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할아버지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koringenieur]

어제 아침 고르바초프 서거라는 소식을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개혁가, 참 레닌주의자, 망국노, 역적...뭐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요. 뭐가 됐든 제가 알던 20세기가 또 한 장 넘어가는 기분이라 아쉽고 착잡하고 그랬습니다. 이제 한 십 년 더 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릿적 이야기를 하냐"고 타박을 받을까요? 슬픕니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멸망케 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를 위해 친구와 화상으로 만나서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어떻게? 보드게임으로요. Twilight struggle (황혼의 투쟁)입니다. ㅋㅋ 역사-보드게임 쪽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게임인데 소련과 미국으로 냉전시대를 경영하는 수작이죠.

자세한 설명은 다른 분의 옛글로 대신합니다. https://cafe.daum.net/Europa/H2b/47519

Daum 카페

Tabletop simulator라고 보드게임 시뮬레이터에 이 게임이 있어서 했습니다.

베를린 봉쇄로 다 굶어 죽으면서 서독이 중립으로 돌아서고 남조선이 공산화하고 읍읍 동남아 도미노에 아주 소련판이었습니다.

베를린 봉쇄. 미국이 들고 있는 카드를 버려서 3점을 서독에 지원하지 않으면 서백림이 굶어죽는다! (미국 영향력 상실)

적색 공포-매카시의 등장. 소련이 발동하면 미국이 쓰는 모든 카드의 점수를 1 줄인다. 조 매카시는 소련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턴 라운드 중간에 빨갱이 소동을 내는 바람에 미국이 예비로 남긴 3점 카드가 2점이 되어 베를린 봉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매카시즘은 유령같이 남아서 고르비 시대에 다시 미국을 강타한다.

한국전쟁. 설명 안 해도 아는 그것. 게임에서도 공산 블록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정당한 민중혁명으로(?) 좌익이 집권했다.

중동에서는 다이나믹하게 온갖 무력정변으로 모든 나라가 미국 괴뢰가 되는 마당에 이스라엘이 소련편이 돼서 엄청 웃겼네요. 그런데 또 이슬람혁명도 크게 터지고. 정변 정변의 연속. 한편 남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이 "내가 지더라도 에비타만은 없앤다!" (왜?) 고 해서 치열하게 선거전(세력재편)하다가 덤으로 옆나라 아옌데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고르비 아저씨 등장...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등장. 유럽 전역에 소련 영향력 6을 자유 배치한다. 막강한 카드.

유럽에 붉은 물결이 갑자기 넘치면서 서독까지 잠시 소련과 동맹 맺을 수준까지 가서 레이건이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 기세를 타서 여유롭게 레이건의 베를린 연설을 허용했다가 (이 카드게임은 소련이 소련 카드를 내면 카드의 점수로 일을 할지 그냥 사건을 일으킬지 정할 수 있지만, 소련이 미국 카드를 내면 미국 사건이 자동 발생합니다. 호기롭게 소련이 카드를 내 준 거죠.) 동독에서 털릴 뻔했습니다. 동독 첫 재편에서 각자 주사위를 굴리는데 미국이 6, 소련이 1이 나오는 바람에 좌익 세력이 쫙 망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이후 미국이 잘 못해서 동독에서 영향력이 빠지는 바람에 살았습니다.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이 벽을 부수시오!" 레이건이 브란덴부르크에 등장하면 미국이 지정한 유럽 국가에서 정권교체 시도가 발생한다. 엄청난 카드.

그런데 레이건 아저씨도 호기롭게 탈스탈린화를 허용합니다. 아니 소련이 아직까지 스탈린주의 국가였어?

스탈린의 초상을 불태우는 인민. 스탈린주의 국가에서 소련 영향력 최대 4가 감소하는 대신, 미국이 통제하지 않는 나라에 소련 영향력 최대 4가 상승한다.

우리 고르비 아저씨가 큰 일을 냈습니다. 피델의 쿠바만 고고히 서 있던 중미에 붉은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는 콜롬비아에서, 니카라과에서 대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련 승리로 끝났네요. 재미있었습니다. 이정도면 우리 고르비 할아버지께서도 저승에서라도 한을 좀 풀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ㅎㅎ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1931.03.02. - 2022.08.30.) 냉전기를 상징하는 (아마도) 마지막 위인. 편히 영면하시길.

참고로, 황혼의 투쟁은 스팀 stand-only 판으로도 있습니다. 카드 사진은 다 여기서 가져왔습니다. 할인할 때 사면 만원이면 사요. 컴퓨터을 상대로 한 사진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어...사진의 상태가??

[루드비히 베크]

어랏??!!

[koringenieur]

분명히 사진 찍을 때는 저게 아니었는데;

[인생의별빛]

미국이 우주개발을 너무 과도하게 한 게 패인이었을 수 있겠네요. 아시아에서 밀리면 진짜 답이 없는데...

[koringenieur]

소련이 유리한 타이밍에 유럽-아시아-동남아시아 점수계산이 다 터지는 바람에 갑자기 기울었어요.
또 너무 오랜만에 해서 미국이 감을 좀 잃은 것도 있고, 탈스탈린화같이 서로 말도 안되는 카드를 꺼내는 것처럼 컨셉플레이를 조금 했습니다.

그거와 별개로 우주개발은 스탈린시기부터 매 턴마다 미소 양국이 비슷하게 많이 시도했는데..이 세계관에는 코룔료프가 없었나봐요. 소련만 족족 실패해서 저렇게 됐어요.

[인생의별빛]

점수계산을 잘 터뜨리는 것, 그리고 이번 라운드에 점수 터질 가능성 있는 대륙에 집중하는 것까지도 다 합쳐서 전략이니까요.
아무튼 유럽은 너무 변화가 없고, 중동 이하는 너무 변화가 심해서, 결국 아시아를 먹고 버티는 쪽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해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리고 우주개발은 많이 쓰면 오히려 함정인 기능이라서... 저는 달 궤도선도 채 못 가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하긴 그것도 컨셉플레이일 수는 있겠죠 ㅎㅎ

[곰나루]

저도 황투나 땡겨야겠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