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여왕은 빅토리아(1837~1901)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26~현재) 여왕
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3대 왕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당초 보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한 인물들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가 영국 왕 헨리 8세의 딸로
태어난 지 3년 뒤, 그녀의 어머니가 반역혐의로 처형되고 의회가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공표하자 그
녀는 금세 시민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헨리 8세가 죽은 뒤 보위를 이은 에드워드와 메리가 잇달
아 요절하자 의회는 마지못해 헨리 8세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옹립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실에서 보낸 수많은 자객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살던 시골에서 런
던으로 입성하자 시민들이 대거 연도로 몰려나와 그녀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무능하고 부패했던 지난
왕조에 대한 반감이자 새 여왕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25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세실을 총리에 임명하는 등 혁신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녀는 불우한 성장기를 통해 경험한 정부의 폐단들을 일소하는 데 신명을 바치기로 단디 결심했다.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여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작용하던 종교제도도 대폭 뜯어고쳤다. 그녀는 유럽 여러
왕실로부터 들어오는 청혼을 모두 거절하고 ‘짐은 영국과 이미 결혼했노라’ 하며 비혼(非婚)을 선포했는
데, 시민들은 이때부터 그녀를 성모마리아와 비견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비혼 고수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첫째는 그녀가 자녀를 낳지 않으면 당장 튜
더 왕조가 절손된다는 점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뿐이었는데, 그
녀는 부왕이었던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거릿의 손녀였다. 많은 영국인들은 영국의 왕위를 메리의 후
손에게 넘겨줄지도 모른다며 우려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위 계승을 위해서도 결혼해야 한다는 청원
이 끊이지 않았다. 둘째는 근거도 없는 악성 루머였다. 엘리자베스의 주위에는 국정을 보필하는 훌륭
한 귀족들이 즐비했는데, 그들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을 지목하여 간통을 했다느니, 사생아를 낳았다느
니 하는 소문을 퍼뜨리는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루머는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다는 데 대한
시민들의 불안을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복언니였던 직전 여왕 메리의 실정(失政)도 반면교사로 작용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더 이상 여자
는 왕으로서 부족하다는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 정치적인 신념과 정책을 확고하게 수립했다. 강력한
군대와 경찰도 없고 관료제도의 기반도 부실하여 허약하고 가난한 나라 취급을 받고 있는 영국을 강
국으로 키울 결심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에 대한 처벌도 단호했다. 1579년 존 스타버스
백작이 여왕과 알랑송 공작이 곧 결혼할 것이라며 맹비난하는 책자를 발간하여 런던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즉각 존과 출판업자를 잡아다 손목을 한 짝씩 잘라버렸다. 이후 다시는 악의적
인 루머를 퍼뜨리는 자가 없었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용
엘리자베스 1세는 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도 과감하게 처단했다. 메리는 1578년 왕위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해 있었는데, 메리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가차없이 재판에 회부하여 1587년 2월 그녀를 처형해버렸다. 그 무렵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영국을
침공할 것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그 동안 착실하게 군비를 확충해오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의회
를 설득하여 大함대를 새로 편성하고 무장을 강화했다. 1588년 7월, 펠리페 2세는 당시 세계 최강인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만만하게 보고 손쉽게 영국을 정복하여 식
민지로 삼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아르마다해전에서 단숨에 무적함대를 패퇴
시켰으며, 귀환하던 무적함대의 나머지 함선들도 풍랑에 파괴되면서 스페인 시대가 저물었다. 이 승
리로 영국은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고 가장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은 대영제국의 가
장 확실한 상징이다. 800여만 점에 이르는 소장문화재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약탈해온 것이다. 이
문화재들을 약탈하는 동안 영국 군인들은 수천만 명을 살해했고 수많은 종족과 문명을 멸망시켰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결코 영광스러운 역사가 아니다. 영국은 상굿도 북아일랜드‧지브롤
터‧포클랜드를 포함한 15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저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아
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이니까, 영국의 못된 짓만 답습해온 왜놈들이 독도를 저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
이다. 영국은 지금이라도 식민지와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약탈문화재를 전부 반환하고 그 나
라에 사죄해야 한다. 그래야 영국은 진정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다른 지출에는 인색했지만 몸치장에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시민들에게 화려하고
건장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동적적인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말기
로 접어들면서 한때 충직했던 측근들이 부패하여 엘리자베스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 시작했다. 반역
을 기도하는 귀족이 있어 처형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통치력이 점점 약해지는 현실에 좌
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력도 쇄진해갔다. 대영제국의 기반을 닦아놓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603년 3월 24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국 국민들
은 오늘날까지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손녀집에 반찬 몇가지를 전해주고 오는길, 수서역에서 들머리를 잡은 탄천변 걷기를 시작 했는데 일요일임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미세먼지로 인한 외출자제로 인한것임을 뒤늦게 알고 저역시 걷기를 중단하였습니다. 목이 칼칼할 정도 였어니 꽤나 심한 오염도 였습니다.단위 면적당 산소보유 1위인 태국 북동쪽 카오야이 국립공원 근처인 팍총이 정말 맑은 공기 였습니다. 3개월을 있다 온 노인네가 다시 출국한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거의 1년의 절반을 공기좋은곳에서 보낸다는 노부부의 여정이 마땅합니다. 심한 기관지염에 오래 고생하고 있는 분 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