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이란 주로 권력자나 재벌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력한 가문과 사돈관계를 맺는 일을 말한
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정략결혼이 가장 유명한데, 훗날 고려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설명하겠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꼬드겨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사주한 공로로 수양대
군-예종-성종 대에 걸쳐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300여 회나 등장할 정도로 조
선 초기에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의 장녀는 예종의 비가 되었으며, 의경
세자의 차남인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차녀와 결혼한 덕분에 예종 사후 형인 월산대군을 젖히고 보위
(성종)에 오를 수 있었다. 복 많은 한명회는 두 번의 정략결혼마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어 세 번이나
영의정을 해먹는 등 남는 딸 장사를 했다.
그러나 정략결혼이 항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용진은 배우 고현정
과 정략결혼을 했다가 세간에 큰 화제를 뿌리며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삼성家와 미원家는 상호 이익
을 위해 정략적으로 이재용과 임세령을 결혼시켰지만 11년 만에 이혼했으며, 노태우 대통령의 딸 노
소영과 SK그룹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원의 정략결혼도 실패로 끝나 목하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다.
노소영은 중위로 제대한 최민정을 비롯하여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웠지만, 최종현에게는 그룹을 물려
줄 아들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전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의 경우는 좀 애매하다. 글래머 여
배우 김혜정, 펄시스터즈 멤버 배인순, 아나운서 장은영 등 당대 최고의 인기인들과 정략결혼을 했다
가 차례로 이혼을 했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라 결혼 자체로 최원석이 만족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본인도 여섯 번이나 정략결혼을 했지만, 19세
의 여동생 메리 튜더(1495~1533)를 33세 연상인 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정략결혼을 시킨 일로 악명
이 높다. 메리는 프랑스와 맺은 평화우호조약의 볼모였던 것이다. 루이 12세는 이미 두 번의 정략결
혼을 한 적이 있었으며, 메리와 결혼할 때는 늙고 병든 몸이었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이웃 나라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혼돈상태였는데, 메리의 희생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공고한 동맹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후계자가 없던 루이 12세는 메리에게서 왕자라도 얻기를 기대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미 발기조차 되지 않는 신세였다.
독일 공주 캐롤라인(1768~1821)의 정략결혼도 참담한 비극으로 끝났다. 그녀는 영국의 조지 왕자(17
62~1830. 훗날 보위에 오르면서 조지 4세가 됨)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시아버지인 영국 왕
조지 3세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캐롤라인은 조지 왕자의 고종사촌이었다. 어머니는 캐롤라인
이 태어나자마자 오빠인 조지 3세의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단단히 작정을 해뒀었다. 그러나 조지 왕
자는 평생 동안 캐롤라인을 멀리한 채 수시로 정부(情婦)를 바꿔가며 쾌락을 즐겼다. 한술 더 떠 조지
왕자는 방탕한 생활로 엄청난 빚까지 지고 있었다. 캐롤라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캐롤라인의 언니, 고모, 이모 등도 모두 왕실 간의 정략결혼에 실패한 불운한 여인들이었다.
캐롤라인은 2세기 후의 다이애나(1961~1997) 세자빈처럼 국민들로부터는 엄청 사랑을 받았다. 이에
질투를 느낀 조지 왕자는 그녀 주변에 항상 염탐꾼을 깔아놓았고, 염탐꾼의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캐
롤라인을 간통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일이 시끄러워지자 조지 3세는 캐롤라인이 해외에서 사는 조
건으로 매년 3만 5천 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해방된 기분으로 도버해협을 건넌 캐롤라인
은 오래지 않아 16세 연하의 이탈리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캐롤라인은 영국을 떠난 지 6년 만에 시
아버지 조지 3세가 서거하자 영국 여왕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국민들은 여왕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
했다.
눈 뜨고 왕관을 빼앗기게 된 조지 왕자는 캐롤라인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다며 상원의 재판에 회부
했다. 영국의 모든 신문은 연일 재판 과정을 대서특필했으며, 캐롤라인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조지 왕
자를 변호하는 귀족들에게 갖은 방법으로 해코지를 가했다. 지금까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
고 있던 여성들도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와 캐롤라인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2만 명 이상의 여성
들이 서명한 청원서가 상원에 제출되기도 했다. 상원도 조지파와 캐롤라인파로 갈라져 언쟁이 끊이
지 않았다. 그러나 상원의 판결보다 염라대왕의 소환이 빨랐다. 상원이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
쳐 캐롤라인으로부터 여왕의 지위를 박탈할 엄두도 못 내고 있던 1821년 8월, 그녀는 각중에 염라대
왕에게 불려갔다.
영국 국민들, 특히 여성들이 캐롤라인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조
지 왕자가 무능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둘째는 캐롤라인이
조지 왕자의 딸을 낳았는데, 그는 이때도 자기 씨가 아니라며 캐롤라인을 고소했다가 패한 적이 있었
다. 게다가 캐롤라인을 국외로 추방하면서 딸을 만날 수 없도록 하는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으며, 딸
이 결혼할 때와 요절했을 때도 이탈리아에 있는 캐롤라인에게 알리지 않았었다. 어머니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박탈한 반인륜적 처사였던 것이다. 캐롤라인이 급서하자 조지 왕자는 비로소 대관
식을 거쳐 조지 4세로 즉위했다.
벨기에 왕 레오폴 2세(1835~1909)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만큼이나 두 딸의 잘못된 정략
결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는 서부 아프리카에 벨기에보다 80배나 넓은 땅을 사유지로 점거한 채
콩고자유국이라는 이름을 붙여 영리 목적으로 운영했는데,1884년부터 1908년까지 이 지역에서 고무
농장 및 구리광산을 운영하는 동안 1200만 명에서 2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팔다리를 잘랐다.
그는 첫딸 루이스를 나이가 훨씬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자와 결혼시켰지만, 루이스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보냈다. 둘째딸 스테파니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다른
왕자와 결혼시켰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왕자가 정부와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정신적 고통이 언니만큼
길지는 않았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살포시 봄비내린 이른 아침 입니다.3개월 마다 래원하는 가정의학과 진료가 있어 엊저녁 부터 금식인채 이른아침 혈액검사가 있어 병원으로 갑니다. 3개월분의 약을 받아올때 마다 한아름 약봉지가 주는 가혹한 느낌을 지울수 없어 약먹지 않는 건강이 제일임을 느낌니다.좋은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