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브랜드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기원은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정착한 수도사들이 직접 약초를 재배해 약재, 연고 등으로 만들어 지역 주민들을 도운 게 시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세계 최초의 약국 중 하나로 알려졌다.
1612년부터 일반인들에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403년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약국으로 시작은 했으나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의약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부 관리용 화장품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노선을 바꿨다. 제품이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8세기에는 러시아, 인도, 멀리 중국에도 수출됐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조도 400년쯤 지나면 처음 위세를 잃고 사그라지듯, 산타 마리아 노벨라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다. 14세기에는 유럽에 흑사병(黑死病)이 돌았고, 19세기에는 이탈리아 정부가 경영권을 몰수하기도 했다. 가장 심각했던 위기는 비교적 최근 일이다.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혁신이 늦었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1980년대 후반 매장 한 곳, 직원 다섯 명이 일하는 동네 화장품 가게로 전락해 버렸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 피렌체에 살던 기계 수리공 에우제니오 알판데리(Alphandery)였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운영하고 있던 스테파니 가문과 가깝게 지내던 그는,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다가 '400년 역사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이유로 이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당시 회사는 마치 무법 지대(no man's land) 같았다"고 회상했다.
경영 체계는 엉망이었고, 직원들은 제멋대로 일했다. 50~60대 단골만 매장을 찾아왔으니 20년쯤 지나 단골들이 세상을 떠나면, 자연스레 회사도 고사해버릴 지경이었다.
알판데리 회장은 26년간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맡아, 전 세계 65개 매장, 직원 450여 명이 일하는 글로벌 화장품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에게 문 닫을 회사를 부활시킨 경영 비법을 묻자 '차근차근 하나씩'이 성장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저희는 아무리 급해도 서두르지 않았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새 사업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다. 제품을 팔고 돈을 벌면, 그걸 고스란히 회사에 투자했다. 수익 내기를 포기하고 제품을 개선하는 데 노력했다. 그 덕에 조금씩 품질이 좋아졌고 더 많이 팔 수 있게 됐다."
그는 전체적으로 변화를 도모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당시 얼마나 구식이었냐면, 제품을 만드는 기계가 너무 낡아서 곧바로 박물관에 보내도 될 상황이었다. 제품 만드는 기계부터 새로 설계했다. 내가 엔지니어 출신이고, 직접 기계를 설계하고 고칠 수 있다. 대표 제품 중에 '장미 화장수(水)'라는 게 있는데, 이 제품을 만드는 방법은 14세기에 처음 나와 지금도 똑같이 유지되고 있다. 다만 그때는 한 번 만드는 데 일주일씩 걸렸다면, 지금은 절반도 걸리지 않는다. 한 번에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품질 개선에도 힘썼다. 예컨대 비누를 만들 땐 완성된 제품을 3일간 숙성·건조해 주는데 그렇게 하면 비누 안에 남아 있던 수분이 증발하면서 비누가 아주 단단해진다. 쉽게 무르지 않고 더 오래 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만드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신제품도 개발하는데 최근에는 성형 보조 스킨케어 제품군을 새로 출시했는데, 성형수술을 받은 뒤 피부를 빠르게 회복시키는 용도로 쓰인다."
그들이 14세기 제조 방식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옛날 방식 제품이 그들만의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당시 수도사들처럼 제품 원료를 직접 재배해서 쓴다. 정원을 관리하고, 약초를 재배하고, 제품 관리까지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들이 가진 전통을 유지하고,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할 수 있다. 그들은 아예 매장을 일종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회사에 있던 유서 깊은 기계나 문헌을 전시하고, 매장으로 활용한다. 지금 이곳 매장은 피렌체에서 꼭 들를 만한 관광지가 됐다.
♡ 구전(口傳) 마케팅만 400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400년간 끊임없이 고객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영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객을 끌어 모으는 방법은 요즘 유행하는 방식이다.
알판데리 회장은 "핵심은 소문 마케팅(viral marketing)"이라고 말했다.
"저희는 광고를 안 한다. 샘플을 공짜로 퍼주는 일도 없다. 우리는 광고 대신 소문의 힘을 믿는다. 정말 만족스러운 제품을 만든다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주변에 권할 것이다. 요즘 IT가 발전하면서, 소문 마케팅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 집중하고 있는데,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언급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그가 처음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알게 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증조할머니가 산타 마리아 노벨라 크림을 매일 발랐다.
실제로 그가 이 회사와 관계를 맺게 된 건 26년 전 일이다. 민트향 사탕을 만드는 기계가 고장 났다면서 고쳐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정확히는 만든다기보다 찍어낸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쿵' 하고 찍으면 사탕 한 알이 나오는 식이었는데, 1분에 56개밖에 못 만들어냈다. 엄청나게 구식 기계였는데 고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낡은 기계가 아직도 돌아가는 걸 보면서 '회사가 참 많이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쓰던 화장품이 이렇게 사라지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새것을 사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옛것을 복원하고 더 좋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제게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낭만이었다. 사업적으로 보면 도태될 건 빨리 포기하고 혁신을 추구하는 게 옳은 일일지 모른다. 나는 도전 정신으로 시작했고, 그렇게 난관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즐겁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라는 화장품 브랜드는 1221년 세워진 수도사들의 약국이 기원이다. 당시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이 정착하면서 약국이 설립됐다. 수도원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제품은 1381년에 처음 만들어진 '장미수'인데, 전염병이 돌 때는 소독제로 쓰이거나 와인에 섞어 약으로 먹기도 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수를 만든 브랜드이기도 하다. 1533년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리나 공주가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콜로니아의 물(Acqua di Colonia)'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제작했다.
카트리나 공주는 이를 혼수로 가져가 지인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기존에 쓰이던 '향유(香油)'와 달리 끈적거리지 않아 프랑스 왕실에서 '왕비의 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향수 가운데 가장 향이 은은한 종류를 흔히 '오데 코롱(Eau De Cologne)'이라 부르는데, 이것의 어원이 됐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종교 기관에서 기업 형태로 변모하게 된 건 1612년의 일이다.
당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총책임자였던 안졸로 마르키 수도사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왕가 전임 약제 제조사'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때부터 대중에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66년 이탈리아 정부에서 '교회 재산 몰수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소유권이 정부로 넘어가게 됐고, 정부는 이 브랜드를 민영화시키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총책임 수도사의 조카인 체자레 아우구스토 스테파니에게 소유권을 주고, 이를 운영하게 했다. 스테파니 가문은 4대째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도 알판데리 회장과 지분을 나눠서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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