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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놓기는 치졸한 문장이라 부끄럽지만 첫걸음마를 걷는 아기 보듯이 귀엽게 봐주세요 .
내 이름 삼생
김 삼 생
나는 1932년 일본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삼생(三生), 부모님은 일본 이민 1세, 따라서 나는 2세인 셈이다. 광복 후 부모님 따라 귀국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때 일본 이름은 사브로우(三郞), 애칭은 사브짱이다. 그러다 한국에 와서 다시 ‘삼생’으로 이름을 찾게 되었다.
가끔 내 이름의 연유를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부모가 왜 그렇게 지으셨는지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셋째라서? 그렇다면 위의 두 형님이 일생(一生), 이생(二生)이라야 하는데 우생(佑生), 구생(龜生)이며, 밑으로 두 동생은 준생(俊生), 채생(采生)이니, 왜 나만 순서를 붙이신 것일까. 아마 첫째, 둘째는 작명가에 물어 지었고, 나를 셋째로 낳다보니 삼(三)자를 붙였고, 넷째는 사(四)자가 불길하다 하여 붙이지 못하고 다시 작명가에 의뢰하여 지었으리라고 추측해 본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들어둘 걸, 그러지 못한 것이 나도 애석하다.
어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생(전생, 금생, 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여하튼 내 이름은 간단하여 웬만한 사람이면 한자로 읽고 쓸 수 있고, 희귀한 이름이라 관심이 가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다. 만약 내가 죄지은 사람이면 불리하겠지만, 좋은 일 해서 남이 기억해 준다면 플러스 요인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삼생이라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오랜 전에 전화번호부를 뒤졌더니, 동명이인이 그래도 세 사람이나 있었다. 아마 그 밖에도 더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나, 내 나이로 보아서 내가 그 중 최 연장자일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이 동명이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았더니, 김삼생씨냐고 물으면서 자기도 같은 이름이라 반가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대뜸 나이를 물었더니, 나보다 아래라 한 이름 동생인 셈이다. 내 궁금증을 풀기 위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몇째냐고 물으니, 5남매 중 세 째며 위에 두 형님은 일생(一生), 차생(次生), 아래 동생은 말생(末生)이라 한다. 아마 그 집은 생(生)자 돌림에 바로 생년 순으로 이름을 지은 것 같다.
내 궁금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컴퓨터를 배우고서부터 가끔 인터넷 검색창에 ‘김삼생’을 검색해 보기도 하는데, 모 은행 간부가 한 분(별세), 모 회사 대표자, 심지어는 여성분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한자는 같을 것이다. 이참에 전국에 깔린 ‘삼생’을 찾아서 그 흔한 계나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장난기가 들기도 한다.
성명철학상 내 이름이 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모른다. 아예 그런 건 믿지 않으니까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젠 나이가 드니까 내가 걸어온 인생을 되돌아볼 때가 많아짐에 따라 생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걸어 온 길이 운명이라면 내 이름을 운명에 관계지어 분류해서 내 일생을 정리해 보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일생이라 하지만, 나는 내 일생을 일생, 이생, 삼생 3기로 나누어 정리해 본다.
일생은 출생부터 30대 중반 결혼할 때까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 슬하에서 보호 받으며 성장했던 유아, 아동(초등), 소년(중학), 청년(고등학교, 대학)시절이 되겠다. 따라서 이 시기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고, 부모님의 의지에 따랐던 의무와 책임이 희박한 시기였다. 이 시대는 사회나 가정이나 빈곤과 혼란의 시대였다. 태어나자마자 일제 때의 전시(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살았고, 해방 후에는 낯 선 고국땅에 귀국하여 갑작스럽게 맞이한 환경 변화에 어려움도 많았다. 거기다가 또 좌·우간에 야기된 사회의 혼란기를 겪었고, 6.25, 4.19 등등 격동의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우리 집 가정형편도 어려웠었다. 초등학교까지의 일본 생활에서는 전시라는 긴축의 사회에서도 우리 집은 비교적 여유로웠으나, 귀국 후의 우리 부모님은 귀환동포로서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시는 일마다 시원치 않아, 일본에서 고생하시며 고향에 장만했던 재산도 다 소진하고, 슬하에 남아 있는 세 아이(7남매 중 둘 사망, 둘 결혼)를 양육하시는데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따라서 내 학창시절도 가난 속에서 보냈다. 급장이면서도 수업료를 못내 수업료를 받으러 집에까지 가기도 했다. 기차편이 아니고는 버스가 없던 시대라 학교가 있던 대연동에서 해운대 집까지 걸어서 돌아가면서 눈물 흘렸던 때가 가슴 시리게 기억난다. 그래도 어머니의 고생 덕으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큰 재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취업문제, 결혼문제, 집장만 등을 모두 자력으로 해결했으며, 과외교사, 군무원 등을 거쳐 교원임용시험을 거쳐 교직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얻기까지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였다. 그러한 내 일생의 시기는 30여년의 길고 긴 가난과 파란만장의 시기라 하겠다.
이생은 30대 중반에서 만 65세, 가정을 꾸리기 시작해서 직장에서의 정년퇴직까지 30여년의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으나 결혼과 가정 꾸리기, 자식양육, 직장생활 등 모두 내 책임 하에 보낸 철저한 책임과 의무의 시대이며,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시대이다. 34세란 늦은 나이에 자력으로 결혼하여 6년간의 셋방살이 후에 내 집 마련, 39세에 안정된 직장을 얻고, 그간에 세 아이를 낳아 길러 대학까지 교육시키고, 성혼시키고……,그리하여 이 시기는 허리 펼 날 없는 철저한 책임시기였으며, 직장에서도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느라 자유스럽지 못한 얽매인 시기였다.
한편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내 성격 탓에 달동네인 마을 일에도(통장, 새마을 지도자) 관여하게 되어 이때부터 내 봉사활동의 싹이 트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 시기는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기라 생각한다. 지금도 직장이었던 교육현장에서는 내가 개발한 교육 자료들이 교육과정이 변한 현재에도 활용되고 있으며, 내가 살던 공동수도, 공동변소의 보수동은 몰라보게 환경개선이 되어 있어 조그만 힘이나마 내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흐뭇하다.
가장으로서는 세 자식 모두 대학을 마치게 했고, 성혼도 시켰다. 고마운 것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서도 자식들이 올바르게 자라주었으며, 배필들도 각각이 잘 선택하여 우리 집 가풍에 알맞은 식구들이 늘어났다.
삼생은 내 인생을 꽃 피우는 시대라 생각한다. 만 65세가 되어 몸담았던 교직을 정년퇴직했고, 자식들은 3남매 모두 건실하게 가정을 꾸며나가고 있으며, 손자들도 잘 자라고 있다. 적으나마 연금을 타니까 욕심 내지 않는 이상 경제적 어려움도 별로 없다. 나도 아내도 아직 건강하고, 여가시간은 남아돌고……, 이런 안정된 바탕이니, 그간 여러 가지 책임과 의무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내 개인생활에 여유로움이 생겨, 이생에서의 운명을 바꿔놓은 삼생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생은 내 황혼을 황금으로 바꿔놓은 황금시대이기도하다. 어느 지역방송국에서 나에 대한 다큐를 방영하였을 때 그 제목이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이유”였다. 내 노후생활을 황혼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붙인 이름이리라. 그 이름이 붙여진지 10년이 되어가는 데 아직도 해는 지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 내가 특히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은 일은 봉사활동을 시작한 일과 컴퓨터를 배운 일이다. 정년 후의 남아도는 시간들을 알차게 보내려면 내 성향에 맞는 봉사활동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나 할까, 시작한지 10여년이 되는 현 시점까지 나는 자유로우면서도 알차게 바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내 봉사활동의 시작은 정년퇴직 2년 전이었다. 1996년 부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일본어 능력을 봉사활동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 때 조직한 글로벌 일본어봉사단은 현재 2천여 개의 소속봉사단 중 최고참이며 활동량도 많아 센터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내 개인으로도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내 능력과 노익장을 과시했다. 국제영화제 10년 연속 활동, 아·태 자원봉사관리자 대회(AVA), 아시안게임, 월드컵, 국제통신장관회의(ITU), 유엔 교통장관회의(UNESCAP) 등 부산에서의 굵직한 국제행사에는 약방에 감초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IMF때 중소기업지원봉사단 창설에 참여, 활동하기도 하여 봉사단의 각 영역 팀 중 외국어 통번역 팀의 업적이 가장 컸었다.
처음에는 일본어 능력을 살린 활동 위주였으나, 그후 차츰 활동영역이 넓어져 노인상담활동, 공원조성을 위한 활동, 이웃사랑을 위한 적십자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간에 배운 컴퓨터 활용능력도 노인 컴퓨터교육 보조강사, 일어번역, 문서작성 등으로 봉사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삼생시대를 꽃피운 것은 아무래도 자원봉사활동이다. 자원봉사는 베푸는 것이라 하지만 나 같은 경우 얻은 것이 더 많다. 즐겁게 할 일이 많다는 데서 정신건강을 얻었고, 자원봉사는 ‘돈벌이’가 아니고 ‘사람벌이’이라는 데서 많은 선의의 사람을 알게 되었다. 자원봉사 세계에서는 조금은 이름이 알려졌다.
이런 봉사활동에는 아내의 도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내는 나보다 한 술 더 떠서 적십자봉사활동을 37년간 계속하고 있으니, 오히려 내 뒷받침도 만만치 않아 상부상조인 셈이다. 인정을 바래서 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는 우리를 인정해 주어 ‘부부 평등상’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에 알리지 말라’ 라고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사례를 떠벌리고(?) 다닌다.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이나, 접어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장수시대의 지루한 세월을 건강하게, 보람되게 살아가는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이다.
내 이름 삼생 중 일생은 동토에 씨앗 뿌려지고, 이생은 얼었던 땅에 싹이 터서 꽃나무가 잘 자라게 되었다면, 삼생에서는 그 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사방에 풍기면서 남을 즐겁게 하는 시대이고 싶다. 이젠 이 꽃들이 때가 되어 미련 없이 지면서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아쉬움을 남기는 일만 남았으면 한다.
꽃 인연
김 삼 생
내가 여기 괴정동에 이사 온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전에 살던 집도 단독 주택이었는데, 새로 이사 온 집도 단독주택이다. 아내와 함께 집 보러 다니다 정원이 마음에 들어 고른 집이 이 집이다. 그 당시에도 아파트 선호 경향이라 할멈(그때는 아내)이나 아이들은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닦달이었지만 나 혼자 굳이 고집 세운 것은 그 집에 아담한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내 고집이 먹혀들지 않겠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내 주장이 먹혀들었던 때였다.
경제 논리로 따지면 50여 평의 이 집을 장만한 돈으로 아파트를 샀었다면 조금 보태서 두 채는 살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집은 그 당시 치룬 값보다 훨씬 떨어져서 거꾸로 이 집을 팔아서는 지금 제대로 된 한 채의 아파트에도 못 살 형편이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 집에서 얻은 정신건강을 값으로 따지면 훨씬 이득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꽃이나 나무가꾸기를 무척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꽃에 대한 애착은 깊어간다. 20평 남짓한 마당은 본래 있던 정원에 증설한 꽃밭과 화분들이 늘어나 사람이 다닐 공간이 자꾸만 좁아진다. 밖에 나갔다 들어 올 때마다 얻거나 사온 꽃들로 좁은 마당을 더욱 좁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마당에 나가 꽃밭을 살펴보고 손질하며 꽃과 마음의 대화를 나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먼저 꽃들과 마주한다. 엔돌핀이 눈에 보인다면 아마 이런 때 내 얼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단독 주택은 외풍이 세고 난방비도 많이 들어 기름 값 아끼느라 난방도 제대로 못하니, 집안이 설렁하여 거실에 들여놓은 화분들이 별로 신통치 않아 죽어 나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따뜻한 봄이 오면, 땅 속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나도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내 즐거움은 이른 봄에서부터 시작된다.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동백이 그 두꺼운 껍질을 벗어 진홍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땅속에서부터는 둥굴레, 어성초의 새싹들이 예쁘고 싱싱한 얼굴을 내민다. 날씨가 더욱 풀리면 집안에 갇혀 있던 화분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고, 목련이 피어나고, 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우리 집 마당은 활기가 가득 차게 된다. 철에 따라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한 가지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어 꽃이 없는 날이 없다. 온갖 나비들과 벌이 찾아온다. 그 활기는 겨울이 오기까지 계속되며 꽃을 돌보느라 내 운동량도 많아지고 즐거움도 많아진다.
그럴 때면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가족 중에는 외손녀가 유독, 나를 닮아 꽃을 무척 좋아 한다. 일찍 일어나서 꽃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할아버지 뭐해요? 나도 할래.” 하고 함께 말벗이 되어준다. 땅에서부터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신기해하며 마냥 좋아한다. 새로이 피는 예쁜 꽃을 보고는 즐거워한다. 취미를 함께하는 이 외손녀 덕에 내 꽃가꾸기는 더욱 신명난다.
꽃에 벌이나 나비가 모이듯이 내 주위에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내가 관여, 활동하고 있는 ‘100만평 문화공원’ 그린 볼런티어 회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야생화 전문가가 있는가하면, 수생식물 전문가도 있다. 모두 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다. 모이면 지기집의 꽃소식, 꽃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꽃씨를 나누기도 하고, 새 모종을 나누기도 한다. 그 중에는 생태환경 바꿔주기(불법채취)한 것도 있다. 모두가 장물아비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좋아한다.
꽃을 나누는 데도 기쁨이 있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길은 찻길이요, 한 길은 골목길이다. 나는 조금 둘러서라도 골목길을 택한다. 거기에는 어느 할머니(……라 해도 나보다 한 띠 젊은)가 살고 있는 집 앞에 화분들이 놓여 있다. 화분이라지만 제대로 된 화분은 몇몇뿐이고 검은 플라스틱 화분, 스티로폼 상자, 우유 깡통, 장독 뚜껑, 사과 상자 등등이다. 그런데도 꽃들은 영양이 풍부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 우리 집 꽃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보인다. 누가 이렇게 예쁘고 튼튼하게 꽃을 가꾸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었는데, 마침 어느 날 아침 꽃을 손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아주머니, 꽃들이 예쁘네요.” “이 꽃은 처음 보는데 무슨 꽃이지요?” “거름은 무엇을 주는데 이렇게 잘 자라지요?” 등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며 꽃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영감 있는 분이라면 이렇게 친해지기는 어려울 텐데 다행히도(?) 혼자 사는 분이라 마음 놓고 얘기에 꽃을 피운다. 우리 집 꽃들도 그 집으로 시집보냈고, 할머니 꽃도 우리 집 마당에 시집 왔다. 물론 할머니도 우리 집 마당을 구경하러 오시기도 했다. “우리는 꽃 사돈이네요, 사돈 댁” 하고 농담도 주고받는다. 골목길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시집간 딸들과 만난다. 내 꽃밭의 영역이 넓어진 셈이다.
내 꽃 인연은 거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멀리 산청에 있는 ‘어머니의 정원’ 과도 인연이 닿은 지 오래다. 그 분의 아들을 통해서 알고 찾았는데, 나하고 동갑의 할머니가 200여 평의 시골마당을 예쁘게 꾸며 꽃밭을 가꾸어놓고 계셨다. 인테리어를 하는 아들이 ‘어머니의 정원’이라 이름 지어 예쁜 푯말도 달아놓고 인터넷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처음 만난 할머니는 얼굴이 까맣게 탄 시골 할머니 풍이었는데, 손님을 맞는 약간 수줍어하는 듯한 할머니의 첫 인상이 꽃을 좋아하고 가꾸어 오신 할머니 인생이 담긴 듯하여 인상 깊었다.
두 번에 걸쳐 모임의 사람들을 안내해서 찾았지만 내가 받은 첫 인상은 변함이 없었다. 안내하면서 꽃 이름, 파종 시기, 포기 나누기, 꺾꽂이 방법, 철에 따른 관리방법……등, 책에서가 아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해박한 지식을 풀어 놓으실 때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충분히 그 분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한편, 할머니는 남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받아놓은 꽃씨를 조그만 비닐봉투에 이름까지 적어 놓고 벽에 붙여두고 계신다. 해마다 봄에 꽃씨를 나누는 날에는 전국의 카페 회원들이 모여 꽃씨 나누기를 한단다. 아마 ‘어머니 정원’을 연유한 꽃들은 전국의 꽃 마당에 퍼져있으며, 그것을 통해 관계 맺은 사람들의 교감이 오고 갈 것이다.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연유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왔지만, 그 많은 인연 가운데에서도 꽃을 통해서 맺은 인연에는 더욱 따뜻한 정이 흐르고 향기를 풍기는 것 같다. 그 인연에는 혼자만 소유하는 마음이 아니라 남과 함께 보고, 느끼고, 즐거워하는 나눔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여느 해처럼 겨울이 다가왔다. 좁지만 리모델링을 해서 전과 같지 않은 거실에 옮겨 온 화분들은 나와 함께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게 될 것이지만, 바깥에 남겨진 꽃나무들은 앙상하고 쓸쓸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추위를 견뎌내며 따뜻한 땅속에서 조용히 생명을 머금고 내년의 내 꽃 인연을 보다 윤택하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첫댓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삼생을 꽃피우신 선생님 . 이미 훌륭한 수필가로 등단하셨군요 .
앞으로 공무원 연금생활수기에서 꽃다발 안고 수상하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누구든 선생님 만큼의 생을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가슴 찡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生き甲斐のある人生をひろげて行く先輩を手本にしたいです.
「三生」を、母胎、この世、あの世と考える人もいます。私もそうです。
それぞれの「生」をちゃんと生きたいも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