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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묵상글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보시는 것을 보는 관상의 눈, 관상의 교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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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24 04:15
- 보시는 것을 보는 관상의 눈, 관상의 교환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편견적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만 놓고 보면 나타나엘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꽉 막힌 사람이나 완전히 닫힌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필립보의 제의랄까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주님께 갔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타나엘은 꽉 막히거나 닫힌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신비에 열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처럼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믿기도 하였지만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에
하느님 신비의 문까지 닫는 사람은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그가 받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이요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사건이나 역사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들면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 간 것을 야곱의 편애와
이에 대한 형제들의 시기 질투가 만든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나타나엘은 이런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 필립보가 찾아가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기를 주님께서 먼저 보셨다고 했을 때
똥고집 부리지 않고 즉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믿는 사람에게는 관상이 교환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믿는 이도 보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시편 139편의 찬미가 절로 나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나이다.”
이렇게 나타나엘처럼 주님께서 알고 계심을 알고,
보고 계심을 관상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위선자라고 나무라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다르겠지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자선하고 단식하지 않고,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주님의 눈앞에서 뭐든지 다 하겠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눈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내 어려운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의 아심에 사랑을 또한 느끼겠지요.
그래서 엇길로 가지 않고,
그래서 행복의 길로 가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나도 보고,
알고 계심을 나도 아는 또 다른 나타나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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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첫 복사를 서는 아이를 보면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긴장해서 초조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첫 복사를 서기 전에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복사하기 싫어.”
복사서는 두려움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긴장하는 새 복사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틀려도 안 틀린 척하는 것이 복사야.”
그렇게 해야 사제도, 또 신자들도 분심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계속하면 실제로 대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불안해하면서 포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범하게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곳이고 또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두려워도 무섭지 않은 척, 틀려도 틀리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기에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 삶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 안에 머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성경에는 ‘나타나엘’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여쭙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조금 뚱딴지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무화과나무’는 메시아적 평화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이미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참으로 거짓 없는 사람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 안에서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자기를 가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 더 올바른 길,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닌,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하늘 나라에서의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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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진정한 지혜는 한 순간에 발견할 수도, 언제까지나 깊이 감춰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프랑수아 를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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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말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대체 이 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만남의 신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너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 곧‘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신 거죠.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곧 우리를 관상하고 계시는 그분을 관상하게 되면,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관상’, 그것은 곧 사랑의 바라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께 대한 믿음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시고
마음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시고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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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신앙인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 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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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 깊이 있는 고기와 하늘 높이 떠, 나는 기러기는 쏘고 낚을 수 있거니와 오직 사람의 마음은 바로 지척 간에 있음에도 이 지척 간에 있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범을 그리되 모양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은 알되 얼굴은 알지만 마음은 알지 못한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명심보감 성심편)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장)” 이렇듯이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기도 어렵고, 나의 마음 또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능과 능력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바둑은 몇 번 두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력에 맞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수는 바둑 판 위에 실력에 맞는 정도의 돌을 먼저 놓습니다. 이것을 접바둑이라고 합니다. 골프도 평균 타수가 있습니다. 하수는 자신의 실력에 맞는 타수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핸디’라고 합니다. 저의 바둑 수준은 아마추어 7급의 수준입니다. 저의 골프 핸디는 100 정도의 수준입니다. 인품과 영성도 몇 번 만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인품과 영성은 능력과 재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품과 영성은 오랜 정진과 성찰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치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위선에 빠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안다고 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모를지라도, 인품과 영성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와 ‘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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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 사람 아무개 아무개, 경상도 사람 아무개 아무개, 전라도 사람 아무개 아무개, 혹은 목수 아무개, 농무 아무개….
그런데 사실 우리 앞에 붙여지는 수식어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말들입니다. 수식어는 수식어일 뿐 그 수식어가 우리 모습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수식어 즉 ‘나자렛’에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했던 나타나엘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난 순간 주님을 나타냈던 수식어는 모두 무의미했음을 나타나엘은 고백합니다.
우리도 우리 신앙의 길에 나타나엘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주님은 그 수식어가 다양합니다.
자비의 주님, 사랑의 주님, 인내의 주님, 용서의 주님, 치유의 주님….
문제는 앞의 수식어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주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저 주님이십니다. 어떤 수식어도 주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식어가 달린 주님이 아닌 그저 주님 자체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수식어가 아닌 주님만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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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理想)이라는 옷.
이상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사랑에 이상을 맞추세요.
이상에 사람을 맞추면
옷이 찢어지거나
그 욕심 때문에 사랑이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에 이상을 맞추세요.
사랑을 잘 보고
사랑을 잘 살펴서
사랑에 맞는 옷을 골라보세요.
내 이상을 강제로 입히지 말고
그저 내가 상대의 이상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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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축복
“참나의 발견”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에만 매몰되면 해서는 안되는 일까지 하게 될 수 있다.”<다산>
“사람으로서 하지 않는 바가 있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다.”<맹자>
매사 완벽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남겨 놓으라는, 자주 삶의 현장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여유와 자유를 지니라는 충고이겠습니다. 이래야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12사도들중 하나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사도들의 명단에만 언급되어 있을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교회는 오늘 요한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된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동일시 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무려 인도까지 갔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였고 거기서 마법사로 고발당한후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힌채 참수형으로 잔혹하게 순교했다 전해집니다. 성인의 상징물은 칼과 벗겨진 살가죽이며, 유다 타대오와 더불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제본업자, 도살업자, 치즈상인, 가죽상인, 미장공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는 나타나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강력히 권합니다. 자주 성소자들을 위해 인용되는 유명한 말마디, “와서 보시오.”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와서 실제 보라는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두분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찬사도 없습니다. 주님과 만날 때 참나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참사람,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꿰뚫어 본 예수님입니다. 평생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참사람의 나를 살고자 노력했을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이란 이름뜻대로 거짓이 없는 참사람 나타나엘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추구하고 선망하는 인간상입니다. 감격한 나타나엘이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아마도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공부에, 특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관한 공부에 전념했을 것이고, 주님께서 이를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곧장 이어지는 감동한 나타나엘의 화답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의 내공을 짐작하게 합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그동안 간절히 부단히 찾았기에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새삼 확인시켜준 나타나엘을 격려하며 더 큰 축복도 예고합니다. 나타나엘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 야곱의 꿈이 예고한 하느님과의 통교가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항구한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말그대로 우리의 하늘문이, 하늘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새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교회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불리는 교회입니다. 이 도시의 성벽의 기초를 위한 열두개의 돌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바로 이 열두 사도들중의 하나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 교회공동체의 기초를 이뤘음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현존하는,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희망인 새 예루살렘 천상교회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활력넘치는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고,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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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리>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6)
함께하고픈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임 만난
나를 건너
임께로 가세요
아직은
닿을 수 없는
벗과 임 사이에
내 기꺼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드릴게요
함께하고픈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임 만난
벗을 건너
임께로 갈게요
아직은
닿을 수 없는
나와 임 사이에
벗께서 기꺼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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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언서에 정통한 나타나엘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칭찬하고 인정하시는 이유는 그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수 있겠소?’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가 한 말은 불신자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의 말이 아니라 칭송을 받아야 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말보다 예언서들의 말을 더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메시아는 베들레헴, 곧 다윗의 고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적어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예언자도 오래전에 예고했던 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혼란스러웠고 의심이 들어, 필립보의 말이 예언자의 예고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나는 두 개의 성서 말씀을 라틴어로 읽었습니다. 첫째 본문은 성무일도에 실려 있는 것으로 이사야 예언자가 한 말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를 질러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천대받는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이사 49,13).
둘째 본문은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요한 8,12).(22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한민족 5천 년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고대 시대에 관한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역사서로서 편찬되기 전에, 이미 고대 단군조선과 삼국 시대의 수많은 사료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해 내려오던 고대 사료를 최근 재야 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주해를 달아 출판도 하고 강단 사학자들과 활발한 학문적 토론도 벌이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 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전문 연구가들의 방대한 노력을 다 소개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자리도 아닌 만큼, 한민족이 가슴속에 간직해 온 하느님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비롯한 몇 가지 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본다. 그리고 한민족에게 유전 인자처럼 형성되어 있는 종교적 심성의 원형으로서 그 ‘하느님 신앙’ 또는 ‘풍류도’(風流道)가 어떻게 한국 종교사 속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 등과 해석학적 지평 융합을 이뤄왔는가를 살펴본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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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스승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1,48)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 책 제목이 특별해서 잠시 짬을 내어 「솔직함의 적정선」(백두리)을 보고 읽으면서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저 자신은 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특히 M.E 주말 발표 중에, 저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때론 이 솔직함이 저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저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으로 다가왔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요? 공감하는 부분은, 『감추는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만, 거짓된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진짜를 듣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 듣고 싶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을 찾는 것은 마치 봄 옷차림을 고르는 것과 같이 이거다 싶은 조건이란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봄마다 옷장을 보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하지, 이 날씨에 뭐가 적당한 거야?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사실 헷갈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오늘 복음에 의하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1,45)라는 이 부분의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는 동일 인물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자신이 만났던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나타나엘에게 소개하자, 대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라고 거침없이 응답합니다. 이 표현의 밑바닥에는 나타나엘의 고정관념, 선입견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커다란 덫,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타나엘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길들여 있었기에, 위대한 인물은 예루살렘이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베틀레햄 출신이면 몰라도, 나자렛과 같은 변두리 시골 촌 동네에서 세상을 구할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1,45)라고 권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일단 한번 가서 만나보게, 라고 설득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나타나엘을 향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라고 긍정적으로 좋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 점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라고 느껴집니다.
예상하지 않은 예수님의 찬사를 듣고 나타나엘은 내심 놀랍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을 처음 본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을 들으면서 내심 놀람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1,48)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단지 나타나엘에게만 던진 물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진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나타나엘 자신이 자신에게 묻고 물어 왔던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1.48)하고 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았다, 는 표현은 마치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 사도를 부르실 때처럼 단지 눈에 보이기에 보는 것이 아니라 주시해서 그를 보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마음에 무엇으로 고민하고 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던 까닭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 각자를 주시해서 보고 계시며 당신과 만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장소는 곧 나타나엘이 이스라엘의 깨어 기다리는 사람의 전형으로 평소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해 온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근거는 바로 시편 1장의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1,2)라는 노래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처럼 그곳이 어디든 하느님을 갈망하고 고대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늘 지켜보시고 당신에게 다가올 것을 기다리십니다. 저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아닌 누이의 무덤 옆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래 참 생명과 진리를 기다려 왔었기에 나타나엘은 마침내 주님과 만남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남은 분명 은총이며 그러기에 은총 중의 은총의 만남은 주님과 만남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를 만났음을 확신한 나타나엘은 그의 솔직한 성격처럼 즉각 단순 명쾌하게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하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진리 앞에 단순 소박하게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주님을 따랐던 나타나엘과 같은 제자와 사도들을 예수님은 기다려 왔었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비록 당신과 당신 고향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그였지만 그렇게 적나라하며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것이 때론 그의 약점이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분명하고 솔직한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솔직한 사람은 담백하기에 한번 마음이 바뀌면 무섭게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길 여지가 충분한 성향의 사람입니다. 이를 계기로 나타나엘은 아마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1,50)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솔직함은 분명 좋은 미덕일 수 있지만, 때론 그 솔직함이 거부당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게 되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 앞에 정직하지 못하게 되고 내적 평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 앞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으로 남게 되면 자칫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서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거짓된 허위와 가식을 벗어 던져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솔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당신처럼 거짓 없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우리에게 나와 함께 가서 주님을 만나 봅시다, 고 재촉하고 초대합니다. “스승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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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새것 받아들이는 지혜 가져야만 /
박윤식 [big-llight] 2024-08-23 ㅣNo.175317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나는 모세와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그러자 그는 필립보에게 ‘그곳에서 무슨 좋은 분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와서 보시오.” 라며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해 말씀하셨다. “보라, 저 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이에게는 거짓이 없다. 그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답하셨다. 이에 그가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임금님이십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분으로, 갈릴래아의 카나 출신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인으로 여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터키에서 활동하다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단다. 오늘이 그의 축일이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출신이기에 편견을 가져 시큰둥하였다. 그러나 그의 참모습을 아신 예수님께서 “너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인이다. 너에게는 거짓이 없다.”라는 말에 마음을 열었다.
이처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오랜 선입관을 버린 것이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런 그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참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이”라고 칭찬하셨다. 이런 의미 있는 만남으로 그는 예구님께 충실하면서 나중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특별한 증인‘이 된 것이다.
우정이 두터운 친구 둘이 길 가다 한 이가 작은 금덩이를 줍고 어쩔 줄 몰라 호주머니에 넣었다. 둘은 말이 없었다. 한참가다 강 건너면서 금을 가진 그가 그것을 슬그머니 물에 버렸다. 그제야 친구가 놀라며 그 귀한 걸 왜 버리느냐 물었다. 그는 우리 우정에 금갈까 봐 버렸단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일 게다. 사실 아무 목적 없이 비우는 게 아닌, 채우려고 비우는 이는 정말 현명한 이다. 더군다나 비울 때를 알고 대처한 이는, 그야말로 ’위대한 이‘ 이다.
사실 “와 봐라.”라는 말에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따랐다. 그분의 설교 초기는 대부분 ‘와서 보라.’라는 초대였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도 ‘와서 보라.’라는 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서 제자가 되었다. 그분께서 제자를 부르시던 나자렛에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까지, 얼마나 많은 이가 ‘와서 보라.’라는 그 초대를 받아서, 또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와서 보고 믿었을까?
그 옛날 나자렛의 예수님으로부터 이 시각 우리에게까지, 예수님께 이어져 있는 첫 번째 고리가 사도들이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후예가 교부들이요 우리들이다.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해 선입견을 품을 수 있다. 사회규범에 얽매였거나 가진 정보나 지식이 제한되어 있기에. 그렇지만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즉시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 할게다.
사실 부름을 받는 이마다 의심으로 또는 확인의 물음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그 많은 이가 자신을 합리화하며 그 굴레를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곤 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달랐다.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즉시 고백했다. 우리 역시도 습관이나 태도, 가치관이 잘못되었다면, 즉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지혜’를 가져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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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신약 성경에서 바르톨로메오 또는 나타나엘 사도의 이름을 찾아보면, 열두 사도의 이름이 열거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4 참조) 오늘 복음에서만 그 이름이 나타납니다.
역설적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사도인데, 그가 복음을 전하였다거나 제자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그에게 복음이 전해진 장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 1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장에서는 증언들이 고리처럼 이어집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그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가 다시 형 시몬을 데려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 그를 부르시고, 그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서처럼 필립보가 다시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을 부릅니다.
이로써 복음서에서는, 바르톨로메오가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전해진 증언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필립보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말로 증언하였고,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던 나타나엘에게 직접 와서 보도록 초대하였고 그래서 마침내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서 1장이 끝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사도들로부터 우리에게까지 신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서도 사도들을 “초석”(묵시 21,14)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사도들에게서 전해진 신앙을 토대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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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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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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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kYX/523
우리는 종종 자신이 가진 정보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정보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정보를 토대로 조각 맞추기를 하고,
빈 공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채우고,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매번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직접 대면이 필요합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오.'
예수님을 직접 만난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상황을 직접 대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한편으로는 굳이 대면해야 할 정도로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기에,
또 다른 쪽에서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직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막상 직면하게 되면 더 정확하게 알게 되고
생각했던 것 만큼 큰 어려움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가졌던 두려움마져도 잘못 생각했던 것임을 알게 되며,
결국에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
직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데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며,
결국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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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전교(傳敎)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전교 대상자를 정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혹시라도 단칼에 거절당하면 어쩌지?’
‘나도 잘 못사는 주제에 전교는 무슨?’하는 마음에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웃 전교에는 큰 용기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타나엘의 완강한 거부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나타나엘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함께 가자는 필립보 사도의 초대 앞에 나타나엘이 보인 반응은 냉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장 46절)
제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나타나엘의 그런 반응 앞에 즉시 위축되어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 사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끝까지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안내한 필립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지혜와 은총으로 가득한 전무후무한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행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필립보 사도의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초대 앞에 나타나엘은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께로 삶의 방향을 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마지막 카드인 ‘와서 보시오’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과감히 떨치고 사람들에게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한번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어렵사리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왔지만, 정작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보다 큰 낭패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앞서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문턱이 낮은 공동체, 그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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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십이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신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고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절).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해 회의를 한다.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여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된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을 우리의 삶 속에 체험할 수 있을 때, 그렇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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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착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바늘 도둑과 작은 거짓말)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솔직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어야만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더욱더 거짓말이 활개를 칩니다.
정부에선 ‘가짜뉴스’를 퍼뜨리면 처벌까지 하겠다고 나옵니다.
잘못된 정보로 정부에서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고, 음성인데도 양성이라고 판정을 내린다고 믿는
사랑의 제일교회 신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불안한 마음에 치료를 받다가 탈출까지 시도해 방역 당국의 애를 먹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전광훈 목사는 정부에서 자신들을 테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교회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는 날엔 코로나가 절대 번지지 않는데 왜 코로나와 광화문 집회를 연결하느냐고 병실에서 유튜브로 따집니다.
지금 정권에서 이것으로 독재를 유지하려고 우려먹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수준까지 올라온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인들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죄가 없어질까요?
그들 때문에 온 나라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거짓말에 대한 의식을 새로 해야 합니다.
는 나라가 거짓말 천국이 되어가는 이유는 ‘착한 거짓말’을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자녀들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선의의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거짓말일까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입니다.
바늘도둑도 도둑인 것처럼, 작은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안 좋은 것이라면 뿌리부터 잘라야 합니다.
제가 음식 대접을 받고 맛이 없을 땐 그저 “먹을 만하네요!”라고 말해줍니다.
먹을 만하니까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맛이 없는데 굳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말이기는 하나, 그러면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나를 믿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합을 펼칠 때, 대부분 갤럽조사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빅데이터 통계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트럼프와 힐러리를 검색한 숫자를 세어보니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힐러리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트럼프를 뽑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트럼프를 뽑았다고 하면 정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갤럽 조사에서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을 마친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누가 저 사람 뽑았어?”라고 물어보면 뽑아준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선이 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거짓말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나무입니다.
거짓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고 했을까요?
자신들이 죄를 지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을 심판하고 또 자신들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고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심판하는 분도, 나를 선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하느님 대신 나 자신이 심판자이고 구원자가 되려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는 방법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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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45-51)”
1) 이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나타나엘이, 즉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나타나엘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을 그의 말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보잘것없는 시골 나자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을 깊이 꿰뚫어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분의 제자가 된 지금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말 때문에 이 말씀을 창세기에 있는 ‘야곱의 꿈 이야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창세 28,12),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에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이사 6,1-4).”
하느님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의 주 임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천사들은 바로 그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이고,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린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위를 날아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찬양한다는 뜻,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는 “너희는 믿게 될 것이다.”인데, 복음서 저자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미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5-17).”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1-3).”
<‘예수님은 하느님의(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으로 풀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그냥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신앙이기 때문이고, 우리 교회의 모든 교리의 출발점이고 핵심이고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3)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말씀의 뜻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갈망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너의 심정과
믿음과 희망을 내가 잘 알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을, 또 그의 믿음과 희망을, 또 그의 심정과 생활을 모두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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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필립보 사도가 두번째로 선교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생활하면서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확신하게 된 필립보가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 나타나엘을 만나서는 자기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를 드디어 만난 것 같다며 예수님에 대해 소개한 겁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가 성경에 대해 박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메시아는 나자렛 같은 별 볼 일 없는 시골 마을이 아니라, 다윗의 성읍인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와서 보시오”라며 자기를 잡아끄는 필립보의 당당하고도 담대한 태도를 보고는 그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예수라는 분을 한 번 만나보기로 합니다. 우리 속담으로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나타나엘과 함께 당신께로 오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필립보야 말로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의 표본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깜짝 놀란 필립보가 우리는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나에 대해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씀은 일종의 ‘은유’로써, 당시 많은 유다교 랍비들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성경 말씀을 공부하던 모습에 빗대어, 나타나엘이 하느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당신께서 알아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보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부르기 전부터 이미 그를 보고 계셨다는 인지적인 측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나타나엘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의지적인 측면까지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주시하고 계셨던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바라봄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꾸만 관심이 생기고 시선이 가서 그를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지요. 나타나엘은 자신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자기 마음 속까지 훤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됩니다. 또한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보시며 그 마음까지 따뜻하게 헤아려 주시는 그분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고대해온 ‘구세주’이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딱딱한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들어오신 ‘살아계신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나타나엘이 우리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현재 이란 영토인 메소포타미아와 파르티아 그리고 현재 터키에 속하는 키라오니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선교사업은 가는 곳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러나 그 모습을 시기한 이교 사제들로부터 사악한 주술을 쓰는 마법사라는 모함을 당해 체포되고 순교하게 됩니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지막으로 참수까지 당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지요. 그런 모진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시련과 고통을 겪는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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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야곱의 사다리 ”
요한 복음에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겠어요?
‘너를 centerville H Mart에서 어제 보았다.’ ‘너를 Annadale에 있는 책방에서 보았다.’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런데 나타나엘은 왜 그렇게 주님께 감격을 하지요? 그는 주님께 반해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50절)
주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는 것을 보면 우리의 기대를 깨고 일상생활의 평범한 삶에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모세가 시나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는 나그네의 삶,
목동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높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언어나 환경에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이렇게 평범하지만 그 결과는 큰 결실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엘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겠지만
장차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 을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하란을 향하던 야곱이 베텔에서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창세 28,11-12)
주님의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광경은 평범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처음부터 주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필립보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반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자렛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는 나타나엘은 주님께
실망을 하고 맙니다. 그의 기대는 진정한 메시아라면 적어도 예루살렘 정도는 되야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던 그가 주님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에 대해 감격을 하며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하루의 일상을 맞으며 순간순간이 바로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새기며 오늘 하루도
뜻 깊게 복음의 정신대로 살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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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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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요한 1,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22,40)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필립보의 증언과 연결해서 본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기록된 분이시며,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시고, 율법과 예언서에 나타난 사랑 자체, 말씀 자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아보십니다. 그분은 나타나엘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가능성까지 속속들이 아십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메시아를 고대해 온 나타나엘도 자기를 알아보시는 분께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부족하고 찌질한 모습 너머로 하느님 자녀다운 진실을 읽고 우리를 제대로 알아주시는 그분께 어떤 고백을 드릴 수 있을지요.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아니 나타나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당신을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는 더 큰 일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0)
얼핏 창세기의 야곱의 꿈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 신성과 인성을 잇는 사다리십니다. 또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던 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인류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를 엮는 사다리이고, 예수님 죽음의 순간 하늘과 땅이 이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도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의 환영과 옹위 속에 본래의 자리로 임하시며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셨지요.
제1독서에서는 천상 예루살렘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요한 사도에게 보여집니다. 언제 만나도 가슴 설레는 대목이지요.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묵시 21,9)
요한 사도와, 요한 사도의 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더 큰 일"을 이 환시 안에서 관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더, 더, 더 큰 일은 이처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롭게 신부로 단장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혼인의 순간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새 도읍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이면서 동시에 세례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뿐 아니라 비천한 우리도 그분의 신부로 들어올려져 갖은 단장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질 것입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묵시 21,11)
광채가 그리 아름답다면 그 빛을 내뿜는 주체, 실체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요! 도성을 감싼 하느님의 영광이 그처럼 찬란하다면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과연 어떠실까요! 온갖 죄와 더러움의 허물을 벗고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서 어린양과의 혼인 잔치로 향하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사도 요한과 함께 어린양의 신부인 거룩한 도성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가장 순결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빛으로 감싸인 새신부 안에 놀랍게도ᆢ 우리 각자의 얼굴이 보입니다. 어린양의 곁에 선 신부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의 극치가 아닐까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실 가장 큰 일은 그분과의 영원한 일치, 합일로 들어가는 우리를 보는 것일 겁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이들."(화답송)
그들의 존재, 그 빛과 찬미와 선포는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부족하나마 자기 자리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불타는 영혼들은 어린양의 신부 얼굴에 자기를 새겨넣은 주님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런 자신에게 매일 놀라고 매일 경탄하는 삶이 곧 어린양과의 혼인 잔치를 향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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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값진 인생으로 나아가는 삶
<2024.8.24>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2:1~11절)
❝값진 인생으로 나아가는 삶❞
❚ 당장 눈앞에 보이는 행복에 양심을 버리지 말고,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며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떤 삶이 값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삶입니다(1~3절).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였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는 이름의 의미를 가졌지만, 그는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1~2절).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세워 놓으신 기준과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한 것이 유다가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는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습니다(3절). 그러나 유다의 멸망이 바벨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 속에서 벌어진 영적인 사건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 자신이 아닌 상대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는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주관자이시며, 자신의 뜻에 따라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외면한 채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시드기야처럼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우리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현실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값진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베푼 은혜를 기억하는 삶입니다(4~6절).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배신했고, 결국 시드기야 통치 9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약 18개월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되면서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읍의 기근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해야만 했고, 철저한 회개가 필요했으나 마지막까지 이를 수용하지 않음으로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어리석은 고집으로 악을 행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 말로는 비참할 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떠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백성이 궁핍에 빠진 것처럼 절망적 상황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고,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돼지 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야 했던 것을 상상해 보면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값진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7~11절).
성벽이 파괴되면서 모든 군사들은 밤중에 성에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무리 가운데 시드기야 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갈대아 군대가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아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고 갔습니다. 시드기야는 추궁을 당했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자녀들과 고관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는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악인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합니다. 시드기야는 자신이 왕으로 있을 때 누리지 못한 영화와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가 온전한 눈으로 본 마지막 장면은 그의 눈앞에서 그의 자녀들과 고관들의 참담한 죽음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죄악 된 삶이 우리의 마지막 날을 참혹하게 할 것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잘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지 말고,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절대 주권자가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값진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선용하여 회개하며 선한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약한 자들의 형통함과 현재의 모습만을 보지 말고, 심판자 되시는 주님을 기억하여 값진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렘 52: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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