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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악 : 반달 ,윤극영 시,곡 - 중국어로 노래(小白船).flv
클릭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A3Ldzm7vw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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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길에서
맑은 샘
꿈꾸다 깨어 하늘엔 반달
아무도 없는 새벽, 호젖한 시골길을 걸었네 장군은 통제사 영감 몰래 샤론이 화한 꽃길을 걸어 보았네 규방 깊숙하고 아늑한 연못에서 영혼(靈魂)을 걸고 다정히 말했지 이싸움 영감 도와 반드시 승리한 후 그대를 찾으리라고 샤론은 알지 그윽한 굳은 믿음 친구에게도 말했지 그러나 정작 슬픈죽음 논개가 맞이했지 학익진(鶴翼陳)이 펼쳐지는 거대한 무대에서도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 그러나 나는 훗날 아련히 그윽한 세레나데가 울릴 꿈을 꾸었네 지금의 오페라와 뮤지칼이 모르는, 그 아름드리 세레나데가 문화(文化)의 전장(戰場)에서 울려 퍼지는 훗날의 꿈을 꾸었네 바람이 꽃씨를 실어오면 향기되어 되돌아 불어 간다네 홀로 걷는 새벽길 향긋하고 꽃길 교향곡 웅장한데 쓰잘데없는 쑥부쟁이들 붉은 독기(毒氣)품고 피었구나 멍청히 취한 '술베르트', 저 자갈돌처럼 구르는 아마 데굴르스 '모자르트', 배고파라 '벤또벤', 헛바람 빠질 '브라암 슈'가 대수랴, 황당히 붉은 쑥부쟁이들이 대수랴 우리는 아 아, 그러나 우리는 황제(皇帝)로 소이다 지국(知國)총 지국(志國)총 은하수 노저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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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쓰잘데없는 쑥부쟁이들 : 문단의 썩은 종북 좌파들....
*배경 :
우리는 지금 엄청난 로얄티, 게런티를 주고 서양의 이태리 오페라들을 수입, 향유하고 있다. 점점 우리 클래식 음악인들의 수준도 세계적으로 도약하고 있는지 오래다. 고리타분한 전통선율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구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선하고 품격있는 새선율로 우리의 창작 오페라, 창작 뮤지칼을 만들고 영어로도 노래할 수 없을까? 우리의 새로운 창작작품을 거꾸로 미주에 유럽에 수출하여 대박터트릴 날만을 일제 강점기의 시인, 문인들을 회고하며 생각해 본다.
지금과 앞으로는 세계적인 글로벌 문화전쟁 시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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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광복절 기념, 일제강점기의 시인, 문인을 돌아봄<3>
봄비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논개(論介)
변영로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신생활 3호, 1923.4)
*작품이해 :
논개의 애국적 절개를 노래한 초기의 시.
명백한 민족의식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민족적 의분을 밖으로 내풍기는 정열보다도 그 의(義)에 대한 강렬한 찬탄을 내향적으로 응결시키려는 시적 긴장감이 돋보인다.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한 비유에 의해 수식됐고, 시의 형태적 구성도 너무 규칙적인 반복으로 일관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감정의 노출 아니면 절규나 영탄에 그치던 당시의 시적수준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얼마나 깔끔하게 시의 기교적 완성을 노렸는가를 짐작케 한다. 아름다운 애국의 여인, 논개와 같이 깨끗하고 맑고 꾸밈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변영로 :
변영로 황신덕
영문학자 · 시인. 아호는 수주(樹州).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정상(鼎相),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서울 재동 · 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이씨(平昌李氏) 흥순(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으며,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활동은 1918년 《청춘(青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페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 · 〈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다. 《신생활》 · 《동명》 · 《개벽》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舘)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 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있었다. 그의 시 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실제(失題)〉 · 〈사벽송(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壁)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 ·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1959), 영문시집 《진달래동산(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첫시집 《조선의 마음》의 표제시. 1924년 발간. 〈논개〉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의 시의 전형적인 일면을 보여 준다.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굴 속을 엿볼까, 바다 밑을 뒤져 볼까/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 볼까/아득한 하늘 가나 바라다 볼까/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볼까/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전문(全文))
단 일곱 줄의 시 속에 민족의 비애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민족의식을 의지화 · 행동화하려는 것이 지배적인 이상이었던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식을 미래와 본질적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시적 의지를 갖추었다. "조선의 마음"을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이라고 직설한 것은 당시의 사회 · 민족의 시대적 심정을 정확하게 묘파한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그의 모든 시는 세련된 시적 기교에 의해 성공적으로 구현되었고, 그의 시적 목표는 언제나 민족의식을 위해서만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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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보성소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2월 『동앙일보』 창간과 함께 진학문(秦學文)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김억(金億)‧김찬영(金瓚永)‧민태원(閔泰瑗)‧남궁벽(南宮璧)‧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고, 김환(金煥)의 「자연의 자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김동인(金東仁)과 논쟁을 벌였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암야」, 「제야」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묘지」(후에 「만세전」으로 개제)를 발표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야 작가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안정감과 구체성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폐허 이후』를 발간함과 아울러 『해바라기』를 출간하였다. 주간종합지 『동명』의 기자를 거쳐 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사회운동의 유심적 고찰」, 「소설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다.
1920년대 염상섭은 대체로 당시 문단에서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단편 「윤전기」를 통해 그의 가치중립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삼대」는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가족간에 벌어지는 세대갈등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서울의 한 중산층 집안에서 벌어지는 재산 싸움을 중심으로 1930년대의 여러 이념의 상호관계와 함께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현실을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속편으로 「무화과」를 내놓은 이후 「모란꽃 필 때」, 「그 여자의 운명」과 같은 통속소설을 발표하다가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두 파산」, 「일대의 유업」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한때 해군소령으로 복무했고, 1954년에는 한국전쟁 중의 서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장편 「취우」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원 창설과 함께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을 지냈으며, 이듬해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에는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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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맥박
양주동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情熱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때에,
나는 조선의 힘없는 맥박脈搏을 짚어 보노라,
나는 님의 모세관毛細管, 그의 맥박脈搏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훤한 동東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希望과 용기勇氣가 두 팔을 뽐내일 때면,
나는 조선의 갱생更生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님의 기관氣管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이른 아침 길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學生들, 그들의
공 던지는 날래인 손발, 책보 낀 여생도女生徒의 힘 있는 두 팔,
그들의 빛나는 얼굴, 활기活氣 있는 걸음걸이―
아아 이야말로 참으로 조선의 산 맥박脈搏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갓난아이의 귀여운 두 볼,
젖 달라 외오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적으나마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기쁨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아아 조선의 대동맥大動脈, 조선의 폐肺는, 아기야, 너에게만 있도다.
조선의 맥박 1932년: 작품이해:
국문학자 · 영문학자 · 시인.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황해도 장연에서 보냈다. 본관은 남해(南海). 아버지는 원장(元章)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호는 무애(无涯).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 졸업. 같은 해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였다가 일제말 이 학교의 폐쇄로 그 자리를 물러나 1940년부터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1947), 중간에 수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것(1958∼1961)을 빼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학교 이외의 다른 대학들에도 출강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 · 간접의 영향을 입은 후학들이 많다.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인 및 문학이론가로서 문단에서의 활약이 화려하였으나,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부터는 주로 고시가(古詩歌)의 주석에 전념하는 국학자로 전신하였다.
《금성(金星)》 동인으로 등장하여(1923)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를 주로 썼다. 시집 《조선의 맥박(脈搏)》(1930)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데, 그의 시들이 가지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문예공론(文藝公論)》(1919)을 발간하며 시작된 양주동의 평론은 문학사가들에 의하여 절충론이라고 불린다. 염상섭과 박영희(朴英熙) 사이의 문학논쟁을 이어받아 경향파(傾向派)의 기수였던 김기진(金基鎭)과의 사이에 폈던 논전은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고시가에 대한 해독 및 주석에 대한 연구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이기도 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은 처음에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研究)》라는 이름으로 1942년에 간행되었는데, 뒤에는 단순히 《고가연구》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지금 표준으로 잡는 것은 1965년 개정증보판이다. 1947년에 출판되어 나온 《여요전주(麗謠箋注)》는 《고가연구》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는 평소에 고시가 연구를 3부작으로 간행할 것을 공언하였으나, 그 제3부에 해당하는 것은 끝내 공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5년에 출간된 《고가연구》 개정증보판에서의 증보부분에서 그 제3부의 일부를 볼 수 있다. 광복후에도 그의 문필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으나, 왕년과 같은 문학평론의 자리에는 돌아가지도 않았으며, 시작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영문학분야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하여서도 거의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영문학 강의와 영시 번역을 하며 작품집의 편저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영문학연구의 저술을 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주석에 대한 관심은 계속된 정정과 보충으로 지속되었다. 1962년 나온 《국학연구논고(國學研究論攷)》에 실린 논문들이 새로운 의견들로 볼 수 있거니와, 《고가연구》나 《여요전주》의 개정판들에 그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신라향가 해독 · 주석서. 1942년 발간. 이 책은 한국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방대한 향가연구저서로서 향가연구의 집대성이다. 일인학자 오쿠라(小倉進平)가 1929년에 《향가와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研究)》를 낸 지 12년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초의 해독가인 오쿠라교수의 연구보다 훨씬 보정의 진경을 보인 명저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14편과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11편 등 현존하는 25편의 신라향가를 해독 · 주석하고 있는 이 책의 특징은 15세기까지의 한국어의 문헌조사를 철저히 한 점, 또 인명 · 지명 · 관직명의 풀이를 새롭게 한 점, 시가를 시가답게 풀이한 점에 있다. 그리고 이 저서의 출간에 의해서 향가의 시가로서의 면모가 어느 정도 명료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뒤 향가의 어학적 연구의 진전은 물론, 이 책을 토대로 하거나 선행조건으로 하여 점차적으로 향가의 문학적인 해석과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학계에 대한 기여는 실로 큰 것이다. 그 뒤 이 책은 《고가연구(古歌研究)》란 표제로 증보 · 개정판이 이루어졌다.
전기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研究)》의 속편으로 1946년에 발간한 것. 따라서 전자가 우리고전문학으로서의 신라향가에 대한 해독임에 비해서, 이 책은 그 향가의 중세적 계승이요 발전인 고려가요를 석주(釋注)한 것이다. 이의 학구적 태도와 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어학적이고 고증적이다. 이 책은 크게 구분해서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편이 서설로서, 여기에는 여대가요(麗代歌謠)의 일반(一斑)과 여요개관(麗謠槪觀)이 실려있고, 제2편에 해당하는 석주(釋注)에는 《정읍사(井邑詞)》 · 《동동(動動)》 · 《처용가(處容歌)》 · 《정과정(鄭瓜亭)》 · 《한림별곡(翰林別曲)》 · 《쌍화점(雙花店)》 · 《서경별곡(西京別曲)》 · 《청산별곡(青山別曲)》 · 《정석가(鄭石歌)》 · 《이상곡(履霜曲)》 · 《사모곡(思母曲)》 · 《가시리》 ·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 《도이장가(悼二將歌)》 · 《관동별곡(關東別曲)》 ·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모두 16편의 작품이 주석되어 있다. 그리고 3편에 해당하는 평설(評說)에는 특히 고려가요의 백미(白眉)를 이루는 《가시리》와 《서경별곡》의 문학적 가치가 평가되어 있다. 이 《여요전주》는 800내외의 어구(語句)를 주석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그 주석이 문헌 고증에 의해 확정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 주석에 주안을 두었으면서도 문학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많이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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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부(靑磁賦)
박종화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베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 무늬, 물결 무늬
구슬 무늬, 칠보 무늬
꽃 무늬, 백학 무늬
보상화문(寶相華紋), 불타(佛陀) 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월탄 박종화 :
시인 · 소설가 · 비평가. 서울 자암동(紫巖洞) 출생. 호는 월탄(月灘), 이밖에도 죵화 · 춘풍(春風) · 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 조수루주인(釣受褸主人)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였다. 같은해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고, 1921년 《장미촌(薔薇村)》 창간호에 처녀작 〈오뇌(墺惱)의 청춘〉과 〈우유(牛乳)빛 거리〉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발을 내디뎠다. 다음해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창간호에 〈밀실(密室)로 돌아가다〉와 〈만가(挽歌)〉의 두 편의 시와 〈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이라는 수필을 발표하였고, 이어 〈오호 아문단(嗚呼我文壇)〉이라는 평론과 〈목매이는 여자〉라는 처녀 단편, 시 〈흑방비곡(黑房悲曲)〉과 〈사(死)의 예찬(禮讃)〉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24년에는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하였다. 단편 〈순대국〉 · 〈아버지와 아들〉(1924) · 〈여명(黎明)〉 · 〈부세(浮世)〉(1925) 등을 쓰면서 소설가로 전신함으로써 좌절로 끝난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현실부정의식의 출구를 열게 되는 역사소설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문단시평이나 문단회고담을 계속 발표하였으며 〈대전이후(大戰以後)의 문예운동(女藝運動)〉이라는 문제의 비평을 쓰기도 하였으나 당시 비평계의 논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금삼(錦杉)의 피〉(1936)와 〈대춘부(待春賦〉(1937)로부터 역사소설로 전환하였으며, 단편〈아랑의 정조(貞操)〉 · 〈전야(前夜)〉(1940) 등과 장편 〈다정불심(多情佛心)〉(1940)을 잇달아 발표하여 역사소설 작가로서의 재량을 인정받았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발간하였다.
광복 뒤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쓰여진 〈민족(民族)〉(1945)은 앞선 〈여명〉 · 〈전야〉와 함께 삼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홍경래(洪景來)〉(1946)와 〈청춘승리(青春勝利)〉(1947) 및 단편 〈논개(論介)〉를 통해서도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였다. 1947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사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란과 공무로 잠시 중단되었던 창작생활을 다시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을 《조선일보》에 전 946회로 연재하였고, 단편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1955)과 장편 〈벼슬길〉(1958) · 〈여인천하(女人天下)〉(1959) 등을 거의 같은 무렵에 연재하여 인기를 모았다. 1961년에 회갑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하였다.
다음해 《조선일보》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부산일보》에 〈제왕삼대(帝王三代)〉를 각각 연재하였다.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志)〉를 《한국일보》에 4년에 걸쳐 연재하였으며, 그 뒤 수상록 《달과 구름과 사상(思想)》을 출간하였다. 1965년 〈아름다운 이 조국(祖國)〉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였다. 1966년 제1회 5 · 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하여 같은해 10월 제1회 월탄문학상을 시상하였다. 칠순을 맞는 1970년 제3수필평론집에 해당되는 《한자락 세월(歲月)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 《영원(永遠)히 깃을 치는 산(山)》을 내놓았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신문소설사상 2,456회라는 최장기록을 남겼다. 그 뒤 발표한 수상록 《화음 · 격음(和音激音)》과 회고록 《역사(歷史)는 흐르는데 청산(青山)은 말이 없네》 등은 그의 문학적 생애를 증언하여 준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시대고인 고독과 절망, 좌절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1930년대의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추구를 역사소설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이나 민족혼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으나 확고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과거를 투영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유(共有)의 역사를 사유화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편. 1937년작 〈문장(文章)〉에 발표한 것으로 일종의 단편 역사물(歷史物)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列傳)에 기록된 《도미전(都彌傳)》에서 취재한 것으로 백제의 미인 아랑이 주인공이다. 아랑의 예쁜 소문이 방방곡곡에 자자하게 퍼졌다. 아랑의 남편인 도미는 솜씨있는 목수로 그의 이름이 백제 서울에 유명했지마는, 그보다도 예쁜 아내 아랑을 가진 복성스런 청년도미로 이름이 더 높았다. 개루왕은 여색을 좋아하는지라, 신하와 백제 서울 미인 이야기를 하다가 아랑에게 미쳤다. 「잔말 말고 부르게 하오.」 개루왕의 명령에도 끄덕하지 않고 끝까지 정조를 지키는 도미의 아내 아랑을 미화시킨 것이다.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정조만은 고수하고 끝내는 도미를 찾아 탈출하는 아랑의 아름다운 부덕(婦德)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인 아내를 둔 탓으로 생눈알을 뽑히면서도 자기의 미인 아내만은 결코 변심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목수 도미. 장님이 된 남편을 찾아 헤매는 아내 아랑의 사랑은 더없는 귀감으로 승화되고 있다.
장편. 1940년작.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되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주인공으로 한 이 역사소설은 하나의 애틋한 애화(哀話)다. 그는 원(元)나라로 끌려 갔다가 노국(魯國) 공주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돌연한 노국공주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정사(政事)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노국공주의 영전(靈殿)을 짓도록 독려했다. 그로 해서 날로 백성들과 신하들의 원성이 높아 갔다. 섭정왕(攝政王)이었던 신돈도 영전 역사를 중지하도록 간하다가 오히려 왕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후 나약한 공민왕은 정사를 맡길 후계자가 없어 낭패하게 되고 성격파탄을 일으킨다. 그는 여러 후궁(後宮)들을 멀리하고 미동(美童)들을 상대로 변태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미동인 홍륜과 최만생이란 신하에게 살해당한다. 이때부터 이씨조선(李氏朝鮮)이 비롯된다. 이같이 공민왕이 오랑캐 땅에서 맺은 한 번의 사랑이 끝내는 나라를 망치는 어마어마한 씨앗을 낳았다는 역사적 교훈이 그려졌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 준 것은 우리 역사에 숨겨진 오점을 끄집어내어 독자와 함께 비판하고자 한 점이다. 그리고 이 주인공인 왕을 하나의 인간으로 환원해서 한 여성을 그토록 병적으로 사랑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재현시켰다. 《다정불심》의 특징은 낭만적인 표현에서 찾게 된다. 공민왕의 뜨거운 사랑을 극적으로 그려 가면서 이어진 낭만적인 대화들은 몹시 매혹적이다.
장편. 1946년작.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한 것으로 홍경래란(洪景來亂)을 소재로 하여 근대사의 영웅 홍경래의 일생을 그렸다. 물론 홍경래의 의거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이상세계를 위한 집념은 대단한 것으로 유토피아를 낭만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홍경래》다. 홍경래란은 조선 순조(純祖) 12년에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岡) 출신 홍경래의 지도로 터진 것이다. 서북인의 천대 차별 정책과 국정 부패에 분개하여 일어난 큰 반란으로 이 반란은 불과 5개월 만에 종식되었지만 근대사상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원인을 작가는 홍경래 같은 영웅이 서북출신인데다가 권문세가(權門勢家)에 태어나지 못한 탓으로 과거(科擧)에 실패한 데서 근인(近因)을 찾고 있다. 여기 동조한 서북인들의 불평은 회유의 기근으로 박차를 가했다고 풀이했다. 최초에 홍경래의 계획은 일면 성공하여 청주칠읍(清州七邑)을 석권했지만 일면 실패해서 정주성(定州城)을 사수하려 하였으나 관군(官軍)에 몰려 참패한다. 이때 홍경래마저 전사하여 난은 종식된다는 얘기다. 이런 역사적 소재를 특유한 낭만적 필치로 현대화시킨 것이다.
장편. 1947년작. 수많은 역사물(歷史物)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최근세사(最近世史)를 다룬 작품이다. 더욱이 《청춘승리》가 말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나 그 주인공들의 피어린 생은 곧 우리 민족의 수난사(受難史)요, 해방사(解放史)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청춘승리》를 통해 일제(日帝)의 식민지하에 불행하게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해 그 얼마나 용감히 싸웠으며, 그 얼마나 비통했던가를 상세하게 증언해 준다. 회고편(懷古篇) · 수난편(受難篇) · 치욕편(取辱篇) · 해방편(解放篇) 등 네 편의 구성을 가진 《청춘승리》는 그 타이틀이 암시하듯이 반세기에 걸친 이 민족의 비극을 구체적 사실과 인물을 통해 형상화시켰다. 주로 광주(光州)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8 · 15 해방과 함께 해피엔딩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록 일파와 옥란 같은 가명(假名)이지만 실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현대 독자들이 좀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물이다. 작가의 문학적인 특성은 흔히 정사적(正史的)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청춘승리》도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장편. 1954년 5월부터 1957년 4월까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연재한 역사소설. 우리 민족사상 일대수난(受難)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소재로 침략자와 우리 사이에 벌어지는 선악(善惡)의 대결을 대하소설(大河小說)로 엮어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애국애족의 심벌로 이순신(李舜臣) · 계월향(桂月香) · 논개(論介) 등 세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호국정신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간악한 왜적의 침략이 7,8년에 걸쳤던 임진왜란 당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이조의 정정(政情)과 여기 겹친 왜적의 포악한 침략상, 전민족적 비극을 리얼하게 그렸다. 모든 작품의 저류에 짙은 낭만정신이 깔려 있듯 《임진왜란》도 전편 속에 민족적인 훈훈한 낭만이 풍기고 있다. 《임진왜란》을 쓰는데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편중한 것은 사실이나 예술성을 돋우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실제로 정사(正史)에는 이순신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을 그는 대담하게 자결(自決)한 것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것은 작가의 말대로 대영웅 이순신장군의 최후가 그토록 패주하는 왜적의 유탄쯤에 싱겁게 죽을 수 없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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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로 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맨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맨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맨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서요 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그 날에 동내(洞内)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다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고 오고 갈 때에도/어머니께서는 기까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푼 눈물만 흘리셨답니다/빨가숭이 어린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그날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스고 뒷동산에 부헝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얘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설게 울어버리었소이다. 울음의 뜻을 도모지 모르면서도요/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열한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흔 날 밤, 맨재터미로 그림자를 보러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길가 짜른가 보랴고/왕의 동무 장난군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後略)」
*홍사용:
시인. 경기도 용인 출생.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 · 소아(笑啞) · 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를 지낸 철유(哲裕)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한식(韓植)이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문단활동으로는 박종화(朴鍾和) · 정백 등 휘문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曙光社)에서 《문우(文友)》를 창간하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中)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를 기획하였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 · 《동명(東明)》 · 《여시(如是)》 · 《불교》 · 《삼천리》 · 《매일신보(每日新報)》 등에 많은 시 · 소설 · 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 〈묘장(墓場)〉 ·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 · 〈붉은 시름〉 등 수편, 소설 〈저승길〉 · 〈뺑덕이네〉 · 〈봉화가 켜질 때〉, 희곡 〈할미꽃〉 · 〈출가(出家)〉 · 〈제석(除夕)〉 외에도 수필 및 평문이 있다. 극단활동으로는 1923년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직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박진(朴珍) · 이소연(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고, 1930년 홍해성(洪海星) · 최승일(崔承一)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써서 직접 연출하는 등 연극활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그 뒤 8 · 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폐환으로 1947년에 죽었다.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감을 형상화한 초기의 사설적(辭說的)인 장시(長詩)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관념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일련의 시작들은 장시를, 그리고 〈봄은 가더이다〉 · 〈해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보인 '어머니'와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향리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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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두견(杜鵑)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金永郞 :
1903. 1. 16 전남 강진~1950. 9. 29.
시인.
김영랑 |
지주인 아버지 종호(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사이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유학중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8·15해방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는 등 우익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평소에 국악이나 아악,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다.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살다가 1950년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죽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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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
소설가. 평남 대동(代同) 출생. 1929년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나와 같은해 정주(定州)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 다시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전학했다. 1930년부터 동요 · 시를 신문에 발표하기 시작, 이듬해 시 《나의 꿈》을 〈동광(西光)〉에 발표, 1933년 시 《1933년 수레바퀴》 등 다수의 작품을 내놓고, 이듬해 숭실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도쿄(東京) 와세다 제2고등학원(早稻田第二高等學院)에 입학했다. 이무렵 도쿄에서 이해랑(李海浪) ∙ 김동원(金東園)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단체인 「학생예술좌(學生藝術座)를 창립, 초기의 소박한 서정시들을 모아 첫시집 《방가(放歌)》(學生藝術座)를 출간했다. 1935년 동인지 《삼사문학(三四文學)》의 동인으로 시와 소설을 발표, 다음해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고 모더니즘의 영향이 짙은 제2시집 《골동품(骨董品)》(學生藝術座)를 발간했다. 이해 동인지 〈창작〉을 발행하고 시와 소설을 발표, 1939년 와세다를 졸업했다. 이 시기에는 〈단층(斷層)〉의 동인으로 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하다가, 첫 단편집 《늪》(漢城圖書, 黃順元短篇集으로 改題, 1940)의 발간을 계기로 소설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별》(人文評論, 1941), 《그늘》(春秋, 1942) 등의 환상적이며 심리적인 경향이 짙은 단편을 발표했다.
1942년 이후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으로 평양에서 향리(鄕里) 빙장리로 소개, 《기러기》 《병든 나비》 《애》 《황노인》 《머리》 《세레나드》 《노새》 《맹산할머니》 《독짓는 늙은이》 등의 단편과 시 《그날》 등 많은 작품을 써두고 해방을 맞았다. 1946년 서울중학교 교사를 역임, 이 무렵 《술》(新天地, 1947), 《목넘이 마을의 개》(開闢, 1948), 장편 《별과 같이 살다》(1947) 등을 발표하고, 해방후의 단편만을 모은 제2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育文社, 1948)을 간행하여 단편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그후 단편 《몰잇군》(1949), 《맹산할머니》(1949), 《노새》(1949), 《기러기》(1950), 《독짓는 늙은이》(1950) 등을 발표, 장편 《별과 같이 살다》(正音社)를 내놓았다. 이해 6 ∙ 25 동란으로 (廣州)를 거쳐 부산(釜山)으로 피난, 단편 《어둠 속에 찍힌 판화(版畫)》(1951), 《곡예사》(1952), 《목숨》(1952), 《과부》(1953), 《여인들》(1953), 《산골아이》(1953) 등과 단편집 《기러기》(明世堂, 1951), 《곡예사》(上同, 1952)를 발간했다. 1953년 장편 《카인의 후예(後裔)》를 〈문예〉에 연재하다가 중단,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장편작가로서의 전신(轉身)을 꾀했다. 이후 《왕모래》(1954), 《사나이》(1954), 《부끄러움》(1955), 《필묵장수》(1955) 등의 단편과 장편 《인간접목(人間接木)》(새가정, 《天使》로 발표, 1955)을 발표했다. 1955년 장편 《카인의 후예》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현대문학〉 추천작품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1956년 〈문학예술〉 추천작품 심사위원에 위촉되고, 이듬해 예술원 회원, 경희대학(慶熙大學) 문리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단편 《잃어버린 사람들》(1956), 《불가사리》(1956), 《산》(1956), 《비바리》(1956), 《내일》(1957), 《소리》(1957) 등과 단편집 《학(鶴)》(中央文化社, 1956), 장편 《인간접목》(上同, 1957)을 내놓았다.
1958년 이후 단편 《다시 내일》 《링반테룽》 《너와 나만의 시간》 《한 벤치에서》 《안개구름 끼다》 《뎃상》을 발표, 또한 단편 《소나기》(유의상 역)가 영국 〈인카운터(ENCOUNTER)〉의 영어비상용국작가 단편콩쿨에 입상 발표되었다. 이무렵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中央文化社, 1958)을 출간, 단편 《과부》가 영화화되었다. 이때까지 발표한 단편으로 한국적 서정성 추구의 한 고전적(古典的) 경지를 개척, 1960년 이후 대표적인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思想界, 1960), 《일월(日月)》(現代文學, 1962. 5.~1964. 12), 《움직이는 성(城)》(現代文學, 1968. 5~1972. 10)을 드러냈다. 그후 단편 《내 고향사람들》(1963), 《비눈》 《달과 발과》(1964) 등을 발표, 또한 이 무렵 단편 《학》 《달과 발과》(1964) 등을 발표, 또한 이무렵 단편 《학》이 미국 계간지〈프레리 쉬너(PRAIRIE SCHOONER)》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思想界社, 60)을 출간하여 예술원상을 수상(61),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단편집 《너와 나만의 시간》(正音社, 64)과 《황순원전집》(倉又社, 全6券)을 발간하고 서울시문화위원에 위촉되었다. 이무렵 단편 《소리그림자》, 《온기있는 파편(破片)》 《어머니가 있는 6월의 대화》 《아내의 눈길》 《조그만 섬마을에서》 《원색 오뚜기》 《수컷퇴화설》 《자연》 《우산을 접으며》 《닥터 장의 경우》 등을 발표, 장편 《일월》로 3 ∙ 1 문화상을 수상하고 그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이후 단편 《피》(1967), 《겨울 개나리》(1967), 《차라리 내 목을》(1967), 《막을 내렸는데》(1968) 등을 내놓고, 《황순원대표작선집》(朝光出版社, 全6券,69)과 장편 《움직이는 성》(三中堂, 1973)을 발간하였다.
1941년 〈인문평론(人文評論)〉에 발표된 초기의 대표작.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찾아 헤매는 한 소년의 마음의 편력(遍歷)을 그린 단편. 어렸을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이 소년의 기억에 남아 있을 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기억에는 없다 할지라도 아니 기억에 없기 때문에 이미지로서의 어머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한다. 그런데 그러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현세에서 실체로 소유하고 싶은 완고한 집념에서 그는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더구나 이 소년은 그 어머니의 모습에 버금갈 만한 여하한 현세적(現世的)이 대상(代償)에도 만족하려 들지 않는다. 어머니의 이미지에 비겨보면 여태까지 이쁘다고 느껴오던 인형도 경각에 미워진다. 그가 알게 된 한 소녀의 아름다움도 어머니의 이미지에 비겨보면 금방 멸시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알뜰하게 구는 누이의 사랑 조차도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녁에 돋는 별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았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그 순간 바로 그 곁에 나란히 돋아나는 별을 누이의 별이라고 생각하자, 그 별에서조차 눈감아 버린다. 서정시적인 단편작가로서의 황순원의 면모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1953년 〈문예〉에 발표한 장편. 8 ∙ 15해방직후 북한의 살벌한 테러리즘을 배경으로 한 작품.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현실고발적(現實告發的) 요소가 가장 짙게 반영되어 있다. 주인공 「박훈」으로부터 어려운 사회적 격동기 속에서 부대끼며 떠밀리며 살지 않으면 안된 한 창백한 지식인의 생태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시대 상황과 상관없는 소박한 「오작녀」의 인간상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격동기를 당하여 방황과 주저를 되풀이하는 「박훈」과는 달리 「오작녀」의 시대상황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대담하고 저돌적이다. 그녀가 체질적으로 간직한 바 원시적 생명력의 발로라할 것이다. 반동지주라는 딱한 처지에 놓인 「박훈」을 번번히 감싸주는 「오작녀」의 저돌적인 헌신은 오로지 그에 대한 「오작녀」의 본능적이고도 맹목적인 애정에서 연유된 것이다. 작품의 구조상으로 볼 때 「오작녀」는 대개의 경우 주인공 「박훈」의 시선을 통해서 관찰되어진다. 그런데도 그녀의 이미지가 보다 강렬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은 이 작품이 시적 이미지를 빚어내는 데서 오히려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작녀」의 모습에서 헌신적이며 인종적인 한국적 여인상의 한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이런점에서 이 작품은 장편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의 단편작가로서의 매력이 두드러지게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사상계〉에 연재한 네번째 장편. 본격적인 장편 작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6 ∙ 25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치르지 않으면 안된 젊은이들의 피해의 양상을 그린 작품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다. 「동호」 「현태」 「숙」 「선우상사」 등을 비롯하여 그 둘레의 모든 사람들이 입게 되는 육체적 정신적 피해는 모두 일차적으로는 전쟁에서 연유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해를 비극으로 의식하는 것은 각자의 자의식의 문제이며, 자의식의 문제란 인간관계를 전제로 할 때에만 생겨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보다 핵심적인 명제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입게 되는 각자의 자의식의 상처의 양상을 구명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매사에 기민하고 선이 굵은 「현태」와 섬세하고 외골수인 「동호」사이의 심리적 갈등관계에서 우월감과 열등의식이 빚어질 수 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열등감이 원인이 되어 「동호」는 본의 아니게 「옥주」와 관계를 맺게 되고, 외골수인 그의 성격으로 하여 「숙」에 대한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살하고 마는 것이다. 매사에 선이 굵은 듯한 「현태」도 실상은 자신의 헛된 우월감이 빚어낸 여러 가지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을 되풀이한다. 결국 그들은 지나치게 과민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각자는 자신의 자의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구명하려는 것이 이 작품의 궁극적인 명제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볼 수 있는 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결국 자기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숙」의 발언은 현대인으로서의 모럴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2년간 〈현대문학〉에 연재한 장편. 주인공 「인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와 비슷한 인물이다. 「인철」 역시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그 병이 싹튼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누이 같은 살가운 이해로써 감싸주는 「다혜」가 있고, 깜찍하고 구김 없는 애정으로 접근해오는 「나미」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들의 이해나 애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들과 어울려 현실 속의 생활인이 되기에는, 그를 언제나 관찰자로 머물게 하는 또 하나의 시선(자의식)이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자기 위장속에 숨어버릴 수도 없고, 「어머니」처럼 종교라는 이름의 행복한 착각 속으로 도피할 수도 없다. 그가 줄곧 기룡을 찾는 것은, 그를 통해서 이제껏 허위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던 자기자신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허위나 과장 없이 자기 자신의 숙명과 대결하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 「인철」은 「나미」네 집 파티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자기가 이제껏 쓰고 있었던 고깔, 즉 가면을 벗어버린다. 자신의 고독을 투철하게 의식한 새로운 삶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68년 〈현대문학〉에 5월호부터 1972년 10월호까지 연재한 장편. 샤머니즘의 연구가인 「민구」, 기독교 교직자인 「성호」, 농학도인 「준태」 등 세 사람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종래의 그의 어느 소설에서보다도 강한 주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전래적(傳來的)인 것과 외래적인 것이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국면에 있어서 이율배반의 양상을 빚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의 상황이며, 낡은 인간상이 등장하는 한국적인 소설과 새로운 인간상이 등장하는 서구적인 소설이 이원적(二元的)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소설의 기본적 성격이다. 이런 이원적 성격은 황순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단편문학이 추구하여 온 과제가 주로 낡은 인간상들이 빚어내는 서정시적인 분위기를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본격적인 장편작가로서의 그의 과제가 주로 현대인으로서의 모럴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이원적인 요인을 하나로 종합하려는 의욕을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샤머니즘으로써 상징이 되는 한국적인 요인과, 기독교로써 상징이 되는 서구적인 요인과의 대결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의 의식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것과 의식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것 사이의 갈등관계는 이 작품에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 작품의 1차적 명제이다.
다음으로 이 작품에는 앞서 말한 바 유형이 다른 세 중심인물들이 각기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음이 없이 각자 별개의 차원에서 각기 별개의 액션들을 펼쳐나간다. 말하자면 각기 고독한 자기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이 반영하는 제2의 명제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한 인간들이 빚어내는 사랑의 양상이 펼쳐진다. 「준태」와 「지연」의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숙명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그들은 각기 사랑할 수 없는 병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독한 현대인이 간직한 바 사랑의 불모성(不毛性)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이 반영하는 또하나의 명제인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의 한국을 종합적인 자리에서 점검(點檢)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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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
소설가. 호적명은 창귀(昌貴). 본명은 시종(始鍾). 경북 경주(慶州) 출생. 대구 계성중학(啓聖中學)에서 2년간 수학, 서울 경신고교(儆新高校)로 전학했으나 중퇴, 박목월(朴木月) · 서정주(徐廷柱) 등과 교우했다.
1934년 시 《백로(白鷺)》로 〈조선일보(朝鮮日報)〉 신춘문예에 입선, 1935년 단편 《화랑(花郎)의 후예(後裔)》가 〈중앙일보(中央日報)〉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상금을 여비삼아 다솔사(多率寺)와 해인사(海印寺) 등으로 전전하며 쓴 작품 《산화(山火)》가 1936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신춘문예에 재차 당선, 이로써 작가적 위치가 굳어졌다. 그 후 《무녀도(巫女圖)》(36), 《바위》(36)등 단편을 발표했으나 곧 다솔사로 다시 들어가 야학(夜學)을 설립, 나중에는 광명학원(光明學院)이란 사립학원으로 발전시켰다.
그후 1940년까지 《황토기(黃土記)》 · 《잉여설(剩餘說)》 · 《찔레꽃》 · 《동구(洞口) 앞길》 · 《혼구(昏衢)》 · 《완미설(玩味說)》 · 《다음 항구(港口)》 등을 계속 발표했으나 일제의 어용문학 단체인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 가입을 거절, 이에 광명학원마저 강제 폐쇄당하였다. 해방 후 좌우투쟁(左右鬪爭)의 와중에서 민족진영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서정주 · 조연현(趙演鉉) · 곽종원(郭鍾元) · 박목월 · 조지훈(趙芝薰) 등과 한국청년문학가협회(韓國青年文學家協會)를 결성하고 그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까지 《윤회설(輪廻說)》(46), 《달》(47), 《혈거부족(穴居部族)》(47), 《역마(驛馬)》(48) 등을 계속 발표하는 한편 좌익문학인과의 이론투쟁에도 선봉에 나서 《순수문학(純粹文學)의 진의(眞意)》 · 《문학(文學)과 자유(自由)의 옹호》 · 《본격문학(本格文學)》과 《제삼세계관(第三世界觀)》 · 《민족문학론(民族文學論)》 등 평론을 발표, 민족진영문학인을 주도하였다. 이 무렵에 제창한 순수문학론과 본격문학(本格文學) 및 신인간주의(新人間主義)는 그의 문학관 및 세계관의 중심을 이루는 이론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은 해방 전에는 신비적 · 허무적 색채가 짙었고, 해방 후 거기에다 인간성의 옹호와 생의 근원적 의의를 탐구하는 주제를 곁들여 사상적 깊이를 더하고 있다.
청년문학가협회 초대회장을 비롯,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 소설분과위원장(49), 동 부위원장(52), 동 대표위원(55), 한국문인협회(韓國文人協會) 부이사장(61), 동 이사장(70) 등을 역임하였으며, 문예지의 창간 육성에도 진력, 1949년 〈문예(文藝)〉의 창간과 함께 그 주간이 되었고, 1968년엔 〈월간문학(月刊文學)》을 창간, 역시 그 주간으로 3년간 일했다. 저서로는 창작집 《무녀도(巫女圖)》(46), 《황토기(黃土記)》(49), 《귀환장정(歸還壯丁)》(50), 《실존무(實存舞)》(58), 《등신불(等身佛)》(63), 장편 《사반의 십자가(十字架)》(57), 평론집 《문학(文學)과 인간(人間)》(48), 《문학개론(文學槪論)》(52), 수필집 《자연(自然)과 인생(人生)》(66), 그리고 전 5권의 《김동리선집(金東里選集)》(68) 등이 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는 《팥죽》(38), 《소년(少年)》(40), 《지연기(紙鳶記)》(47), 《한내마을의 전설(傳說)》(50), 《여수(旅愁)》(55), 《원왕생가(願往生歌)》(55), 《당고개무당》(59), 《천사(天使)》(62), 《심장(心臟)비맞다》(64), 《송추(松湫)에서》(66), 《까치소리》(66), 《석노인(石老人)》(67), 중편 《극락조(極樂鳥)》(68), 장편 《춘추(春秋)》(57), 《이곳에 던져지다》(60), 《해풍(海風)》(63), 그리고 《해바라기》(53), 《꽃》(58), 《광주(光州)에서》(59) 등을 비롯한 수다한 시 · 시조와 평론 · 작가론 등이 있다. 이러한 다각적 업적에 따라 그는 아세아자유문학상(自由文學賞)(55), 예술원상(藝術院賞)(58), 3 · 1 문화상본상(67), 서울시문화상(70) 등을 받았고, 1968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장편. 1955년부터 1956년 사이 〈현대문학〉에 연재되어 1958년 예술원 작품상을 받았다. 이 작품을 완결한 후 작자 스스로가 「작가생활 35년만에 비로소 작품다운 작품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주인공 사반은 2천년 전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유대의 독립투사이며 혈맹단(血盟團)이라는 비밀결사의 수령. 따라서 그는 언제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현세적 · 지상적(地上的) 영광을 추구한다. 그러나 때마침 구세주란 말을 들으면서 나타난 예수는 영혼의 구제, 즉 내세적(來世約) · 천상적(天上的)영광만을 추구함으로써 사반과는 끝내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적 대립을 거듭하다가 두 사람은 다 같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만다.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바로 옆 십자가에서 예수를 향해 「먼저 너 자신부터 구하고 남을 구하라」고 소리친 강도가 사반이다.
이 소설은 예수와 사반의 대립을 통해 영혼과 육체를 스스로 대극점에 놓고 있는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추구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순은 영혼과 육체의 조화로써 해결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그러한 조화의 가능성은 몰락해 가는 서구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동양문화 속에 있다는 시사를 주고 있다. 웅건 장대한 스케일과 빈틈없는 구성, 그리고 정확한 문장 등이 이 작품의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편. 1936년 발표한 그의 초기의 문학적 특색을 가장 집약적으로 구현한 대표작의 하나이다.
주요등장인물은 무당 모화와 딸 낭이, 그리고 낭이의 씨다른 오빠 욱이의 3인이지만 작품의 드라마는 모화와 욱이의 모자 사이에서 벌어진다. 욱이는 어려서 집을 나가 각지를 전전한 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온 청년으로 무당인 어머니 모화와의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이러한 충돌 끝에 욱이는 「예수귀신」을 몰아내려고 치성을 드리는 모화의 칼에 찔려 죽고 그후 모화도 굿을 하던 중 깊은 늪(沼)에 빠져 자살과 다름없는 죽음에 이른다.
모화와 욱이의 충돌은 한국의 토속적인 샤머니즘과 서구의 외래사상인 기독교의 대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그 자체에만 집착하여 모화의 죽음을 단순히 샤머니즘의 패배로만 연결시킬 수는 없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대립할 경우 전자의 패배는 자명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화의 죽음은 기독교가 상징하는 서구문화에 대항하여 현실적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한국고유사상의 역설적인 삶의 한 양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모화의 샤머니즘은 모든 사물이 저마다 혼령을 가졌다고 보는 한국적 범신론(汎神論)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범신론은 한 걸음 나아가 그 혼령을 통해 인간이 천지자연의 만물과 더불어 교류 · 조화할 수 있다는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무녀도》와 쌍벽을 이루는 초기의 대표작.
억쇠와 득보라는 절세의 힘을 타고 난 두 장사는 설희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으르렁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적 고민을 감당치 못해 설희는 어느날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그러자 설희를 잃은 두 장사는 서로 상대방이 설희를 빼돌렸다고 의심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서로가 서로의 분함을 못이겨 황토벌에서 끝없는 싸움을 되풀이한다는 줄거리. 작품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쌍룡의 전설이 소개돼있다.
「등천하려던 황룡 한 쌍이 바로 그 전야에 있어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지라 황제께서 노하시고 벌을 내리사 그들의 여의주를 하늘에 묻으시매 여의주를 잃은 한 쌍의 용이 슬픔에 못이겨 서로 저희들의 머리를 물어뜯어 피를 흘리니 이 피에서 황토곡이 생기니라.」
이 작품에 있어서의 억쇠와 득보는 전설 속의 두 마리 용, 그리고 설희는 여의주에 대응한다. 두 장사도 한 쌍의 용처럼 보람이 있을 리 없는 자학적인 유혈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허무의 심연(深淵)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허무의 세계는 《무녀도》의 신비적 · 몽환적(夢幻的) 세계와 더불어 김동리의 초기문학을 지탱하는 2대 지주(支柱)다.
1963년에 상재한 동명의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 가 남경(南京)에 주둔해 있다가 탈출, 정원사(淨願寺)란 절에 몸을 숨긴 작중의 나는 그곳에서 등신불(等身佛)을 발견한다. 그 등신불은 옛날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한 만적(萬寂)이란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운 것이다. 만적은 어릴 때 모친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異腹兄)을 찾아 자기도 집을 나가 중이 된다. 승려로서 그는 남달리 수도에 정진하는데 어느날 자기가 찾던 이복형이 문둥이가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소신공양을 하게 된다. 그가 1년 동안의 준비 끝에 자기 몸을 불태우던 날엔 여러 가지 이적(異跡)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성불한 만적의 등신불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불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나 할까‥‥‥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움켜잡는 일찌기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가부좌상」이었다. 이러한 만적의 등신불은 부처이면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그대로 지닌 특이한 부처가 아닐 수 없다. 부처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처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만적은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철(徹)함으로써 인간과 부처를 동시에 체현(體現)했다. 여기에 이 작품의 핵심이 있다.
1966년에 발표하여 이듬해 3 · 1 문화상을 받은 작품.
주인공 봉수는 일선에서 수십번 죽음의 고비를 겪은 제대군인이다. 일선에서 끈질기게 살아 남은 것도 고향의 애인 정순에 대한 사랑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대해보니 정순은 속임수에 넘어가 상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집안에는 천식을 앓는 노모가 이상하게도 마을 회나무에서 까치가 울 때마다 발작을 일으켜 죽여 달라는 소리를 연발한다. 그때마다 봉수 또한 형언할 수 없는 살의(殺意)를 느낀다. 이러던 어느날 봉수는 정순에게 상호를 버리고 자기와 결혼할 것을 간청하나 정순의 동생 영숙이 그럴 수 없다는 언니의 편지를 전한다. 봉수는 그때 갑자기 야수적 충동에 휘말려 영숙을 능욕하고 이어 그녀를 목 졸라 죽인다. 죽이기 직전 예의 살의를 유발하는 까치소리가 들렸다. 까치소리와 노모의 발작과 봉수의 살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데도 현실적인 사건의 전개는 그 사이에 거의 필연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그것은 생의 근원적 부조리(不條理), 바꾸어 말하면 허무에 바탕을 둔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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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옆에서
서 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오하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화사(花蛇) /서정주
麝香(사향) 薄荷(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辨)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石油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 슴여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슴여라! 배암.
시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출생. 호는 미당(未棠). 전북 부안군 줄포보통학교 수료 후 서울중앙고보(中央高普) 및 전북 고창고보(高敞高普) 중퇴. 방랑생활. 1931년 고승(高僧) 박한영(朴漢永) 대종사 문하에 입산, 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중앙불교전문강원(中央佛敎專門講院)에 입학, 그 뒤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 1936년 시 《벽(壁)》이 〈동아일보(東亞日報)〉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동인은 김동리(金東里) · 이용희(李用熙) · 오장환(吳章煥) 등이었다. 1938년 화투패를 떼 보고 선을 본 방옥숙(方玉淑)여사와 결혼하고 첫 시집 《화사(花蛇)》를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출간, 그 뒤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황막한 강산을 떠돌고 서울의 여기저기에 기류하다가 만주로 방랑, 한동안 간도(間島)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있었고 용정(龍井)에도 가 있었다. 일제 말기를 고향과 서울에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선문사(宣文社)에서 시집 《귀촉도(歸蜀途)》가 출간되어 시단에 나온 직후부터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그의 시가 이 시집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동아대학 교수, 〈동아일보〉 사회부장 · 문화부장 등에 취임한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약 1년간 역임하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시부위원장에 피임되었다.
1950년 6 · 25 동란이 발발하자 조지훈(趙芝薰) · 이한직(李漢稷)들과 한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대전(大田) · 대구(大邱) 등지로 피난하였다. 전쟁과 함께 그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세를 일으켜 전시(戰時)임시문인단체인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문우들의 보살핌으로 대구의 병원과 부산의 한거(閑居)에서 요양하다가 9 · 28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 1 · 4후퇴와 함께 가족과 더불어 피난열차(避亂列車), 마차 따위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으며 후배들의 알선으로 생활 터전이 마련되어, 그의 중견시(中堅詩) 이후에 가장 중요한 시적 테마가 되었던 「신라(新羅) 체험」을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 영감(靈感)이 확대된 경지에 정착시켰다. 또 전주시대는 자살미수사건도 생긴 반면 동양사상(東洋思想)과의 만남에 의해서1936년 초기에 강렬하게 보인 보들레에르풍(風)의 마성(魔性)이 승화되었다. 그의 전주시대 그리고 광주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대가시(大家詩) 《상리과원(上里果園)》 《무등(無等)을 보며》 등 명작을 산출했는데, 이런 서정주문학의 예술적인 승리는 그의 정신분열증세와 함께 진행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학 강사, 전주고교 교사, 조선대학 부교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환도와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술원 회원,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 동국대학(東國大學) 교수를 역임하면서 1960년 시집 《신라초(新羅抄)》를 출간했다.
그의 동양정신은 전후세대(戰後世代)의 공격을 받은 샤머니즘을 주조(注潮)로 삼으면서도 노장철학(老莊哲學) · 유교 등을 체질화한 뒤 마침내 그가 청년시대부터 경험해 온 불교에서 완숙한 상상력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실상론(實相論)보다는 현상론(現象論) · 연기론(緣起論)에 기울어져서 인연설화(因緣說話)의 오묘한 전생(轉生)에 시의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성사략(韓國星史略)》과 같은 전율적인 학구 정신사를 확인함과 동시에 불교적 영생주의(永生主義)를 고조하였다. 특히 1968년 출판의 시집 《동천(冬天)》은 「범천(梵天)」과 같은 「동천(冬天)」과 자아 사이의 성적(性的) 교감을 발휘한 것으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님은 주무시고》 《선운사 동구(禪雲寺洞口)》 《고요》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海溢)》 《산수유꽃 나무에 말한 비밀》과 같은 비술적(秘術的) 경지를 드러냈다. 시집 《동천》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질마재 신화(神話)》와 같은 어린 시절의 토속적 감동(土俗的感動)을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를 가리켜 「한국 최대 시인」이라는 일반적인 찬양이 압도적이지만 그의 다음 세대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언어 패턴에 의해서는 많은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72년 《서정주문학전집》 전5권이 나오면서 서정주의 문학사적 위치는 거대한 것으로 공고해졌다.
시. 1938년에 낸 첫 시집 《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발표된 것은 동인지 〈시인부락〉이므로 1, 2년 앞서서일 것이다. 서정주 초기시의 인상적인 작품으로 여기서는 서구 세기말적(世紀末的) 보들레에르의 마성(魔性)이 그의 힘찬 원생주의(原生主義)와 이상적으로 조화된 「지옥의 시」라고 활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초기시에서도 「사향박하(麝香薄荷)의 뒤안길이다」 「이브를 꾀어 낸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불게 타오르는」 따위의 이국적 정취에도 불구하고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 · · · · · 」의 결귀(結句)가 보여 주는 토속적 이미지로 환원하고 있다. 이 시는 명시임에도 불구하고 불균형(不均衡)으로 쏟아진 낭자한 혈상(血狀)의 사디즘이 보이며, 특히 「석유(石油) 먹은 듯 · · · · · · 석유 먹는 듯 · · · · · · 가뿐 숨결이야」의 감동은 그의 초기시를 낸 그 시대의 암울한 식민지시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 표면적으로 《화사》는 남성적 · 야만적 유미주의 시라고 이해될 수 있으나 그것은 시인의 의식이 받아들이고 있던 그 당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여자의 「피 먹은」 입술에 스민 뱀을 통한 원한이 깃들인 관능이 이 시의 선율을 이루고 있다
시. 1955년에 출간한 시집 《서정주시선(徐廷柱詩選)》에 수록되어 전후(戰後)의 검인정 중고등교과서를 통해서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자연 전체가 봄부터 여름 · 가을까지 동원되어 마침내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운다는 자연계 운동의 과정을 설화체(說話體)로 묘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쉽사리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모두 4련(聯)으로 된 간결하고 절실한 이 명시는 첫련에서 봄에 소쩍새가 우는 일까지도 가을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한 자연계의 작업임을 일깨우고, 둘째 연에서 여름의 천둥소리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먹구름 속에서 극성으로 울었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강조한다. 이런 자연계의 작업과 함께 인간은 그 꽃을 인간과의 혈연관계로 설정해서 가장 간절한 근친여성으로 그 꽃을 기다리다가 만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그 꽃을 피우려고 바로 어젯밤에도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인간도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에 이르러 자연의 온갖 작업과 인간의 온갖 그리움 · 기다림이 하나가 되어서 국화가 완성된다는 창조적 발견을 실현하고 있다.
시. 1955년에 낸 시집 《서정주 시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시인이 6 · 25 동란을 통해 깊은 내상(内傷)을 받은 뒤에 기적적으로 얻어낸 범신론적 낙천주의와 자연을 혈연적으로 대하는 커다란 사랑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이 시를 통해서 그의 초기시의 열정, 해방시의 정형(定型)을 초극해서 서정주의 대가시적(大家詩的) 좌표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일종의 산문시 형태를 취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의 한 귀절 「……융융(隆隆)한 흐름이다」가 그대로 설명하고 있듯이 시의 전편에 흐르는 도도한 자세를 위한 방법이다. 과수원의 꽃이 만발한 정경(情景)을 그의 동양적 고자세의 사랑을 통해서 자세하고 광활하게 묘사함으로써 성공한 시다. 꽃의 향기를 큰 강의 상류(上流)에 비유하고 꽃송이 하나하나를 조카딸이나 조카딸의 친구로 비유하는 희열과 순진 무구의 경지로 이 시는 일어나서, 과수원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것에 어울리는 일로 이어진다. 또 거기에 먼 산과 낮, 저녁놀들이 모여서 어둠을 이룰 때까지의 장엄한 과정을 통해서 사람이 살아 가는 지혜와 사랑을 「우리 어린것들에게」 베풀고 있다.
시. 1960년에 출간한 시집 《신라초(新羅抄)》에 수록되어 있으나 1950년대 후반기에 발표된, 그의 신라체험의 대표적이다. 이 시는 선덕여왕에 대한 천민 지귀(志鬼)의 짝사랑 설화를 채용해서 선덕여왕의 아미타(阿彌陀)사상을 격조있는 정감으로 유로시키고 있다. 여왕을 짝사랑하다가 잠든 지귀의 가슴 위에 여왕이 손수 팔찌를 빼놓는다는 신라적 로만스에 현세를 곧 극락으로 확신하는 신라불교를 통해서 사후(死後) 욕계(欲界)에 태어난다는 겸손한 여왕의 내세관(來世觀)이 어울려서 괄목할 만한 신라정신을 발휘시키고 있다. 「피」 「살」 따위의 짙은 육감이 국법(國法)을 초월한 사랑을 가지고 자연계의 「구름」이 엉기고 「비」가 터를 잡는 범신론적 교감과 대응하여 시의 율동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신라정신은 《신라초》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전후문학이 저항을 일삼을 때에도 동요없이 그의 사상을 형성시켰다. 그의 시작(詩作)을 위한 기본자료로서 《삼국유사》 등의 고전이 있지만 그것들을 새롭게 육화(肉化)시키는 그의 선천적인 기교의 절묘함은 그의 위대성에게 기인한다. 그는 이런 신라정신을 완료한 뒤 그의 불교적 영생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시. 1968년에 나온 시집 《동천》에 수록된 명작이다. 아마도 서정주는 이 시를 어느 시보다도 자애(自愛)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어느 시가 대표작이고 어느 시가 범작(凡作)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초기시의 일부가 미완성 조사(措辭)를 약간 보일 따름, 그 이후의 시는 발표 될 때마다 시단의 중요한 위치를 자리잡게 해 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작은 5행시 《동천》은 그가 얻어낸 가장 완성된 형태이며 완성된 사상시(思想詩)라고 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동요나 경쾌한 연가(戀歌)의 한 도막과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자세히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서정주 정신사가 이룬 대형(大型)의 이디엄을 발견하게 된다. 임의 눈썹을 하늘에 심어 놓는다. 그 눈썹을 겨울의 새가 알고 비껴 날아간다는 것이 이 시의 개요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사물에 상상을 부여하지 않고 상상적 사물을 실재(實在)로 이끌어 냄으로써 불교적 관념세계를 현실에 부착시킨다. 이런 현상은 시접 《동천》이나 그 이후의 근작시가 나타내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인연무진(因緣無盡)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그는 인연사상으로 허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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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노루 /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
한국시단에서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시인으로, 향토적 서정을 민요가락에 담담하고 소박하게 담아냈다. 본명은 영종(泳鍾).
태어난 지 100일 만에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으로 이사가 그곳에서 자랐다. 1933년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그해 〈신가정〉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바 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인과 어울려 지냈으며, 1946년경부터 계성중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이어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문필가협회 상임위원,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문총구국대 총무, 공군종군문인단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57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로 있다가 1968년 회장이 되었다. 한때 '산아방'·'창조사' 등의 출판사를 운영했고,〈아동〉·〈동화〉·〈여학생〉·〈시문학〉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1973년 시전문지 〈심상 心象〉을 펴냈다.
[문학세계]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산그늘〉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청록파). 이어 발표한시들은 초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는 시집 〈청록집〉(1946)·〈산도화 山桃花〉(1955)를 펴낸 시기이며, 중기는 시집 〈난(蘭)·기타〉(1959)·〈청담 晴曇〉(1964)을 펴낸 시기이고, 후기는 〈경상도의 가랑잎〉(1968)을 펴낸 이후의 시기이다. 초기에는 자연을 보는 입장에 서 있고 후기에는 사회현실을 인식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있는데, 소재가 자연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바뀌고 표현방법도 객관적인 스케치에서 주관적내지 자아응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보는 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했다면 후기에는 '느낀 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했고,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동화내지 화해를 꾀했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어긋남과 비틀어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연을 노래하고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을 그리는데 힘썼던시적 태도, 율격과 간결미에 치중했던 시적방법은 시집 〈난·기타〉에 와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시집에 실린 〈넥타이를 매면서〉·〈모일〉·〈서가〉·〈정원〉 등을 보면, 초기시보다 운율과 시각적 효과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시적 대상도 자연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으로바뀌어 생활인의 아픔과 소시민의 고달픔을 읊고 있다.따라서 〈난·기타〉는 〈청록집〉이나 〈산도화〉에서 보여주었던 '동화적 욕구'의 좌절을 알리는 첫 신호라할 수 있다. 대표작 〈나그네〉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 玩花衫〉에 화답한 것으로서, 초기 시가 그렇듯 향토성이 짙고 민요가락을 빌려 섬세한 서정을 읊고 있다.
그의 시관(詩觀), 시 기능론, 시 방법론은 전통적인 것에 아주 가깝다. 그의 시는 "시는기껏 시인 자신을 정화하고 구제해주는 것"이라는 시효능론에 뿌리를 두고있으며, 시는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고 읽히고 에네르기화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는 신념 또는 철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양식이라는 통념을 완강하게 뿌리치고, 한편의 시를 쓰는 과정이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나칠 만큼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밖에 평론으로 〈동요교육론〉(새교육, 1949. 9)·〈시와 관조의 세계〉(세대, 1963.11)·〈자전적 시론〉(사상계, 1965.8)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구름에 달가듯이〉(1975)·〈박목월시집〉(1983)·〈달빛에 목선가듯〉(1986)·〈소금에 빛나는 아침에〉(1987)등과 동시집으로 〈동시집〉(1946)·〈산새알 물새알〉(1962)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시〉(1956)·〈여인의 서(書)〉(1959)·〈밤에 쓴 인생론〉(1966) 등이 있다. 1955년 아세아 자유문학상, 196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 197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 중학교 재학 중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 결성,
조선 문필가 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 문학가 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 시인 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1946』(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구름에 달 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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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 경남 충무(忠武) 출생.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 중퇴. 마산대학(馬山大學) · 경북대학(慶北大學)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 시 《산악(山嶽)》을 〈백민(白民)〉에, 시 《사(蛇)》를 〈문예(文藝)〉에 발표하였으며, 주로 〈문학예술(文學藝術)〉 · 〈현대문학(現代文學)〉 · 〈사상계(思想界)〉 · 〈현대시학(現代詩學)〉 등에서 창작과 평론 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특이하여 그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사물(事物)로 비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인식(認識)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고, 그의 언어는 인식을 위한 연장이다. 그는 인식의 시인이다. 초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벌여 온 작업의 전과정(全過程)에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경우를 빼고는 인식이 아닌 때가 없다. 거기서만은 이례적(異例的)으로 그는 의미의 시인이다. 《타령조(打令調)》에서도 그의 언어는 상당히 의미의 전달을 담당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타령조》의 도처에는 인식을 위한 연장으로서의 언어가 스며 있다. 그래서 《타령조》는 그가 끝내 의미의 시인으로서는 존립하기 힘든 시인임을 밝힌 증언이기도 하다. 인식을 위한 연장으로서의 언어가 담당하는 것은 사물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서 본질을 발견하고 잡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본질(本質)이란 것은 의미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언어자체가 잡아내지 못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다. 그리하여 그의 언어는 이미지 구성(構成)의 자료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럼으로써 언어가 언어의 자리를 떠나고 이미지가 언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뜻에서 그는 이미지의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2년에 발표한 《처용단장 · 제1부(處容斷章 · 第一部)》에는 그의 언어인 이미지가 가장 밀도(密度)있게 나타나 있다. 그는 이미지의 추구로서 우리 시의 표현이 조형적(造型的) 리얼리티를 가지게 한 시인이다. 1947년에 낸 첫시집 《구름과 장미(薔薇)》 이후 《늪(沼)》(49), 《기(旗)》(51),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59), 《타령조 · 기타(打令調 · 其他)》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밖에도 시론집(詩論集) 등 《한국현대시형태론(韓國現代詩形態論)》과 편저로 《세계현대시감상(世界現代詩鑑賞)》을 발간했다. 1958년에는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韓國詩人協會賞)」을 수상하였으며, 동협회(同協會)의 중앙위원으로도 있다.
제4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少女)의 죽음》에 수록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의미(意味)가 되고 싶다」 이 작품은 그가 초기부터 인식의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여기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물이다. 사물이므로 그의 인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는 사람도 인식의 프로세스를 통과하지 않으면 별로 쓸모 있는 것이 못된다. 그 프로세스를 통과함으로써 사람의 본질은 밝혀지고 그럼으로써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가지는 이름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말 이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이름이 이 작품에선 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사람은 아마도 사랑의 의미로 해서 가득찬 사람일 것이다.
「한국 시인협회상」 제2회(58) 수상시집.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소련제(製) 탄환(彈丸)은/땅바닥에/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순간/바숴진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피가/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舖道)를 적시며 흘렀다」 이 작품은 철저한 의미의 시다. 이 의미란 그것이 어떤 구체적, 현실적인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설명이 필요없이 쉽게 알 수 있는 산문성(散文性)의 문장이 서술하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헝거리에 일어난 자유의 물결을 총검으로 유린하고 억압하는 소련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비판과 고발과 항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체가 서술위주의 산문성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요소요소에 적절한 의미를 박아 넣음으로써 충분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든 그가 자유를 위해서는 전투적인 의미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다.
연작시.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1년간 〈현대시학(現代詩學)〉에 연재한 연작시 가운데 하나.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저녁이 오고 있었다/잡혀 온 산새의 눈은/꿈을 꾸고 있었다/눈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붉은 열매/봄은 한잎 두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비 개인 해안통(海岸通)으로 달리고 있었다/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雜木林) 너머 보리밭 위에 깔고/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인식에 따르는 표현을 이미지로써 한다. 그것은 그의 전 작품을 일관하는 불변의 기법이다. 그 이미지가 가장 밀도 있게 나타나 있는 것이 《처용단장 · 제일부(處容斷章 · 第一部)》다. 그 가운데 하나인 「 Ⅰ 의 Ⅻ」의 경우는 그 전문이 오직 이미지를 자아내는 데 필요한 자료가 되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 Ⅰ 의 Ⅻ」은 이미지의 덩어리가 되어 있다. 작품 하나가 전부 이미지의 덩어리가 될 때 그 작품은 거의 의미하는 것이 없어진다. 이미지의 덩어리가 됨으로 해서 설명적 요소를 지닐 틈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미지는 스스로 논리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Ⅰ 의 Ⅻ」 은 그러한 뜻에서 끝내 무의미의 상태에 이르거나 적어도 이르려고 하는 지향을 보인 작품이다.
소설가. 경남 동래군(東來郡) 북면 남산리에서 기수(基壽)의 장남으로 출생. 호는 요산(樂山). 어려서 서당에 다니다가 명정학교(明正學校)를 거쳐, 1928년 동래고보(東來高普) 졸업. 그 무렵부터 〈동아일보(東亞日報)〉 학예란에 시를 투고하면서 일제(日帝)의 한국인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그해 11월 「조선인교육연맹」의 조직을 계획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일본 토오쿄오에 가서 외국어를 수학하며 문학수업에 몰두, 193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일고등학원(第一高等學園) 문과에 입학,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는 한편 국내 잡지에 《구제사업(救濟事業)》이라는 단편을 기고했으나 문제가 되어 전문 삭제되었다. 1935년에 귀국, 양산(陽山) 농민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1933년 남해(南海)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교단에 서면서 농민문학에 뜻을 굳혔다.
1936년 데뷔작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朝鮮日報)〉 신춘문예에 당선됨을 계기로 《옥심이》(36), 《항진기(抗進記)》(37), 《기로(岐路)》(38), 《그러한 남편》(38), 《낙일홍(落日紅)》(40), 《추산당(秋山堂)과 곁사람들》(40), 《월광한(月光恨)》(40) 등을 발표했다. 1940년 재직중인 남명(南明)공립보통학교의 교사직을 사퇴,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한 얼마 뒤 다시 일경에 피체, 민족지 〈조선일보〉 ·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붓을 꺾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관계하면서 〈민주신보(民主新報)〉 논설위원을 역임, 1947년부터 다시 교직생활로 돌아갔다. 그 뒤 이시영(李始榮)의 전기 《성재소전(省齋小傳)》(51)을 쓰고, 그동안의 작품을 모아 첫 창작집 《낙일홍(落日紅)》(56)을 출간했다.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좀처럼 작품 발표가 없던 중, 1966년 월간지 〈문학(文學)〉에 《모래톱 이야기》의 발표를 기점으로 주목할 만한 문단복귀를 실현했다.
그 뒤로 《축생도(畜生道)》(68), 《수라도(修羅道)》(69), 《뒷기미 나루》(69), 《인간단지(人間團地)》(70), 《산거족(山居族)》(71), 《사밧재》(71) 등의 작품을 발표한 5년 동안 한국문학의 큰 줄기를 새로이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낙동강 일대에 깔린 민중의 소리를 생기있는 문체로 소설화하는 작업이다. 역사 속에 흐르는 민중의 피맺힌 소리를 집단사회의 실태로서뿐 아니라, 인간구원의 보편 타당한 문제로 들고 나옴으로써 민중문학(民衆文學)의 한 정통(正統)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리얼리즘소설의 정공법으로 소설이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음이 그 사정을 말해 준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로 제6회 한국문학상(韓國文學賞)과 부산시문화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71년 11월 작품 《산거족》으로 제3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 그해 12월에 제2창작집 《인간단지(人間團地)》를 발간하여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는 16편의 역작이 수록돼 있다. 《모래톱 이야기》 · 《과정(過程)》 · 《곰》 · 《유채(油菜)》 · 《생도》 · 《제3병동》 · 《수라도》 《굴살이》 · 《뒷기미 나루》 · 《지옥변(地獄變)》 · 《독메》 · 《인간단지》 · 《어둠 속에서》 · 《산거족》 · 《사밧재》 · 《산서동 뒷이야기》 등 어느 작품에나 삶을 줄기차게 긍정하는 민중의 자세가 있고, 현실의 모순과 대결해 나가는 생존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단편소설. 1966년 발표. 낙동강 하류의 어느 외진 모래톱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로 소수 유력자와 선량한 다수 민중 사이의 동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조마이섬 사람들은 땅이 없는 주민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외세의 압제와 제도의 불합리로 말미암아 오늘에 이르도록 제대로 소유의 토지 혜택을 입어 본 일이 없어 땅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 건우네 집만 해도 그 비극의 상처를 씻어 버릴 수가 없다. 아버지는 삼치잡이에 나가 죽고, 할아버지 갈밭새영감이 살고자 아무리 발버둥쳐도 살 길은 막연하다. 절박한 현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마철이 닥친다. 둑을 파헤치지 않고는 섬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된 위급한 순간에 소위 유력자의 앞잡이 청년들이 들이닥친다. 엉터리 둑을 막아 놓고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무리들의 소행에 화가 치민 갈밭새영감은 청년 한 사람을 탁류에 던진다. 결국 민중의 정당한 의사를 반영한 갈밭새영감은 법망에 걸려 들게 되고, 모래 톱은 황폐해진 채 나룻배 통학생인 건우마저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이 작품은 민중의 소리를 외면해 온 종래의 문학풍조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촉구한다.
중편소설. 1969년도에 발표하여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구한 말(舊韓末)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許進士)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실감있게 표현된다. 시할아버지 허진사는 한일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西間島)에서 유골로 돌아오고, 시동생 밀양양반은 3 · 1운동 때 일제에 죽음을 당하고, 일제에 반행해 온 시아버지 오봉선생은 고등계 형사의 미행을 당하다가 태평양전쟁이 고비에 다다를 무렵 이른바 한산도사건이라는 애국지사 박해사건(迫害事件)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어 그 여독으로 일찍 타계한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학병을 피해 숨어다녀야 했고, 집안 일을 도우며 양딸 구실을 하던 옥이마저 전쟁 말기에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로 끌려 갈 뻔한다. 6남매의 어머니로 며느리와 손자를 거느리게 된 수난의 여인상 가야부인은 8 · 15해방을 맞이하고도 신통한 일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이름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한 문제작의 하나다.
단편. 1969년에 발표. P교도소의 모범여죄수 심속득의 필연적인 저항(抵抗)을 그려 보인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결혼하여 낙동강 상류 뒷기미 나루의 뱃사공이 된 그녀의 궁핍한 삶의 현장이 묘사되고 악바리같이 일을 해나가도 운명이 개척되지 않는 참담한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남편 춘식은 징용에 끌려 간 뒤 소식이 없고 몸서리치게 설움만 받아 온 순한 백성들과 고통스런 생활을 꾸려 나간다. 농민천시 정책은 노동의 댓가를 허락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날로 가혹한 시련을 강요할 뿐이다. 풍년 기근(豊年饑饉) 속에서 농민들의 삶은 흡사 유형지(流刑地)를 상기하게 한다. 뒤늦게야 고향에 돌아온 춘식이는 진종일 노를 젓고, 부인 속득이는 무거운 볏단이며 채소를 여나르는 노동에 시달리나 그 시련을 오히려 달게 받는다. 하루는 난데없는 밤 손님들의 요구에 배를 젓다가 총상을 입고 희생된다. 더우기 전쟁이 가져온 불행은 시아버지와 속득을 사정없이 짓밟는다. 수사기관에서 풀려난 속득은 할 수 없이 나룻배를 젓는 사공이 되고, 엉큼한 마음을 품은 김씨를 어느날 밤 처치하는 우연한 사고를 저질러 사형수가 되며, 시아버지 박노인 역시 자살로 최후를 마친다. 착한 민중의 수난상(受難相)을 극화한 작품이다.
1970년에 발표한 대표작의 하나. 반인간적이요, 반사회적 · 반민족적인 상황에 대한 문학적 저항의 압권(壓卷)이라 할 이 작품은 나환자 수용소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유원(自由園) 원장 박성일의 비행을 보다 못해 우중신 노인을 비롯한 나환자 2백여명이 박원장의 부정 사실을 낱낱이 폭로한 진정서를 당국에 내어 그의 처벌을 호소함으로써 문제는 야기된다. 부랑아 수양소인 희망원 청년들의 격분을 산 것은 물론이지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우중신 노인은 자칭 애국 사업가를 용납할 수 없어 끝까지 버틴다. 그러나 우노인 일행은 국립나환자 수용소에 감금되는 몸이 된다. 세도가의 행패에 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우노인은 조국을 잃은 식민지 청년으로 일찌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의 길을 걸어왔건만 가정적인 불운 속에서 아내가 문둥병을 앓게 되고, 그 역시 환자가 된 터였다. 박원장의 비인도적인 처사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우노인은 정치지배(政治支配)를 받지 않는 새로운 공화국 「인간단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필생의 소원을 성취한 듯했으나 이웃 부락민들의 습격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체제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복지사회(福祉社會)를 모색해본 민중의지의 항장(抗章)이라 할 만하다.
1971년 초에 발표하여 제3회 「예술문화상」을 받은 사회 부조리에 항거한 작품. 《인간단지》의 우중신 노인과 같은 민중의지(民衆意志)의 화신(化身) 황거칠이 등장한다. 마삿등 4백여 세대 따라지 주민들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중늙은이 황거칠은 주민의 생명수인 물〔食水〕을 확보하고자 갖은 횡포와 끝까지 싸운다. 산에서 물을 끌어 수도 시설을 갖춘 황거칠은 조국에 목숨을 바친 선대(先代)의 교훈을 살려 사회정의의 수호에 언제나 앞장 선다. 불의에 굽힘이 없이 이웃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선 그의 마을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친다. 마삿등의 젖줄기인 사설수도(私説水道)를 철거하려는 유력자 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임야 일대가 불하되어 마삿등은 다시금 물없는 지대가 되고 만다. 울분을 안공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는 새우물을 판다. 그러나 두번째 수도공사 역시 제 땅을 못 가진 주민들에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다. 국유(國有)의 것은 언제나 유력자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세태 탓이다. 법적인 사설수도 철거조치에 거듭 수모를 당하면서도 황거칠에게는 정의감이 남아있어 이번엔 목축지로 근대화한다는 산기슭의 부정불하 취소와 수도철거 반대의 기치를 좀처럼 내릴 줄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그러한 민중에 의하여 창조된다고도 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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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자 · 시인.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아버지는 헌영(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4남매 중 둘째아들이며,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제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작품활동은 1939년 4월 《문장(文章)》지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같은해 11월 〈승무(僧舞)〉, 1940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풍의상〉에서는 전아한 한국의 여인상을 표현하였고, 〈승무〉에서는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봉황수〉에서는 주권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조지훈의 작품경향은 《청록집(青鹿集)》(1946), 《풀잎단장(斷章)》(1952),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1956)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 1〉 · 〈고사 2〉 · 〈낙화(落花)〉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시편에 담긴 불교적 인간의식은 사상적으로 심화되지 않고 한유(閑悠)의 미에 머무르고 있기는 하나,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높은 자연인식 및 삶의 융합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풀잎단장》과 《조지훈시선》은 《청록집》에서 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 종래의 《청록집》 등에서 나타난 시 세계와는 달리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으로는 〈역사앞에서〉 · 〈다부원(多富院)에서〉 · 〈패강무정〉 들이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국면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시론집 《시의 원리》(1959), 수필집 《시와 인생》(1959),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된 추천작품. 섬세한 미의식(美意識)과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약 250편이나 되는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시인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동양의 정적(靜的) 미감(美感)을 불교세계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빈 대(臺)에 황촛(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승무를 추는 여승(女僧)의 동작과 그 선(線)의 아름다움을 애절하고 신비한 정감(情感)으로 그리고 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에서 한국적인 정한(情恨)과 불교적인 선감각(禪感覺)을 느끼게 한다. 또 전편을 통하여 고전적인 시의 리듬과 외형률(外形律)의 조화를 꾀하기 위해 많은 형용사와 파생적(派生的) 부사(副詞)를 도입했는가 하면 '나빌레라' '서러워라' '별빛이라' 등의 고전적인 어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는 〈고풍의상(古風衣裳)〉과 나란히 초기시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1, 2 두 편이 있다.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를 때 쓴 작품으로 불교적 선감각이 압축된 시형(詩形)에 담겨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고오운 상좌 아이도/잠이 들었다//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서역만리(西域萬里) 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 〈고사1〉의 전문(全文). 이 시에 대해서 작자 스스로 이렇게 해설을 하고 있다. “이 시는 선사상(禪思想)에서 피어난 것이거니와…… 시는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요, 대상을 내적(內的) 생명(生命)에서 감수하는 것이므로 모두 하나의 범생명(汎生命) 또는 범신론(汎神論)의 세계에 절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시의 원리》(p. 177)" 작가의 주장과 같이 과연 이 시에서 선사상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어느 평자(評者)는 부정적으로 논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불교적 세계가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고사에서든지 볼 수 있는 단조롭고 고요한·순간의 풍경이 불교적 세계의 상징으로 나타나 7 · 5(調)의 형식으로 유려하게 읊어진다. 마지막 시행(詩行) '모란이 진다'라는 구절은 이 시의 긴장감을 최고도로 조성하여 완벽한 시의 미(美)를 이루고 있다.
작가가 산에서 내려와 낙향해 있으면서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지은 시. 청록파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목월(木月)에게' 라는 헌사(獻詞)가 가리키듯이 이 시는 목월의 유명한 시 〈나그네〉와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목월의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표표히 유랑하는 외로운 나그네의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나그네〉의 "길은 외줄기/남도삼백리(南道三百里)", 〈완화삼〉의 "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리(七百里)"는 다 같이 한국적 고전세계의 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나그네〉가 순수한 한국적 감성(感性)에서 발생된 것이라면, 〈완화삼〉은 다분히 한시(漢詩)에서 그 발상을 얻었다 할 것이다."술익는 강마을의/저녁 노을이어"라는 대목이 "주숙강촌난석휘(酒孰江村暖夕暉)"의 한시적 발상이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하다. 마지막 연의 "다정하고 한 많음도/병인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라는 구절은 다분히 시조적(時調的)인 가락과 한국적인 한(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시집 《여운(餘韻)》에 수록되어 있는 후기작품.
"무르익은 과실이/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이 종소리는/허공에서 떨어진다.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다시 엉기고 맴돌아/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치며 종소리는/웅 웅 웅 웅 웅……/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 오른다. 아득한 것/종소리 위에 꽃방석을/깔고 앉아 웃음짓는 사람아/죽는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공간을/조용히 흔드는/종소리/너 향기로운/과실이여!" 전문(全文).
이 작품은 불교사상의 기본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허공, 즉 무(無)에서 하나의 생명이 지상으로 떨어지며, 그 생명은 찰나적인 속도로 사멸하고, 그러나 다시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삼십삼천을 날아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약속한다. 따라서 '죽은자'와 '산 자'가 허망한 공간을 메우고 있는 이 우주, 즉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우주는 불타의 자비로 이룩된 '향기로운 과실' 이란 것이다. 불교사상을 통하여 허망한 생명 가운데서 영원성을 감지(感知)할 수 있는 시다. 이 시의 불교적 원리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바지만, 종소리에서 그것을 체득(體得)하는 작자의 시 정신은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다.
1968년에 쓴 작품. 《청록집 이후(青綠集以後)》에 수록되어 있다. 병고(病苦)와 싸우는 작가의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어 절명시(絶命詩)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라고 시작되는 첫 연은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숙명적인 병마(病魔)의 그림자를 읊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일 동안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회한없이 죽음을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이 노래 부른다. “생애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지옥의 형벌이야/있다손 치더라도/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느라면" 질병은 선뜻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고 병마에 지친 인간이 죽음을 기다리면 심술궂게 도망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 "잘 가게 이 친구/생각나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라고 노래한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없이 풀려진 형식으로 쓰여져 있지만 죽음에 임박하여 슬퍼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즉 작가의 달관된 정신을 과장없이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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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경기도 안성(安城)출생. 호는 혜산(兮山). 1939년 〈문장(文章))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 《낙엽송》, 이듬해 《의(蟻)》 · 《들국화》가 각각 추천되었다. 그 후 《도봉(道峰)》 · 《별》 · 《푸른 하늘 아래》 · 《설악부〔雪岳賦〕》 · 《장미의 노래》 등 수작을 발표하였다. 이 시인을 시단에 내보내면서 정지용〔鄭芝溶〕은 ⌈박군의 시적 체취는 무슨 삼림(森林)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新自然)을 소개하여 선자는 법열 이상입니다⌋ 라고 극찬했다. 작품을 통해 나타난 초기의 경향은 자연을 형이상적 차원(次元)으로 일원화시켜 관조적이기보다 감각적으로 파악한다.
특히 초기의 시 《청록집(青鹿集)》 속에 포함된 시를 특징지은 감각적인 인식방법과 비유는 이미 있어 온 관조적이며 기교일변도의 시들에 대한 반발임을 고려에 넣을 때 분명 당시로서는 새로움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결합된 감각적 발상은 순전히 외부에서 온 새로운 관심의 확대이며, 이런 점에서 청록파(青鹿派) 시인인 박목월(朴木月)과 조지훈(趙芝薰)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자연은 목자적인 세계가 아니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윤리의식이 밑바탕이 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자연은 그의 종교적 신앙과 일체화하였고, 민족적 현실에 대한 굳은 의지와 감개로 물들어 있다. 이러한 바탕은 그 후 《해》 · 《오도(午禱)》 · 《거미와 성좌(星座)》 · 《인간밀림(人間密林)》 · 《하얀날개》 등 시집의 세계와 그리고 최근의 《사도행전(使徒行傳)》 · 《수석열전(水石列傳)》의 세계를 특징짓는 지배적인 양식이 되어 왔다. 그것은 청원적(請願的)인 감정상태의 직핍(直逼), 지고(至高)한 대상에 대한 감동 및 긴장의 표출로 나타난다. 민요형태가 지닌 정조유출의 유지를 위한 반복의 형태, 정서표출의 감탄어 등과 같은 서정적 자아(自我)의 음악적인 어법 및 그 산문성은 그 이전 조선 가사를 지배한 산문성과 사슬시조의 사슬조와 무관하지 않다.
그 뒤에 나온 《해》가 그 단적인 예증이다. 그러나 《오도》 · 《거미와 성좌》에 이르면서 현실파악의 방법은 보다 현실에 밀착된 정신의 경험으로 발전한다. 말하자면 이원적 질서에의 자각이다. 이러한 이원적〔二元的〕질서의 사상이 굳어짐에 따라 그의 시는 현실시〔現實時〕의 면모를 띄게 된다. 따라서 정적〔靜的〕인 이미지인 산은 바다와 같은 보다 넓은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발전한다. 4 · 19 혁명을 구가하는 대부분의 시가 그 이전의 시보다 호소력을 갖는 것은 즉물적이며 그 기저에 날카로운 현실감각이 비판기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시의 기저가 되어 온 자연과의 교감은 《청록집》 · 《해》가 보여준 일차원적(一次元的)인 순진(純眞)의 세계에서 《오도》이후의 경험세계로 변모 발전하였고, 다시 순진과 경험의 종합이 근자에 시도된 《사도행전》 · 《수석열전》의 세계로서 나타났다. 《사도행전》과 같이 순진의 노래가 사도의 뜨거운 신앙적인 체험과 내밀(內密)의 짝이 될 때 좌절은 초월적인 계기로 긍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수석열전》에 와서 수석(水石)처럼 차고 굳은 의지를 다짐한다. 문총 중앙위원 · 한국문학가협회 시(時)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에는 제4회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한때 잡지 〈학생계(學生界)〉를 주간하였고 연세대학 · 서울대학 문리대 · 국학대학 ·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시집 외에 《박두진 시선(朴斗鎭時選)》, 수필집 《시인의 고향》 · 《생각하는 갈대》, 시론집 《시(時)와 사랑)》 · 《한국현대시론(韓國現代時論)》 등이 있다.
묘지송[墓地頌] - 박두진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추천 시. 1939년 5월호 〈문장(文章)〉에 《향현(香峴)》과 함께 발표. 묘지의 정서를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 준 수작(秀作)으로 전연 4행으로 이루어진다. 제 1행에서 북쪽이기는 하지만 잘 자란 금잔디 가운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게 있음을, 제 2행은 무덤 속의 촉루(觸髏)들을 동정(同情) · 공감(共感)으로 친화(親和)했고, 그것을 색깔과 향기와 노래로 투시, 관조했다. 제 3행에 화서 영원한 생명, 죽음에서 생명, 죽음에서 부활을 갖는 그러한 염원을 노래하였고, 제 4행에 이르러 금잔디 포근한 곳에 할미꽃과 새소리에 싸여 누워있는 무덤의 외경을 불멸의 종교적인 믿음으로 노래했다. 햇볕과 죽음과 촉루와 무덤에서 동경 · 영원 · 조화를 촉수한 작자의 인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단순하지 않은 세계를, 그 형식에 있어서 가장 간결 · 단순하게 표현하여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삐이 삐이 배뱃종! 뱃종!」의 멧새소리위 묘사(描寫)는 실감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으며, 무덤을 에워싼 장송(長松), 눈앞에 흐르는 한강과 포근한 잔디, 봉긋한 무더미들의 전개는 착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애정을 엿보이게 한다. 시의 형태는 비록 짧아도 이 소재에 알맞을 정도로 할 말은 다 하였고 이 소재에 알맞게 발휘해야 할 시의 표현미를 완전히 발휘했다.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뷘 골 골을 되도라 올 뿐.
산그늘 길게 느리며
붉게 해는 넘어 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조국을 잃은 일제 암흑기에 쓴 서정시.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 않던 시대, 그렇게 고독하고 그렇게 처절하고 그렇게 암담했던 시절, 작자는 산을 찾고 산에 숨어 살고 그리고 안으로 울고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는 그러한 심정을 노래한다. 글자 그대로 최후의 모국어에 그지없는 매혹을 느끼고 그것을 깎고 다듬고 그 말로써 운 괴롭고 적막한 분위기가 전개된다. 자연스러운 가락. 진폴이 있는 애조와 도사림. 고독하고 여린 자세가 이 시의 전반적인 특색이다. 이 시에서 <그대>는 애인이거나 민족이거나 여호와거나 그 모두이거나 어느 것일 수도 있다. 전체 구성이 7련으로 된 우수한 시이다.
1949년 처녀시집 《해》에 수록된 시. 8 · 15 해방이란 역사적 계기와 그러한 격동과 극적인 배경에 의해서 씌어진 것으로 그의 초기시를 총결산하는 시다. 여기 「해」는 일상적 의미의 해가 아니라 생명적인 것을 표현하는 미래지향적 의지의 표상(表象)이다. 따라서 《해》는 감각의 기쁨으로 파악되는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송가(頌歌)이며, 송사적(頌辭的) 수사(修辭)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초월적인 믿음이 내재(內在)해 있다. 시 속의 「나」인 시적 자아가 높고 신비적인 힘의 대상인 자연에 대하여 향하는 서정적인 표출이 장중한 찬양으로 일관, 미학적 의미에서 숭고성과 연관되고 있는 점이 이 시의 전반적인 특색이다. 때문에 여기 씌어진 사슴과 칡범의 이미지가 원시적(原始的) 무우드의 환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믿음으로 착색되어 있다.
《해》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그리하여 이 시가 희망하는 세계는 양지이며 사슴과 칡범이 인간과 같이 노는 꽃과 새와 짐승과 인간이 한자리에 앉아 사는 밝고 활기찬 세계다. 또한 이 시가 주는 충격은 「해」가 적극적이고 밝은 상징적 의미로 구사되었다는 것과 거기에 동반된 줄기찬 가락에 있다. 전체 구성이 6연으로 된시다.
시집 《오도》에 수록된 시. 민족의 역사적 주체로 응고된 낡고 눈멀고 이끼낀 빈 벌판의 퇴락한 비석에서 민족의 역사를 육성적으로 절규한 다이내믹한 작품이다. 죽어있으나 살아 있는, 낡고 눈멀었으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비석(碑石)–민족을 앞에 보며 절감한 호소를 표현, 그것이 분명 형태로 인지되는 것을 순전히 그 기저에 그의 날카로운 현실감각이 비판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만 푸른 새가 날아 오르라, 비……. 한마디만 길다랗게 소릴 뽑으라」와 같은 의인(擬人)과 상징은 비 자체의 고체감과 입체감을 조형하였다. 민족의 역사적인 상징체로서의 낡은 비신(碑身)에다 징과 못을 콕콕 박고, 다시 거기서 학(鶴)의 비상을 절원하여 구원을 기대한 것이 이 시의 주제다. 그의 현실시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 좋은 시사(示唆)를 주는 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 좋은 예증이다.
「비(碑). 오오, 돌, …… 무엇을 호흡하는가? 오래 숨이 겹쳐지면 깃죽지가 돋는가? 목을 뽑아 학처럼 구름밖도 나는가. 비바람과 눈모래와 내려쬐는 뙤약볕, 미쳐 뛰는 세월(歲月)들이 못을 박는다. 징을 박는다」
거미와 星座 얼개를 친다. 얽어 나가는 지주의 포망은 은소리 속에 매어달린다. 또 한번의 포만을 위해 거미의 자세가 긴장한다. *거미와 성좌는 박두진의 시집 《거미와 성좌》에 수록된 시다. 현실과 오늘의 상황이 이 시의 주제가 된다. 사상적 현실주의와 시적 리얼리티의 동시적인 천착이며 가난하고 어두운, 그리고 어려운 시대를 이겨내는 현실 대결의 직투사(職投射)는 이 작가 개인 것이면서 동시에 동시대 사람들의 공통된 장(章)이다. 거미는 현대적 생리의 상징이며 시인 자신에 대한 상징이다. 현대의 생리와 현대의 죄성(罪性)과 현대의 존재형태가 「거미」를 통해서 구상화하고 「나」를 통해서 이념화해 있는 동시에 「거미」는 거미대로의 생리와 형상성(形象性)과 거미대로의 순수한 대상으로 시화되어 있다. 그리고 생리 · 현상 · 생태와 그 구성상을 빌어 여러가지 이미지를 시도한다. 가령 「여덟개의 발끝으로 하는 어덟 차례의 간음(姦淫)」이란 성적 이미지가 나오고, 추녀끝에서 벚나무 가지까지 점착성(黏着性) 포망(捕網)을 치며 일하는 노동과 생산의 이미지까지 나온다. 현실 대결의 시를 소박한 내셔널리즘으로 이해하는 감상주의가 굳어가고 있는 오늘 시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 시가 보여주는 현실대결의 직투사는 높은 차원이 아닐 수 없다.
박두진
습습하고 어두운
지목으로부터의 너희들의 탈출은
또 한번 징그러운 유배색 음모
지옥에서 지상에의 유배였고나.
추녀 밑 낡은 후미진 틈새에서
털 솟은 숭숭한 얼룽이진 몸둥아리
종일을 움츠리고 묵주 뇌이를 한다.
거미, 거무,
거미, 거뮈 !……
지주, 지주 !…… 지주, 거믜 !
거미, 지주 !…… 지주,
거뮈 !……
ㅡㅡㅡㅡ일몰……
어디쯤 바다에서 밀물소리 잦아오고
산에서, 들에서는,
밤새가 왜가리가 뜸북세가 울고 오고
이리는 너구리를
너구리는 다람쥐를, 구렁이는 개구리를, 개구리는 쉬파리를, 먹으며 먹히우며 처절한 정적……
거미는----
새까만 내장,
새까만 내장을 겹겹이 열어 피묻는 일몰을 빨아 먹고,
새까만 내장을 겹겹이 열어 피묻는 후광을 빨아 먹고,
새까만 내장을 겹겹이 열어 피묻는 노을을 빨아 먹고는,
그리고는 황혼,
당향묵처럼
선명한
까만 황혼을 뿜어낸다.
서서히
거미는
이제야 실현해 볼 회심의 음모
오늘의 짙은 황혼을 위한
피묻는 계략을 펴는 것이다.
발통을 들어 몸내를 풍겨 수거미들을 고혹한다.
여덟 개의 발끝으로 하는 여덟 차례의 간음
맞달겨드는 숫거미들은
전율해 오는 결사의 정부
여덟 번의 간음과 더불어 오는 여덟 마리의 정부를
활홀해 하며 아찔해 하며
교살해 먹어버리는 쾌적!
이윽고 거미는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낭랑하게 주문을 다시 외이다가
늴-늴 늬나이 나이나,
산이 올라서 궁둥일 저어
독무를 추며 휘돌아가면
슬, 슬, 슬, 저녁 산바람
목줄을 와서 간질른다.
거미는 다시 이때
또 하나의 푸른 공간
추녀끝 캄캄한 데서 벚나무 높은 가지 끝까지
점착성
가장 질긴 밑줄을 뽑아
새로이 포망의
산뜻하고 열렬한
이때야말로 거미는 일사불란의 용의
아슬아슬한 공중작업에
혼신의 정력을 소모한다.
끈끈하고 섬세하고 순미로운 선ㅡㅡ
이것은 곧 탈출
이것은 곧 유배
이것은 고독
이것은 절망
이것은 허무
이것은 체념
이것은 또 일몰
이것은 후광
이것은 노을
이것은 바닷 소리
이것은 갈댓 소리
이것은 황혼
이것은 오열
이것은 묵주
이것은 음모
이것은 간음
이것은 황홀
이것은 숫거미
이것은 육즙
이것은 교살
이것은 쾌적
그러한 것이 짓이겨져서 거미줄 줄이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의 정취가 엉겨 끈끈한 줄이 된 것이다.
눈이 부신, 차라리,
승화된 순색의 희뽀오얀 혈맥!
그 그물 같은,
하늘로의 포망에는
하나씩의 칸살마다
하나씩의 하늘
하나씩 하늘마다 하나씩의 황혼
하나씩의 황혼마다 하나씩의 성좌가
꽃밭처럼 허트러진 꽃밭 같은 성좌가
먼, 먼, 무한궤도를 전설을 밟고 돌아 가고
젤그렁거리는 별소리 속에
풍뎅이가 하나 날아와 걸린다 쭈루룩 달려나가서 휘감아 버린다.
왕파리가 하나 날아와 걸린다 쭈루룩 달려나가서 휘감아 버린다.
고추쨍아가 왕퉁이가 호박벌이 와 걸린다.
말모기가 개똥벌레가 딱장벌레가 와 걸린다.
걸리는 족족 휘감아 싸서 몽뚱그려서 죽이면
까만 잇발로 모조리 짓씹어 입맛을 다시며
까만 잇발로 짓씹어 입맛을 다시며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밤------
어디선가 풀섶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풀벌레들의 울음에 섞여 어머니 없는 아이가 울고
밤이 울고 어둠이 울고 바람이 울고 풀숲이 울어
울어 예는 만래 속에 밤이 깊으면
밤이 오면 언제나 우는 사람들
울음 속에 여위어가는 눈이 맑은 사람들의
울음 울며 뒤착이며 여위는 소리......
아, 거미도 이런 밤엔 오열을 한다.
디룽디룽 매어달려
먼 그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흔들리는 실줄을 잡고 눈물짓는다.
지르지르 지르르르.....지질 지질 지르르르....
바로 발밑
시궁창 울밑에서 이제야 겨우 우는
지지리도 못생긴
지렁이의 측은함에 연민을 준다.
그는----눈을 든다.
다시 한번 바라보는 먼 항하사
성좌와 성좌들의 어찔어찔한
대우주-----
오오래인 이법들을 궁글려 보며
묵묵하니 눈을 감고 철학하다가,
호접 ! 오, 호접 !
문득 그는,
밤이 다한 아침, 어쩌면 다시 오는 해밝이 녘에
극채색 눈이 부신 네 겹 날게의
남국종 크다란 범나비가 한 마리
추방되어 내려오는 천사의 그것
찬란하게 펄럭이는 자유의 나라의 기폭처럼
휠훨훨 날아들어 펄럭일지도 모른다는
부풀어 오르는 보람에 싸여
황홀해 하며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