 자였다. 더우기 레닌은 1922년, 공식적으로 '예수회를 러시아에 다시 받아들였다. 그 당시 공산주의는 종교를 금지하였기에 예수회 승인은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공산주의가 예수회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17~18세기, 예수회는 파라과이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그들의 규모는 축소시켰다. 재림 카톨릭 백과사전은 '재산의 조건'에 관한 설명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경제의 기반이었다. 토지와 그 위의 서 있는 모든 것이 공산주의의 것이었다. 토지는 토착민의 지도자들에게 분배되었고, 다시 그 휘하의 가족들에게 할당되었다 농기구와 소는 공동 소유에서 빌렸다. 땅과 집을 파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과연 공산주의자들 답다. '사회적 정의'라는 용어도 예수회가 만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 그런 이름을 붙인 이는, 예수회 소속이였다 (Luigi Taparelli d'Azelio Sagio teoretico di dritto).
레닌은 예수회의 꼭두각시였다. 카발은 그로 하여금, 러시아를 불안하게 만들고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레닌은 러시아와 러시아 인을 증오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들을 소개한다. 나는 러시아에 침을 뱉는다. 정부가 존재하는 한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는 곳에는 정부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인 90%가 죽더라도, 나머지 10%는 공산주의 하에서 살게하라.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에 대한 예수회의 공격이었다. 그들의 동기는 복수!!! 그들의 앞잡이는 레닌 !!! 그들의 도구는 볼셰비키 당원 !!!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과 판박이였다. 1917~1923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수 백만이 죽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연방을 수립한 후에야, 러시아 혁명이 종식되었다.
3-2. 카발 FRB를 세워 미국과 세계 금융을 장악하다
제2 차 세계 대전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를 기절 초풍케 한 사건을 공유하겠다. 계속 주목하라. 미국에서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다. 전편인 카발의 몰락 part 2에서, 미국 연준(FRB)가 1913년에 설립된 것을 기억하는가? 모든 은행들을 거느리는 FRB
로스차일드를 비롯하여 몇몇의 카발 패밀리들이 소유하고 있다. FRB 설립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3명의 대부호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기억나는가?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편리하게도 그들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FRB가 설립되었다. 그 당시 미국에는 21,000개의 은행이 FRB의 관리 밖에 있었다. 카발이 그냥 보고 있었을 리가 없다. 누구 하나 자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 세계 역사속에서 반복해서 증명되듯이.
1918년에는, 제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FRB 수립 후 1년 만의 일이었다. 1914~1918년 사이에, FRB는 통화 공급을 2배로 늘렸었다. 전국적으로 대출이 폭증했다. 전쟁이 끝난 1920년, FRB는 통화 공급을 줄였다. 5,500개의 경쟁 은행이 파산했다. 이들을 FRB가 거저 사들였다. 1921 ~ 1929년 사이에 FRB는 다시 통화 공급을 늘렸다. 대출이 너무 쉬었다. 운명의 1929년 10월 23일이 되었다. 주식 3,600만 주가 미친듯이 매도되었다. 누가 그랬을까? 그리 어려운 추측이 아닐 것이다.
다음 날인 10월 24일 오전 9시, 월 스트리트는 문을 닫았다. 투자자들이 건물 밖에 모여 들었다. 쇼킹 상태에서 그들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대출은 회수되었고, 투자자들은 그들의 주식을 팔아 치워야만 했다. 이 사건은 "월가의 붕괴"라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월가의 붕괴로 인해 다른 나라들도 카발에게 굴복되었다. FRB의 관리 밖에 있던 16,000개의 경쟁 은행이 파산했다. FRB는 이 은행들도 거저 주워 담았다. 이 사건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약탈"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치 않았다. FRB는 통화를 30% 이상 더 줄였다. 미국 전역에 기근을 촉발했다.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런 수법을 써먹어 왔다. 주식 시장 조작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대신 자신들의 부와 힘을 더욱 축적해 나갔다. 맥페든 의원은 공포에 질렸다. FRB를 소유한 은행가를 상대로, 탄핵 절차에 착수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가 즉시 자살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연회에서 독살되었다. 그리고 FRB 탄핵은 중단되었다. 카발의 일에는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월가가 붕괴된 4년 뒤인 1933년, FRB는 경기 침체 탈출을 명분으로 정부를 움직여서 전국적으로 금을 압수했다. 위반 시에는 10년 형에 처했다. FRB의 압박에 굴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가난한 이들이 금을 포기토록 하는, 행정 명령 6102에 서명했다.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가진 게 없어졌다.
금 본위는 사라졌다. 이제 카발은 통화 공급량 조작에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되었다. 카발을 대적할 상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13년에는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정부가 FRB에 지급하는 돈을 감당하는 용도였다. 전편의 2부에서 언급했듯이 소득세는 불법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3-3. 카발 월가를 붕괴시켜 히틀러 나치당에게 카페트를 깔아주었다
월가 붕괴를 신호로 FRB가 모든 국제 채무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독일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은 희생자에게 보상해야 했다. 독일은 국토와 경제를 제건하기 위해 자금 대출이 절실했다. FRB가 대출을 회수하자 독일 경제는 무너졌다. 독일은 깊고 깊은 침체에 빠졌다. 그해 겨울, 대략 200만의 실업자가 생겼다. 3년이 채 되기 전에 그 수는 3배가 되었다. 실업율이 40%에 도달한 것이다. 이들을 돕기 위한 정부의 지출이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절망적으로 독일 총통은 실업자 지원을 중단했다.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총통이 여럿 바뀌었다. 누구도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카발의 귀에는 음악 소리로 들렸다.
시민들은 극좌파 공산당과 극우파 나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그는 의회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절대 권력은 가지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고작 4주 후에 베를린의 독일 국회 의사당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불탔다. 히틀러는 이 사건으로 대통령 힌덴버그를 움직였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비상 법령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법령은 발언, 집회, 사생활, 언론에 대한 자유를 폐지시켰다. 이 법령으로, 개인 재산 소유 권리 및 투옥 전 재판 받을 권리가 사라졌다. 또한 전화 및 통신 도청을 합법화했다.
나찌의 반대자로 간주되는 사람을 투옥하는 법적 근거로도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투옥될 수 있었다. 그날 밤, 4,000명 이상이 SA(돌격대)에 의해 체포, 투옥, 고문을 받았다. 히틀러는 그의 주적인 공산당의 지도자를 투옥시킬 수 있었고
선거 기간 동안 공산당은 무너졌다. 히틀러의 SA는 그이 다른 적들을 위협했고 히틀러는 강제 법안을 추진하였다. 이 법안에 따라, 히틀러는 향후 4년 간 의회 동의 없이도 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심지어 모든 정당을 금지시켰다. 나찌 당만 존재하도록 허락되었다.
완전한 독재를 위한 마지막 장애물은 1934년 6월 13일에 처리되었다. 그 날을 긴 칼의 밤이라 부른다. 요구 사항을 내세우던 400명의 돌격대(SA) 멤버들이 친위부대(SS)에 의해 처형되었다. 2 달 뒤, 히틀러는, 독일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총통이 되었다. 대통령, 수상, 군대의 수장이 된 것이다. 군인들은 국가가 아니라,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받쳐야했다. 이는 예수회의 방식이다!!! 예수회가 최고 사령관에게 바쳤던 절대 복종 서약이 떠오르는가?
3-4. 히틀러는 로스차일드의 사생아 혈통이다
도대체 히틀러란 작자가 누구였는가? 히틀러는 흥미로운 가족 출신이다. 어머니는 클라라 (Klara Polzl). 아버지는 알로이스 (Alois Hitler) 였다. 히틀러의 할머니 스토리를 따라가 보자. 할머니의 이름은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이다. (Maria Anna Schicklgruber). 그녀는, 돌레스하임 근처의 스톤스 출신이며, 시골 농부의 딸이었다. 그녀는, 42세까지 독신이었는데 아들인 알로이스를 출산했다. (훗날 알로이스는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를 1846년 9월에 임신했는데 그 때는 비엔나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안셀름 로스차일드의 하녀였다. Anselm Salomon von Rothchild.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안셀름 로쓰차일드는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알로이스는 그녀의 고향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알로이스의 생부를 숨겼다. 힘 있는 누군가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여생 동안 이를 비밀로 했다. 알로이스의 생부는 마리아와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알로이스가 5살 때 마리아가 결혼했다.
알로이스의 새아버지의 성이 히틀러였다 (요한 게오르그 히틀러) 그를 아돌프 히틀러의 생부라고 믿는 연구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기 자식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알로이스는 40세가 되어서야 돌연, 그의 성을 양아버지를 따라 히틀러로 바꾸었다. 알로이스는 양아버지 요한 히틀러 밑에서도 35년 동안을 어머니의 성 시클그루버를 썼었다. 알로이스가 요한 히틀러의 친자라면 왜 그리 엄마의 성을 사용했을까?
알로이스는 클라라와 결혼했다. 그의 세번째 결혼이었다. 6명의 아이가 있었고 4명은 어릴 때 죽었다. 2명만 살아 남았다. 아돌프 히틀러와 누이 파울라 히틀러였다. 알로이스의 생부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몇 몇 이름이 거론되었다. 레오폴드 프랑켄베르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 히틀러 양아버지의 형제?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친부라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로스차일드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미끼였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가 하녀 마리아를 임신시켰다는 근거는 있는가?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알로이스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836년 9월로 가보자. 런던에 있는 로쓰차일드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마리아는 안셀름 로스차일드의 하녀로 일했다. 마리아를 강간한 로스차일드 용의자는 2명이다.
한 명은 아들인 안셀름 로쓰차일드. 그는 당시 32살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안셀름의 아버지. 72세의 살로만 로스차일드이다. 로스차일드의 기록물 중에는, 아들 안젤름이 런던의 로스차일드 은행과 주고 받은 수백 통의 서신이 있다. 이 서신들에 따르면 마리아가 파리에서 임신할 당시, 안젤름 로스차일드는 비엔나에 있었다. 반면에 안셀름의 아버지인 살로만 로스차일드는 마리아와 함께 파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일까?
히틀러가 로스차일드 혈통이라는 두번째 증거는 이렇다. 아돌프 히틀러의 친부인 알로이스는 40세 때인 1876년, 갑자기 막대한 돈을 상속받았다. 히틀러 가문은 돈이 없었는데 이 돈은 누가 준 것일까? 안셀름 로스차일드는 그의 재산 상속이 법원에서 승인되기 1년 반 전에 죽었다. 로스차일드의 사생아닌 알로이스가 양아버지 성을 따라 히틀러로 개명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상속 받으려면 성을 바꾸라는 로스차일드의 요청 때문이었을까? 로스차일드의 혈통임을 추척할 수 없도록 아예 성을 히틀러로 바꾼 것인가? 로스차일드 가문은 공식적으로는 유대인임을 명심하라.
그들은 러시아 왕의 압박에 못견뎌 유대인으로 위장한 바발로니아 카자리안이다. 당신은 그들을 가짜 유대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는 진짜 유대인 출신이라고 믿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로스차일드 혈통임이 알려지면 엄청난 스캔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돌프 히틀러가 로스차일드 혈통에 연결되는 모든 흔적은 지워야했다.
1921년, 뮌헨 포스트는 나찌당의 초기 당원들이 돌려보던 팜플렛을 입수했다. 그 팜플렛의 제목은 '아돌프 히틀러는 배신자'였다. "그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신문은, '히틀러가 유대 자본을 옹호'하고 '그 자신도 유대인처럼 행동한다'고 고발했다. 뮌헨 포스트는 그 팜플렛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 날, 뮌헨 포스트는 탈탈 털렸다. 편집인과 작가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의 소식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스트리아 총통인 돌퍼스는 히틀러의 뿌리를 두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1932년 첫번째 조사 결과는 다음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42세 미혼 여성과 신원 미상인 아버지 사이의 사생아였다. 두번째 조사 결과는 "히틀러의 엄마는 비엔나에 있는 로쓰차일드 남작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다" 였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를 조사한 오스트리아 수상의 암살을 지시했다.
아돌프 히트러는, 조카인 윌리암 히틀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 출신이며 어느 가문 출신인 지를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된다. 히틀러를 로스차일드와 연결하는 모든 증거를 삭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히틀러의 할머니 마리아의 고향 돌레하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모두가 히틀러의 명령이었다. 히틀러도 사람인 이상 조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로스차일드라고 믿는다. 그는 사생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카발의 몰락 제5부에서 사생아인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앞에 내세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국 엘리트 사회와 피자게이트에서 중요한 일에 앞장서도록 내세워 졌었다. 아돌프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카발이 벌인 또 다른 전쟁인 2차 세계대전에 내세워졌다.
3-5. 열열한 예수회 숭배자 히틀러
히틀러는 예수회 창립자인 Ignatius of Layola를 열렬히 숭배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카톨릭의 위계 조직보다 대단한 것은 지금껏 이 땅에 없었다"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우리 당으로 옮겨왔다' 아돌프 히틀러 (1939)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를 친위부대 최고직에 앉혔다. 그가 바로 홀로코스트의 고안자 겸 운영자였다. 히틀러는 힘러를 예수회 최고 사령관이었던 Ignatius of Loyola에 비유했다. 친위 조직 SS는 예수회의 원칙을 본 따 힘러가 만들었다. 힘러는 Ingatius of Loyola의 규정과 영적 훈련을 카피하고자 했다. 힘러의 직위인 친위대 최고 사령관은 예수회의 장군에 해당된다.
친위대의 전체 구조와 방향은 카톨릭 교회의 위계 질서의 판박이다. 절대 복종이 최고의 규칙이었다. 모든 명령은 토를 달지 말고 실행되어야 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전쟁과 무기 산업에서 일자리를 만들었다. 그가 독일의 골치거리라고 비난했던 자들도 제거했다. 유대인, 집시, 공산장,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들의 모든 돈도 몰수했다.
히틀러는 최고 선동 조직의 지원을 받았다. 친위대의 조셉 괴벨스가 이끄는 선동 조직이다. 그는 독일인들을 세뇌시켰다. 히틀러는 메시아다. 유대인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8,500만이 죽었다.
그러나 카발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당신이 알다시피,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대인 수 십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놀랍게도 유대인의 대량 이주는 이미 1917년에 계획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22년 전이다. 외무부장관 발포어가 영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에게 넘겼다. 장기판의 말처럼, 주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건내진 것이다. 누구일지 짐작이 가는가?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이다.
여기서 잠깐, 1917년이라니?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도 전이다. 그들은 어떻게 유대인 대량 학살이 시작도 되기 전에 유대인의 새로운 정착지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서명한 문서에 있다.
친애하는 로쓰차일드 남작. 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시온주의 유대인의 열망에 대한 공감을 전합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이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유대인 공동체 시민의 권리, 종교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국가에서 유대인이 향유하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이 소식을 시온주의 연합에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국 외무무 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유대인 조차도 이 사실을 몰랐다. 카발이 벌린 또 다른 한 판의 체스이다. 유대인에게 제공된 이스라엘 땅은 또 한번의 분할 및 정복 전략이었다. 결국 이것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켰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과 간의 전쟁이다. 발포어의 선언이 있은 지 22년 뒤에 유대인은 2차 대전 중에 의도적으로 살해당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로스차일드와 카발들에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카발 구성원 중 많은 이의 이름이 솔로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템플 오브 솔로몬, 템플 마운트이 있는 이스라엘 땅은 카발의 중요한 우선 순위이다. 우리는 곧 그 이유와 그들의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을 공개할 것이다. 지금은 수 백만의 유대인이 그 곳에 도착하기 위하여 희생된다.
계속해서, 더 많은 전쟁이 잇따른다. 베트남 전쟁!!! 소련과의 냉전!!! 모든 전쟁이 카발이 양쪽에서 선동하고, 양쪽 모두에 돈을 댄 전쟁이다. 카발이 기획한 전쟁에 휩싸여, 우리는 공포에 질리고, 무기력, 빈곤, 분열하고, 비굴해져 갔다. 그들의 전략을 이해하고 알아 본다면, 당신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최악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면서 카발은 전략을 수정했다. 카발의 세계 정복 계획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3개의 키워드는 여전하다. 증오, 복수, 경멸. 이 3개의 키워드가 1개의 문서에서 완벽하게 결합되었다. 시온 의정서!!! 시온의 지혜로운 지도자들이 주는 규약.
모든 전쟁은 카발이 일으켰다. 모든 것이 계획되었고 카발의 악한 계획에 필요한 꼭두각시들이 동원되었다. 카발의 목표는 더 많은 돈을 모으고 사람들을 통제할, 더 큰 힘을 얻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을 뿐이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수 백만 명이 사라졌다. 카발과 반대 편에 서서 소리를 높힌 사람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궁극의 희생양인 (진짜) 유대인들은, 카발이 이스라엘을 차지하려고 고의로 희생 시켰다. 드디어 시오니스트가 이스라엘을 인수했다. 태초부터 이스라엘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또 다른 카발 전쟁으로 정복되었다.
현재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의 상황이 나찌 독일과 닮아 있다. 히틀러는 비상법으로부터 시작했다. 현재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도 비상법이 발효 중이다, 히틀러는 비상법에 이어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독재자에게 필요한 완전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더 준비했을까? 4부에서 답을 찾아본다. 3부 끝.
첫댓글
고맙습니다. lightworker님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세계사는 카발의 역사입니다. 대부분을 숨겼고, 조작하면서 어쩔수 없이 공개한 것도 거의 다 꼭두각시들입니다.
역사는 완전히 새로 써야 될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청하신 영상 2개 럼블에 올렸습니다^^
@jump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밀리언달러베이비님
점프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세상님
감사합니다. 재미있어요. 저 내용에 상세한 역사나 상황. 단어. 이름등이 저는 약한데 고맙습니다. 굵직하게만 알고 세계정세 나열로는 못 만들고 딸리는데 관심무라서 애쓰썼어요
응원 메세지 고맙습니다. 우주저편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BoOm님
다음편이 기다려 지네요~
감사합니다 ^^
다음편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로마2님
오타 발견! 1970년 러시아 혁명 => 1917년으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이라님^^
수정하였습니다~
엄청난 저들의 날조된 역사입니다. 읽을때마다 놀라고 믿어지지 않고 그러네요.
그래도 DNA를 따라가다보면 어쩔수 없이 맞춰지는 퍼즐입니다! 트뤼도가 카스트로의 아들인 것처럼요.
2차 대전때 수백만의 유대인들의 희생은 이스라엘 건국시 진짜 유대인들이 못 들어오게 하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으로 읽히는데요,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모든 카발들의 몰락을, 그들의 마지막을 EBS를 통해서 볼 수 있길요...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