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9
4월16일[부활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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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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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oeEdii90OI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봉담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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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나를 잊고, 일상적인 고통도 잊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때는 어찌 그리도 밥시간이 기다려지는지? 어찌 그리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이 많은지? 왜 그리도 미련하게 숨도 못 쉴 정도로 과식을 하는지?
반대로 뭔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 보람되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할때에는 먹고마시는 일이 부차적인 일이 되고맙니다.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나를 잊고,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우울감을 잊고, 더 나아가서 먹고 마시는 일조차 잊게 됩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다니느라 습관적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왔던 제자들이 이렇게 청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빵에 대한 참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럽고 맛있는 세상의 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래로만 향하던 제자들의 시선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도록 초대하십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쪼개지고 나누어지며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안에 현존하시며, 그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헌신과 관대한 나눔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생명의 빵이요,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영원한 생명의 음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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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2E4rjZpH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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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인 표징은 내적인 표징을 앞서지 못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에 진격했을 때, 어느 날 러시아 병사 한 명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에게 자기를 황제로 섬기면 후한 대접을 해 주겠다며 전향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포로된 그 러시아의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러시아 황제 폐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나의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소.” 거절하는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화를 내며 부하에게 지시했습니다.
“저 놈에게 거룩한 황제의 표시를 새겨 주어라.” 그러자 한 병사가 달려들더니 그 러시아 병사의 팔에 불 인두로 ‘N’자를 새겼습니다.
“자. 봐라. 이미 네 팔에는 이 나폴레옹의 인(印)이 있느니라.” 이 말을 듣자마자 이 러시아 병사는 옆에 서 있던 프랑스 병사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어 자기의 팔을 뚝 잘라 버렸습니다. 피가 튀기며 하얀 눈밭에 떨어진 자기의 팔을 바라보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충성은 오직 한 분, 그분에게만 바칠 것이오. 나의 황제 짜르여.”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또 표징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외적인 표징만으로는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외적인 표징은 내적인 표징을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외적인 표징은 그저 살에 새겨지는 인(印)에 불과합니다. 내면에 새겨진 표징이라야 구원에 이르는 표징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도움의 은총’을 통해 열매 맺은 믿음입니다. 그러자 태중에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 잉태되셨습니다.
이때 생기는 믿음은 ‘생명의 은총’을 통해 얻게 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이고 그 생명의 은총을 받도록 마음을 여는 힘이 도움의 은총입니다. 도움의 은총까지 이끄는 표징이 외적인 표징입니다.
그다음엔 내적인 변화를 통해 생명의 믿음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가 유다인들에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사도 7,51)라고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원죄의 원인이 된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은 믿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 탓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합당한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나 이적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으로 도움의 은총을 받아들일 마음이 열리기는 하나 참 구원에 이르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자신이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겨울, 어머니와 밤샘 성령 기도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표징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도회를 주도하는 회장님의 손 방향에 따라 사람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걷는 동선에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쓰러졌습니다.
백합의 향기를 맡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해 탄성을 질렀습니다.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려주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병이 치유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방언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일어나 확신 있게 번역하였습니다. 끝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천상의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들은 금방 잊혔습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회장님이란 분이 안 좋은 것과 연관되었다는 이상한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표징을 보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표징은 그저 그분께 나의 마음을 열어 들일 힘이 되지만 더는 큰 작용은 하지 못합니다. 내가 자신을 버리고 그분을 받아들여 변하게 될 때 가장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게 되었을 때 그것보다 더 확실한 표징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려면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말씀을 받아들여 그대로 해보면 됩니다. 그러면 표징을 몸으로 느끼게 되고 그것이 외적인 표징들을 훨씬 앞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5년 동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10권짜리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삶의 목표이자 좌우명은 ‘행복’이었습니다. 25살까지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이 참 행복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도움의 은총이 된 것입니다. 이 도움의 은총으로 이끌기까지 외적인 표징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책을 통해 오시는 주님의 뜻을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더니 그 이후로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씩 더 행복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 저에게 큰 표징은 없습니다.
하늘이 변하고 바다가 갈라지는 표징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내 안에서 일어난 표징만큼 클 수 없습니다. 외적인 표징을 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자신 안에서 표징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더는 외적인 표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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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신부님이 후원금을 주었고, 교우들이 직접 나서서 ‘창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외벽을 칠하고, 전기를 끌어들이면 창고는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창고를 만들면서 그 밭에서 많은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제게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창고에 재화를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아야 한다.” 창고를 만들면서 수고해 주신 분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마치고 삼겹살에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은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이 정겨운 시간입니다. 저는 그 시간에 교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본당에 대한 사랑과 본당에 대한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새로 온 사제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남은 공간에 어떤 건물을 세워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사제관과 수녀원’이었습니다. 예전에 사제관과 수녀원을 지으려고 했지만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중단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성당 주변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학교도 들어섰으니 사제관과 수녀원을 짓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당 밖에 있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교우 분들과 소통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당까지 출근해야 하는 시간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추모공원’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도 만들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교우들이 돌아가시면 모실 수 있는 추모의 공간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추모 공원은 미리 신청을 받아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고, 성당에 그런 공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고인을 위한 묵상과 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우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그림을 그려야할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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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30-35: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29절)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자, 군중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1절)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모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32절) 그 말씀을 듣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그 빵을 우리가 먹는 빵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를 그들에게 주시기 전에 그들의 입을 당신의 빵과 포도주에 익숙하게 하려 하셨다.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 있는 몸과 피를 충만히 누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썩어 없어질 빵과 포도주를 충분히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성체성사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려고 작은 것들을 공짜로 주셨다. 빵과 포도주의 기적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기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빵이시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 하셨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있으면서 그분의 몸과 떨어지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양식으로서의 빵을 청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확실히 배불리 먹이고 완전하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다. (베들레헴: 빵의 집)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빵, 곧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 곧 썩어 없어지지 않을 사랑을 음료로 마시기를 원합니다.”(로마 7) 이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성찬례의 빵이 거기에 내리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이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이다. 그래서 이 빵은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사제로서 매일 당신의 말씀으로 그것을 축성하시기 때문이다. 이 빵은 그래서 신자들의 양식이 되었다. 이 빵으로 참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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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과 독서는 어제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군중은 또 다시 표징을 요구합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표징 요구하기’를 되풀이하는 것일까요? 이 끝나지도 않을 요구에 예수님께서 모세에게 비교되십니다. 모세가 표징을 일으켜 만나를 주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표징을 보여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군중이 아직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모세와 비교되실 분이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설명하여 주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 내 아버지시다. …… 하느님의 빵은 ……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 복음서는 이 선언을 위하여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 차별화된 전개를 선택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결정적 표징으로 제시하고 마무리하는 공관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 복음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으로 생명의 빵에 대한 긴 담화를 수록하고, 이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주제를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여 주시고, 다음에는 썩지 않을 양식을 찾으라고 가르쳐 주시며, 이어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까지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라는 부사가 두 번 되풀이됩니다.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저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체험될 약속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살아 있는 체험이 있어야 우리 신앙은 비로소 “생명의 빵”으로 힘을 얻는 참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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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0-35)
1)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한 일과(마르 8,11) 비슷하게 보이지만, 뜻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라는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날마다’ 배불리 먹는 것이었습니다. 또, 바로 그 말이, 그들이 왜 예수님의 ‘빵의 기적’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탈출기에 기록되어 있는 ‘만나’는 ‘사십 년 동안’ 안식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내렸습니다.(탈출 16,35; 여호 5,12) 반면에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사람들을 한 번 배불리 먹인 일회성 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끼를 배불리 먹는 일회성 기적 말고, 평생 날마다 배불리 먹는 기적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표징도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몸의 배부름을 위한 빵’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대화처럼 보여도 대화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희망사항만 계속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라는 말씀은, “구약시대 백성들이 먹은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 아니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나’는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입니다. ‘몸의 배부름’이 ‘만나’의 일차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라는 말씀은, ‘참된 빵’이 무엇인지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3) 예수님께서 ‘만나’를 부정하신 것도 아니고, 모세의 업적을 깎아내리신 것도 아닙니다. ‘만나’도 분명히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기적의 양식’이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만나’의 목적이 달랐다는 것과,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의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만나’를 받아먹었음을 생각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크게 다르게 됩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 받아먹은 사람들에게는 그 ‘기적의 빵’은 그저 한 끼 식사였을 뿐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의 권능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4)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요한 6,40)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씀과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결코’ 라는 말은 ‘영원함’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5) 예수님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굶주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어느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때, 바리사이들이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한 일이(마태 12,1-2) 바로 그런 폭력입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날마다 힘들게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고 있다고 비난하는 일은 정말로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공관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주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4,16; 마르 6,37; 루카 9,13)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일은, 예수님께서 교회에(신앙 공동체에) 맡기신 과제입니다. 만일에, 그 ‘사랑의 과제’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이고, 주님의 뜻을(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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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일 요셉 신부님]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하느님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지향하고 지성과 감성, 양심과 자유의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희망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쓰는 말 중에 살아도 사는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건강하고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나 마음 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이러한 말을 쓰지 않습니까?
인간이 산다고 했을 때 그것은 결국 육체적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마음 적으로도 충만해야 산다고 말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 우리 사람은 영혼도 충만해야만 결국 살아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채워졌다고 느끼더라도 영혼이 충만치 못하면 채워짐은 채워짐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과 세상적 풍요로움으로 정신과 마음이 흡족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것이 그 차제로는 영원할 수 없기에 영원을 향해 열려있는 영혼이 채워져야만 살아있음의 생명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이 채워지고 나머지 다른 요소들은 부족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줄 알기에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영원성이 담겨 있는 영혼이 채워져 생명력을 지니면 죽어 없어지는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해도 우리 존재는 이미 영원성이 확보되었기에 영원한 생명력이 다른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채워짐에 있음을 느끼게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에 생명력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 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내어 놓으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는 여기에서 이미 영원한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 삶의 원리가 되어 주셨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다시 살리시는 구원의 원천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 예수님께 가야만 하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믿어서 예수님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어 없어지는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이 음식이라면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 존재에 생명을 주는 것은 생명의 빵인 예수님이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빵으로서 우리 안에 모셔서 존재의 살과 피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려고 먼저 다가오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 경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언서를 읽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하느님께서는 필리포스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에 내시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청하여 받고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세례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기뻐하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고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간 내시만큼 기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청한 내시처럼 우리도 세상이 주는 기쁨 앞에서 하느님께 우리를 이끌어 주시라고 청하며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자주 모시도록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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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났던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과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신 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언한 스테파노가 그 거룩한 사건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도우미가 되고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결국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의 순교는 맹목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자세도 아니요, 편협한 사고로부터 주어진 물리적 학대에 대한 체념도 아닙니다.
스테파노의 마음을 가득 채우신 성령께서는 오히려 주님을 향한 저들의 분노와 스테파노를 향한 비난을 뛰어넘어 열린 하늘로 그의 시선을 돌리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싶은 우리 삶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를 짓밟으려는 부당한 폭력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은 예수님께만 행하여졌던 것이 아니라 첫 교회 공동체의 스테파노에게도 행하여졌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악한 힘의 행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하루하루에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이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악의 힘을 끊어 버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폭력을 이겨 내도록 주님께서 성금요일 전날 저녁인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음을 날마다 기억하고 기념해야 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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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서 몰려든 군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미게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먹는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부활의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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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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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6,34)
군중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믿게 해달라고 합니다. 문득 기적은 나에게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저에게는 매일의 삶에서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 보고 만지는 것을 기적이라고 봅니다. 이곳에 살면서 매일 보고 있는 산과 들, 개천이 그리고 그곳을 시시각각 다르게 느껴지게 하는 날씨와 계절들(=현상들), 봄이 되면 여기저기 형형색색으로 피어나는 꽃들이며 새록새록 돋아나는 나무의 새싹들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합니다. 누가 돌보지 않았는데도 매일매일 새로운 색깔로 변화되어 가는 자연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놀라며, 보이지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부드러운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일어나서 하느님 자비 앞에 기도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 계시는 어르신들의 살아온 생이,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들을 주님의 십자가에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기적을 봅니다. 하느님의 손길은 이처럼 자연과 사람 그리고 나에게 허락된 오늘이 바로 기적이며 이를 느낄 수 있는 나 자신이 바로 기적일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6,33)라고 하자,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6,34) 하고 확언하십니다. 이는 바로 설명이 아니라 자기 계시의 선포입니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가야 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며, 그분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 믿음의 기적을 사신 분이 바로 스테파노입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섬김과 믿음 선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며, 또 다른 예수로써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처럼 타인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살아왔다면, 이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기적입니다.
때론 같은 듯 보이지만 다른 것처럼, 오늘 독서의 스테파노와 복음의 군중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걸까요? 어쩜 그 차이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내외적 시선과 태도에서 차이가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신”(6,33)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불신 그리고 하느님의 영으로 사느냐와 인간의 정신으로 사느냐에 따른 차이에서 같은 듯 전혀 다른 존재와 그 처신이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믿음과 영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육적으로 죽겠지만 영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이와 달리, 군중들은 육적으로 살아있겠지만,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은 아래-땅-육에서 났지만, 스테파노는 위-하늘-영으로 이미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6,30)라고 묻습니다. 사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3,5)은 모든 형상과 현상, 모든 사건과 사람들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기에 다른 표징과 일이 필요하지도 않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여기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표징의 표징이며 성사 중의 성사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더 요구될 뿐입니다. 요한복음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라는 군중들의 간청엔 썩어 없어질 양식 곧 먹어도 늘 배고프고 마셔도 늘 목마른 양식을 얻기 위해 피땀을 흘린 사람만이 느끼는 고달픔이 물씬 풍겨 나옵니다. 오늘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마련하기 위해 힘들게 애써 일하시는 모든 분께 위로와 축복을 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라는 약속과 함께 당신께로 나아오도록 초대하십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스테파노처럼 이미 삶에서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고 열린 하늘을 보고 기뻐하며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을 감사하며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며 살아가려고 힘써 애쓸 것입니다.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시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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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도에서 기도를 배우는 한 수련자가 스승에게 달려와 외쳤습니다.
“스승님! 제가 드디어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나?”라고 물었고, 제자는 18년이 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갠지스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는 이 질문에 18루피(한화 300원) 정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를 벌었군.”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기도는 과연 필요한 기도였을까요? 배를 타고 가면 그만이니 필요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 성취에 도달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기도를 세상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절망도 또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만 바라보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의 길이 아닐까요?
군중이 예수님께서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성취,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청하기만 할 것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채워야 진정한 하느님이라면서 엉뚱한 곳에서만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갖 불평과 원망 속에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나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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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소 음식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양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녀 체칠리아). 그러므로 현세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미리 준비하며 투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하자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군중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합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16,9)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사참례를 통하여 충만한 영양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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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먹고 당신이 되어갑니다>
요한 6,30-35 (생명의 빵)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먹고 당신이 되어갑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날이
굳건히
나를
믿게 하시니
당신은
믿음의 밥이시며
믿음의 밥을
먹는 나는
더디더라도 조금씩
믿음이 되어갑니다
나날이
기쁘게
나를
희망하게 하시니
당신은
희망의 밥이시며
희망의 밥을
먹는 나는
더디더라도 조금씩
희망이 되어갑니다
나날이
뜨겁게
나를
사랑하게 하시니
당신은
사랑의 밥이시며
사랑의 밥을
먹는 나는
더디더라도 조금씩
사랑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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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신 삶-
4월16일이 되니 304명 희생자를 낸 10년전 4.16세월호 참사 사건이 생각납니다. 이날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해지며 말문을 잃게 됩니다. 오마이뉴스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염원 3645일, 고 박수현 군의 아버지 박종대씨>의 글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0년전 2014년은 제가 원장직을 내려 놓고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을 지내던 중이었고 당시 이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 성주간에 맞이했던 상상을 초월한 비극적 재앙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은 되지 않은 상태로 피해 가족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성주간 이었고, 오늘은 부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부활의 기쁨, 신록의 기쁨중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0년전 세월호 참사요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기일전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가급적 빨리 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재의 난국을 생각할 때 저절로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국내 상황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길을, 방향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잃고 방황중이라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을 찾아야, 잡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제가 피정지도시 늘 강조하던 내용도 생각납니다.
1.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꿔져선 안된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날로 가치관 부재의 혼돈 시기에 하느님 믿음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해 갑니다. 참으로 단절의 불행과 비극의 시대, 무엇보다 신앙유산의 전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삶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우선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돈을 필요 이상으로 쌓다가는 돈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 진정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작은 일상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다산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명심보감
작은 일상에 만족하는 일, 재물에서 초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일치를 이루기 까지는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 뿐입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절정의 말씀이 오늘 복음 후반에 나옵니다. 주님은 어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라 힘쓰라 하신후,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청은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의 궁극적 소망이요 이에 대한 주님의 통쾌한 응답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늘 이런 생명의 빵을 모셔야 비로소 충만한 삶,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뿐 답이 없습니다. 바로 얼마전 교황청 사순시기 첫째 강론 주제도 이 성서 구절이었습니다. 일부 핵심적 내용을 나눕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 빵을 발견할 수 있나? 미사와 성서이다. 고대 교회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인정했다. 오직 후대에 서방에서 그리스도교의 분리가 있었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성사적 해석이 우세함으로 끝나자, 루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명의 빵인 하느님의 말씀편에 섰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사간의 원래적 종합으로 회귀해야 한다. 바로 최근 일어나는 종교일치 운동도 이런 분위기다. 때로 성서와 성사가 신학에서 대립될지라도 그들은 전례 안에서 늘 ‘평화로이’ 공존해 왔다. 교회의 맨처음부터, 미사(Mass)는 ‘말씀과 성체(the Word and the Eucharist)’ 둘을 포함해 왔다.”
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명쾌한 설명이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 미사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완성에 이른 스테파노입니다. 과연 우리는 몇% 예수님을 닮아있는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스테파노의 대를 잇는 사도 바오로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시 그의 겉옷을 곁에 놓고 스테파노의 순교장면을 보면서 충격과 더불어 깊이 배우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삼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고 싶습니까? 유한한 인생 여정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일년사계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를 생각하면 잠자는 시간도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회개하기도, 기도하기도, 공부하기도 턱없이 짧은 세월,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닮의 여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임종어나 묘비명을 좌우명 삼아 써놓고 이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글도 생각납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밤 빛나는 별,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만을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종교였다”-2005. 5
수도원이 한참 어려움을 겪던 시기 자신을 정리해봤던 묘비명이 생각나 나눴습니다. 어제 문득 수도원 방문시 집무실을 찾아 강복을 받던 수녀님에게 수도명을 물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의 이름 앞에 말마디 라이너 수녀입니다. 독일어로 라이너 뜻은 ‘맑은’이라합니다.”
맑은 수녀 모습대로 조촐하고 맑아보였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예닮의 여정중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맑고 향기로운,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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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의 식별>
스테파노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적대자들에게 스테파노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먼저 목이 뻣뻣하다고 하는데 어떤 뜻입니까? 우리말에는 목에 힘을 준다는 말이 있는데 목이 뻣뻣해서 숙일 줄 모르고 겸손할 줄 모른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숙이고 들어간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숙일 줄 알아야 큰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럽니까?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숙이는 것은 지는 것이고 죽는 것인 줄로만 아는 사람, 그래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 그래서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교만의 한 측면이라면 조금 다른 측면의 머리를 숙일 줄 모름도 있습니다.
한 번도 잘못했다고 머리를 숙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자신은 아예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없기에 자기와 다른 사람은 늘 잘못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데 늘 거침이 없습니다. 오늘도 천사처럼 보이는 스테파노를 거침없이 단죄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할례는 구약의 세례이고, 세례는 신약의 할례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과 귀가 주님 자녀의 마음과 귀로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럴 겁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과 귀가 되어있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새 시대가 열렸는데도 여전히 새 술을 옛 부대 또는 헌 부대에 담으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줄곧 성령을 거역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령을 거역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분이라고 요한복음의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그렇긴 하지만 문이 닫혀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요. 이때의 거역은 그래서 성령의 강림을 거부하는 것이 되겠지요.
다음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분인데 그 이끄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거부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거역한다면 왜 거역할까요?
우리의 경우 그것이 성령의 이끄심인 줄 안다면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거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제 베드로 사도가 백성들에게 말했듯이 무지(無知), 곧 성령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겁니다.
성령 무지. 이렇게 얘기해도 될지 모르지만 성령 무지가 우리에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저는 의식 성찰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성령 무지와 영의 식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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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6,35)
<정화와 기억!>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 30절에서 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군중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6,3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6,34)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이 받아모시는 '성체(聖體)는 보이지 않는 영을 살리는 영적 양식'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생명의 빵인 성체를 받아모시기에 합당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곧 나의 마음이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모시면, 내 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성체를 모독하는 모령성체(冒領聖體)의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성체를 받아모시기에 합당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 성체를 받아모시기 전에 꼭 '고해성사와 자비기도를 통한 정화(淨化)의 시간'을 갖습니다.
'나는 얼마나 정화의 시간을 잘 갖고 있는가?'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모든 교구는 오늘 304명의 불쌍한 세월호 희생자들과 아직도 고통 중에 있는 유가족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합니다.
"주님, 세월호 희생자들과 어제 세상을 떠난 박남분(세실리아) 자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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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EgsI_yI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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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꽃잎을
다 떨구어도
여전히
꽃나무로
존재하는
신비입니다.
배고픔을
채워주어야
생명의
빵입니다.
받아들여야 할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의 방향은
생명의 빵이
되는 소중한
생명의
삶입니다.
생명의 삶은
생명의
나눔으로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위에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의 빵을
벗어난 삶은
하느님을
벗어나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교만의
반대방향에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으며
알게 되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생명의 빵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삶을 좌우하는
생명의 빵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생명의 빵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께
방향을 틀어
아멘이라
응답합니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빵을
이기지 못합니다.
생명의 빵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생명의 빵에서
생명의 문(門)이
활짝 열립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언제나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의 빵으로
눈에 보이지 않던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보게됩니다.
생명의 빵은
하느님 나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으로
나가는
생명의 빵을
받아모시는
생명의 기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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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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