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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울산 문수경기장. 모처럼 2만여 관중이 운집한 경기장에서는 2004 K-리그 8라운드 포항과 울산의 경기가 한창 열기를 뿜어내며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경기는 당시 1, 2위를 나란히 달리고 있던 양팀의 맞대결로 전기리그 우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구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경기였다.
경기의 중요도를 의식한 듯 포항은 원정경기임에도 침착한 운영과 수준 높은 압박을 구사하며 빠르고 파괴력 있는 울산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최후의 저지선이 무너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동물적인 판단력과 순발력으로 포항 골문을 사수하는 선수가 있었다. 포항은 이 든든한 골키퍼 덕에 전후반 무실점을 지킬 수 있었고, 후반 45분에는 ‘새별’ 황진성이 벼락 같은 슈팅으로 선취골을 터뜨리며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한 전통의 라이벌답게 경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포항의 승리를 확신하던 후반 46분 울산에 페널티킥이 주어진 것. 홈관중의 염원까지 실리며 분위기는 급격히 울산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을 다시 극적인 드라마로 만든 선수가 있었으니 몸을 던져 도도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포항의 골키퍼 김병지였다.
포항은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2위권과의 승점차를 더욱 벌려 놓았고,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던 전반기 우승의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포항이 9년만에 리그 정상의 자리를 탈환한 것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향수를 자극시킨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김병지, 그는 이 사건의 발단이 된 핵심 인물 아닌가.
김병지는 항상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한국축구의 수많은 영광과 좌절의 순간, 그 정점을 함께했으며 ‘공격하는 골키퍼’로 K리그의 역사를 다시 쓰기도 했다. 90년대 초반 콜롬비아의 이기타가 ‘골 넣는 골키퍼’로 화려한 골키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면, 한국에서는 김병지가 골키퍼의 새로운 역할을 소개했다. 주변에 머물러 있던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무대 중앙으로 등장시킨 주역인 셈이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그에 대한 축구팬들의 평가는 다소 엇갈리지만 적어도 90년대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김병지를 꼽는데는 이견이 없다.
대표팀에 대한 미련도 어느 정도 옅어지고 올스타전 팬투표에도 낙마(?)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지금,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끈 그의 얼굴은 오히려 여유 있어 보였다.
- 늦었지만 전기리그 우승을 축하한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결실을 맺어서 기쁘고, 개인적인 소감보다는 주위 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우승에 대한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다. 가족이나 (포항)축구단에 관계된 분들, 서포터들이 좋아하시는걸 보니 가장 기쁘다.
- 96년 울산 시절 우승한 이후 첫 우승인데, 그 당시와 비교해 본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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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주장을 맡았던 김병지/포항구단 제공
|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우승했던 것이 96년이었는데, 울산이 창단 13년만에 처음으로 정규리그에서 우승했던 해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우승을 경험했다는 것이 참 좋았던 기억이다.
포항에서의 우승은 좀 다른 느낌이다. 나이도 좀 들고 고참으로 느끼게 되는 아릿함이랄까, 은퇴하기 전에 또 우승을 해봤다는 남다른 감회 같은 것이다. 어쨌든 영광스럽고 기분 좋다. 언제라도 또 우승을 이뤄내면 되겠지만 나 혼자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최근 몇 년 동안 포항이 침체기였고, 올 시즌도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포항이 전반기 우승을 차지한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단 선수들이 책임질 수 있는 부분에서 행동했던 것이 몇 가지 있었고, 전체적으로 팀 구성이 좋아지면서 안정감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시즌 전 전문가들이 냉정하게 내린 판단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잘하면 5위권이 가능하다는 평가였고, 선수들도 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실제 전력 이상으로 운도 많이 따랐고, 한 두 경기 이기면서 상승세가 되니 자신감까지 더해지면서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우리팀이 100%의 전력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선수 자원이 15명 정도인데, 올시즌 리그 방식이 바뀌면서 일주일 간격으로 경기를 소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경고누적이나 큰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선수들이 없어서 조직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작년처럼 일주일에 두 경기씩 치러야 되는 상황이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 올시즌 잔부상이 잦은 편이었는데, 주말에 경기 치르고 목요일까지 회복 시간을 갖게 되니 다음 경기를 소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쪽 다리 근육에 부상을 입으면 다른쪽 다리에 힘을 주기 때문에 또 그 근육에 무리가 간다. 이것이 결국 부상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데 올시즌에는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 비교적 여유 있는 편이었다.
결정적으로 운이 많이 따랐다. 도저히 골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경기 막판에 극적인 동점골, 역전골이 많이 터졌다. 또 우리가 못하는 날에는 다른 상위팀들도 나란히 성적이 안 좋았다. 리그 막판에는 대전과 광주가 우리를 도와줬고(웃음).
- 본인이 보기에 포항 축구의 색깔이랄까, 특징은 무엇인가.
경험 많은 선수들이 요소요소에 포진되어 있다보니 위기 관리 능력이나 임기응변이 다른 팀보다 좋은 것 같다.
- 김병지 선수의 앞을 지키고 있는 산토스-김성근-이민성 라인은 국내 최강의 수비라인으로 평가된다. 뒤에서 지켜보는 골키퍼로서 그들에 대한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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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스와 함께/포항구단 제공
| 구성 요소 자체가 서로의 장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 있는 선수들로 짜여져 있다. 결과적으로도 그랬고, 실제 경기 운영 능력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장단점이 잘 맞고, 경기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도 좋은 편이다.
- 이번 시즌을 앞두고 재계약 협상에서 조금 삐걱거림이 있었는데, 본인의 실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는가.
기본적으로 협상을 할 때는 밀고 당기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계약을 하는 순간에는 더 이상 금액이나 다른 이유로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결국 내가 결과를 인정하고 사인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만족을 한다. 만족이라는건 금액에 대한 부분이라기 보다 내가 ‘선택’하고 ‘인정’한 결과물이기에 만족하고 잊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가 부족했다고 인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계약기간 동안 열심히 해서 다음 협상 테이블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계약 전에 밀고 당기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인데, 그것이 개인의 감정으로 비쳐진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 현재 포항을 보면 고참급 선수들과 20대 초반의 선수들이 주축이다. 같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세대차이는 없는가.
경기장에서의 세대차는 느끼지 못하지만 밖에서의 행동들이나 움직이는 방향, 사생활에서는 차이를 조금 느낀다. 의식적인 부분에서의 차이도 있고, 어떤 부분은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신입생들과 고참들이 생각하는 프로에 대한 개념차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 프로에 대한 개념차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
사생활과 경기장에서의 구분이 불분명하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경기 경험이 많아지고 어떤 부분에서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면 사생활과 경기장에서의 움직임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기의 승패나 결과도 좀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테고.
- 이번 올스타전에서 아쉽게 남부올스타 팬투표 1위를 김영광에게 내줬다. 팬투표로 올스타를 선발한 이래 첫 낙마(?) 경험인데 아쉬움은 없는가.
사실 팬투표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이제는 그런 경험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이미 경험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나 뿐 아니라 후배 선수들도 나중에 어느 시점이 되면 같은 수순을 밟게 될테고,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싶다. 모든 선수들의 숙명이기도 할텐데 나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 올스타전마다 항상 특별한 이벤트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데, 이번에 필드 플레이어로 뛴 것도 본인의 의지였나?
전혀 아니다. 일단 우리팀에 부상 선수가 많아서 선수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최순호)감독님이 마침 기회를 주셔서 뛰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공격수로 뛰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계속 무산됐었다. 몇 번 그러다보니 내심 바라고 있으면서도 차마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됐다. 아무리 올스타전이라고 해도 감독님 나름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특정 선수만 무작정 배려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 올스타전은 철저히 즐기는 것 같다.
항상 그렇게 새로운 시도나 도전으로 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골키퍼라는 특수한 포지션에서의 생존의지와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다. 골키퍼에 대한 열악한 상황과 인식을 모두 깨고 싶었고, 권익을 찾기 위해 열심히 했다. 그래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인기나 영광스러운 기억들 모두 좋았지만,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이 있다. 연봉이나 프로선수로서 골키퍼의 입지 같은거.. 후배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에 대해 기분이 좋다.
- 어떻게 보면 음지에 있는 포지션을 무대 중앙으로 화려하게 등장시킨 주역이다. ‘공격하는 골키퍼’가 인기를 끌던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본인 스스로의 사명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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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김병지/김동환
| 두 가지 모두 원했다. 한국 축구는 항상 세계 축구의 흐름을 따라간다. 얼마전 끝난 ‘유로2004’에서 그리스가 선수비로 안정감을 강화하면서 세계강호를 다 격침시켰는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흐름이다.
그 당시 내가 했던 행동들 역시 나 스스로 앞서갔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이기타(콜롬비아)나 캄포스(멕시코)가 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골키퍼의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렇게 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공격 성향의 골키퍼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수비 지향의 골키퍼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또 다르다. 자신의 자질은 물론이고, 경험이 축적된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 골키퍼의 자질이라면 동물적인 감각, 침착성, 판단력, 위치선정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골키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상황 대처능력. 위기 관리 능력이다.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면 결국 많이 힘들어질 부분이다. 내 경우 신체적인 조건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나보다 월등하게 좋은 체격의 골키퍼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어야 했다. 그것이 곧 순발력으로 발전한 것 같다.
- 최근 골키퍼의 평균 신장이 거의 190cm대에 육박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골키퍼 치고는 단신에 속하는데, 핸디캡을 극복했던 방법이라면.
우선 정신적으로 지탱했던 부분이라면 내게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체력적, 기술적으로는 근력 운동에 주력했다. 폭발적인 순발력, 점프력이 나오기 위해서는 후천적으로 근력을 키워야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상무 시절에 그 부분이 많이 좋아졌다. 운동량도 굉장히 많았고, 돌이켜 보면 한참 좋았던 시기였다. 그 시절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잘 준비했던 부분들이 지금 나의 장점들로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상무에 들어가기 전 직장팀에 있었는데, 그때도 프로팀에 가겠다고 매일 야간 훈련을 했다. 악착같이, 근성있게 했는데 당시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꼭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요즘에는 그렇게 야간 훈련하는 후배를 보지 못했다(웃음).
->2편에 계속... | | |
첫댓글 정말 김병지선수에대해서 알게될수록 좋은사람이란 인상이 확확나네요... 정말 이번 우리 스틸야드~! 포항의 우승의 숨은 일등공신^^..
역시 김병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군
김병지 멋있군...
최고의 골키퍼~
최고 최고중에 최고....
진정한 K-리그의 별로 남아주길~~
아~월드컵에좀 나오지 김병지 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