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언제 : 2018.4.7(토) 10:00 ~ 11:30 /성북구청 주관
ㅇ 어디 :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소녀상 앞) ~ 채동선 집터 ~ 김광섭 집터 ~ 염상섭, 조지훈 집터 ~ 김기창 집터
~최순우 옛집 ~ 간송 미술관 입구 ~ 상허 허태준 집터(수연산방) ~ 삼우장
한성대역 6번출구 소녀상앞에서 모였다. 우측은 중국인 소녀상이란다.
일본은 지난 역사의 잘못을 만천하에 사죄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사죄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피해를 입은 동남아 각국과 연계해서 일본에 대처하면 좋을 것 같다
소녀상 옆에 성북동 문화유적지 안내판인데 좀 선명하질 않다
소녀상옆에 있는 비문이다
소녀상 바로 앞 도로 건너에 나폴레옹 제과점이 있다.
이제 채동선 집터로 가는데 가는 골목길에 아름다운 한옥과 꽃이 어우러져 있어 찍어보다.
골목길을 걸어서 채동선 집터에 이르다. 앞에 마당이고 붉은 벽돌집이 채동선 선생의 집이였단다
채동선(1901∼1953). 전라남도 보성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슈테른쉔음악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쳤다.
1924∼1939년에 4회에 걸친 독주회를 가진 바 있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였다. 고려음악협회장·작곡가협회장·국립국악원 이사·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관련 활동을 하면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독창곡을 지어냈다.
특히, 성악곡 가운데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이 있고, 「현악4중주곡 제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採譜)한 바 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져 있다.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가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이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蔡東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채동선 선생 집
저 위 화살표가 표시된 빌라가 김광섭(1905~1977) 시인 집터였단다
호는 이산(怡山). 함북 경성(鏡城) 출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영문과 졸업.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中東)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해외 문학> 동인(同人)으로서 외국 문학 번역, 소개에 힘썼고, <시원(詩苑)> 동인이 되어 시를 발표하기 시작. 1941년 학생들의 반일(反日) 사상 고취 혐의로 투옥. 3년 8개월 간 복역. 해방 후 신문사 사장ㆍ자유 문학가 협회장, 이승만 대통령 공보 비서 등을 역임. 1957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에는 시대적 고민으로 일관했으며 후기에는 인생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金珖燮]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앞에 보이는 새이용원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이발사가 하시는 곳이란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받아서 지금 83세이시란다
지금 성북동은 도로폭을 좁히고 대신 인도를 확장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성북동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의자를 만들어서 설치한 "성북동 조지훈 기념 건축 조형물"이 도로 옆에 있다
주로 골목길을 많이 다닌다. 이런 골목길이 있다는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옛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앞에 보이는 집이 염상섭선생(1897~1963) 집터였단다
본명은 염상섭(廉尙燮), 호는 제월(霽月), 횡보(橫步). 서울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교토부립중학을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협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했다. 『폐허』의 창간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동아일보》 창간 때 정경부 기자로 시작하여 《조선일보》 기자, 《만선일보》 주필 및 편집국장, 《신민일보》 편집국장 등 생애 대부분을 신문기자로 일하였다. 『만세전』, 『견우화』, 『삼팔선』, 『해방의 아들』, 『일대의 유업』 등의 작품집과 『사랑과 죄』, 『이심』, 『삼대』, 『모란꽃 필 때』, 『취우』 등의 장편소설을 냈으며, 『염상섭 전집』이
있다.
염상섭선생 집터
염상섭 선생 집터
염상섭선생 집터에서 내려오면서 맞은편에 보이는 곳이 경신고등학교이다
시인 조지훈 집터(성북동 60-44)
같이 문화탐방을 한 초등 6학년 학생이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를 낭독하고 있다
조지훈 시인 집터
화가 김기창 화백의 운우미술관이다. 재정문제때문에 지금은 운용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다음 찾은곳은 최순우 옛집이다. 집 앞에 "최순우 옛집" 팻말이 보인다.
1916∼1984. 미술사학자.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희순(熙淳)이며 순우(淳雨)는 필명이다. 호는 혜곡(兮谷). 종성(鐘聲)의 아들이다.
대문위에도 팻말이 있다
방 앞뒤로 유리문이 되어 있어 확 트인 느낌을 받는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 된다"는 글이다. 정말 서울에 있으면서 꼭 조용한 시골 한적한 마을에 있는 집같이 느껴진다
최순우 선생 옛집 뒷마당이다. 서울에 이런 아늑한 집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아름답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책을 읽을 수 도 있고~~ 장독대가 보인다
서재이다
<오수당> 이 방안에서 낮잠을 주무셨단다
최순우선생 옛집을 나오면서 앞에 설치된 안내판을 찍어보다
성북동에는 마전터가 있었다고 한다. 안내석이 설치되어 있다
마전터는 성북 2동에 있는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하는 부근의 냇가.
이곳은 원래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았지만 땅에 돌이 많아서 농토가 없고 시장이 멀어 사람 살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조선 영조 때 김한구와 영의정 흥봉한이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에 대한 마전, 즉 생피륙을 삶거나 빨아 볕에 바래는 일에 대한 권리를 이곳 사람들에게 주어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해설사께서 마전터에 대해 설명하신다
마전터 안내석에 있는 그림만 찍어봤다. 아녀자들이 생피륙을 빨래하고 있다.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니 영조대왕의 세심한 백성사랑이 대단하심을 느낀다.
2018.4.10(화) 개관한다고 한다
성북선잠박물관은 지하 1, 지상 3층 규모로 3개의 전시실과 개방형 수장고로 조성, 선잠제와 선잠단, 비단 관련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한다. 옥상은 한양도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성북동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늘정원으로 조성했다.
선잠단은 조선시대 왕비가 누에농사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국가시설로 의복 원료이자 화폐인 직물 생산을 확대,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꾀했던 당시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주요 문화유산이다.
성북구는 주민과 함께 1993년부터 중단됐던 선잠제를 재현, 문화행사로 확대해 왔으며 2016년부터는 선잠단지의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선농단의 원래 위치와 전체 규모를 밝히는 등 역사적 가치를 밝히고 원형 복원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성북동은 옛 정취를 느낄 수 도 있고 또 같은 서울이지만 공기가 너무 맑은것 같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앞에 성곽도 보인다
앞에 보이는 곳이 간송미술관이다.
전형필의 본관은 정선(旌善)이고 호는 간송(澗松)이다.
1906년 7월 29일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전영기(全泳基)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무관출신이고 배오개에서 미곡상을 경영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고종 사촌형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1921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휘문(徽文)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휘문고 시절에는 야구부로
활동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 일시 귀국하여 스승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을 만났으며 그의 조언으로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세창으로 부터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29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1930년 와세다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논 800만 평이 넘는 거대한 재산이었으며 해마다 2만 석의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간송은 조선의 중요한 서화를 수집하면서 안목을 키워나갔고 스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문화재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사동에 소재하는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고서적과 서화, 화첩 등을 수집하였고
한국의 중요한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국내 문화재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전국의 거간꾼과 국내, 일본의 수장가를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구입하였고 경매를 통해 문화적 가치가 높은 다수의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1940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校主)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간 맡았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수집한 문화재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 10,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가 소장한 문화재 중 신윤복의 화첩도 유명하다 (두산백과)
간송 미술관을 나오면서 다시한번 찍어보다
간송미술관에서 내려오면서 우측에 글라렛 선교 수도회가 보인다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이다
별장형 주택인 수연산방은 소설가 이태준선생께서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머물면서 <달밤>,<돌달이>,<황진이>등의 작품을 집필한곳이다. 현재는 전통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태준(1904~?). 소설가. 강원도 철원(鐵原) 출생. 호는 상허(尙虛). 일본 죠오치대학(上智大學) 수학.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 1920년대 후반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한 때 개벽사(開闢社)에 근무했고,
뒤에 《문장(文章)》의 편집을 맡았다.
1933년 박태원朴泰遠) · 이효석(李孝石) · 정지용(鄭芝溶) 등과 《9인회(九人會)》를 조직하면서부터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일제 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상허 이태준선생의 집을 해설사님이 돌아보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만해 한용운 옛집으로 가는 도중 만개한 꽃이 있어 찍어보다
성북동 도로옆에 만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만해 공원 좌측 골목길로 올라가다 보면 만해 한용운선생 옛집 삼우장이 나온다
만해 한용운선생이 이곳에 오면서 심은 나무
만해 한용운 선생 옛집에서 앞을보고 찍어보다
만해 한용운 선생 집에서 내려오면서 골목길에 있는 나무를 찍어보다
문화탐방을 마치고 칼국수 한그릇으로 시장기를 달래다. 성북동에는 맛집이 많은것 같다.
몇번 성북동에 와서 식사한적이 있지만 올때마다 정겨운 느낌을 받는다
버스타러 내려오다 보니 미술관도 있다
버스타기전 마지막으로 한컷 담아본다
첫댓글 좋은 경험하셨네요. 옛말에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읖는 사람들을 한량이라 했는데 준복선생도
한랼기질이 다분히 있네요..
감사~ 저는 한량기질이 못되어요^ 잘 보내시고요
역사탐방가 다 되셨네
감사~ 지기님^^^
와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있는데
좋은데 탐방하시고 잘 알려주어 감사드립니다
이박사님~ 감사^^ 가까운 곳이라 처음으로 이런데 탐방갔어요^ 성북동은 같은 서울이래도
좀 특이한 동네같아요^^^^
성북동 탐방코스도 있군요.
한번 다녀봐야겠습니다.
멋진 사진과 해설은 수준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