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멈췄던 발걸음은, 예상치 못한 도적의 습격과
두 사람의 부상으로 인해 거의 하루를 소비하고 난 뒤에야 다시 내딛
을 수 있었다.
알트웰까지 이틀 정도로 예상했던 시간은 부상 덕분에 더욱 늘어나 버
렸지만, 마침 도적들이 타고 온 말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어서 그것을
잡아탄 덕분에 오히려 예정에서 반나절 정도 더 단축시킬 수 있었다.
어차피 버려지는 말들이기에 먹을 것도 없는 사막에서 굶어죽게 하는
것 보다는 타고 가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각자의 짐을 정리하여 안장 뒤에 단단히 묶어놓고, 그는 에즐란의 도
움을 받아 겨우겨우 말에 탈 수 있었다. 왼쪽 어깨가 욱신거려 고삐
도 한 손으로 잡아야만 했다. 그의 다리에 매인 붕대를 미안한 표정으
로 바라보던 에즐란도 곧 자신의 말에 올라타서 가능한 한 천천히 말
을 몰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면 충격으로 그의 몸이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뭐가...말이죠?”
“어제 말이에요.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까지 봤는데, 어째서
그 다음 순간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었죠? 그때 서 있는 자세도
도저히 총에 맞은 사람 같지 않았다구요.”
“......”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기드온이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넌 인간이
아니란 말이냐!’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름, 나이, 고향이나 버릇,
식성이나 심지어는 가족관계 같은 것도.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굳은 살 하나 박혀있지 않은,
최근에 사막을 통과하면서 조금은 거칠어지고 검게 탔다는 것만 제외
한다면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손바닥. 검은커녕 막대기도 휘둘러보
지 않은 듯한 손바닥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분명 어젯밤 도적들을 상대로 총도 아닌 검을 들고
압도적인 싸움을 했었다. 검을 쓰는 손놀림은 무척이나 능숙하고 또
한 자연스러워서, 그조차도 순간적으로 자신이 예전에 검을 사용했던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정말로......뭐였을까?”
“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얼버무리며 그는 펼쳤던 손바닥을 꽉 쥐어보
았다.
심각한 얼굴의 그를 바라보던 에즐란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얼굴을
활짝 펴면서 내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름 안 가르쳐줬죠? 여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알았다면, 진작에 가르쳐 줬을 거에요.”
“에?”
“모른다는 말이에요.”
라며, 그는 힘없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그
의 말에 에즐란은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한마디를 내뱉을 수가 있었다.
“기억상실증?”
“아무래도.”
“언제...부터?”
“일주일? 가장 최근의 기억이 그때의 것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에요? 나이나 여행 목적 같은 것도?”
그의 고개가 작게 끄덕였다.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춰 그와 나란히 선
그녀는, 이해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
작했다.
침묵이 둘 사이의 공간을 한참동안 맴돌다가, 에즐란이 탄 말의 투레
질 소리에 스러져 갈 즈음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내가 지어줘도 괜찮아요?”
“뭘......?”
“이름 말이에요, 이름. 하루 정도는 같이 다녀야 하는데 마땅히 뭐
라 부를 이름이 없으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해서.”
“......저야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럼, 앞으로는 ‘뮤(Mu)’라고 부를게요. 어때요?”
“뮤......?”
“불현 듯 생각난 거라. 당신의 처지랑 그 칼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려 뒤쪽의 짐 사이에 놓여있는 아르제노
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무슨 힌트를 얻은 건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
어 한 번 더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즐란은 손
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조금 어색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쓰인 글자, 고대어잖아요. 나도 별로 잘 알진 못하지만, 고
대어 중에 ‘뮤’가 딱 당신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조금 유
아틱 한가?”
“그다지......”
“에헤헤, 그럼 앞으로 당신의 이름은 뮤에요. 잘 기억해요.”
기쁜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뮤는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말이라면, 대체 무슨 뜻?
그가 묻자, 에즐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말했다.
“그거, 고대어로 ‘잊혀져버린, 사라져버린’이란 뜻이에요. 어울리
지 않아요?”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딱 들어맞는데요.”
“킥킥......아, 하지만 지금은 고대어 잘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티
나진 않을 거에요.”
"으음......어쨌든 감사합니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
리려다가 뮤는 동작을 멈추고 조금 전 그녀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
다. 이 검에 쓰인 글자가 고대어라고?
고대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해석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건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고, 뜻까지 알려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
다. 뮤는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에즐란에게 다시 한 번 질
문하였다.
“이 글자, 고대어라고 했죠?”
“네, 그런데요?”
“혹시......뜻 알아요?”
“뜻? 으음...잠시만요. 하도 배운지 오래돼서 잘 생각이......그러니
까 아르제노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듯,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미간을 찡그리고 곰곰
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알아냈다는 듯 손가락
을 탁 튕기면서 말했다.
과거의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단 하나의 열쇠, 며칠 전 생각했던 의미
그대로였던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단지 확신시켜 주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왠지 허탈해진 마음에, 뮤는 피식 하고 실소를 흘리며 아르제
노를 흘깃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그다지.”
“흐응......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뮤는 지금 아무런 계획 같은 것
없죠?”
“그렇긴 하지만......”
“그럼 나랑 같이 다닐래요? 목적도 없이 다니는 것보단 나랑 같이 다
니면서 세상 구경도 해 보고, 공부도 좀 하고.”
“공부?”
“이래뵈도 나 유적 조사원이거든요.”
유적조사원?
처음 듣는 직업에 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즐란
은 살짝 실소를 터트리며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수천 년 전의 이곳 아르폴라드는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단 하나의 나라만이 존재했었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제국이라 불리는
그 나라는 기관이나 무기가 발달한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과 자원-이것이 무엇인지는 에즐란도 알지 못했다-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당히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런,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제국이 한순간 멸망해 버렸다.
“멸망?”
“자세한 건 나도 몰라요. 아르폴라드 외의 다른 대륙에서 바다를 건
너 온-아, 우리가 사는 이 별이 둥글다는 건 알고 있죠? 그래서 바다
를 건너 끝없이 항해하면 결국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고 하죠. 아
무튼, 그래서 그 대륙에서 건너온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는 설이 있고, 또 화산 폭발이나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인해 멸망했다
는 말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남아있는 유적들의 상태가
너무나 온전했고 지형도 그때나 지금이나 극미한 차이만 뺀다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거든요.”
“그런가......”
“뭐, 이것도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말이지만요. 그 사람들은 제국이
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도 모를걸요. 나 같은 유적 조사원이나 고고
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살아가는 데 별 필요도 없는 거니까.”
“그래서, 에즐란이 하는 일은 뭔데요?”
“그냥 편하게 에즈라고 부르라니까요. 유적 조사원의 역할은 이 도
시 저 도시 다니면서 고고학 지부(地府)에 들러 근처에 새로 발견된
유적 조사나 유물 해석하기 등등. 이 과정에서 고대어 실력이 조금 필
요해서 익혀둔 건데-제국이 쓰던 언어를 고대어라고 부르거든요. 뭐
대강 이런 일이에요. 벌이는 꽤 좋은 편? 사실 말이 좋아 유적 조사원
이지 잡부나 다름 없다니깐요.”
고대의 유적을 조사한다. 뮤에게는 뭔가 묘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에즐란에게서 고대어의 이야기를 듣
고 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
다.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뭔가 목표를 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열쇠’가 고대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인 걸까.
과거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이야기만 나오면 심각해지는 뮤의 얼굴
을 흘깃 쳐다보면서, 에즐란이 재촉하듯 물었다.
“같이 갈 거에요, 말거에요?”
“......난 고대어도 잘 모르고, 별로 그런 일은 잘 할 수 없을 것 같
은데, 왜 같이 가자는 거죠?”
“글쎄요, 말하자면...에 또, 수행원이라고 하면 될라나?”
“수행원?”
“어떤 유적에는 루드라(Ru-Dera;지킴이)가 있기도 하거든요.”
모르는 단어의 연속이다. 뮤는 이제 아예 포기한 듯 힘빠진 표정으로
별다른 말없이 그녀의 설명을 기다렸고, 왠지 혼자 신나서 설명하던
에즐란이 간신히 그의 상태를 깨닫고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
이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파수꾼 말이에요.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멸망할 것을 알았던 건
지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파수꾼을 붙여놓았거든요. 이게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어떤 기관으로 움직이는 지 아직은 모르지
만, 아무튼 무척 거추장스러운 거라는 것은 틀림없거든요. 유적 안으
로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튀어나와 공격을 하니
까. 그래서 보통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정규군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절차죠.”
“대강 알겠습니다만은, 그 루드라와 절 데려가는 것에 대해 뭔가 연
관이?”
“당신의 검 실력, 그런 데 사용해 보면 좋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녀는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지난밤 그의 모습을, 사람 셋을 눈 하
나 깜짝 않고 순식간에 베어 넘기던 모습을.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는지 에즐란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뮤의 얼
굴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앳된 외모에, 자세히 보면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모습의 그가 어째서 지난밤에는 악귀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뮤 역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어 선뜻 그녀의 제
안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밤의 일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
지만, 그는 단지 그때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가늠할 수도 없는 실력을 가지고 뭔가를 하겠다는 것은 자칫하다간 다
른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는 한참동안을
머뭇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신경 쓰였다. 아르제노와, 유적의 관계가. 엉망으로 엉켜 있던 실타래
에서 그것을 풀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이 그의
정신을 가득 메웠다.
타인의 배려하려는 마음과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본능, 둘 중에 승자
는 본능 쪽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죠! 잘됐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해요. 에즈.”
애칭으로 불러준 것이 맘에 들었는지 그녀는 씨익 하고 크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뮤 역시, 그녀 정도는 아니었지만 희미
하게나마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 한 가지 명심할 것.”
“......?”
“나랑 다니려면, 절대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요.”
“절대?”
“네,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다못해 자신의
목숨이 위급하더라도......라는 건 조금 억지고, 아무튼 모든 일은 가
능하면 대화로 끝낼 것. 그게 안 된다면 약간의 상처를 입히는 정도
로 끝낼 것. 그것도 안 된다면......일단 자리를 피하고 볼 것.”
“......요구 사항치곤 너무 자세한 것 같은데요.”
“절대, 저얼대! 이거 안 지키면 살인자로 고발할 거에요. 알겠어
요?”
어제의 일을 약점으로 잡겠다는 건가. 알 듯 모를 듯 치밀한 그녀를
보며 뮤는 살짝 한숨을 내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 가지고는 부족! 맹세해요. 하늘에, 바다에, 대지에, 태양에,
그리고 뮤의 이름에 걸고.”
“......하늘에, 바다에, 대지에, 태양에, 그리고 나의 이름에 걸고,
앞으로는 절대로 살인을 하지 않겠습니다.”
뮤의 맹세를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는지, 에즐란은 다시 활짝
웃는 표정으로 되돌아가서 쾌활하게 외쳤다.
“좋아요! 그럼, 조금 속도를 내 볼까요? 알트웰이 얼마 안 남았다구
요!”
“좋을 대로.”
두 사람이 탄 말이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꼬였던 실타래
를 풀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 잡힌 기분에, 뮤는 어느 샌가 자신이
에즐란의 페이스에 휘말려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