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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장달수 편집
경상북도 봉화군의 삼계서원에 보관된 현판으로 사당에 걸려있던 현판이다. ‘경현’이란 ‘현자를 흠모한다’는 의미로서 서원이나 향교의 사당의 명칭으로 자주 쓰이던 이름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 1588년(선조21)에 경상도 봉화현에 안동 부사 김우옹(金宇顒)이 충재 권벌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1661년(현종2)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였다.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유생들에게 답한 편지 -학봉 김성일
심부름꾼이 와서 보내 온 편지를 받고는 제현(諸賢)들의 학문 공부가 만중하심을 알았으니, 몹시 위로가 됩니다. 초봄에 못난 저에게 물어 주시는 편지를 받고는 외람되게도 어리석은 견해를 참람되게 진술하였는데, 삼가 저의 견해를 받아들여 인정해 주는 뜻을 보이셨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스럽습니다.
그리고 묘우(廟宇)가 이미 완성되어 장차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소문을 듣고 흠모하지 않겠으며, 덕을 보고서 흥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한 고을 사람들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우리 삼한(三韓) 백대(百代)의 다행일 것입니다.
처음 제향을 올릴 때에 쓸 제문(祭文)은 당세에 붓을 잡을 자가 있을 것인바, 우리 고을에서 구해 보더라도 역시 문장이 뛰어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명망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현들께서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운운하였단 말입니까. 천만번 다시 생각하여 이런 따위의 말로써 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마침 몸에 병이 있어서 이만 줄입니다.
삼계서원 충재 권 선생 묘허비 후지〔三溪書院冲齋權先生廟墟碑後識〕 -향산 이만도
오른쪽의 글은 사암(思菴) 박 문충공(朴文忠公 박순(朴淳))이 지은 충재(冲齋 권벌(權橃)) 선생의 비명(碑銘)이다. 글을 지은 것이 작위를 더하여 증직하기 이전이어서 마침내 묘도(墓道)에 세우지 못하였다. 그 후에 조옥천(趙玉川 조덕린(趙德隣)), 권창설재(權蒼雪齋 권두경(權斗經)) 등 여러 공들께서 삼계서원의 묘정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잡초가 우거진 유허지에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붙일 데가 없으므로 더욱 이미 이루어진 공론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비석돌 하나를 떼어 왔는데, 살펴보니 돌은 작고 글자는 많아서 서문은 생략하고 명문만 새겼으니, 형편이 부득이한 것이다. 그런데 묘명(墓銘)을 서원 터로 옮겨 오는 것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삼계의 상류에 묘소가 가까이 있으니 양양(洋洋)한 선생의 혼령이 오르내리시기에는 저곳과 이곳의 구별이 없어 그립고 사모하는 마음을 의탁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도 하나의 예가 되지 않겠는가. 대개 서원은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창건되었고 현종 경자년(1660, 현종1)에 사액이 되었으며 금상 신미년(1871, 고종8)에 훼철되었다. 창건과 훼철이 모두 천명이나 선생의 도학과 충절은 실로 천지에 우뚝 서서 백세 후의 성인을 기다릴 수 있으니, 산이 평평해지고 바다가 마르더라도 이 비석은 쓰러지지 않으리라. 이 비석이 쓰러지지 않는 것도 천명이니, 나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충재선생승무소청일기權橃陞廡疏廳日記 충재선생의 문묘에 배향을 청하는 상소 본 자료는 201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책을 편집한 글입니다. 외후손 인동 장달수 편 해제 1. 개요 권벌승무소청일기權橃陞廡疏廳日記는 가철된 1책 11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1851년 (철종 2) 2월 6일부터 6월 18일까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1478~1548)의 문묘종사文 廟從祀를 위한 소청疏請 준비과정과 서울에 설치한 소청疏廳에서 진행된 일들을 기록 한 일기이다. 이 일기는 현재 경북 봉화군 충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일기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기 위하여 향론鄕論을 모으고 소를 올리는 과정이 자세 히 쓰여 있어 19세기 중반 영남지역의 향론 형성과정과 소청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 권벌승무소청일기의 구성과 체제 본 일기는 가철된 1책 11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표지에 ‘소청일기疏廳日記’라고 묵서 하였고, 내제는 별도로 적지 않았다. 일기는 날짜와 날씨를 적고 그 아래 내용을 적었으며, 날짜가 바뀌면 행을 바꾸어 구별하였다. 3. 권벌승무소청일기의 내용 1) 1851년 권벌 승무 소청의 배경과 참여 인원 1851년 2월 6일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통문(85명 연명)이 도착했다. ‘2월 2일 경주사림이 옥산서원에 모여 60년 전 경술년(1790, 정조 14)에 본가의 반대로 중지되었던 충재 권벌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소청疏請을 다시 전개하기 로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2월 10일 삼계서원에서는 내성면奈城面 사림 84명이 모였다. 권벌을 주향主享하는 삼계서원으로서는 60년 전 당시에도 옥산서원이 발의했던 논의를 다시 옥산서원 에서 발의하였다는데 분발하여 ‘권벌승무소청權橃陞廡疏請’을 주관하여 적극 추진하 기로 하고 2월 15일 옥산서원에 회신 통문을 보낸다. 옥산서원으로부터 통문을 받은 도내 여러 서원에서도 삼계서원으로 통문을 보내 왔다. 2월 16일에는 예안 도산서원에서 2월 28일 안동부 향교에서 도회道會를 열 자는 통문(62명 연명)을 보내왔고, 17일에는 순흥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통문(55명 연명), 19일에는 영주[榮川] 이산서원伊山書院의 통문(52명 연명), 23일에는 호계서원虎溪書院 의 통문(62명 연명), 24일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의 통문(38명 연명)이 도착하였다. 한편 2월 20일 삼계서원에서는 유생과 본손 6, 7명이 우선 상경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기로 하고 서울 성균관에 통문을 보냈다. 선발인원인 유학幼學 이상성李相聖, 진사進士 김병수金昞銖, 김종걸金宗杰, 이만송李晩松, 남정교南正敎, 봉사奉事 권택하權宅夏, 정언正言 권영하權泳夏, 권재형權載衡 등은 27일 서울에 도착하여 집춘문集春門 밖 반인 가泮人家에 소청을 설치하였다. 안동부에서는 2월 28일 향교에서 도회가 열렸다. 삼계서원 유생과 본손 40여명이 도회소道會所에 갔으며, 도내 유생들이 잇달아 도착하였는데 예천 23명, 영주 17 명, 예안 13명, 경주 4명, 풍기 2명, 순흥 9명, 봉화 4명, 의성 7명, 진보 2명, 용궁 1명, 영양 1명, 안동 132명 등 모두 25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외 상주의 정윤우鄭允愚, 경주의 생원 조유해曺有海, 양동이씨 문중, 진보권씨 문중은 각기 이름 을 적은 명첩名帖을 보내오는 것으로 참석을 대신하였다. 이 도회에서 소청을 이끌어갈 임원들이 선출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소수疏 首에 유학幼學 이형○李衡○, 장의掌議 유학 이술상李述祥, 김붕수金朋壽, 류진시柳進詩, 최 운창崔雲昌 4명, 소색疎色 진사進士 김중휴金重休, 김진호金鎭澔, 유학幼學 김낙홍金樂泓, 이휘준李彙濬 4명, 제소製疏 유학 이치정李致楨, 진사進士 이오수李五秀, 유학幼學 최효술 崔孝述, 박종후朴宗垕, 진사進士 이만익李晩翊, 유학幼學 황원선黃源善, 강성흠姜性欽, 안병 로安秉魯, 이의수李懿秀, 박주정朴周正, 김석유金奭裕 11명, 택소擇疎 유학幼學 류성조柳聲 祚, 진사進士 김종휴金宗烋, 김헌운金憲運, 유학幼學 이병은李秉殷, 금서술書述, 류성문柳 聖文 6명, 사소寫疎 유학 김재숙金在肅, 진사進士 장주병張周炳 유학幼學 정기락鄭驥洛, 생 원生員 이인흠李仁欽, 유학幼學 최병규崔炳奎, 강건姜楗, 진사進士 이유재李維在, 유학幼學 이형구李亨九 8명, 관행管行 유학 정광근鄭光根, 생원生員 조시성趙時成, 홍도洪燾, 이규 응李奎應, 유학幼學 정치장鄭致章, 류양천柳養天, 이문직李文稷, 진사進士 이만송李晩松, 유 학幼學 조각해曺珏海, 조술대趙述大 10명, 직일直日 유학 정민채鄭民采, 류택흠柳宅欽, 생 원生員 성종진成鍾震, 김사묵金思黙, 송홍익宋鴻翼, 유학幼學 권구상權久相, 김헌金, 이능 혁李能奕, 류규영柳奎榮, 이휘면李彙冕 10명, 향도청鄕都廳 진사 이석규李錫奎, 유학幼學 김휘대金輝大, 김광희金光凞, 정윤재鄭崙載 4명, 경도청京都廳 생원生員 김병수金昞銖, 김 종걸金宗杰, 유학幼學 김용진金龍鎭, 이택용李宅鎔, 생원生員 김우수金遇洙 5명, 배소陪疎 유학 이면기李勉基, 권치엄權致儼, 이규석李奎錫, 강세규姜世奎, 생원生員 이정상李鼎相, 유학幼學 정기상鄭璣相, 김원호金元 護, 김준동金駿東, 김영유金永裕, 조언석趙彦錫, 이상성李相聖, 김진휴金鎭休, 진사進士 김 응규金應奎, 유학幼學 정운규鄭雲逵, 박정영朴貞永, 임재준任在準, 김찬규金燦圭, 남공수南 公壽, 신명휴申命休, 최세응崔世應, 장진현張鎭鉉, 김호수金昊銖, 이형진李亨晉, 배선원裴善 源, 금성렬禁聖烈, 생원生員 남정교南正敎, 송석구宋奭求, 유학幼學 류기만柳基晩, 권기權炁, 서직렬徐稷烈, 정익규鄭翼逵, 이만조李晩祚, 이정익李庭翼, 이명화李命和, 조가상趙家相, 심 계붕沈啓鵬, 하경순河景舜, 이계주李啓周, 장구봉張九鳳, 진사進士 이휘봉李輝鳳, 유학幼學 금석하琴錫夏, 변광한邊光翰 42명으로 모두 95명이었다. 이를 다시 직역職役별로 살 펴보면 생원·진사 25명, 유학 70명으로 임원 내 비유학과 유학의 비율은 26 :74(%)정도였다. 지방의 유소는 배소상경拜疏上京한 다음에 주로 관학館學이나 사학四學에서 소청疏廳을 차리고 치소治疎·정소呈疏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성균관 상사생上舍生인 생원·진사는 유학에 비해 관학출입이 자유롭고 또 그곳을 발판으로 활동하기가 편리한 측면이 있었다.1 1 이수건,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1995, 일조각) 499쪽. 임원선출 이후 소수가 출석하는 도회를 3월 3일 삼계서원에서 열기로 정하고 도내 에 통문을 발하는 한편, 도내 각 진鎭 소속 수전유사收錢有司를 정하여 오백금五百金을 한도로 소행경비[資費]를 모으자고 의논하였으나 충재 권벌 본가에서 극구 사양하 여 경비 수합에 대한 의논은 정지되었다. 영남유소嶺南儒疏에 참가한 소유疏儒는 크게 세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소 수疏首(소두疏頭)를 비롯한 각종 소임원疎任員이며, 둘째는 소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는 배소인陪疎人이며, 셋째는 단순히 명첩名帖만 제출한 참소인參疎人으로 나눌 수 있 다. 첫째는 유소를 주관하는 간부 임원으로서 문벌門閥과 지망地望 및 학덕學德을 겸비한 유사儒士들이 선정되는데 이들은 시종 번거로운 소사疏事를 처리하고 다중의 소유 를 동원해야 하며, 보통 백명이 넘는 배소유를 인솔하여 예궐정소詣闕呈疏하고 그 상 소에 책임까지 져야 하는 실질적인 유소儒疏의 간부진이었다. 둘째의 배소유陪疎儒 는 각읍·명문중名門中별로 제출한 연명첩聯名帖 등재인수에 비례하여 차출된 상경소 유上京疏儒들로서 서울까지의 왕복여비와 체경비滯京費를 부담해야 하며 심신의 고통 을 감내하고 상당한 경제적 부담까지짊어져야 했다. 셋째는 명첩만 빌려주고 소유수를 채운다는 의미가 강하고 실제상소과정이나 결과에 대하여 하등의 부담이나 책임이 없었다.2 특히 소수疏首는 소두疏頭 또는 소유疏儒의 수반首班·수장首丈이라 하기도 하며 유소의 대표자로서 많은 소유를 동원하고 통솔할 수 있는 학덕이 고매하고 도내 여러 읍 의 유림사회가 존경하고 심복할 수 있는 문벌門閥과 지망을 갖춘 인사가 추대된다. 소수의 정원은 1명이며, 선임절차는 매우 복잡하였다. 소사疏事의 발의가 있고 난 뒤 개최한 소회疏會에서 소수 추대 공사원公事員이 먼저 선정되고 그들의 주관 아래 유림의 공론에 따라 3명을 소수 후보3로 내세워 투표[圈點]를 통해 소수를 선출하 며, 소수 선출이 확정되면 소수를 봉청奉請하는 절차가 선임된 공사원公事員 또는 조사曹司에 의해 거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수로 추대된 자는 으레 사양하는 단자單 子를 두 세차례 제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소수로 추대 받은 사람과 소청 (또는 소회) 사이에 사양하는 단자와 고청固請하는 단자 2 이수건, 위 책(1995, 일조각), 497쪽, 관련내용 전재. 3 1851년 권벌승무소청에서 내세워진 3명의 소수 후보는 수망首望 유학幼學 이형○李衡○, 부망副望 유학 이운상李運祥, 말망末望 유학 정민충鄭民衷이었다. 가 몇 번 오고 간 끝에 끝내 소수로 추대되면 곧 소청 또는 소회의 공석公席에 나아 가 소수와 소유간에 상읍례相揖禮를 행한 다음 비로소 소수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다. 또한 장의掌議는 소수를 보조하는 간사와 같은 임무를 띠고 소수와 공동책임을 지 며 시종 같이 행동한다. 정원은 2명이 보통이나 4명, 6명 또는 9명이 될 때도 있었 다. 공사원公事員은 유소를 발의하여 소회를 개최하고 소수를 추천·봉천奉薦·선정하 거나 치소治疎에 관계되는 각종 행사나 임원을 선정할 때마다 임명되는 비상임非常 任과 소청疏廳이 설치된 뒤부터 소사疏事를 마치고 소청을 철거할 때까지 계속되는 상임공사원이 있었다. 조사曹司와 도청都廳은 서무 또는 재무를 관장하며, 직일直日 은 당번과 같은 임무를 띠며, 관행管行은 치소상경治疎上京할 때 배소유를 인솔하는 책임을 맡았다.4 4 이수건, 위 책(1995, 일조각), 501~503쪽, 관련내용 전재. 2) 승무소청의 진행 서울에 소청疏廳을 설치한 것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나 이후 정소呈疏과정은 순탄 하지 않았다. 2월 29일 정소呈疏를 진행하겠다는 통문을 성균관 동·서재에 보내 돌려보인[輪示] 후 동·서재의 장의掌議에게 전하였으나 동재 장의 조원섭趙元燮만 서 명하여 돌려주었다. 그리고, 2월 30일에는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 묘종사를 위해 서울에 소청을 설치한 소유疏儒 석사碩士 장복원張福遠이 방문하여 두 소청을 합하여 함께 진행하자고 요청하였다. 또한 3월 1일에는 성주의 유학 정래 석鄭來錫이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묘종사 소청을 위해 입경하였다. 같은 경상도 유림에서 문묘종사를 경쟁하는 양상이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조율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1 4월 2일에야 비로소 성균관 동재 장의 조원섭과 서재 장의 조단호趙端鎬로부터 ‘근 실謹悉’을 받을 수 있었고5 4월 12일에는 소초疎草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같은 영남 에서 승무소청의 유소가 각기 3개소가 동시에 나와서 경쟁을 하는 형태가 되었고, 성균관에서 복합伏閤한 3현賢의 승무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월 18일에는 성 주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주관한 정구의 승무소청에 대해 승무를 윤허할 수 없다는 비답批答이 내려졌다. 5 효종 원년(1650) 류직柳稷의 우율승무반대소牛栗陞廡反對疏를 고비로 그 이전의 영남유소嶺南儒疏는 승정원에 봉소하는 데 크게 어려움 이 없었으나 그 이후부터 서인세력이 승정원을 거의 독점하게 되자 승정원의 갖은 방해와 지연책으로 인해 승정원봉소가 늦어지기 도 하였다. 특히 17세기 말부터 유소儒疏는 성균관 장의의 유소에 대한 회통回通인 ‘謹審’을 받아야만 승정원에 접수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영남유소는 당장 이 근실문제가 승정원봉소에 관건이 되었고 성균관을 이미 장악한 노론정권하에서 그것을 받을 가망이 없는 영남유소에서는 근심謹審이 없이도 상소가 가능했던 만인소萬人疏가 대두되었다.(이수건, 위 책(1995, 일조각),507~508쪽, 관련내용 전재.) 4. 권벌승무소청일기의 가치 본 권벌승무소청일기權橃陞廡疏廳日記는 충재박물관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권벌승 무소행일록權橃陞廡疎行日錄(1851년), 삼도소청일기三道疏廳日記(1853년)와 함께 19세 기 영남유소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서 당시 영남지역 유림의 존재양상과 정치·사회적 활동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수건,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일조각, 1995. 권벌승무소청일기權橃陞廡疏廳日記 저 자 미상 연 대 1851년(철종 2) 형태사항 1책(11장) / 가철 / 사주무변, 무사란, 8행 20자 내외, 무어미 / 31.4×18.2cm 소 장 자 충재박물관 權橃陞廡疏廳日記 辛亥二月初六日。慶州玉山書院通文來到三溪書院, 蓋以 冲齋先生從享 文廟之議也。前甲庚戌, 自玉院, 發通于陶山·廬江兩院, 已倡大 論, 而以本家持重之故, 竟中止矣。今於本月初二日, 慶州士林齊會玉院, 復申前論, 衛道尊賢之誠, 甚盛也。發通並及于道內校院云。〔通文謄在他冊, 名帖八十五員。〕 初十日。本面士林堂會于溪院, 都有司幼學李致楨, 齋有司邊光翰·權鎭夏, 會員 凡八十四人。金院長在璿主席, 望出公事員二人, 幼學金在赫·生員洪燾。曹司, 幼學 金駿永·權啓魯。直日, 進士金昌銖·幼學權璉夏。時到有司, 幼學金耆永·進士權好淵。 公事員出座, 行相揖禮訖, 議于座中曰, 先生陞 廡之議, 自是數百年前, 前 輩已定之大論, 而尙未有擧幡之擧者, 不但本家之過於鄭重, 實是吾黨後生之責 也。去前庚辛之論, 始自玉院, 繼於陶廬, 而今又更申於六十年之後, 其在本院士林之心, 신해년(1851, 철종 2) 2월 6일. 경주慶州 옥산서원玉山書院1에서 보낸 통문通文이 삼계서원三溪書院2에 도착하였다. 대개 충재선생冲齋先生3을 문묘에 종향從享하자는 논의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60여 년 전 경술년(1790, 정조 14)에 옥산서원에서 도산陶山4, 여강廬江5 두 서원에 통 문을 발송하여 이미 큰 논의를 창도하였는데, 본가本家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바 람에 결국 중지되었었다. 이제 이번 달 2일에 경주의 사림士林이 옥산서원에 함께 모 여 다시 이전의 논의를 꺼내었는데, 도道를 수호하고 현인을 높이는 정성이 매우 지 극하였다. 통문을 발송하여 도내道內의 향교鄕校와 서원에 두루 전달하였다.” 〔통문은 다른 책에 등사되어 실려 있는데, 명첩名帖의 인원은 85원이었다.〕 1 옥산서원玉山書院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모신 서원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안강읍安康邑 옥산리玉山里에있다. 1572년(선조 5)에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창건하였고, 1574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2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1588년(선조 21)에 창건하여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위패를 모셨 다. 1660년(현종 1)에 사액을 받았고,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51년에 복원되었다. 3 충재선생冲齋先生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벌(權橃, 1478~1548)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9년(중종 34)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주청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45년(인종1)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 일로 10월에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고,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국원종 일등공신光國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저서로 충재집이 있다. 4 도산陶山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는 서원이다. 1574년(선조 7)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1575년(선조 8) 사액賜額을 받았다. 5 여강廬江 :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옛 이름이다. 1573년(선조 6)에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안동부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에 창건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월에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柳成龍을 배향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호계虎溪’라고 사액賜額을 받았고,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이건, 복설하였다. 10일. 본 면面의 사림들이 삼계서원에서 당회堂會를 열었다. 도유사都有司는 유학幼學 이치정 李致楨, 재유사齋有司는 변광한邊光翰, 권진하權鎭夏였고, 모인 인원은 모두 84인이었다. 원장院長 김재선金在璿이 주석主席을 맡아 추천으로 인원을 선출하였는데, 공사원公事員 2인은 유학 김재혁金在赫, 생원 홍도洪燾, 조사曹司는 유학 김준영金駿永, 권계로權啓魯, 직일直日은 진사 김창수金昌銖, 유학 권연하權璉夏, 시도유사時到有司는 유학 김기영金耆永, 진사 권호연權好淵으로 하였다. 공사원이 자리에 나와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나서, 좌 중에 의론하기를,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자는 논의는 본시 수백 년 전에 선배들 이 이미 정했던 큰 의론인데, 아직까지 깃발을 들고 호소하는 거사가 없었던 것은 비단 본가本家에서 지나치게 신중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당黨 후생들의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난 경신庚辛6 연간의 논의가 옥산서원에서 시작되어 도산 서원陶山書院과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계속되었는데, 이제 그 60년 뒤에 또다시 논의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본원 사림의 마음에서 볼 때 6 경신庚辛 : 경술년(1790, 정조 14), 신해년(1791, 정조 15)을 가리킨다. 愧服, 當何如哉。今當相議于本家, 以爲趁期敦事之地云云。製通, 生員成鍾震·幼學金一永, 寫通, 幼學成鍾遠·進士金應奎。 十五日。發玉山書院答通文。 十六日。禮安陶山書院通文來到溪院, 以本月二十八日, 定道會于本府鄕校, 發通並及 于道內校院云。〔名帖六十二員。〕 十七日。順興紹修書院通文來到溪院。〔名帖五十五員。〕 十九日。榮川伊山書院通文到院。〔名帖五十二員。〕 二十日。溪院釋菜罷後, 山長遞任, 薦出前參奉金在鼎。卽日出座, 議送儒生及本 孫六七人, 爲先上京設廳之擧, 發太學通文。 二十三日。虎溪書院通文到院, 皆以見玉院文字故也。〔會員六十二人。〕 二十四日。永川臨皐書院通文來到院。〔名帖三十八員。〕 二十七日。儒生及本孫入城, 設疏廳于集春門外泮人家, 幼學李相聖, 進士金昞銖·金宗 杰·李晩松·南正敎·奉事權宅夏·正言權泳夏·權載衡。 二十八日。溪院儒生及本家人, 凡四十餘員, 入本府道會所, 鄕道內儒員, 次第來到, 醴 泉二十三員·榮川十七員·禮安十三員·慶州三員·豊基二員·順興九員·奉化四員·義 城七員·眞寶二員·龍宮一員·英陽一員·本鄕一百三十二員。尙州鄭允愚伻人書問, 請錄名帖於時到記。慶州曹生員有海書問, 講誼以致年老不赴之意。良洞李氏門中及眞 寶權氏, 各有聯名書問。鄕儒薦出, 都辦有司, 幼學李秀戇·李瓚·金驪洛·金龍鎭· 金燦圭。時到有司, 幼學金鎭休·李宅夏·河德霖。以雨不能開座於菁莪樓, 就便設 崇報堂, 分坐前庭及誠潔齋, 會員多不能容。護軍李彙寧·進士李五秀·李 秀應·幼學李彚炳·李海鷹·參奉金在鼎, 實主上座。薦出曹司六員, 幼學李能 부끄럽기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본가에 상의하여 시기에 늦지 않 게 일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제통製通은 생원 성종진成鍾震, 유학 김일영金一永, 사통寫通은 유학 성종원成鍾遠, 진사 김응규金應奎가 맡 았다. 15일. 옥산서원에 답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16일.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보낸 통문이 삼계서원에 당도하였다. 이번 달 28일 에 본 안동부安東府의 향교에서 도회道會를 하기로 정하였다는 내용으로 통문을 내어 도내의 향교와 서원에 두루 전달하였다고 한다. 〔명첩의 인원은 62원이었다.〕 17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7에서 보낸 통문이 삼계서원에 도착하였다. 〔명첩의 인원은 55원이었다.〕 19일. 영천榮川의 이산서원伊山書院8에서 보낸 통문이 서원에 도착하였다. 〔명첩의 인원은 52원 이었다.〕 20일. 삼계서원의 석채釋菜9가 끝난 뒤에 원장院長이 교체되었다. 추천으로 전前 참봉 김재정 金在鼎을 선출하였다. 그날로 자리에 나와 유생과 본손 6, 7인을 보내 먼저 상경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태학太學에 보내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7 소수서원紹修書院 :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봉향하기 위해 1543년(중종 38)에 건립하였다. 원래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다가 1550년(명종 5)에 ‘소수서원紹修書院’ 라고 사액을받았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8 이산서원伊山書院 : 경북 영주시 이산면에 있는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강학의 장소로만 사용되었으나,뒤에 퇴계 이황을 배향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6년에 중건되었다. 9 석채釋菜 : 석전례釋奠禮이다. 23일.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보낸 통문이 서원에 도착하였다. 모두 옥산서원에서 보낸 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인 인원은 62인이었다.〕 24일.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10에서 보낸 통문이 서원에 도착하였다. 〔명첩의 인원은 38원 이었다.〕 27일. 유생 및 본손本孫이 도성으로 들어가 집춘문集春門 밖 반인泮人의 집에 소청疏廳을 설치 하였다. 유학 이상성李相聖, 진사 김병수金昞銖, 김종걸金宗杰, 이만송李晩松, 남정교南正敎, 봉사 권택하權宅夏, 정언 권영하權泳夏, 권재형權載衡이었다. 10 임고서원臨皐書院 :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臨皐面에 있는 서원으로, 1553년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뒤에 장현광張顯光과 황보인皇甫仁을 추배追配하였다. 28일. 삼계서원의 유생 및 본가 사람 총 40여 원이 안동부의 도회소道會所에 들어갔다. 본 고을과 도내의 유원儒員들이 차례로 도착하였는데, 예천醴泉 23원, 영천榮川 17원, 예 안禮安 13원, 경주慶州 3원, 풍기豊基 2원, 순흥順興 9원, 봉화奉化 4원, 의성義城 7원, 진 보眞寶 2원, 용궁龍宮 1원, 영양英陽 1원, 본 고을 132원이었다. 상주尙州의 정윤우鄭允 愚가 사람을 보내어 편지로 위문하고, 시도기時到記에 명첩名帖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였 다. 경주慶州의 생원 조유해曹有海가 편지로 위문하고, 세의世誼를 논하면서 연로하여 참석하지 못하는 뜻을 전하였다. 양동良洞의 이씨李氏 문중 및 진보眞寶의 권씨權氏 문 중에서 각각 연명으로 편지로 위문하였다. 향유鄕儒 중에서 추천으로 선출하였는데, 도판유사都辦有司는 유학 이수당李秀戇, 이찬李 瓚, 김여락金驪洛, 김용진金龍鎭, 김찬규金燦圭, 시도유사時到有司는 유학 김진휴金鎭休, 이택 하李宅夏, 하덕림河德霖이었다. 비 때문에 청아루菁莪樓에서 개좌開座하지 못하고, 편의대 로 숭보당崇報堂에 마련하여 앞뜰과 성결재誠潔齋에 나누어 앉았는데, 모인 인원 중 수 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호군護軍 이휘영李彙寧, 진사 이오수李五秀, 이수응李秀應, 유학 이휘병李彚炳, 이해응李海鷹, 참봉 김재정金在鼎이 실로 상좌上座에서 주관하여, 추 천으로 조사曹司 6원을 선출하였는데 유학 이능혁李能奕, 奕·權冑煥·柳進瑗·柳宅欽·裵善源·李王集。薦出公事員二員, 進士金廷瑞·幼學權 致根。曹司進請, 公事員出座, 行相揖禮訖。議曰, 沖齋先生陞享之議, 自是吾東百年前已定之論, 而因循未遑, 吾林之齎鬱久矣。幸今 玉山先唱, 陶廬曁伊紹諸院, 次第同聲, 指日敦速, 甚盛擧也。第當爬定疏任, 以爲擧 幡之擧矣。僉君子, 盍各效誠力以敦大事云云。僉議同然, 遂薦出疏首, 首望幼學李 衡○, 副望幼學李運祥, 末望幼學鄭民衷。諸生次起圈點, 首望爲準點。遂薦 錄疏下人九十餘員。掌議, 幼學李述祥·金朋壽·柳進詩·崔雲昌。疏色, 進士金重休·金 鎭澔·幼學金樂泓·李彙濬。製疏, 幼學李致楨·進士李五秀·幼學崔孝述·朴宗垕·進 士李晩翊·幼學黃源善·姜性欽·安秉魯·李懿秀·朴周正·金奭裕。擇疏, 幼學柳聲祚· 進士金宗烋·金憲運·幼學李秉殷·琴書述·柳聖文。寫疏, 幼學金在肅·進士張周 34 權橃陞廡疏廳日記 炳·幼學鄭驥洛·生員李仁欽·幼學崔炳奎·姜楗·進士李維在·幼學李亨九。管行, 幼學 鄭光根·生員趙時成·洪燾·李奎應·幼學鄭致章·柳養天·李文稷·進士李晩松·幼學曹 珏海·趙述大。直日, 幼學鄭民采·柳宅欽·生員成鍾震·金思默·宋鴻翼·幼學權久相· 金·李能奕·柳奎榮·李彙礻冕。鄕都廳, 進士李錫奎·幼學金輝大·金光凞·鄭崙載。 京都廳, 生員金昞銖·金宗杰·幼學金龍鎭·李宅鎔·生員金遇洙。陪疏, 幼學李勉 基·權致儼·李奎錫·姜世奎·生員李鼎相·幼學鄭璣相·金元護·金駿東·金永裕·趙彦 錫·李相聖·金鎭休·進士金應奎·幼學鄭雲逵·朴貞永·任在準·金燦圭·南公壽·申命休·崔世 應·張鎭鉉·金昊銖·李亨晉·裵善源·琴聖烈·生員南正敎·宋奭求·幼學柳基晩·權 炁·徐稷烈·鄭翼逵·李晩祚·李庭翼·李命和·趙家相·沈啓鵬·河景舜·李啓周·張九鳳·進士 李輝鳳·幼學琴錫夏·邊光翰。發文道內, 以三月初三日, 定疏首出座, 道會于三 권주환權冑煥, 류진원柳進瑗, 류택흠柳宅欽, 배선원裵善源, 이잡李王集이었다. 또 추천으로 공 사원公事員 2원을 선출하였는데, 진사 김정서金廷瑞, 유학 권치근權致根이었다. 조사가 나아가 청하니 공사원이 자리로 나와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의논하기를, “충재선생 冲齋先生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논의는 본시 우리 동쪽에서 백 년 전에 이미 정해진 논 의로서, 차일피일 미룬 채 미처 거행하지 못하니, 우리 유림에서 한스러워한 지 오 래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옥산서원에서 선창하고 도산서원과 여강서원, 이산서원 에서 차례로 동참하여 빠른 시일 내에 신속히 결행할 수 있었으니, 심히 성대한 거 사입니다. 다만 마땅히 소임疏任을 분정分定하여 깃발을 들고 호소하는 거사를 실행하 여야 할 것입니다. 군자들께서는 각자 성력誠力을 다 바쳐 대사大事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운.”라고 하니, 중론이 동의하였다. 마침내 추천으로 소수 疏首를 선출하였는데, 수망首望에 유학 이형○李衡○, 부망副望에 유학 이운상李運祥, 말망 末望에 유학 정민충鄭民衷이 올랐다. 제생諸生들이 차례로 일어나 권점圈點을 하니, 수망 首望이 기준 점수를 채웠다. 마침내 소하인疏下人 90여 원을 추천하여 기입하였는데, 장의掌議는 유학 이술상李述祥, 김붕수金朋壽, 류진시柳進詩, 최운창崔雲昌, 소색疏色은 진사 김중휴金重休, 김진호金鎭澔, 유학 김낙홍金樂泓, 이휘준李彙濬, 제소製疏는 유학 이치정李致 楨, 진사 이오수李五秀, 유학 최효술崔孝述, 박종후朴宗垕, 진사 이만익李晩翊, 유학 황원선黃源善, 강성흠姜性欽, 안병로安秉魯, 이의수李懿秀, 박주정朴周正, 김석유金奭裕, 택소擇疏는 유학 류성조柳聲祚, 진사 김종휴金宗烋, 김헌운金憲運, 유학 이병은李秉殷, 금서술琴書述, 류성문柳聖文, 사소寫疏는 유학 김재숙金在肅, 진사 장주병張周炳, 유학정기락鄭驥洛, 생원 이인흠李仁欽, 유학 최병규崔炳奎, 강건姜楗, 진사 이유재李維在, 유학이형구李亨九를, 관행管行은 유학 정광근鄭光根, 생원 조시성趙時成, 홍도洪燾, 이규응李奎應, 유학 정치장鄭致章, 류양천柳養天, 이문직李文稷, 진사 이만송李晩松, 유학 조각해曹珏海, 조술대趙述大를, 직일直日은 유학 정민채鄭民采, 류택흠柳宅欽, 생원 성종진成鍾震, 김사묵金思默, 송홍익宋鴻翼, 유학 권구상權久相, 김헌金, 이능혁李能奕, 류규영柳奎榮, 이휘면李彙礻冕, 향도청鄕都廳은 진사 이석규李錫奎, 유학 김휘대金輝大, 김광희金光凞, 정윤재鄭崙載, 경도청京都廳은 생원 김병수金昞銖, 김종걸金宗杰, 유학 김용진金龍鎭, 이택용李宅鎔, 생원 김우수金遇洙, 배소陪疏는 유학 이면기李勉基, 권치엄權致儼, 이규석李奎錫, 강세규姜世奎, 생 원 이정상李鼎相, 유학 정기상鄭璣相, 김원호金元護, 김준동金駿東, 김영유金永裕, 조언석趙彦 錫, 이상성李相聖, 김진휴金鎭休, 진사 김응규金應奎, 유학 정운규鄭雲逵, 박정영朴貞永, 임재 준任在準, 김찬규金燦圭, 남공수南公壽, 신명휴申命休, 최세응崔世應, 장진현張鎭鉉,김호수金昊銖, 이형진李亨晉, 배선원裵善源, 금성렬琴聖烈, 생원 남정교南正敎, 송석구宋奭求, 유학 류기만柳基晩, 권기權炁, 서직열徐稷烈, 정익규鄭翼逵, 이만조李晩祚, 이정익李庭翼, 이 명화李命和, 조가상趙家相, 심계붕沈啓鵬, 하경순河景舜, 이계주李啓周, 장구봉張九鳳, 진사 이휘봉李輝鳳, 유학 금석하琴錫夏, 변광한邊光翰이다. 도내道內에 글을 발송하였는데, 3월 3일에 소수疏首가 자리에 나와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도회道會를 개최하기로 정하였다. 溪書院。製通, 幼學李庭龍·金樂泓。寫通, 幼學李晩億·李庭翼·生員金驥雲·幼學 金樂圭·裵善河·李進燮。直日, 進士洪壂·幼學權人夏。公事員諗于衆曰, 疏行旣敦, 則 自道內不可無資費排錄, 以爲效力之道。定出各鎭所屬收錢有司, 限五百金, 收合之 議, 竟爲本家人力辭而止。 二十九日。雨。入送通文于太學, 東西齋輪示後, 傳于掌議, 時東齋掌議趙元燮, 獨當任名面。正言金宗泰·進士金泰璜· 金震洛·持平權敎準·別檢郭泰魯·正字安致默·注書權翰成·幼學金鋮·金金宓來訪。 三十日。晴。金碩士寅敎來訪。疏儒姜碩士性欽來到。金進士斗應·金進士奎應來訪。是 夜, 張碩士福遠來訪。蓋以文康公陞廡事, 欲爲合疏計也。 三月初一日。晴。聞星州幼學鄭來錫, 亦以文穆公陞 廡事入京云。疏色李彙濬來到。 是日, 自溪院, 送疏首奉請儒生幼學洪家厚·鄭昌甲于疏首家, 疏首丈尋辭單。 卽日夕, 道內儒員, 會于溪院, 奉還辭單, 更定勸起儒生, 幼學鄭光琳, 進去請出。 初二日。晴。尹進士宗儀來訪, 此人卽 忠毅公之祀孫, 而別有誠忱於議事也。蔡都事果 永·趙奉事雲植·鄭正字顯德來訪。本府道會所文蹟來到。是日, 疏首丈連辭, 不 獲强起, 到溪院近地, 再尋單云。 初三日。晴。李司諫彙圭·李進士卿佐·金進士泰璜·金進士震洛·李進士基鎬·權進士中憲·安正 字致默·郭別檢泰魯來訪。是日, 道儒一百八十餘員, 會溪院, 更送疏首勸起儒生, 幼學李應浩·成鍾遠請出。疏首丈辭不獲, 行到院底, 又傳言固辭, 儒員設座于觀物樓 前, 再三往復而後, 始入來就座, 行相揖禮訖, 敦議疏事。山長, 金參奉在鼎·金院長 在璿·金持平重夏·金進士宗煜主席, 直日, 姜世奎·李啓周云。 初四日。晴。疏儒金進士應奎·成進士鍾震·金在肅來到。金進士昞銖·金進士宗杰·金 제통製通은 유학 이정룡李庭龍, 김낙홍金樂泓, 사통寫通은 유학 이만억李晩億, 이정익李庭翼, 생원 김기운金驥雲, 유학 김낙규金樂圭, 배선하裵善河, 이진섭李進燮, 직일直日은 진사 홍전 洪壂, 유학 권인하權人夏가 맡았다. 공사원公事員이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소행疏行이 이 미 결정되었으니, 자금을 분배하여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도내에서 방도를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각각의 진鎭에 돈 걷는 유사有司를 지정해 5백 냥[金]을 목표로 걷도록 하자는 논의는 끝내 본가 사람들이 극구 사양하는 바람 에 중지되었다. 29일. 비. 태학太學에 통문을 들여보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11에서 돌려 본 뒤 장의掌議에게 전하였다. 당시 동재의 장의는 조원섭趙元燮으로, 서재의 장의 없이 홀로 임무를 맡아 일처리를 하고 있었다. 정언正言 김종태金宗泰, 진사 김태황金泰璜, 김진락金震洛, 지평持 平 권교준權敎準, 별검別檢 곽태로郭泰魯, 정자正字 안치묵安致默, 주서注書 권한성權翰成, 유학 김성金鋮, 김복金金宓이 내방하였다. 11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 조선 시대에 성균관成均館의 명륜당明倫堂 좌우에 있던 기숙 건물로,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를 수용하 였다.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도 있었는데, 향교의 경우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가, 서재에는 향리鄕吏나 평민의 자제가 기거하였다고 한다. 30일. 맑음 석사碩士 김인교金寅敎가 내방하였다. 소유疏儒인 석사 강성흠姜性欽이 도착하였다. 진사 김두응金斗應, 진사 김규응金奎應이 내방하였다. 이날 밤에 석사 장복원張福遠이 내방하 였다. 대개 문강공文康公12을 배향하는 일 때문에 함께 소를 올릴 계획을 세우고자 해 서였다. 3월 1일. 맑음 듣기로 성주星州의 유학幼學 정내석鄭來錫이 역시 문목공文穆公13의 문묘 배향과 관련한 일로 서울에 들어왔다고 한다. 소색疏色 이휘준李彙濬이 도착하였다. 이날 삼계서원에 서 소수봉청유생疏首奉請儒生14 유학 홍가후洪家厚, 정창갑鄭昌甲을 소수의 댁으로 보내었 는데, 소수 어른이 사양하는 단자를 제출하였다. 그날 저녁에 도내의 유원儒員들이 삼계서원에 모여서 사양하는 단자를 돌려보내고 다시 권기유생勸起儒生15 유학 정광림 鄭光琳을 정하여 가서 자리에 나오기를 청하게 하였다. 12 문강공文康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시호이다. 13 문목공文穆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시호이다. 14 소수봉청유생疏首奉請儒生 : 소수를 모셔오는 일을 맡은 유생을 말한다. 15 권기유생勸起儒生 : 사양하는 소수에게 역할을 맡아주기를 권하는 일을 맡은 유생을 말한다. 2일. 맑음. 진사 윤종의尹宗儀가 내방하였다. 이 사람은 곧 충의공忠毅公16의 사손祀孫으로서, 일을 논의하는 데에 남다른 성의가 있었다. 도사都事 채과영蔡果永, 봉사奉事 조운식趙雲植, 정 자正字 정현덕鄭顯德이 내방하였다. 안동부의 도회소道會所에서 보낸 문적文蹟이 도착하 였다. 이날 소수 어른이 연달아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억지로 출발하였다. 삼계서 원 근처 지역에 도착하여 재차 사양하는 단자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16 충의공忠毅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임(尹任, 1487~1545)의 시호이다. 3일. 맑음. 사간司諫 이휘규李彙圭, 진사 이경좌李卿佐, 진사 김태황金泰璜, 진사 김진락金震洛, 진사 이기호李基鎬, 진사 권중헌權中憲, 정자正字 안치묵安致默, 별검別檢 곽태로郭泰魯가 내방하 였다. 이 날 도유道儒 180여 원이 삼계서원에 모여서 다시 소수권기유생疏首勸起儒生인 유학 이응호李應浩, 성종원成鍾遠을 보내 나오기를 청하였다. 소수 어른이 사양해도 되 지 않자 서원 아래에까지 와서 또 전언하여 고사하였다. 유원儒員들이 관물루觀物樓 앞 에 자리를 마련하고 두 번 세 번 왕복한 뒤에야 비로소 들어와 자리에 나아갔다. 상 읍례相揖禮를 행한 뒤에 소사疏事의 의론에 착수하였다. 산장山長 참봉 김재정金在鼎, 원 장院長 김재선金在璿, 지평持平 김중하金重夏, 진사 김종욱金宗煜이 주석主席을 맡았고, 직 일直日은 강세규姜世奎, 이계주李啓周가 하였다. 4일. 맑음. 소유疏儒인 진사 김응규金應奎, 진사 성종진成鍾震, 김재숙金在肅이 도착하였다. 진사 김 병수金昞銖, 진사 김종걸金宗杰, 進士泰璜·金進士震洛·南進士正敎·李相聖·沈啓鵬·姜性欽·李彙濬·金進士國喬· 金寅敎·權持平敎準·安正字致默, 會議疏事。 初五日。晴。鄭來錫來言, 亦將以疏擧始事云。此中會員皆曰, 莫重之擧, 有此疊發, 恐涉 輕遽。且事係一室, 而若有岐貳之嫌, 則實非公共之論, 旣有先發之擧, 稍待後日, 亦吾嶺 之一氣數也。唯唯而退。張福遠亦以此事, 累次來言, 而亦以前言, 累累曉解, 則一直無從 容處事之意, 深以爲憂矣。夕後, 果聞投通於大學, 同室之事, 有此紛競之擧, 全嶺 之羞極矣。可悶可歎。正言金宗泰·注書鄭顯德·持平權敎準·金釒宬·李進士濟秉來 訪。 初六日。微雨。疏儒及泮留嶺人, 齊會相議曰, 自有仁同投通之擧, 吾輩擧措去留, 俱狼狽, 或 有幷擧之議, 而此則非大同之論, 且非吾嶺本意矣。或有停止之論, 而疏廳已設, 任員多會, 不可以張氏一人之錯了一事, 旋掇大論, 姑爲遲留, 以待事機物論之如何耳。柳養天·崔進 士鳳煥·李進士運河來訪。 初七日。晴。朝, 鄭來錫來言, 始以先事上來, 而旣有先發之論, 故姑爲退讓矣。今聞仁同 之通, 有此顚倒, 則吾亦欲投通云。會中皆曰, 彼旣處事失當, 而尊亦以此自處, 實非吾林 本色。且前鑑昭然, 繼蹈後轍, 不但有損於尊衛之事體, 抑亦吾黨之羞恥云云。鄭友似 未曉解而歸。夕後, 果投通館學云。柳贊祚·權守經·金永宅·金鏞振·張心學·金進士 斗應·李進士運河·金釒宬來訪。疏儒洪進士燾入來。 初八日。晴。崔進士鳳煥·李進士興浩·尹進士致宗·曹進士翼承·崔進士瑛來訪。疏儒李 進士鼎相入來。夕後, 仁同疏首鄭象璜及疏儒若爾人入來, 定出謹悉儒生, 擧措設 施, 甚緊急云。此中疏儒, 齊會相議, 竊欲各立疏事, 則同歸紛競之窠, 因此退待, 진사 김태황金泰璜, 진사 김진락金震洛, 진사 남정교南正敎, 이상성李相聖, 심계붕沈啓鵬, 강 성흠姜性欽, 이휘준李彙濬, 진사 김국교金國喬, 김인교金寅敎, 지평 권교준權敎準, 정자 안치 묵安致默이 모여서 소사疏事를 논의하였다. 5일. 맑음. 정내석鄭來錫이 와서 그쪽에서도 장차 소거疏擧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이곳의 회원會員들이 모두 말하기를, “막중한 거사를 이처럼 중첩되게 발론하는 것은 경솔한 듯하다. 또 일이 일실一室17에 관계되는 만큼 만약 분열하는 혐의가 있게 된다면 실로 공공의 의론이 아니다. 기왕에 먼저 발의한 일이 있으니, 조금 훗날을 기다리는 것 도 우리 영남의 일대 기수氣數인 것이다.”라고 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물러갔다. 장복 원張福遠이 또한 이런 일로 누차 와서 말하였다. 역시 앞의 말로 누누이 알아듣도록 설명하였으나 시종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는 뜻이 없으니, 심히 우려가 된다. 저녁이 된 뒤에 과연 태학太學에 통문을 보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실同室의 일로 이처럼 다투는 일이 있게 되니, 전체 영남의 수치가 극심하다고 할 것이다. 안타깝고 한탄 스럽다. 정언 김종태金宗泰, 주서 정현덕鄭顯德, 지평 권교준權敎準, 김성金釒宬, 진사 이제 병李濟秉이 내방하였다. 17 일실一室 : 한 집안 식구라는 의미로, 동문同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사승師承 관계를 둘러싼 갈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뒤의 동실同室 역시 같은 개념이다. 6일. 가랑비가 내림. 소유疏儒 및 반촌泮村18에 머무르는 영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상의하기를, “인동仁同 19에서 통문을 보내는 처사가 있은 뒤로 우리들의 거조擧措와 거류去留가 모두 낭패스럽게 되었다. 혹자는 동시에 추진하자는 의론을 내었으나, 이는 대동大同의 논의가 아니고 또 우리 영남의 본의가 아니다. 혹자는 정지하자는 의론을 내었으나, 소청이 이미 설치되어 임원이 많이 모였는데, 장씨 한 사람의 잘못된 일 때문에 대뜸 큰 논의를 거두어서는 안 된다. 우선 머무르면서 상황과 여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기다려 볼 따름이다.”고 하였다. 류양천柳養天, 진사 최봉환崔鳳煥, 진사 이운하李運河가 내방하 였다. 18 반촌泮村 :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이르는데, 이곳에는 대대로 성균관에 소속된 반인泮人들이 거주하였다. 성균관 동쪽물길을 따라 난 길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반촌, 서쪽은 서반촌으로 불렀다. 19 인동仁同 : 장현광의 서원이 있는 경북의 지명으로, 여기서는 그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7일. 맑음. 아침에 정내석鄭來錫이 와서 말하길, “처음에 선조先祖의 문묘 배향과 관련된 일로 올 라왔다가 이미 먼저 발의한 의론이 있었으므로 우선 물러나 양보하였었다. 이제 듣 기로 인동의 통문으로 이처럼 선후가 뒤바뀌는 일이 있게 되니, 나 또한 통문을 보 내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쪽에서 이미 처사가 온 당치 못한데, 그대 또한 이렇게 자처한다면 실로 우리 유림의 본색이 아니다. 또 앞 의 잘못이 분명하게 보이는데도 그 길을 다시 답습하려고 한다면, 도道를 수호하고 연인을 높이고자 하는 일도 나아가지 못하며, 또한 우리 당黨의 수치가 될 것이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정우鄭友가 이해하지 못할 듯이 하면서 돌아갔는데, 저녁이 된 뒤에 과연 관학館學에 통문을 보냈다고 한다. 류찬조柳贊祚, 권수경權守經, 김영택金永宅, 김용진金鏞振, 장심학張心學, 진사 김두응金斗應, 진사 이운하李運河, 김성金釒宬이 내방하였 다. 소유疏儒인 진사 홍도洪燾가 들어왔다. 8일. 맑음. 진사 최봉환崔鳳煥, 진사 이흥호李興浩, 진사 윤치종尹致宗, 진사 조익승曹翼承, 진사 최영 崔瑛이 내방하였다. 소유疏儒인 진사 이정상李鼎相이 들어왔는데, 저녁이 된 뒤에 인동 仁同의 소수疏首 정상황鄭象璜과 소유 몇 사람이 들어왔다. ‘근실謹悉’20을 받아 내는 유생 을 정하여 조치하는 것이 심히 긴급하다고 하였다. 이곳의 소유들이 함께 모여 상의 하였는데, 생각건대, 제각기 소사를 고집하고자 하면 똑같이 분분하게 다투는 잘못 을 범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물러나 기다린다면20 근실謹悉 : 삼가 잘 알았다는 뜻으로, 조선의 승정원의 규례에 의하면 유생儒生의 상소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두 장의掌議가 적은 ‘근실謹悉’ 라는 말이 없으면 봉입捧入할 수 없게 되어 있다. 則益覺義理之晦矣。罔知攸措, 第觀事勢而已。 初九日。晴。李進士鎭相·李進士在珏·張氏本孫南樞·一魯·基魯及申宅修來訪。 初十日。晴。科儒次次來到。多有疏任見到, 縉紳·章甫之來問者甚多, 而俱在時到記, 以科 擾, 不能一一盡記。 十一日。晴。科儒若爾人, 以星州疏事, 爬任於東泮空廳云, 事涉逕廷, 可悶。 十四日。陰。嶺儒及泮留縉紳, 一齊來會, 相議疏事曰, 方今西中三賢之疏, 伏閤累月, 旣 未竣請, 且嶺中吾儕, 一時竝擧, 各設疏廳, 極非穩當。旣未調停, 則不可以自吾鄭重先始, 而一例紛 競, 第當退待, 以觀事勢之得宜。疏首丈行次, 職此未發, 則當以此中事機, 專通于在 鄕長德, 見進退文字, 而後爲處置得宜, 不可輕先罷歸云云。座中一辭同然, 故姑未罷廳, 而爲坐待之計。 十五日至二十九日。以退待之故, 姑不記事。京鄕儒紳之來問者, 載在時到記。 四月初一日。晴。聞東齋掌議趙元燮差出, 西齋掌議趙端鎬。仁星兩廳儒生, 累次往請 謹悉云, 故亦使儒生往見。睦校理仁栽來訪。金生員是珩來訪。 初二日。晴。朝後, 成均館守僕來言, 將出謹悉次, 待令於掌議家云, 故起送儒生一員往見, 則已出給謹悉矣。午後, 守僕奉謹悉來納。疏儒及泮留縉紳, 一齊會議疏事。洪進士燾·李正言 晩奎·柳養天·金進士正銖·金進士昞銖·金釒宬·金正言宗泰·鄭耆洛·姜運欽·柳進 士敎睦·金進士國敎·柳進士孝睦·金正言龍基·權久相·李夏稷·李相聖·李進士維在· 安正字致默·本孫奉事宅夏·載衡·承夏·正言泳夏·秉淵僉議, 或以趁卽敦疏爲 言, 或以謂謹悉, 一時幷出, 一嶺之內, 三疏互發, 則不免紛競之嫌。且 國有大祥, 在下道 理, 不可不退待數朔, 務從事體之鄭重云云。大抵目今事勢, 館學三賢疏請, 在十 더욱 의리가 어두워진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니,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사세를 살펴볼 따름이다. 9일. 맑음. 진사 이진상李鎭相, 진사 이재각李在珏, 장씨張氏의 본손本孫인 남추南樞, 일로一魯, 기로基 魯 및 신택수申宅修가 내방하였다. 10일. 맑음. 과유科儒들이 차례로 도착하였는데,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와 서 위문한 진신縉紳과 장보章甫들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시도기時到記에 들어 있다. 과 거로 인해 소란한 터라 일일이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11일. 맑음. 과유科儒 몇 사람이 성주星州의 소사疏事 때문에 동반東泮의 빈 청사에서 직임職任을 분 정分定하였다고 한다. 일이 크게 어긋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14일. 흐림. 영남의 유림 및 반촌泮村에 머무르는 진신縉紳들이 모두 와서 모여 소사를 논의하기 를, “지금 서중西中21에서 삼현三賢22에 관한 소로 여러 달 동안 복합하여도 청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또 영중嶺中의 우리들이 동시에 함께 일을 추진하여 각자 소 청을 설치하게 된다면 극히 온당치 못한 것이다. 기왕에 조정할 수 없다면 우리들이 정중하게 먼저 시작했다는 이유로 똑같이 분분하게 다투어서는 안 되고, 그저 물러 나 기다리면서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소수疏首 어른의 행차가 아직까 지 출발을 하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이곳의 상황을 본 고을에 있는 장덕長德들에게 전달하여 진퇴를 결정하는 글을 받아본 뒤에 처치하는 것이 타당하며, 경솔하게 먼 저 파하고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좌중의 인원들이 한목소 리로 동의하였다. 그래서 우선 소청을 파하지 않고 기다릴 계획이다. 21 서중西中 : 호서湖西를 가리킨다. 22 삼현三賢 :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가리킨다. 15일부터 29일까지. 물러나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에 우선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와서 위문한 경향京鄕의 유신儒紳들은 시도기時到記에 실려 있다. 4월 1일. 맑음. 동재東齋의 장의掌議 조원섭趙元燮이 서재西齋의 장의 조단호趙端鎬를 차출差出하였다. 인 동仁同과 성주星州 두 소청疏廳의 유생들이 누차 가서 ‘근실謹悉’을 청하였다고 하므로, 역시 유생을 시켜 가서 만나보게 하였다. 교리 목인재睦仁栽가 내방하였다. 생원 김시 형金是珩이 내방하였다. 2일. 맑음. 아침이 된 뒤에 성균관成均館의 수복守僕이 와서 장차 ‘근실謹悉’을 출급出給하려고 하니 장의 집에 대령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생 1원을 보내서 가서 보게 하였더 니, 이미 ‘근실’을 출급한 상태였다. 오후에 수복이 ‘근실’을 받들고 와서 들였다. 소 유疏儒 및 반촌泮村에 머무르는 진신縉紳들이 모두 모여 소사疏事를 의논하였다. 진사 홍도洪燾, 정언 이만규李晩奎, 류양천柳養天, 진사 김정수金正銖, 진사 김병수金昞銖, 김성金 釒宬, 정언 김종태金宗泰, 정기락鄭耆洛, 강운흠姜運欽, 진사 류교목柳敎睦, 진사 김국교金國 敎, 진사 류효목柳孝睦, 정언 김용기金龍基, 권구상權久相, 이하직李夏稷, 이상성李相聖, 진사 이유재李維在, 정자 안치묵安致默, 본손本孫인 봉사奉事 택하宅夏, 재형載衡, 승하承夏, 정언 영하泳夏, 병연秉淵이 참석하였다. 여러 의론 중에 혹자는 진작에 소사를 결행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근실’이 일시에 함께 나와 영남 안에서 세 소가 번갈아 발하게 된다면 분분하게 다 투는 혐의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나라에 대상大祥23이 있으니 아랫사람의 도리로 볼 때 물러나 몇 달을 기다리면서 사체가 정중하게 되는 쪽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운 운.”이라고도 하였다. 대개 지금의 상황은 삼현三賢의 문묘 배향과 관련한 관학館學의 소청疏請이 이달 12일에 있고, 23 대상大祥 : 사후 만 2년, 즉 25개월째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여기서는 헌종憲宗의 대상을 가리킨다. 二, 其後日子, 似難間隙, 竟未敦議而罷。姜承旨必魯來訪。星州疏廳, 更出首任, 金是珩云。 初三日。晴。姜世奎·姜進士漢奎, 出外見還。昨今會議之縉紳·章甫及留廳疏任, 次第來 會, 相議疏事, 竟未敦進退之議。 初四日。晴。因姜承旨歸鄕便, 折簡于院, 而亦以觀勢更通之意爲言。疏儒金進士思默見 到。李校理彙圭來訪。金進士昞銖·姜進士漢奎·本孫承夏歸鄕。 初五日。晴。金生員良鋧·李正言晩奎·具應魯·朴復基·崔永甲·進士洪弼模·李命宇·李進 士維在·鄭來錫來訪。李彙濬往會洞。姜世奎始移接于疏廳。 初六日。晴。洪進士殷標·鄭民和·金正言宗泰·金主簿奎運·李進士運河·鄭進士虁和, 後先來訪。 初七日。晴。姜鋈來訪。疏紙自太學例出, 以四十四丈來納。 初八日。晩雨。金鏔來訪。 初九日。晴。趙奉事錫疇·李運河·金宗泰·金馨直·張海南龍逵來訪。鄕伻持四處疏草而來到。 初十日。晴。朴周鍾·金釒宬來訪。午後, 李彙濬自會洞徠, 疏事始敦退定之議。 十一日。晴。朝, 李相聖·權秉淵歸鄕。朴正郞初壽·睦正言仁會徠訪。朴進士周虎持 檜淵疏草, 來議而去。鄕來諸處疏草, 似欠圓滿, 故遂有改構之議。 十二日。晴。疏草成。李校理彙圭·金生員良鋧·檜淵疏首金丈及蔡直長果永來 訪。太學以三賢再疏事伏 閤, 而未得準請而止云。 十三日。晴。東洛疏首鄭象璜來見, 以當初事機之未能詳聞, 頗致悔恨之語矣。李進士 學運·鄭民和·李秀林來訪。夕雨。 十四日。晴。申在河來訪。晩雨。 그 뒤의 일자는 틈을 내기가 어려울 듯하여 결국 논의에 착수하지 못하고 파하였다. 승지 강필로姜必魯가 내방하였다. 성주星州의 소청疏廳에서 다시 수임首任을 정하였는 데, 김시형金是珩이라고 한다. 3일. 맑음. 강세규姜世奎, 진사 강한규姜漢奎가 외출하였다가 돌아왔다. 어제오늘 모여서 의론했던 진신縉紳, 장보章甫 및 소청에 머무르는 소임疏任들이 차례로 와서 모여 소사를 논의하 였으나 끝내 진퇴의 의론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4일. 맑음. 강승지가 귀향하는 편에 삼계서원에 편지를 보냈다. 역시 상황을 살피면서 다시 통 고하겠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소유疏儒인 진사 김사묵金思默이 도착하였다. 교리 이휘 규李彙圭가 내방하였다. 진사 김병수金昞銖, 진사 강한규姜漢奎, 본손本孫 승하承夏가 고향 으로 돌아갔다. 66 權橃陞廡疏廳日記 5일. 맑음. 생원 김양현金良鋧, 정언 이만규李晩奎, 구응로具應魯, 박복기朴復基, 최영갑崔永甲, 진사 홍 필모洪弼模, 이명우李命宇, 진사 이유재李維在, 정내석鄭來錫이 내방하였다. 이휘준李彙濬이 회동會洞으로 갔다. 강세규姜世奎가 비로소 소청疏廳으로 기거를 옮겼다. 6일. 맑음. 진사 홍은표洪殷標, 정민화鄭民和, 정언 김종태金宗泰, 주부 김규운金奎運, 진사 이운하李運 河, 진사 정기화鄭虁和가 전후로 내방하였다. 7일. 맑음. 강옥姜鋈이 내방하였다. 소지疏紙가 태학太學에서 관례대로 나왔는데, 44장을 가지고 와서 들였다. 8일. 저녁에 비가 내림. 김인金鏔이 내방하였다. 9일. 맑음. 봉사 조석주趙錫疇, 이운하李運河, 김종태金宗泰, 김형직金馨直, 해남海南 장용규張龍逵가 내 방하였다. 시골의 인편이 네 곳의 소초疏草를 지니고 도착하였다. 10일. 맑음. 박주종朴周鍾, 김성金釒宬이 내방하였다. 오후에 이휘준李彙濬이 회동會洞에서 왔다. 소사疏 事는 비로소 물려서 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11일. 맑음. 아침에 이상성李相聖, 권병연權秉淵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랑 박초수朴初壽, 정언 목인 회睦仁會가 내방하였다. 진사 박주호朴周虎가 회연서원檜淵書院24의 소초疏草를 지니고 와 서 논의하고 갔다. 시골에서 온 여러 곳의 소초疏草가 원만圓滿함이 부족한 듯하므로 마침내 고쳐 짓자는 논의가 있었다. 12일. 맑음. 소초가 완성되었다. 교리 이휘규李彙圭, 생원 김양현金良鋧,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소수疏首 김씨 어른 및 직장直長 채과영蔡果永이 내방하였다. 태학太學에서 삼현三賢의 문묘 배향 을 청하는 소를 재차 올리는 일로 복합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그쳤다고 한다. 24 회연서원檜淵書院 :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이다. 1622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0년(숙종 16) ‘회연檜淵’ 라 사액을 받았다. 13일. 맑음. 동락서원東洛書院25의 소수 정상황鄭象璜이 와서 만나 당초에 상황을 자세히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자못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 진사 이학운李學運, 정민화鄭民和, 이수림李秀林 이 내방하였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14일. 맑음. 신재하申在河가 내방하였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25 동락서원東洛書院 :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 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 ‘동락’ 라고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가 1932년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十五日。晴。趙進士東淳來訪。 十六日。晴。檜淵疏, 早朝伏閤。 十七日。晴。成碩士台煥徠訪。 十八日。晴。檜淵疏蒙 批曰, 省疏具悉。先正問學淵源之正, 士林此論之發久矣。而陞廡事體至重, 爾等退修學業云云。 十九日。晴。周松內便, 承聞鄕信, 而疏事僉議, 亦以 國祥後伏 閤爲鄭重。李注書敦禹來訪。 二十日。晴。東洛疏, 早朝又伏閤。是午, 東齋掌議, 欲其奉玩心近兩書, 委人書問。 二十一日。午前小雨。本孫正言泳夏歸鄕。東洛疏承 批, 省疏具悉。文康操履進修之篤, 嘗所欽歎, 而纔 以鄭文穆事, 有所批諭, 想宜諒悉, 爾等退修學業。兩廳疏儒, 迭相伏 閤, 而蒙批後, 各自罷歸云。 二十二日。晴。蔡直長果永來訪。 二十三日。晴。因李注書便, 得聞鄕信。 二十四日。晴。李注書錫宙來訪。 二十五日。小雨。 二十六日。晴。 二十七日。晴。是夜, 亞銓政, 本孫宅夏, 以禁府都事復職, 凌晨 肅謝。 二十八日。晴。 二十九日。晴。姜世奎往樓院, 暮後還來。 三十日。晴。始手疏錄, 書六丈, 李彙濬·姜世奎·李敦禹·權翰成合手。 四月初一日。晴。書疏錄七丈, 李彙濬·李敦禹·姜世奎合手。 初二日。陰。寫疏錄九丈, 李彙濬·姜世奎·權翰成合手。 初三日。晴。書疏錄十丈, 李彙濬·姜世奎合手。 15일. 맑음. 진사 조동순趙東淳이 내방하였다. 16일. 맑음. 회연서원의 소임疏任들이 이른 아침에 복합伏閤하였다. 17일. 맑음. 석사碩士 성태환成台煥이 내방하였다. 18일. 맑음.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소疏에 비답이 내렸다. 내용에,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선정先正의 바른 학문과 연원에 대해서는 사림에서 이런 논의를 낸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문 묘에 배향하는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 운운.”이라고 하였다. 19일. 맑음. 송내松內의 인편을 통해 본 고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소사에 대한 중론은 역 시 국상國祥 이후에 복합하는 것이 정중하다는 의견이었다. 주서 이돈우李敦禹가 내방 하였다. 20일. 맑음. 동락서원의 소행疏行이 이른 아침에 또 복합伏閤을 하였다. 이날 정오에 동재東齋의 장 의掌議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두 책을 봉독奉讀하려고 사람을 보내 편지로 문의 하였다. 21일. 오전에 약간의 비가 내림. 본손本孫인 정언 영하泳夏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락서원의 소에 대한 비답이 내렸 다. 비답은 “소를 보고 잘 알았다. 문강文康의 조행操行이나 진수進修의 독실함은 일찍 이 흠탄하던 바이나, 막 정문목鄭文穆의 일로 비답을 내린 바가 있으니 의당 잘 알았 으리라 생각된다. 너희들은 돌아가 학업을 닦으라.”는 내용이었다. 두 소청疏廳의 소 유疏儒들이 번갈아가며 복합하였으나, 비답이 내린 뒤에는 각자 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22일. 맑음. 직장直長 채과영蔡果永이 내방하였다. 23일. 맑음. 이주서李注書 편에 고향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24일. 맑음. 주서注書 이석주李錫宙가 내방하였다. 25일. 약간의 비가 내림. 26일. 맑음. 27일. 맑음. 이날 밤에 아전亞銓26의 정사가 있었는데, 본손本孫인 택하宅夏가 금부도사禁府都事로 복 직하였기에 이른 새벽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28일. 맑음. 29일. 맑음. 강세규姜世奎가 누원樓院으로 갔다가, 저문 뒤에 돌아왔다. 30일. 맑음. 비로소 소록疏錄27 작성에 착수하여 6장을 썼다. 이휘준李彙濬, 강세규姜世奎, 이돈우李敦 禹, 권한성權翰成가 협력하였다. 26 아전亞銓 :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가리킨다. 인사권을 지닌 이조를 전조銓曹라고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이조참의는 삼전三銓이라고 불렀다. 이조판서까지 3인이 모두 모였을 때가 아니면 어명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요 자리를 제외한 인사만 하는 것이 관례였다. 27 소록疏錄 : 상소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을 가리키는데, 상소의 말미에 연명으로 기록하였다. 4월 1일. 맑음. 소록疏錄 7장을 썼다. 이휘준李彙濬, 이돈우李敦禹, 강세규姜世奎가 협력하였다. 2일. 흐림. 소록 9장을 베꼈다. 이휘준, 강세규, 권한성權翰成이 협력하였다. 3일. 맑음. 소록 10장을 썼다. 이휘준, 강세규가 협력하였다. 初四日。晴。書疏錄六丈, 李彙濬·姜世奎合手。午後, 鄕伻徠到, 各▩...▩ 初五日。陰。午後, 鄕伻發還。疏草則本家僉議, 以此中改構者爲定本云。 初六日。晴。疏儒南進士正敎, 自鄕還徠。 初七日。晴。 初八日。晴。柳應敎進翰徠訪。 初九日。晴。韓參判鎭庭徠訪。 初十日。小雨。沈進士啓宇徠訪。 十二日。風。鄭注書東奎徠訪。安東道會時, 抵爾通文, 自今日始輪示。 十三日。晴。 十四日。晴。 十五日。熱。通文連日輪示, 而以下隸之未知宅號, 不得這這輪示而止。 十六日。熱。 十七日。晴。李正言彙承徠訪。畢書疏錄。李注書晩運又徠訪。 十八日。晴。李東萊彙寧徠訪。 十九日。晴。疏行以徠月初九日發行之意, 抵爾通文徠到。李彙濬往南村。 卄日。晴。金承旨建銖徠訪。 卄一日。陰。李典籍基東徠訪。 卄二日。晴。金正言錫禧徠訪。 卄三日。旱熱太甚。姜注書夏奎徠訪。 卄四日。旱。李參判孝淳徠訪。 4일. 맑음. 소록 6장을 썼다. 이휘준, 강세규가 협력하였다. 오후에 본 고을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하였다. 각자 (원문 결락) 5일. 흐림. 오후에 본 고을에서 보낸 사람이 출발하여 돌아갔다. 소초疏草는 본가本家의 중론은 이곳에서 고쳐 지은 것을 정본定本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6일. 맑음. 소유疏儒인 진사 남정교南正敎가 고향에서 돌아왔다. 7일. 맑음. 82 權橃陞廡疏廳日記 8일. 맑음. 응교 류진한柳進翰이 내방하였다. 9일. 맑음. 참판 한진정韓鎭庭이 내방하였다. 10일. 약간의 비가 내림. 진사 심계우沈啓宇가 내방하였다. 12일. 바람이 붐. 주서注書 정동규鄭東奎가 내방하였다. 안동安東의 도회道會 때 저쪽으로 보낸 통문을 오 늘에야 비로소 돌려 보았다. 13일. 맑음. 14일. 맑음. 15일. 더움. 통문을 연일 돌려 보았으나, 하예下隸들이 택호宅號를 모르는 탓에 일일이 돌리지 못 하고 중지하였다. 16일. 뜨거움. 17일. 맑음. 정언 이휘승李彙承이 내방하였다. 소록疏錄 쓰는 것이 끝났다. 주서 이만운李晩運이 또 내 방하였다. 18일. 맑음. 동래東萊 이휘령李彙寧이 내방하였다. 19일. 맑음. 소행疏行이 다음 달 초9일에 출발하겠다는 뜻으로 저쪽으로 보내는 통문이 도착하였 다. 이휘준李彙濬이 남촌南村으로 갔다. 20일. 맑음. 승지 김건수金建銖가 내방하였다. 21일. 흐림. 전적典籍 이기동李基東이 내방하였다. 22일. 맑음. 정언 김석희金錫禧가 내방하였다. 23일. 가뭄과 더위가 매우 심함. 주서 강하규姜夏奎가 내방하였다. 24일. 가뭄. 참판 이효순李孝淳이 내방하였다. 卄五日。旱。李彙濬自會洞還徠。 卄六日。旱災漸酷。守廳消日, 各自難堪。 卄七日。旱。柳正言光睦徠訪。 卄八日。旱災。始手疏錄着啣。 卄九日。旱餘甘霔, 自午終夜。因海底金承旨, 金海·恩津便, 各付家書。 六月初一日。雨。終日畢書着啣。銀溪丞權宗憲, 委伻書問, 而亦有二緡錢所送。 初二日。晴。 初三日。晴。姜校理冕奎徠訪。夕後始雨, 終夜大霔。 初四日。雨。甘霈慰洽。 初五日。晴。疏儒金昞銖·李在韶徠到。李注書能燮·金持平羲裕·鄭碩士斗相徠訪。是夜四更一點, 參哭班于敦化門外。 初六日。晴。 國祥奄闋, 普慟如新。 初七日。雨。午後, 李彙濬還鄕。 初八日。晴。金海今以五緡錢助用, 發行通文, 今始輪示京中。柳正言宜貞徠訪。 初九日。晴。趙奉事錫疇徠訪。趙奉事雲植徠訪。 初十日。陰。以檜淵·東洛合疏之事, 齋中若儒人, 稱以三道儒生, 聚會于養賢庫, 而主論則出於藥房云, 此疏未伏閤之前。又此 再擧之議者, 其意極爲駭歎。遂被坊外誚謗, 乍發而寢。 十一日。陰。三溪院隸徠到。聞初九日發行道會定于郁陽書院。 十二日。晴。南察訪溟翼徠訪。 十三日。熱。疏儒朴周正徠到。 十四日。雨。朝後快勝。朴進士俊寧徠訪。 25일. 가뭄. 이휘준李彙濬이 회동會洞에서 돌아왔다. 26일. 가뭄 피해가 점점 혹심해짐. 소청疏廳을 지키며 날을 보내게 되니, 각자 견디기 어려워하였다. 27일. 가뭄. 정언 류광목柳光睦이 내방하였다. 28일. 가뭄 재해. 소록疏錄에 착함着銜28을 하기 시작하였다. 29일. 가뭄 속 단비가 정오부터 밤새도록 내렸다. 해저海底의 김승지金承旨, 김해金海, 은진恩 津 편에 각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6월 1일. 비. 종일 쓰기를 마치고 착함着銜하였다. 은계 승銀溪丞 권종헌權宗憲이 사람을 보내 편지로 위문하고, 또한 2꿰미의 엽전을 보내왔다. 28 착함着銜 : 서류에 이름과 수결을 기입하는 것을 말한다. 2일. 맑음. 3일. 맑음. 교리 강면규姜冕奎가 내방하였다. 저녁 이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크게 퍼 부었다. 4일. 비. 단비가 퍼부어 매우 위안이 되었다. 5일. 맑음. 소유疏儒 김병수金昞銖, 이재소李在韶가 도착하였다. 주서 이능섭李能燮, 지평 김희유金羲 裕, 석사碩士 정두상鄭斗相이 내방하였다. 이날 밤 4경更 1점點에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곡 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6일. 맑음. 국상國祥이 어느덧 끝나니, 백성들의 슬픔이 초상 때와 한가지였다. 7일. 비. 오후에 이휘준李彙濬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8일. 맑음. 김해金海가 이제 다섯 꿰미의 엽전을 찬조하였다. 발행통문發行通文은 이제 비로소 경 중京中에 두루 전하였다. 정언 류의정柳宜貞이 내방하였다. 9일. 맑음. 봉사奉事 조석주趙錫疇가 내방하였다. 봉사 조운식趙雲植이 내방하였다. 10일. 흐림. 회연서원檜淵書院, 동락서원東洛書院이 연합하여 상소하는 일 때문에 재중齋中의 몇몇 유 인儒人들이 삼도三道의 유생이라 칭하면서 양현고養賢庫에서 모여서 회합을 하였는데, 주된 논의는 약방藥房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쪽 소를 미처 복합하기도 전에 또 이렇 게 재차 거행하자는 논의를 낸 것은 그 의도가 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웠다. 마침내 방외坊外의 비난을 받고 잠깐 논의를 내었다가 중지하였다. 11일. 흐림. 삼계서원의 하예下隸가 도착하였는데, 9일에 욱양서원郁陽書院29에서 발행도회發行道會를 개최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29 욱양서원郁陽書院 : 경북 풍기읍에 있었던 서원으로, 1662년(현종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과 황준량黃俊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12일. 맑음. 찰방察訪 남명익南溟翼이 내방하였다. 13일. 뜨거움. 소유疏儒 박주정朴周正이 도착하였다. 14일. 비. 아침이 된 뒤에 상쾌해졌다. 진사 박준녕朴俊寧이 내방하였다. 十五日。雨。 十六日。連日潦雨, 江水大漲。轉聞疏行登途已久, 而姑未見到, 殊極慮鬱。 十七日。雨。疏儒金鎭澔·黃明夏·李相聖·李文稷, 冒雨先到。積水泥濘, 可知 行色之艱關, 而且伏聞疏首行次, 遭銜橜之厄, 滯留金良地, 調護云, 驚慮不可言。 惟各承家信之安候, 慰甚慰甚。 十八日。陰。權參奉璨徠訪。疏儒諸員, 後先入來, 會話團欒, 而未承疏首 丈調候之如何, 極深慮鬱。伏 閤漸次遲緩, 尤悶悶不可言。且以權領閤收議事, 臺 啓方張, 不無疏事相妨之慮。疏儒金樂泓入來。 十九日。 15일. 비. 16일 연일 장맛비가 내려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전해 듣기로 소행疏行이 출발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도착을 하지 않으니, 매우 염려스럽고 답답하다. 17일. 비. 소유疏儒인 김진호金鎭澔, 황명하黃明夏, 이상성李相聖, 이문직李文稷이 비를 무릅쓰고 먼 저 도착하였다. 물구덩이 진흙탕 속에서 얼마나 행색이 어려웠을지 알만하였다. 또 삼가 듣기로 소수의 행차가 말이 날뛰는 횡액을 만나 금량金良 지역에서 체류하면서 조리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움과 염려스러움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각자 평안하다는 집안 소식을 받고서 심히 위안이 되었다. 18일. 흐림. 참봉 권찬權璨이 내방하였다. 소유疏儒 제원諸員이 전후로 들어왔다. 모여서 단란하게 대화를 했으나, 미처 소수 어른의 조리 상황이 어떤지를 받들지 못하여 매우 염려스 럽고 답답하였다. 복합伏閤도 점차 지연되니 더욱 안타까움을 형언할 수 없었다. 또 권 영상權領相의 수의收議하는 일 때문에 대간臺諫의 계문啓聞이 한창 펼쳐지고 있어 소 사疏事에 방해가 될 우려가 없을 수 없었다. 소유疏儒 김낙홍金樂泓이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