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인 <한·중·일이 함께 쓴 미래를 여는 역사> 발간을 앞두고, 공동교과서 집필위원들과 함께 그 내용과 쟁점을 매주 수요일마다 소개한다.
후원:2005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중·일 함께쓰는 역사 함께여는 미래
⑤ 한·중·일 연대투쟁
‘천황’ 폭살 도모한 가네코 후미코
조선·대만인 변호한 후세 다쓰지
반전운동 벌인 일본군
한-중 손잡은 항일연합전선…
평화위한 저항연대 사건별 첨부
3국교과서 인물 아예 안다뤄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 <한중일이 함께 쓰는 미래를 여는 역사>의 지향이다.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이런 특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대목이 있다. ‘국경을 넘어선 연대투쟁’에 대한 서술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역사주제다. 핵심은 한국·중국·일본이 침략에 함께 맞섰던 역사적 장면과 대표적 인물을 되짚는 노력이다. 그 노력은 교과서 곳곳에 녹아 있다.
한국의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을 서술하는 2장에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를 소개하는 별도의 칼럼이 있다. 가네코는 조선인 박열과 함께 천황을 폭살하려다 사전에 체포돼 감옥에서 자살한 혁명가다. 후세는 이들을 변호하고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특히 후세는 일본과 조선, 대만에서 ‘피억압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쳐, 최근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국경을 넘은 연대와 우정을 나눈 이들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소개한다.
제3장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 편에서는 ‘특공대와 청년학도’, ‘일본병 반전동맹’ 등을 따로 칼럼으로 실었다. 여기서는 제국주의의 실상에 눈뜬 일본군들이 벌인 반전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한 특공대원의 유서는 인상 깊다. “자유의 승리는 명백하고 권력주의 국가는 일시적으로 흥했다가도 결국에는 망한다. … 내일은 출격이다. 내일 자유주의자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인물은 한·중·일 어느 나라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국경 중심의 일국사관’에 의해 역사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조국 일본은 물론, 그들이 헌신한 한국·중국의 민중들로부터 잊혀졌다. 그들을 다시 불러와 ‘평화를 위한 저항연대’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미래를 여는 역사>만의 힘이다.
한·중 연대에 대한 서술이 두드러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만주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북지역의 각 민족은 일본에 대한 노역을 거부하고 공동 투쟁을 전개했다”고 적었다.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연군’에 대한 소개도 눈길을 끈다. 민족의 경계를 넘은 연대의 정신과 함께,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을 양지로 끌고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공동 교과서는 항일연군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동북민중과 손을 잡고 전투를 벌였다”고 적었다.
일본 후소사판 역사교과서는 물론 도쿄서적판 역사교과서에도 ‘저항의 연대’에 대한 서술은 아예 없다. 중국의 초급중학교용 <중국력사>, 고급중학교용 <중국근대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에 대한 서술로 일관하고 있을 뿐, 동북지역 등에서 펼쳐진 한국과의 연합전선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그나마 한국의 중·고등학생용 <국사> 교과서는 당시 중국과의 연대 투쟁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대했고 윤봉길의 의거가 중국의 협력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식의 짧은 서술에 그치고 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저항의 연대에 대한 한·중·일의 냉대에 다시 한번 저항한다. 침략에 맞선 시민연대의 역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게 이 교과서의 메시지다. ?態횝癡? 기자 ahn@hani.co.kr
동아시아 ‘연대의 역사’ 복원 양심세력 평화벨트 구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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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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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연대투쟁에 대한 <미래를 여는 역사>의 관심은 동아시아의 ‘오늘’에서 비롯됐다. 지금 동아시아는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 한 축에 일본 우파가 우뚝 서 있다. 우파의 주류는 미국의 세계전략 아래 우선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이어 대만을 독립시켜 동맹으로 끌어들일 계산을 갖고 있다. 대신 남한의 노무현정권을 ‘친북좌파’로 몰아 동맹에서 제외시키고, 중국과 북한을 봉쇄하려 한다. 이런 태도는 2005년도 후소사판 <역사> <공민> 교과서에 투영돼 있다. 중국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을 유도했다는 뉘앙스로 서술했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를 강조하고 대만을 개발시켰다는 내용을 새로 추가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중·일의 평화·양심세력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하고 교류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침략사실을 숨기고 배제의 논리를 퍼뜨리려는 우파의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에 ‘평화 벨트’를 만들려는 시민연대가 절실한 것이다.
사실 이런 ‘평화연대’의 경험은 1945년 이전에도 많았다. 한국인들은 민족운동사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만 배워 왔지만, 여기에는 동아시아 평화연대의 고리가 숨어있다. 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에 반대한 반침략운동이었으며 오늘날로 치면 평화회복운동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의 항일전쟁사는 ‘평화운동’의 이름 아래 한국의 민족운동과 만난다. 우리의 민족주의 단체 가운데는 중국은 물론 여러 약소민족과 ‘동일 전선에서 일치의 보조’를 취하며 싸운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화북지방과 만주지방에서 총을 들고 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경우도 있었다.
동시에 중국은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해 주었고, 미국의 화교들은 공동의 적 일본과 싸우는데 필요한 자금을 미주 한인들을 통해 임정에 제공하기도 했다. 1932년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의 의거에 소요된 자금은 바로 이들이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인 가운데서도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반항하는 조선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일본인”이라며 식민지 지배를 비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야나기는 후일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을 파괴하려 하자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연대 투쟁의 역사’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모두 외면당하거나 소흘히 다뤄졌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런 연대의 역사를 다시 복원하려 한다. 그것이 동아시아 평화연대를 만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중국인과 항일투쟁 조선인
김산, 독립 우회로이자 지름길 선택
김산은 한중 연대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에겐 그 이름보다 <아리랑>이란 책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사회주의운동가다. 그가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한 기간을 따져 보면, 조선독립보다 중국혁명을 위해 싸운 시간이 더 길다. 1938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인생을 끝마쳐야 했던 것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받은 간첩혐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혁명투쟁, 곧 조선혁명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조국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극동에서의 지도적인 혁명과제’가 중국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 공동의 적인 일본을 우선 중국 땅에서 몰아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일제 침략시기, 중국을 기반으로 한 한·중 연대투쟁의 이면에는 바로 김산과 같은 숱한 조선혁명가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이 문제로 갈등하고 방황할 때도, 김산은 현지에 직접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도록 이들을 설득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중국공산당의 만주지역 조직이 곧바로 무장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조선인 대원들 때문이었다. 김산에게 있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에 뛰어든다는 것은 조선독립을 향한 ‘우회로’이자 동시에 ‘지름길’이었다. ??
신주백
조선인과 항일투쟁 일본인
가네코 국가주의 저항…박열과 ‘거사’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인들에게 무척 낯선 일본인 여자다. 23살의 짧은 생이었지만, ‘비극적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등 불우하게 자랐다. 소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9살때 조선에 사는 친척의 양녀가 됐지만 오히려 학대만 받았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일어난 3·1운동을 조선에서 목격했다. 그의 내부에서 자라던 강자에 대한 반감이 체계적 사상으로 다져진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감격했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온 가네코는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조선인 박열을 만난다. 이때부터 ‘비국민’이자 가족제도의 희생자였던 그의 삶은 확실히 바뀌었다. 혼자 공부하며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을 접했다. 이를 통해 “충군애국과 여자의 순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대표자가 천황”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이후 박열과 함께 천황 암살 계획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돼 체포됐다. 그녀는 법정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인과의 공동투쟁을 당당하게 주장할 정도로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사형판결을 받은 뒤 천황이 내린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그는 사면서류를 찢어버렸다. 이후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임신중인 몸이었다.??
신주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