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엽에 발생한 서경 천도운동을 주도한 묘청(妙淸, ?~1135)은 고려 역사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한미한 승려 출신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고려 지배층을 흔들고 서경 천도운동
‘조선역사상 1천 년 이래 최대 사건’을 일으키다
오랜 기간 반란의 수괴로 이미지가 각인되었던 묘청이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
수도를 이전하라: 서경 천도론의 대두
묘청이 등장한 고려 인종이자겸과 척준경金)이 발흥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묘청이 표방한 대표적인 슬로건은 서경 천도론이다. 말하자면, 개경에서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것이다. 이 무렵 서경 천도론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우외환 때문이었다. 하지만 묘청의 서경 천도론은 전부터 있었던 서경 천도론의 재판이었지 결코 이때 와서 처음으로 주장된 것은 아니다.
묘청 난의 최대의 이슈였던 서경 천도 운동은 풍수와 도참사상地德衰旺說)’은 고려 태조 이후부터 거의 모든 고려 왕들이 신봉했던 풍수론이었다.
사실, 내용만 따지고 본다면 지덕쇠왕설은 단순한 미신에 불과한 것 같지만, 보수적이고 무기력한 구세력의 근거지 개경을 떠나, 새로운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 싶어 한 왕과 신세력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도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태조로부터 예종에 이르는 2백여 년 동안 거의 모든 고려 국왕들이 평양을 서경으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전략적 유용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론은 풍수설뿐만 아니라 제도와 문물의 혁신, 그리고 개경세력을 제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서경세력의 일대 반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청하며, 중앙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원래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서 정심(淨心)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1132년(인종 10년),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개성의 정궁(正宮 : 만월대 滿月臺)을 재건하기 위해 기초공사를 할 때 묘청은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병가압승의 술책을 부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법은 일찍이 선사 도선이 강정화에게 전해준 것인데 강정화가 다시 나에게 전하였고, 나는 뒤늦게야 백수한을 만나서 그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니,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술법이다.”
묘청이 언급한 백수한은 천문관리 출신이고, 강정화는 어떤 기록에도 전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묘청의 계보는 정확하지가 않다. 음양대가로 알려진 묘청을 중앙 정계에 소개한 사람은 서경 출신의 문신 정지상
정지상은 서경 출신으로 인종 대에 언관직을 맡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1127년에는 척준경을 탄핵하여 추방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경연에서 고전 강의를 도맡을 정도로 실력파였던 정지상은 시문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날리는 등 본래 묘청과 같은 음양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의 혁신과 서경 천도 운동에는 크게 공명한 바 있었는지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하기도 하고, 내시낭중 김안
인종도 처음부터 묘청을 신뢰했던 것은 아니었다. 14세에 왕이 되어 이자겸의 난을 경험한 그로서는 서경 천도론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1127년 2월, 인종은 마침내 정지상과 묘청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경으로 가서 ‘유신 정교’를 선포했다. 이때 인종이 선포한 정교는 대개 산천신에게 제사하고, 검약을 실천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여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도모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서경파의 천도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섣부른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 주장
유신의 정교를 반포하고 나서묘청 일파는 서경에다 신궁을 건설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서경 임원역(林原驛) 땅이 풍수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며 금나라도 조공을 바쳐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대화세’란 이른바 산수의 발맥(發脈)·결국(結局) 따위를 나무의 줄기나 가지, 꽃과 열매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으로, 산수가 취합하여 좋은 격을 이룬다는 소위 명당자리를 말한다. 대화세인 명당자리를 인종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1128년(인종 6년) 8월 23일, 드디어 묘청의 말에 따라 서경으로 향한 인종은 자신을 따라간 묘청과 백수한에게 임원역의 땅에 새로 지을 궁터를 잡게 했다. 그리고 곧장 그 해 11월에 일명 대화궁이라는 이름의 궁궐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불과 3개월 만에 완공을 보았다.
묘청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인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 문제를 주청했다. 그야말로 자주 선언이었지만, 금국정벌은 그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비추어보아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은 불만이 하늘을 찌르던 수도 이전 반대파들을 결집시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묘청 일파는 서경 천도를 서둘렀다. 개경의 궁궐 재건 기공식에 참석한 묘청은 백수한·정지상 등과 함께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인종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김부식 등 묘청 반대파들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었다.
개경파의 역공, 결국 거사를 일으키다
인종도 처음부터 묘청 일파의 비술이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이자겸 일파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여 개경 땅이 싫어진 참이었고, 개경 귀족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묘청 일파의 말대로 옛것을 혁신하여 새것을 세우는 이른바 ‘혁구정신(革舊鼎新)’의 정치를 인종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인종은 1134년 1월에 묘청을 삼중대통지루각원사에 임명하고 붉은 가사 옷을 주더니 뒤이어 2월에는 다시 서경의 신궁으로 행차하였다.
인종의 서경행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초봄이라 그런지 인종이 뱃놀이하는 대동강가에 별안간 폭풍이 몰아치자, 인종은 낙심하여 보름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인종이 개경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천재지변은 그치지 않았다. 음력 3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하늘에선 별똥도 떨어졌다. 4월(현재로는 5월)에는 때아닌 서리가 내렸으며 또 큰 비와 우레 때문에 인명과 농작물의 피해가 막심했고, 그해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마저 들어 인종은 급기야 기우제까지 지냈다.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은 본격적으로 인종의 서경 행을 저지하고 나서고 인종도 마침내 서경 거둥을 포기하고 말았다.
1135년(인종 13년) 정월,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칼끝은 왕이 아닌 개경의 귀족들을 향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자신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나 스스로 왕이 될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묘청의 거사는 앞서 이자겸이나 척준경의 반역과는 달리 새롭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묘청 일파가 과연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반란을 준비했는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묘청의 측근이었던 안중영이 불사에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놓았을 때 갑자기 도화선이 터졌으며, 백수한과 정지상∙김안∙최봉심 등 묘청 일파 다수는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말하자면 묘청의 반란은 급작스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며 정지상 등은 뒤늦게 묘청의 반란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얘기이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지만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반란 규모를 볼 때 과연 이들이 사전에 함께 반란을 모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여전히 남는다.
묘청의 거사가 그처럼 쉽게 터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비령을 포함한 서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 데는 그만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경은 이미 태조 때부터 서북계의 요충지로서 정치와 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앙과 비슷한 분사의 조직이 구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요소에 자기 일파를 대치시키기만 하면 세력을 확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묘청이 천도를 하자고 주장한 서경은 현재의 평양이다. 나라를 혁신하고자 한 묘청의 꿈은 서경천도가 물거품이 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사진은 평양의 위성사진. <출처 : NASA>
서경, 역적의 땅이 되다
묘청의 거사 소식이 알려지자 인종은 곧 백관을 소집하고 회의 끝에 토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토벌대의 대장은 김부식이었다. 당시 인종은 김부식에게 “난을 일으킨 서경 사람들도 모두 내 아들 딸들이니 우두머리만 죽이고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마라.”고까지 거듭 당부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김안과 정지상·백수한 등 개경에 있던 묘청 일파들을 암살하고 인종에게는 나중에 가서야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당시 암살된 김안과 정지상은 서경의 반란에 처음부터 관련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없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살해된 것은 개경파의 모함 때문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부식이 선참후계식으로 성급하게 정지상 등을 죽인 것은 오래전부터 정지상의 문명(文名)을 질투한 김부식이 그 기회에 그를 묘청파로 몰아서 죽여 버린 것이라고 한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의 진영에선 당황하기 시작했고 상황은 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경 세력도 배신과 분란이 일어났다. 묘청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조광은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 등 세 사람의 목을 베고 투항할 의사를 밝혔다. 조광이 미처 항복하기도 전에 개경파들은 묘청을 비롯한 우두머리들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효시하였다. 항복해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광은 결사항전으로 방향을 틀고 결국 서경 천도운동은 묘청의 이념 투쟁에서 조광의 생존투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마저 정부군의 총공세에 무릎을 꿇고 이로써 서경성은 반란을 일으킨 지 1년여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조광은 가족들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고 수많은 반란군 지휘관들은 목을 매 자살하였다. 특히 묘청이나 조광에 합세하여 관군에 항거했던 백성은 ‘서경 역적(西京逆賊)’이란 글자를 몸에 새기고 먼 곳으로 귀양가거나 천민이 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또 다른 수렁으로 빠져든 고려 사회
항전 1년여 만에 ‘칭제건원’, ‘금국정벌’을 내세웠던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은 조광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종결되었다. 고려조정 내의 서경세력은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불교세력도 상당히 쇠퇴하였다. 서경성이 무너지자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신귀족들은 정권을 독식하고 문신귀족들의 독주는 무신을 홀대하는 풍조로 이어져 무신정변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