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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1절)
어떤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 아들을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네가 어머니가 감추어둔 과자를 훔쳐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아들은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네’ 어머니의 추궁은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늘 지켜보고 네 마음속까지 다 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아들은 역시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네’ 묻는 말마다 하도 씩씩하게 ‘네’라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기가 막혀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시면서 네가 과자를 훔쳐 먹을 때에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어머니는 아들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할 줄 알고 그렇게 물었는데 아들이 또 씩씩하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이구나. 그러니 두 몫을 훔쳐 먹어도 좋다.’ 아들이 너무나 태연하게 말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는 항상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 하는 것도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하는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든지 무엇이 먹고 싶으면 부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채고 떼를 쓰고 그것도 안 되면 울고 넘어집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고집에 못 이겨 병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이런 어린 아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예언이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것들의 일부분만을 깨닫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행하던 것을 폐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린 아이의 일에 비유하여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듯이 신자들도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버렸노라’라는 말 카테르게카‘는 단순히 어린 아이의 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냥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칸트라는 분이 자기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지금 최대한으로 어른들로부터 재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든 것의 성장과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정도 필요하고 단계도 필요합니다.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재촉하고 있습니다. 빨리 크고 빨리 알고 빨리 천재가 되라고 몰아칩니다. 옛날에는 초등학교 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글을 배우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2-3학년이 되어도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부모님들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속담과 같이 글자를 모르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고 집에서 부모님들의 일이나 거들고 놀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유치원이라는 것이 생겼고 잘 사는 집의 아이들이 유치원, 미술학원, 태권도 도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유치원도 너무 늦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집이 생기면서 거기서 글자를 배우고 영어를 배우고 난리법석을 합니다. 나아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도 너무 늦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태아교육이 제일 중요하다. 이렇게 서두르다보니 ‘빠를수록 좋다.’ 학습의 압력이 대단합니다. 서울시에서 아이들에게 ‘아동 학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이시찬이도 이 발표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하여 서울 시장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고 아동 학대에 대해 많은 발표할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매질하고 버리고 굶기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라 가장 큰 학대는 ‘어른들의 재촉’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화급한 재촉 속에서 아이들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장과 성숙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육신의 몸이 자라나는 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속사람 즉 내적 인격이 자라나는 것을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장과 성숙이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몸은 비대해졌는데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바보 천치나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인격은 갖추었는데 몸이 자라지 못하면 장애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하듯이 어린 아이들은 성장과 성숙이 하나가 되어 장성한 어른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식물을 키워보셨을 것입니다. 화초나 농작물을 빨리 키우려고 거름이나 물을 많이 주면 식물의 뿌리가 썩어버리거나 아니면 키만 크게 자라나서 결실도 못하고 꺾어져 시들어버립니다. 이와 같이 요즈음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육신의 성장이나 학습의 성장은 비대해졌는데 인격의 성숙은 반비례하여 적어졌습니다. 아이들의 키가 많이 커졌습니다. 영양식으로 잘 먹여서 그런지 키가 많이 커졌습니다. 손자들이 인사를 하면 할아버지가 위로 쳐다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인사를 받는 것인지 도리어 인사를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아이들의 얼굴을 보려면 위로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청년들의 속사람은 옛날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 말로 하면 철이 없고 너무 여리고 너무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군대에 갑니다. 장성한 청년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청년들의 마음이 너무나 여리다는 것입니다. 군대생활을 감당하지 못해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군인들이 전체 군인의 5-7%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청년들은 항상 불안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증상이 심해서 고통스러워하자 부대에서 어머니를 오시라고 하고 특별 휴가를 허락하고 어머니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울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답답하여 ‘왜 우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습니다. ‘울지 마라.’ ‘고생이 심하느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습니다. 밤새 아들을 다독이고 타이르다가 어머니가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아들이 목을 매어 죽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립니다. 속사람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키고 크고 배운 것도 많지만 속사람이 너무나 연약합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어리기 때문에 자란 후에도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합니다. 항상 어머니의 치마폭에 있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청년들의 결혼의 대세가 연상 결혼입니다. 연상의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30% 이상을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상상도 못하고 꿈도 못 꾸었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도 한다면 어른들에게 경을 칠 일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맡은 목사님들의 말이 신부가 확실히 나이가 많다고 합니다. 피겨 선수였던 김연아도 5살 아래 청년과 결혼한다고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현상이 왜 생겨났는지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니까 아이가 자랄 때 어머니의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에 자기 주도력이 없어지고 자기 주체의식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자기의지, 자기 판단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차라리 나이가 많은 여자와 결혼을 한 후에 여자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사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자 아이들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어머니의 그 많은 잔소리가 아이들을 자리지 못하게 합니다. 정신적으로 연약하고 강하지 못합니다. 사내아이는 그냥 내버려두어서 실수도 좀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일일이 보살펴 주니까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못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교육학자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말하기를 ‘여자 아이는 집 안에서 철저한 가정교육과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키워야 하고, 사내아이는 광야에서 홀로 키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키우다보니까 여자 아이들은 장부가 되고 사내아이들은 졸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른이 되어서도 성숙하지 못하여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유치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문제가 될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싸웁니다. 시시한 일을 가지고 온통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데가 없습니까. 옛날의 어른들은 체면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말과 행동을 아주 조심하고 젊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려고 덕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그런 미덕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배울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유치하고 졸렬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사람입니까. 고린도 전서에는 어린 아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어린 아이는 부분적인 것만 알고 전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전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어린 아이들은 자기들이 듣고자 하는 것만 듣고 그 외에는 귀를 닫아버립니다. 아예 듣지를 않습니다. 알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알기를 원하고 그 외에는 일체 알기를 거부해 버립니다.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고 전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전체적인 것,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인식이 없고 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판단해 버립니다. 거기에 집착하고 전체를 말하면 귀찮아하고 짜증을 냅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은 참 영리하고 아이큐도 높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체를 보면 예술이요 부분만 보면 외설이다.’ 소설을 읽든지 영화를 보든지 전체적인 테마, 편집, 음악, 장르, 철학,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으면 그것은 예술이지만 한 부분만 보고 평가하면 외설이 되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음악이 주는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한 부분만 보고 평가를 하면 바른 평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유치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것은 우리의 정신세계가 외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전체를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보는데 숲을 보지 못합니다. 땅은 보는데 하늘은 보지 못합니다. 전체를 이야기하면 머리가 아프다 하고 복잡하다 하며 신경질을 냅니다. 지난 날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에 많은 성도들이 머리가 깨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중도 포기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견디고 난 사람은 성경의 전체를 볼 줄 알고 이해하고 깨닫습니다. 이와 같이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로 전체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둘째, 어린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아이들의 심리가 다 그렇습니다. 예외인 아이들은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엄마의 젖이 둘인 줄 아느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하나는 먹으라고 있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고 있는 거예요.’ 동물들은 어미의 젖을 먹을 때 자기 것 하나만 먹습니다. 다른 젖은 형제들이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엄마의 젖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둘 다 내 것이라는 욕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나면 그 젖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울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아빠는 나를 위하여 돈을 벌어오는 사람,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 누나는 나하고 놀아주는 사람, 전부 나밖에 모릅니다. 이런 사상이 자라면서 깨어지고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식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좁아지고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린 아이들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인격도 자라면서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남을 위하여 살고 남을 높이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어린 아이들은 지극히 물질적입니다.
물질을 받으면 사랑을 받은 것이고 물질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선물을 아주 좋아합니다. 생일이 되면 서로 선물을 준비했다가 축하를 해주고 생일잔치를 합니다. 그럴 때 어느 친구가 무슨 선물을 했는지 아주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그 선물을 받기 위해서 잔치를 준비하고 친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떻습니까. 크리스마스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만 주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아이들은 정신적인 세계나 영적인 세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그것만을 바라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보이는 세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넷째, 어린 아이들은 지극히 현세적이요 순간적입니다.
아이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장래의 꿈을 물어보면 ‘의사가 되고 싶다. 경찰관이 되고 싶다.’ 여러 가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만 사실 아이들은 그 장래가 자기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장래의 꿈을 꾸지도 않고 계획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은 내년에 2학년이 되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먼 미래의 일일 뿐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지금 어떤 놀이를 할 것인가 하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가 항상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젊은이가 되고 성인이 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 날들은 저절로 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가지고 오락 몇 번 했는데 벌써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결혼 주례를 하는데 ‘자, 지금은 신랑과 신부다. 며칠이 지나면 아빠와 엄마다. 조금 더 있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 할아버지 할머니 때를 생각하면서 좋은 할아버지, 좋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주례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할아버지 좋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며 자기를 성찰하는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겠습니까. 부부로 만나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티격태격하면서 마음에 드느니 안 드느니, 취미가 다르다니, 재주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참 유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지나가고 인생은 늙어 가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도박을 즐기는 것도, 자기 인생이 항상 젊은 시절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저 나이가 내게 다가옵니다. 결정적인 미래,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적어도 300m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처음 운전하는 사람은 자기 코앞 밖에 보지 못합니다. 발밑도 보지 못해서 휘청휘청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운전에 여유도 생기고 음악도 들어가면서 먼 곳을 보고 종합적으로 운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린 아이들은 유치한 분쟁을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친구를 친하게 사귀다가 조그만 일에 마음이 상하면 그만 토라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점점 그런 분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에게 잘해주는 친구들만 친하게 지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파벌이 많았습니다. 파벌이 왜 생깁니까.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들이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남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예수파다’ 파벌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즈음 정치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못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노무현파다’ ‘나는 문제인파다’ ‘나는 이재명파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국가의 법을 만드는 입법 기관에서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람들이 보이는 추태가 이렇습니다. 교린도 교인들 중에는 심지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했습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내가 세례를 준 사람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들뿐’ 이라고 그 이름을 밝혔습니다. 그 외에는 너희 중에 아무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남의 권위를 빌려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참 유치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결혼을 했으면서도 상대방에 대해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섯째, 어린 아이들은 자기 집착에 매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만 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잘못했고 내가 하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고, 내가 맡은 일이 귀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는 귀한 것이고 내가 맡은 사명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유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교인들에 대해 농사짓는 법을 비유하여 교훈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불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심는 자도 있고 물주는 자도 있고 가꾸는 자도 있고 추수하는 자도 있습니다. 다 소중합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농약을 치고..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집착에 매여 사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이것이 바로 성숙한 자의 지각입니다.
일곱째, 어린 아이들은 사랑 받기만 좋아합니다.
성숙이란 바로 사랑의 이해에 있고 사랑의 성숙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랑을 이해하고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치한 사람은 사랑도 욕심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받는 사랑만 고집합니다. 정신적으로 높은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것도 높은 차원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도리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넓은 사랑으로, 진실한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훌륭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심리학자인 고든 올파트라는 분이 ‘사람의 성품의 성숙’에 대해 ‘성숙이란 자아감의 확대를 의미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냥 커지는 것이 아니라 크면서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에는 저 혼자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크면서 부모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을 압니다. 형과 누나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인식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가정이 있고, 나라가 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자아감이 점점 확대되면서 큰 뜻에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큰 뜻이란 지금 내가 편하고 불편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저 사람이 편해야 내가 편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내가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남편을 기쁘게 해야 내가 기쁜 것입니다. 누구를 슬프게 하고 누구를 아프게 하고는 내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선린관계를 이루면서 비로소 내가 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큰 사랑이요 성숙한 사랑입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이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급한 인생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을 따르고 출세를 할 지 몰라도 이런 사람은 비천한 사람이요 비류에 속합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정서적 안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인관계에서 그 어떤 불편함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도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 어떤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항상 나를 돌아보고 살기 때문에 마음에 편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도 찌증을 내고 화를 내니까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왜 그렇게 짜증을 냅니까.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당신하고 오래 살면서 성격이 점점 나빠지고 매사에 짜증이 난다.’고 했답니다. 이 남자가 성격이 나빠진 것이 아내 탓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남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더욱이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 문제를 나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순간만을 보지 않고 다음을 보면서 미래를 준비합니다. 항상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볼 줄 알고 자신을 객관시 하게 됩니다.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우쭐하거나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도 않고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모든 것이 당장 끝나는 것처럼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성찰의 능력을 확고하게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항상 통일된 인생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처신해 나갑니다.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확고한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나의 길을 의연히 가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오든지 후회함이 없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장성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장성한 자로 키우고 계십니까.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우리는 성장해 나갑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서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비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가 튼튼한 나무가 됩니다. 인격도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큰 것을 발견한 사람, 참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유치한 것을 버립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다 버리게 됩니다. 큰 것 소중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작은 것 시시한 것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주인공 유다 벤허는 말할 수 없는 환난과 핍박을 당했으면서도 끝내 칼을 들지 않습니다. 친구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살았어도 막상 친구를 만난 후에는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렇게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는 음성이 내게 들려올 때 내 손에서 칼이 떠나는 것을 느꼈노라.’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그 거룩한 사랑의 선포를 보면서 그 사랑에 부딪히는 순간 내 손에서 칼이 떠났다고, 나는 누구도 칼로 대할 수 없다고, 누구를 미워할 수도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아이의 일을 다 버렸습니까.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이해와 인식과 그 거룩한 말씀 속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유치한 것,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다 떠나게 됩니다. 문제는 십자가에 대한 나의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에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 거룩한 영광을 온전히 이루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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