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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세상이야기]
지록위마,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를 멸망시키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로는 단연 진시황제가 지목된다. 중국 진(秦)나라의 제31대 왕인 영정(嬴政)은 자신의 나이 39세에 어지러웠던 중국 천하를 통일시키고 스스로 자신의 칭호를 황제로 고쳐 부르게 하여 우리에게는 ‘진시황제(秦始皇帝)’로 더 유명하다.
영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훗날 장양왕)와 부인 조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전국시대의 거상 여불위의 애첩이었다. 수완(手腕)과 안목이 남달리 뛰어났던 여불위는 진나라의 왕위계승권이 있던 영자초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심지어는 자신의 여인인 조희마저 바쳤던 것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여불위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희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의 아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후 영자초는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소양왕(진나라, 제28대)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태자 안국군(효문왕, 진나라 제29대)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여불위가 영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여보냈다. 훗날 영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진나라, 30대)이 되었다. 그런 공로로 여불위는 진나라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여불위의 계획대로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양왕이 죽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너무 이른 나이에 보위에 오른 영정은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었기에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다.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과거 자신의 첩실이었던 모후(母后) 조희와 다시 각별한 사이로 지낸다.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으로 꾸며 조희의 처소로 보냈다. 여불위가 뜻한 바대로 노애와 조희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이 생긴다. 이에 조희와 노애는 영정의 눈을 피해 수도인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영정은 모반(謀反)을 일으킨 노애를 능지처참하며 노애의 두 아들마저 모두 죽이고, 어머니인 조희를 감금시킨다. 그리고는 이런 엄청난 일들을 꾸민 여불위를 자결하게 만든다.
영정은 새로운 승상 이사를 옆에 두고 친정을 시작한다. 진나라의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중국 대륙의 통일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쇠약했던 한나라를 필두로 위나라ㆍ초나라ㆍ연나라ㆍ조나라ㆍ제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BC 221년, 마침내 거대한 중국 대륙을 통일시킨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주왕조 때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의 잔치에서 박사인 순우월이,
“현행 군주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改替)할 것을 진언했다. 이에 시황제가 여러 대신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한 가부를 묻자 군현제를 주장했던 승상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런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ㆍ복서ㆍ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진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또한 진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진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몹시 진노했다. 노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생매장시켰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진시황제의 수하에는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환관(宦官) 조고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고사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다. 지록위마란,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로 조고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여 보고자 황제 호해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서 남을 속이려는 짓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친이 죄를 범하는 바람에 조고의 어머니는 관노(官奴)가 되었다. 이일로 인해 그는 노예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출생했다. 하는 수 없이 조고는 어려서 거세를 하고 궁으로 들어가 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신분 낮은 환관이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다. 덕분에 복잡하고 까다로운 궁중예법을 몸소 익혀 나라의 법률에 정통하였고, 그런 그의 영명함이 진시황제의 눈에 들어 제법 높은 관직을 맡아보게 되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에도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머리를 조아리는 등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다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조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의 권력을 움켜쥐고 자신을 천대했던 귀족문벌 사람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고야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의 복수심은 극에 달했다.
조고는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병사하자, 당시의 승상 이사와 짜고 거짓 조서를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명장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또 시황제의 용렬(庸劣)한 막내아들 호해를 시황제를 이은 2세 황제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다. 또한 평소 정사에는 별관심이 없었던 황제 호해에게 참소(讒訴)하여 승상 이사를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 횡포와 만행을 저질렀다. 이사가 죽은 후, 진나라의 권력은 이제 완전하게 조고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 조고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도 할 겸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도 할 겸 겸사겸사 황제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폐하, 천하의 명마를 한 마리 바치오니 부디 거두어 주시오소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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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조고에게 물었다.
“승상, 저건 사슴이 분명한데 어찌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승상 조고는 매우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건 분명히 말입니다. 폐하께서만 어찌하여 사슴이라고 하십니까?”
호해는 그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좌우의 대신들에게 모두 물었다.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저것이 말로 보이오?”
대신들은 조고의 눈치를 보다가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하였으나, 더러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했던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
이것이 바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였다는 데서 비롯된 고사 ‘지록위마’의 유래이다.
진나라의 멸망은 진시황이 죽으면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고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장자 1인과 황제 한 명을 죽였으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경세가인 승상 이사를 죽였으며, 진나라의 대들보인 장군 몽염과 몽의 형제를 죽였다. 아울러 진시황의 공자와 공주 30~40여명을 죽였으며 수 십 명에 달하는 대신과 수 백 명이 넘는 그들의 가족을 죽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백성을 죽였다.
그는 정치권력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인 일 뿐이었다. 오로지 비천한 신분의 굴욕과 열등감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역사에 등재되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날, 호해는 낭중령(郞中令)으로 승진된 조고를 불러 말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일은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에 불과하오. 나는 황제가 되었으니 이제 정말로 통쾌하고 시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뿐, 무슨 정사를 논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소. 경도 나와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게 어떻소?”
조고는 무거운 얼굴빛을 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명한 군주는 정사를 대신에게 맡기고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구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많은 공자와 대신들이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공자들은 대부분 황제 폐하의 형장(兄長)들입니다. 대신들도 선황의 유조 때문에 복종을 하고 있을 뿐 내심으로는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변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더욱이 몽염 장군이 죽었지만 몽의 장군은 변방에서 병마를 거느리고 있어 항시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지금 폐하께서는 편안하게 즐거움만 추구하고 계십니까?”
황제 호해는 갑자기 두려움에 온 몸을 떨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고가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단지 법률을 더욱 엄하게 바꾸고, 형벌을 가혹하게 다스리며, 죄인에게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화근을 아예 뿌리 채 뽑아 버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조정의 일에 공자(公子)들을 멀리하게 만들고, 선제(先帝)의 대신들은 서서히 하나씩 제거하고, 가세가 빈궁한 사람들을 등용하면 그들은 성은에 감격하여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안정을 찾게 되고 폐하께서는 오로지 즐거움만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호해는 조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업무를 조고에게 맡겼다. 이날 이후 함양성은 조고에 의해 도살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상금을 타기 위하여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공자들과 대신들의 죄상을 내궁부에 고발하였다. 조고는 고발을 접수하면 곧바로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가혹하게 고문을 하여 없는 죄상도 스스로 불게 만들었다.
이때 몽의 장군을 비롯하여 수십 명에 해당하는 선황제의 대신들과 호해의 12명 형제들이 피살되었고, 연루되어 함께 피살된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더욱 공포스럽고 끔찍한 일은 10명의 공주들이 죄명도 모른 채 동시에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거열형은 여섯 대의 수레에 각각 사지와 목과 몸통을 묶고 말을 힘차게 몰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조고는 고귀한 신분의 공주들이 동시에 목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하늘한 몸통이 네 쪽으로 갈라져 하늘에 선홍색의 피를 뿌리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생리적인 결함과 오랜 억압으로 조성된 야수(野獸)보다 더한 잔인성과 동물적 포악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가슴에 극도의 만족감과 쾌락을 안겨주었다.
법령은 날이 갈수록 가혹해져 갔고, 형벌은 더욱 끔직해졌다. 여러 대신들은 점점 위기의 벼랑에 몰려 전전긍긍 하였고, 백성들의 시신은 산처럼 쌓여갔다.
2세 황제 호해는 조고가 정적을 제거하는 동안에 토목공사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진시황이 조성하려다 미완으로 남겨둔 아방궁의 공사를 넓고 화려하게 다시 수축하기 시작하였고, 노역(奴役)으로 수만 명의 백성을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하여 가래나 삽을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도망가 초적(草賊)이 되었다. 진승과 오광이라는 사람은 대택향에서 대나무창을 높이 들고 봉기를 하였고, 뒤이어 옛 6국의 귀족후예들도 여기저기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반진(反秦)의 봉화는 벌판을 태우는 불처럼 사방에서 일어나 진나라의 운명을 풍전등화로 만들었다.
조고는 개인적인 은원(恩怨)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기 때문에, 원한에 쌓인 대신들이 직접 호해에게 자신의 죄상을 폭로하는 주청을 하지 못하도록 호해에게 협박조로 권고하였다.
“폐하! 천자(天子)가 늘 대신과 얼굴을 맞대면 고귀함이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의 비판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자의 권위와 신명(神明)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심궁(深宮)으로 물러나 편안하게 계시옵고, 조정의 잡다한 사무는 소신과 법령에 익숙한 시종들이 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하의 사람들은 폐하를 현명한 군주라고 칭송을 할 것입니다.”
조고의 말은 호해의 생각에 꼭 들어맞았다. 호해는 모든 정사를 조고에게 맡기고 궁중 깊숙이 몸을 감추고 주색에 심취하였다. 조고는 지위만 환관이었지 사실상 임금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비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고귀한 신분의 대신들 사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감과 열등감이 심하다. 때문에 그들은 권세를 얻으면 오랫동안 눌렸던 원한과 비굴감과 열등감이 보복행위로 변질되기가 십상이고, 유혈을 오락으로 즐기는 잔인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천하의 군웅(群雄)이 쳐들어와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9년 2세 황제마저 모살(謀殺)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자영은 재위 46일 만에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통일이후 3대 15년 만에 멸망하고, 뒤이어 쳐들어온 항우에게 잡혀 죽었다.
대저 그릇이 작은 권력자는 항시 두려움에 눌려서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또한 개인적인 한(恨)과 야욕이 강한 사람은 천하의 대세를 엉망으로 만든다. 진정한 권력자는 인내와 관용과 이해가 풍부해야 한다.
도량이 부족한 조고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 강대한 통일왕조를 뿌리 채 흔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왕자, 공주, 승상, 장군은 물론이고 숱한 공신과 귀족을 살상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고, 타인의 약점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기지를 올바른 방향에 사용하였다면 현상(賢相)이 되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는 정치권력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인 일 뿐이었다. 오로지 비천한 신분의 굴욕과 열등감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역사에 등재되는 인물이 되었다.
한림(漢林) 최기영
오늘도 즐거운 날 되세요
행운이살아 숨 쉬는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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