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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權鎭圭)
목차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3. 귀국 이후
4. 사후의 "권진규"
1. 개요
권진규(權鎭圭, KWON Jin Kyu; 1922년 4월 7일~1973년 5월 4일)는 대한민국의 조각가이다. 일본 체류시기인 1950년대의 초기 작품엔 석조가 많았고 1959년 귀국 후엔 주로 점토를 구운 테라코타와 삼베에 옻칠을 바른 건칠로 환조 및 부조 작업을 하였다. 동물, 여인초상, 자각상, 불상 등 조각 420여점(오리지날 326점, 사후복제 100여점)과 우화 및 데생 55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권진규의 구상적 조소는 인간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초월로 치닫는 정신적 치열함을 보여준다.
2. 생애
2.1. 초년기
1922년 4월 7일 함경남도 함흥부(현 함흥시)에서 사업가였던 아버지 권정주(權定周, 1897. 9. 11 ~ ?)와 어머니 영춘 조씨(永春 趙氏, 1894. 11. 15 ~ ?)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작은 누이 권경숙에 따르면 그녀의 오빠였던 권진규는 명랑하고 장난기가 많은 소년이었다. 1930년 함흥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재학 시절 늑막염으로 1년을 쉬어 1937년 졸업했고, 함흥부에서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는 바람에 다시 1년을 쉬었다. 1938년 4월 춘천공립중학교에 진학하였고, 1943년 3월 졸업하였다.
1943년 봄, 권진규는 친형 권진원을 따라 일본 도쿄도로 가 사설미술학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강제 징용되어 타치카와시에 있던 히타치 제작소 소속 공장에서 거친 노역살이를 하다가 용케 탈출하여 바다 건너 고향인 함흥에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 소유의 인근 과수원에 은신하며 지내던 중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그렇게 2년 여 후에 비로소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는데 누이 경숙은 오빠 진규의 성격이 그 사이 확 바뀌어 과묵하고 침울해졌다고 회상했다.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조선은행에 다니던 누이 권영숙,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던 권경숙과 함께 살았다. 권진규는 마침 인근에 이쾌대가 세운 성북회화연구소가 있어 그곳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이쾌대의 지도 하에 그림 공부를 하였다. 김창렬, 심죽자, 전뢰진 등이 그 때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었다. 이때 그는 일본 유학을 희망하였으나 부친이 아들의 미술 공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으므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가 다가왔다. 조각가 윤효중(1917~1967)이 당시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의 마무리 작업을 했는데, 이때 조수로서 약 6개월간 그를 도왔다. 속리산 법주사 대불 조성은 조각가 김복진(1901~1940)이 시작하였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이 기간에 권진규는 김복진이 남기고 간 다수의 작품을 윤효중과 함께 충무로 수장고에서 친견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최열, 2011; 39쪽). 아마도 이 때 권진규는 향후 조각가의 길을 꿈꾸게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일본에서 의사가 된 형 진원이 폐결핵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에 아버지 권정주는 가서 형을 간병하라고 동생 진규를 일본에 보냈다. 당시 한국과 일본 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던 바, 밀항해 들어갔다. 1949년 봄, 형 진원은 동생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권진규는 귀국하지 않았다. 그 때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쾌대의 소개 또는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27세였다. 당시 도쿄에는 큰 미술학교가 두 곳 있었다. 하나는 사학인 무사시노미술학교이고 관학으로는 도쿄미술학교가 있었다. 무사시노미술학교는 종전엔 데이코쿠미술학교로 불리었으며 1962년에 무사시노미술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권진규는 1953년 3월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권진규는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로댕 Rodin - 부르델 Bourdelle의 맥을 이어받은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Takashi Shimizu, 1897~1981)를 사사하였다. 1952년 37회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상하였고 1953년 38회 이과전(二科展)에서 특대(特待)상을 받았다. 출품작은 <백주몽白晝夢>,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 <기사騎士>로 모두 석조였다. 당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위치한 기치조지역 근처에는 묘석상이 다수 있었다. 권진규는 묘석상의 석공들로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시미즈 교수는 권진규가 돌로 조각하는 것을 언찮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시미즈 다카시는 주로 브론즈 작업을 하였다. <백주몽白晝夢>, 즉 "한낮의 꿈"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았는데 몸체는 사람이나 머리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는 직방형의 묘석을 최소로 깍아 말의 머리를 단순하게 형상화한 돌 조각이다. <기사騎士>에는 말과 혼연일체가 된 기수가 형상화되었다. 이처럼 권진규의 미술대학 시절 작품엔 말(馬)이 많고 이후로도 말이 평생의 테마로 자주 활용되었다.
1951년, 권진규는 같은 학교 서양화과의 오기노 도모(荻野トモ, 1931~2014)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였다. 도모는 진규보다 아홉살 연하의 짧은 머리 숙녀였다. 도모는 인상이 부드러웠지만 생각에 심지가 있었고 독립적 생활력이 있었다. 도모는 미술대학 졸업 후 마네킹 제작, 재봉과 공예 등으로 경제적 수입을 확보하여 평생 자기 그림을 그렸다. 권진규가 1951년 제작한 <도모>는 권진규의 현존하는 작품 중 최초의 것으로 권진규가 1959년 귀국하면서 도모에 맡겨졌다. <도모>는 도모가 2014년 이 세상과 작별하기까지 도모와 함께 하였다. 도모가 간 뒤 진규의 누이 경숙이 <도모>를 확보하여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진규와 도모가 함께 있게 되었다.
미술학교 재학 시기(1949년~1953년), 권진규는 생활이 어려웠다. 1950년 이후 한국전이 발발하고나서는 본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없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진규의 석조 여러점을 사주었다. 다나카의 사후, 누이 경숙이 수년 간 수소문 끝에 다나카 이사장의 딸을 만났고 그의 자택 정원에 놓여 있던 이들 작품들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1953년,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학교를 졸업하지만 연구생 신분으로 학교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진규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자상한 실력파 형 또는 선배였다. 진규는 학교 인근의 싸구려 하숙에서 도모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동거를 함으로써 그들은 생애 최고의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955년, 진규는 도모의 니카타 친가에 체류하면서 <보살입상> 등 나무조각을 하였다. 산책 길에 기와 공장이 있어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이를 계기로 진규는 테라코타를 하게 되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빈터에 가마를 만들어 흙을 구웠다. 진규는 영화제작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진규와 도모는 한동안 마네킹 공방에서 같이 일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음에도 진규와 도모는 고급 카페를 출입하며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1959년, 진규는 귀국을 결심하였다. 홀로 된 노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적 동기가 더 컸다. 조각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지 10년이 넘었지 않은가?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시미즈 다카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기류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 그런데 한일 양국관계가 도모와 같이 귀국할 사정이 아니었다. "일단 혼자 귀국하여 자리를 잡고 양국 관계가 호전되면 도모를 데리러 다시 오리라." 8월 네리마(練馬)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고, 9월 하네다에서 홀로 비행기를 탔다. 진규의 귀국 전날, 도모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일어나 재봉틀에 앉았다. 진규의 작은 누이 경숙의 네 아이를 위해 옷 네 벌을 지었다.
3. 귀국 이후
귀국 해보니 경제적 여건이 기대보다 훨씬 열악하였다. 함흥에서 열 손가락 내에 들던 집이 아니었던가? 많은 재산을 북에 두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서도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머니가 꿍겨둔 돈으로 겨우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3가 256번지 언덕에 가마와 우물을 갖춘 아틀리에를 자신이 설계해서 2년여에 걸쳐 지었다. 기념동상 수주에 대비하여 층고를 높게 하였다. 은사의 은사인 부르델처럼 부자 조각가가 되자. 당당하게 성공하여 도모와 재회하는 진규를 꿈 꾸었다. (이후, 권진규는 기념동상 수주를 한 번도 못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고분 부장품과 고려의 불상, 조선의 왕릉과 왕궁의 잡상을 살펴보았다. 혼자 살다보니 저녁 노을에 고향의 전설과 추억이 주마등에 실려 춤을 추었다. 이것들이 흙으로 형상화되고 가마에서 구어졌다. <해신海神>과 <춤추는 사람>이 아틀리에에 들어섰다.
차츰 자기류의 예술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귀국시 희망적 기대와는 달리 생활 여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수입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덕성여자대학교 등 몇 군데 시간강사 수당이 다였다. 그는 워낙 눌변이었다. 입 발림엔 영 젬병이었다. 자존감이 왜 그리 센지 남에게 작은 부탁 하나 넣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어디에 대고 전임교수직 로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 언감생심, 어디에도 말을 못 꺼냈다. 진규가 문제였다. 어쩌랴, 진규는 진규인 것을.....
도모에게는 너무 미안해 진규는 편지를 못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본 처가에서 도모의 부친이 이혼서류를 보내왔다. 1965년 4월 도모와 법적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진규는 다짐했다. "성공한 조각가로 도모와 재회하리라".
1965년 9월, 서울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출품작은 <조국> (남자 등신대 입상, 석고>, <입산> (목조), <손> (테라코타), <희구> (테라코타 자소상) 등 45점이었다. 전시회에 대하여 사회적 반향이 거의 없었다 (싸늘하였다). 당시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열악하였던 탓이 크지만 권진규의 소조가 구상 위주여서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조류였던 추상 미술에 반하였기 때문이었다. 뜻밖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단번에 고개를 넘은 적이 있었던가? 매 고개마다 재수, 삼수를 하지 않았던가?
1966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출강하면서 여러 여학생들을 모델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지원의 얼굴>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1967년). 아틀리에가 제법 많은 여인 두상으로 채워져갔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아틀리에가 적멸공간으로 전환되면 도모의 환영이 나타났다.
한 살 차이로 15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서양화가 권옥연(權玉淵, 1923. 7. 4. ~ 2011. 12. 16.)은 여러 면에서 진규와 대조적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상남자였다. 옥연은 프랑스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1965년 일본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가 주선하여 1968년 7월 권진규의 제2회 개인전이 같은 화랑에서 열렸다. 출품작은 <재회>, <춘엽니(尼)>, <지원의 얼굴>, <싫어> 등 테라코타 30점이었다. 소식을 접한 도모가 전시회 첫날 내방하여 <재회>가 실현되었다. 도모의 첫 마디는 "권상, 바보!". 그리곤 눈물뿐이었다. 도모는 재혼한 상태였다. 옥연이 두 사람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도모가 울었고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재회하지 못하였다.
니혼바시 화랑 전시회에 대한 일본 미술계의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출품작 가운데 <춘엽니>와 <애자>가 일본 도쿄도 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제 권진규는 삶의 공간을 일본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측에 비상근 강사직을 요청하였고 긍정적 응답을 받았다.
귀국 후 건칠 작업에 착수하였다. 건칠(乾漆)은 과거 중국, 한국, 일본에서 잘 사용되던 전통적 기법이었으나 근래에는 전통이 단절된 고전이 되어 있었다. 진규는 건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삼베에 까만 옷칠을 하여 석고 틀 안에 붙였다. 하루에 수천번 되풀이하며 영원을 기원했다.
무사시노 인사건이 궁금했으나 소식이 없었다. 진규는 시미즈 교수에 재차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가 고개 숙여 남에게 청을 넣은 경우는 그의 생애에서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사건은 대학의 캠퍼스 이전과 관련된 학내 혼란으로 무산되었다. (권진규가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는 항간의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협의건은 교수직이 아니라 시간강사직이었으며 그나마 성사되지 못하였다.)
1970년 젊은 화상 김문호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명동화랑을 열었다. 그는 미술품 거래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했다. 권진규에게 제작비를 선지불하고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 하였다. 김문호는 권진규에게 월 3만원씩 6개월을 지원했다. 1971년 12월 명동화랑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제3회 권진규 초대전을 열었다. 권진규는 테라코타 24점, 건칠 11점, 석조 3점을 출품하였으나, 기대를 걸었던 건칠 소조가 예술계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 문명대 교수가 주선하여 진행되던 사명대사 동상의 수주 건도 취소되었다. 1972년 들어 작가는 제작의욕을 상실하였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서 목불을 깍으며 마음을 추스리고자 하였다. 새로운 도전과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이규호 학예관이 고려대학교의 품의를 얻어 작품 2개를 15만원에 구입하였다. 그에게는 세상 살다보니 생긴 별일이었다. <마두>와 <가사를 두른 자소상>이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구니>가 따라갔다. 좋은 일이 이어졌다. 이규호의 소개로 알게 된 박혜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교수, 핵물리학 전공)이 선뜻 7만원을 내놓고 소품 2점을 골라갔다. 197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이 좋은 위치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박혜일의 자택에서 안동림(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강사), 김정제(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 학생)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5월 4일 오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재방문하여 미술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와 몇 명의 지인들에 편지를 써 발송하였고 누이동생 경숙(1927~) 앞으로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유서와 30만원을 남겼다. 오후 3시, 그가 예술혼을 불태운 아틀리에에서 세상을 떠났다.
4. 사후의 "권진규"
사후 언론보도는 짤막하게 나왔으며, 그의 시신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묻힌 1973년 5월을 기점으로 망우리 묘지의 안장이 금지되어 사실상 그가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진규의 자결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그를 다시 보았다. 하루 아침에 권진규는 "비운의 천재"로 바뀌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변덕은 호들갑에 불과하다.
권진규는 그의 세대에서 특별히 운이 나쁘지 않았다. 운이 좋아 도모와 연이 닿았고 운이 좋아 착한 누이 경숙이 있었으며 운이 좋아 진규를 어떻게든 미술계 중앙에 넣고자했던 15촌 지간의 족질 권옥연이 있었다. 평론가 유준상, 박용숙 등은 진작 그를 알아봐주었고, 박혜일, 이규호, 안동림, 김문호 등 우인이 있었다.
사후 15주기인 1988년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엔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에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2009년은 모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개교 8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무사시노가 배출한 가장 자랑스런 동문으로 권진규가 뽑혀, 모교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그리고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2004년,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가 국가등록문화재 제134호로 등록되었다. 2006년, 누이 권경숙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틀리에와 살림채를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http://www.ntculture.or.kr/에 기증하였다. 아틀리에는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영구히 보존하는 시민문화유산 제3호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http://www.ntculture.or.kr/culturalHeritage/3.
권진규 작품을 모아온 미술 애호가 박문덕 하이트문화재단 이사장과 김현식 대일광업 회장은 권진규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누이 권경숙과 권진규기념사업회가 2021년 유작 대부분과 일본에서 회수한 권진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2022년 권진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렸다(3.24~5.22). 또한 누이 권경숙의 손자, 즉 조카인 허준이가 물론 한국인은 아니더라도 필즈상을 수상하는 가문의 경사도 있었다.
권진규, 1971년 [가사를 걸친 자소상]
권진규, 1967년 [지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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