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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묵상글 ( 연중 제21주일. - 정답은 나와 있는데 우리의 대답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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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25 05:06
- 정답은 나와 있는데 우리의 대답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선택 장애 또는 결정 장애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만 해도 나이 먹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고,
결혼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늦게 떠밀려 결정하는 사람 수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 젊은이만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젊은이들은 선택의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늙은이보다 선택이 어렵습니다.
그것은 젊을수록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고
뒤집어 말하면 늙을수록 선택의 폭이 좁기에
늙을수록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자기의 선택에 안주하곤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대통령이 되는 것도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지요.
그러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기 능력에 따라 그리고 자기 욕망에 따라
하나하나 선택지를 좁혀가게 되고 그래서 선택지가 좁아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젊을수록 능력도 많고 욕망도 많기에
선택지가 많고 그만큼 선택하기 어려웠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욕망도 줄어지면서 선택지가 좁아지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를 얼마간 먹은 지금의 제게 좋은 것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졌고 선택의 고민이 별로 없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수록 죽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고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택에 안심하고 안주합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안주하기에 새롭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오늘 또 그리고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데
1년 전에 또는 십 년 전에 선택해놓고 새롭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연인이었을 때나 신혼이었을 때는 사랑이 매일 새롭고
매일 뜨겁게 사랑 고백을 했는데 내 사람이 되고 십 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가슴이 뛰지도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성무일도 초대송 때 부르는 시편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지요.
매일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출전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말입니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이 적힌 세숫대야로 매일 세수를 했다고 하지요.
오늘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렇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며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질문과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정답은 나와 있는데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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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 예술가 마이클 뒤샹은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 예술가 전시회에 말도 안 되는 작품 하나를 출품했습니다. 그것은 도자기로 만든 소변기였습니다. 소변기는 옆으로 눕혀 있었고, 그 위에 검은색 물감으로 드문드문 서명을 해두었으며, ‘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독립 예술가 협회는 너무나 터무니없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전시하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이런 작품을 출품한 뒤샹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알아주지 않아서 전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00년도 채 나지 않은 2004년, 예술가와 역사학자 500명의 투표를 통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작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 진리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많이 봐왔던 모습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현대 세계는 더 눈으로 보고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 모르는 것은 아직도 너무 많습니다. 주님에 대해 안다고 말하지만, 아주 일부만을 알 뿐입니다.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예수님을 떠납니다.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 하시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던 여호수아는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라고 말했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결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상의 관점을 가지면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주님의 관점을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힘껏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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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생활이 단순하다. 쓸데없는 일에 마음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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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21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주일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6장의 마침부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체성사”에 대한 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전례>는 “성체성사”를 계약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스켐에서의 있었던 계약의 갱신을 들려줍니다. 스켐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나 뵌 곳이요, 제단을 쌓아 봉헌한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또한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온 온갖 제물과 우상을 파묻은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 신앙을 다짐한 이곳, 스켐에서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사랑과 충실함을 깨우쳐주고,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 놓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5)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자, 백성들도 같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제2독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어야 할 혼인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혼배성사라는 ‘계약’의 실현을 말해줍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아내인 교회에 대한 사랑과 교회가 신랑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요, 자신을 건네주는 성체성사로 이루는 사랑의 일치를 말해줍니다. 곧 상호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계약의 삶이요, 성체성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신 주님을 택할 것이지 아니면 우상과 죽음을 택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빵”(35절과 48절)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5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참으로 당혹스럽고 황당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다투기(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 60) 하고 말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이르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한 술 더 떠서‘당신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당신 “말씀”이 “생명을 주는 영”(로마 8, 2)이요,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몸’과 ‘말씀’은 ‘생명의 빵’으로 동일시됩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이제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의 몸’으로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육화’하심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스켐의 계약의 갱신에서처럼, ‘자유로운 선택’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기로 서약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곧 “말씀”이 ‘생명의 빵이신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음으로 서약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과 말씀을 영하는 성체성사는 곧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고 지키는 결단이요,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의 갱신이 됩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 전례>는 우리를 ‘계약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성체성사의 삶으로의 요청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 생명과 사랑을 택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고,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매달려 있고,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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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려거든 가시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늘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저자는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시편119,103).“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119,105).하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 그분을 알면 더없이 큰 갈증을 느끼게 되거늘 미처 알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알게 되는 것이니 이 시간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끝없는 선택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무엇을 할까? 성당에 갈까? 밭에 일하러 갈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면 차라리 돌아 갈까?’음식은 뭘 먹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때가 되면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정이 행복과 불행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래된 얘기지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하나 잘못 고르면 10년 동안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주님을 택하면 생명이요, 육적인 욕망을 택하면 죽음입니다.
1독서를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도 다짐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두개, 물고기 다섯 마리로 오 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시고 배를 이용해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쫓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하고 속을 콕 찔렀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냉혹하고 잔인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베드로는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가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단은 삶의 매순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확실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 말까?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3,15-16). 그런 의미에서 미사참례에 함께하신 여러분은 하느님을 택하셨으니 복됩니다. 행복하십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어딜 가다니요? 길은 여기 있고 당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소?”길은 이미 있고 그 길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천상,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집이기 때문에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집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굴곡이 있어도 목적지에 닿아있다면 묵묵히 가야합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운 길이라도 목적지에 연결되지 않았다면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하셨지만 많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북해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믿음이 있고 누가 믿음이 없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하셨다면 우리도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떠난다고 나도 떠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친구 따라 강남가지 말며 매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지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알고 나서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지식의 검증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일단 선생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먼저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게 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따름으로써 알게 되었고, 그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능력이 따르고 치유가 따르며 위안도 평화도 기쁨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은총은 이미 주어졌고 역사하고 있으며 앞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지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결단을 내리십시오. 떠나든지, 주님 안에 머물던지….. 가려거든 가시오!
성 안나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눈이 나빠서 고생을 하셨지만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눈이 더 나빠지면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하시며 틈만 나면 성당에 오셔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영적인 눈과 함께 육적인 눈도 밝아졌습니다. 놀라운 역사입니다. 주님 말씀을 갈망한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은 언제나 역사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주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소크라 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수학선생님이 말한다면 ‘네 분수를 알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국어선생님께서 말하면 ‘네 주제를 알라’그리고 지리 선생님은 ‘네 자리를 알라’ 고 하십니다. 미술 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고 했을 것이랍니다.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주님의 사람인가?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입길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주님을 만들지 말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나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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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삼권분립인 나라에서 국회는 ‘청문회’ 제도를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고, 현재 발생한 사건과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의 능력을 검증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려 했던 청문회로 ‘5공 청문회’가 있습니다. 이때 청문회 스타로 활약했던 의원으로 이해찬, 노무현 의원이 기억납니다. 의원들은 송곳 같은 질문과 잘 준비된 자료로 증인들의 잘못을 밝혀냈습니다. 최근에 발생했던 사건과 사고의 청문회는 작년 7월에 숨진 해병대원에 대한 청문회가 있습니다. 증인들은 거짓과 허위를 말할 때는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선서’를 하게 됩니다. 의원들의 질문과 증인들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몇몇 증인은 현재 수사 중인 사건이기에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증인 선서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에 대한 청문회는 ‘방송·통신 위원장’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청문회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후보는 자진하여 사퇴하기도 하고, 어떤 후보는 오히려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능력과 자질을 보여 준 후보는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엄격한 과정을 넘어서지 못할 후보는 알아서 사퇴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합니다. 기도와 성찰을 통해서 영성(Sanctitas)을 배우고, 학업과 독서를 통해서 지성(Scientia)을 배우고, 내규와 운동을 통해서 건강(Sanitas)한 몸과 마음을 가꾸게 됩니다. 선배들은 이것을 3S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어도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이 걱정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서품 공시’입니다. 서품 후보자가 사제가 되기에 합당한지, 중대한 허물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청문회처럼 치열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서품 후보자들에게는 긴장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근무할 때, 서품 후보자들의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은 사제가 되기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올 때도 검증을 거쳐야 했습니다. 먼저 댈러스 교구에서 초청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저에 대한 서류를 보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서류작업이 완료되면 댈러스 교구에서 실시하는 교육프로그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0개의 영상을 보았고, 영상에 대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문제를 다 풀면 확인서를 받습니다. 그 확인서를 댈러스 교구로 보내면서 모든 검증이 끝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면 안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가정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온갖 심오한 진리도, 화려한 건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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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칭찬은 듣기 좋고, 기분도 좋습니다. 칭찬의 힘입니다. 욕설은 듣기 거북하고 기분도 나쁩니다. 그것이 욕설의 힘이지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꼭 칼은 칼인데 그것으로 채소를 썰고, 반찬을 만든다면 그것은 양식을 만드는 생명의 칼이고, 그것은 남을 해치거나 위협하면 공포를 만드는 죽음의 칼입니다. 이처럼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화초나 꽃에게 ‘예쁘다’라고 계속 말하면 화초와 꽃은 더 싱싱하고 오래 산다고 합니다. 반면 그것을 보고 저주 섞인 말과 욕설을 하며 화초와 꽃은 금방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저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고, 욕설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또한 이러한 어둠의 힘은 남을 망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도 떨어뜨립니다. 자기 자신을 ‘나는 볼품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생명의 말씀이다.’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생명을 얻고, 예수님의 말씀에 사랑을 얻습니다. 삶의 희망을 얻고, 그렇게 삶을 살아갑니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 저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에서는 저주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칭찬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웃어주십시오.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곳에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당신께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저희가 어딜 가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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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의 말침
얼마 전 운동을 무리해서 했는지 팔꿈치가 아파져 왔습니다.
여러 지인분의 추천으로 동네 한의원을 방문했습니다.
팔꿈치에 침을 꽂고 누워있는데
옆 침대에서 치료받는 할머니와 한의원 선생님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다치게 됐는지 설명하셨고, 이번에 다친 거 이외에 살아오면서 다쳤던 모든 곳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마음 다친 것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한의사분은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에효~~~ 그러게요~~~
많이 아프셨겠네요.
에효~~~ 그런 일이 있었네요.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침술도 침술이지만 한의사분은 할머니의 마음도 치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한의사분은 침술뿐만 아니라, 말 침술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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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키엣 대주교님.
시련의 아픔 속에서도 ‘믿음’은 성장합니다
믿음의 길은 살아가는 동안 쉼 없이 가야 하는 고된 길입니다.
그 길은 주님께 인도하는 길이지만 일평생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멀고 험난한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은 불행하게도 행복하고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험난한 시련과 쓰라린 실패의 고통을 겪을 때는 깜깜한 밤 방향을 잃은 새와 같이 깊은 절망에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아주 작은 믿음조차 사라져버리고 주님의 존재조차 의심하게 됩니다.
믿음을 시험하는 시련이라지만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두려움은 커져만 가고 피곤하고 지친 영혼은 좀 더 편안한 길, 쉬운 길로 유혹하는 손에 쉽게 빠져들게 되고 믿음은 점차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유대사람들과 몇몇 제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일으키자 군중들의 믿음은 극에 달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그리스도라고 믿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달콤한 말씀이 아닌 듣기 거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의 믿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발길을 돌려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순간에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은 믿음, ‘거짓 믿음’입니다.
믿음은 마치 순금을 가리기 위해 용광로 속의 뜨거운 불에 녹는 시련을 통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아직 알 수 없기에, 아직 볼 수 없기에 더욱 더 필요한 것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서로 다른 양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지만 그 빛은 믿음이 있을 때만이 길을 비쳐줍니다. 하지만 스스로 어둠과 의심의 장막을 가리우면 밝은 빛 속에서도 눈을 가린 것처럼 어떠한 불빛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볼 수 없어도 믿을 수 있는 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여전히 주님께 의탁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믿음의 길도 사도들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행복할 때는 자신의 믿음이 아주 굳건하다고 믿습니다. 달콤하게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격려와 힘을 북돋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항상 기쁨과 평화, 희망을 주시며 성공과 행운을 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하고 절망이 시작될 때 믿음도 따라 흔들립니다. 시련 속에 헤매고 있을 때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남은 평화마저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모든 잘못이 나의 교만함과 자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꾸짖고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헛되다고 꾸짖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꾸짖음은 나의 영혼을 도려내고 고통을 주시고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시기에 주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습니다.
시련에 닥쳤을 때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생각해보십시오. 시련의 아픔 속에서 토로하는 고백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의 신앙 고백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과 사랑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베드로 성인과 같이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흔들리는 나의 믿음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이 부족한 믿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 믿음은 마치 순금을 가리기 위해 용광로 속의 뜨거운 불에 녹는 것과 같은 시련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련이 있었습니까? 어떠한 마음으로 그 시련을 견디고 지금 주님 곁에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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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택하십시오,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의 여정”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옛 어른의 말씀도 선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매일 내리는 사소한 선택들이 모두 나를 만드는 나의 역사가 된다.”<다산>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하는 주님을 선택해온 제 수도생활의 역사에 감사합니다. 하루의 시작에 강론 쓰기 선택은 언제나 우선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다산>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다스리는 기본은 삼가고 삼가는 자세에 있다.”<다산, 흠흠신서>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사는 이들은 신중에 신중을 다하는, 삼가고 삼가는 자세로 살 것입니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이 둘을 함께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한다.”<맹자>
이기적 내가 아니고 의로운 주님을 선택하겠다는 결의의 발로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말그대로 선택의 여정입니다. 좋은 선택이 삶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라는 고백도 선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주님을 선택하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 주제가 되는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시편34,9ㄱ)
언젠가 갑자가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평상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갈 때 좋은 선택에 행복한 삶입니다. 역시 선택-훈련-습관화가 행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생활화하는 일이 행복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에 좌절하고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유혹이요 이런 상태에 머무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니 천국이냐 지옥이냐 이 또한 선택입니다. 보십시오,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도 부모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외모도 성격도 체질도 소질도 재능등 온갖 유전들 모두가 타고난 것들입니다. 이들에 좌절하고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주님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타고난 것들에 매이면 비관적 운명주의자가 됩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선택을 하는 낙관적 섭리주의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선택할 좋은 것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감사를, 찬미를, 사랑을, 희망을, 평화를, 기쁨을, 일치를, 겸손을, 경청을, 순종을, 관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며 온갖 좋은 것들이 절로 따라옵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는 일이 습관화, 생활화할 때 저절로 행복이요 좋은 분별의 지혜도 지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한, 선택의 달인이자 선택의 대가가 제1독서의 여호수아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요, 복음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결코 이런 주님의 선택은 우연이 아닙니다. 평소 체화(體化)된 주님과 일치된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삶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자 열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서는 스켐 집회에서의 여호수아의 장쾌한 긴 연설로 이루어졌고 특히 다음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지도자의 이런 좋은 선택도 백성들은 보고 배웁니다. 여기 ‘오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가리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기분 좋은 응답이 너무 통쾌하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호수아 지도자와 백성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하나로 일치된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희망이, 미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비단 나라나 민족뿐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도 진리입니다. 새삼 역사를 렉시오디비나하며 성찰할 때 올바른 선택, 참 좋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판단이나 선택이 힘들 때, 성소에 혼란이 올 때,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면 저절로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라든 공동체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정체성을 새롭고 견고히 하는데 그 나름대로의 역사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선택 또한 그의 평소 주님을 향한 신망애 삶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거북하다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 또한 좋은 주님의 선택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일치된 영과 생명의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다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시며 예수님은 이들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역시 주님께 정통한 시몬 베드로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를 대변해 정답을 말합니다. 역시 선택의 달인이자 대가인 시몬 베드로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결론 말씀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삶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살아 온 바오로의 지혜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부부관계를 일방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상호순종과 상호존경, 상호사랑의 순리대로 풀어갑니다. 대전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즉 상호순종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도 이렇게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몸의 신학’의 원조인 바오로의 사상이 참 심오합니다. 결코 남녀차별이 아닌 상호순종, 상호사랑을 말합니다. 어제 30대 초반의 사윗감을 만난 자매의 감격에 벅찬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아 정말 요즘 만나기 힘든 젊은이입니다. 함께 식사하는데 얼마나 딸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정성을 다하는지 온몸에 표현됨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 자기에게 온 ‘따님을 정말 아끼고 잘 돌보겠습니다’ 카톡메시지에도 감동했습니다. ‘아끼고’ 참 오랜만에 들어본 반갑고 고마운 말마디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역경속에서 남매를 한결같이 참 반듯하게 기도와 믿음, 사랑으로 키워낸 지혜로운 자매입니다. 이미 결혼한 아들 부부도 서로를 끔찍이 소중이 여기고 아낀다했습니다. 좋으신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언제나 좋은 선택이 뒤따를 것이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시편3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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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과 함께>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바로 곁에 있어도
버려진 벗들을 보듬으려는
임의 찢기는 마음에
알알이 박힌 서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곁에 있어도
가난한 벗들에게 건네는
임의 슬픈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곁에 있어도
쓰러진 벗들에게 내미는
임의 떨리는 두 손에
마디마디 새겨진 쓰라림을
느끼지 못한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곁에 있어도
멈춰선 벗들을 이끄는
임의 거친 두 발에
시퍼렇게 물든 힘겨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곁에 있어도
죽어가는 벗들을 살리는
임의 죽어가는 삶에
오롯하게 깃든 핏빛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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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 하시는 영과 육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말하는 영과 육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육체를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2세기경 희랍문화권에서 널리 유포되어있던 전반적 인식은 영과육, 선과 악을 대립시키면서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분리하고 육신을 저급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윤리적 생활에 있어 금욕, 절제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반해 교회 초기 교부들은 유대전통의 관점과 같이 영과 육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합일체로 보고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고 보고 육신을 소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선악의 행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이 단순히 영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매순간 모든 상황에서 영혼의 협조자이고 누구에게나 육신은 영혼과 공존합니다
육체는 인간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 가를 알려주며 그만 먹어야 할때를 일러줍니다. 육체에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을 제공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불규칙한 수면 시간은 육체의 리듬을 교란시키고 신앙생활의 리듬에 장애를 가져오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도 애덕에 대한 사랑으로써 사랑해야 합니다. 육체도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며 육체는 하느님을 위한 봉사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있어서 육체의 변화는 거동과 용모 그리고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육체의 변화는 우리의 음성과 말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음성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만 내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육체의 변화는 웃는 태도와 웃음소리에서 조차도 영향을 미칩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주의 깊은 태도는 나 자신의 육체적인 자세, 몸동작의 표정, 나의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의 속도와 신중함에서 드러납니다.
이렇듯 영적으로 변화된 사람은 반드시 육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주님의 영의 깃들어 있는지 육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알게 해 주는 영혼의 창입니다.
영의 사람에게서 육체에 무엇보다도 드러나는 것은 온유와 자비입니다. 온유와 자비는 그 사람이 참된 영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 당깁니다. 그런 영을 지닌 사람은 달리 믿는 사람들을 자기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온유함과 자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충분합니다. 그의 온유와 자비를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 분을 알아뵙게 됩니다.
온유와 자비는 주님의 영을 인식하는 원천입니다. 성서를 많이 읽고 금욕과 절제를 할지라도 온유가 자비가 없다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이들에게 온유하고 자비가 드러날 때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 주님의 영의 여러분의 육체안에 충만하게 용솟음쳐 나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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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성체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 ‘말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열두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고 실천하려는 이는 성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며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요? 그는 말씀을 생명으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해석’하려 듭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은 말씀을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입니다.
마치 의대생이 죽은 시신을 해부하듯이 말씀을
자신 뜻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실행하는 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 개의 성경의 다른 해석과 종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체의 역할이 사라집니다.
루터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 성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말씀을 통해 늦게나마 사제 성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힘차게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 주시는데 내가 뭘 드린다고 유세를 떨었던가?’라며 크게 회개하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하려고만 한다면 성체는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마치 거울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거울은 말씀이고 물은 성사입니다.
거울을 보면 물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굴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로 씻으면 다시 거울을 찾습니다.
잘 씻겼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체는 마치 자전거의 두 페달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라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떨까요? 순종하지 않고 해석합니다.
‘그건 그때 당시나 그런 것이고, 또 개신교나 하는 것이지 이젠 그런 율법은 없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을 주시는 성사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 주신 분을 성사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소득의 십분의 일 바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삼식이 삼촌’(2024)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사람은 세 끼니를 다 먹인다고 하여 별명이 삼식이라고 붙여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장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아들이 수장을 맡자 그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죽게 됩니다.
삼식이 삼촌은 말합니다.
“저는 평생 청우회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사냥이 끝났다고 사냥개를 잡아 먹습니까?”
“사냥이 끝나서 잡아먹는 게 아니죠. 사냥개가 지가 사람인 줄 알더라고. 왜 자꾸 식탁 위에 올라와? 잡아먹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에 비해 가나안 여인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니까 성사, 곧 마귀 들린 딸이 낫습니다. 개에게 주인의 말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하.사.시.』를 읽고 매일 하루를 살 한 문장을 공유하며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결코 성체성사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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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주님 곁에서만이 영원한 생명이 /
박윤식 [big-llight] 240824 21:27 ㅣNo.175342
믿음의 사람으로 신자로 살다보면, 종종 믿을까 말까라고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나. 선과 진리,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기가 힘들 때, 미사에 참여하는 것에 싫증이 날 때 등일 게다. 이렇게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만 한다. 돈과 권력, 쾌락과 성, 교만과 이기주의, 허영과 소비주의 등,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며 생명의 말씀도 주지 못하기에.
예수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렇게 당신 살마저 먹지 않는다면, 영생이 힘들다는 말에, 제자들 중 많은 이가 떠나고 더는 그분과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압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확신하도록 물으신 것일 게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떠나려면 일찌감치 떠나라는 거다. 만약 그때 베드로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다시 갈릴래아의 어부가 되었다면, 그의 삶은 과연 평탄했을까? 우리도 자주, ‘지금보다 인생을 좀 더 쉽고 안락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곧장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진리를 포기하고는 다른 어떤 것을 결코 선택할 수가 없기에. 그날 그 자리의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게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더 솔직한 것은 “누구를 향하여 떠날 수 있겠습니까?”일 게다. 그마저 달리 갈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신앙은 결단이다. 조금씩 자신과 하느님 아닌 것과 타협할 때, 결국은 하느님을 떠나게 되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묻는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지금도 성당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성당에 다녀도 뾰족한 수가 없다.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더 많다. 한두 번 안 나가니까 오히려 더 편하다. 성당에 다니다 그만두면 하느님께서 벌주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냉담하고 있는 이들이 쉽게 하는 말이다. 우리 삶은 영과 육의 싸움이다.
육은 이기심과 악으로 나아가는데, 이 육에 따라 살면 파멸에 이른다. 사람에게는 육과 영의 충동이 수시 있기에, 이들의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진다. 이기적이고 쾌락적 삶에서는 영에 따른 생활은 없다. 육을 이기려면 성령의 인도에 맡겨야만 한다. 이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기도를 통해서만 성령을 맞아들이기에. 성령에 따라 살면,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사실 그분만을 바라보는 삶이라고 사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시도 때도 없이 주어진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계명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를 놓고 선택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과 죽음의 길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례식 때 마귀의 온갖 유혹을 끊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겠다고 결단하였다. 이제 그 결단을 우리 삶으로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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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 가운데에서”(요한 6,66) 많은 이가 돌아갔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단순히 빵을 찾아왔던 군중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 나름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던 이들이 돌아서서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붙잡지도 않으십니다.
그래도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며 남아 있겠다는 이들만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 거북할까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일까요?
듣기에 거북하다고 한 이들도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복음서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떠나갑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듣기 거북해합니다.
포도밭의 일꾼들은 포도밭 주인이 후하다고 하여 화를 내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받아주자 첫째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도,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따라오라는 말씀도 듣는 이에게는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가는 이들에게 이것을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6,65)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북하게 들리는 그 말씀, 따라가면 죽을 것만 같은 그 말씀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뛰어들 수 있는 이들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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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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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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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어디를? 누구를? 찾아가고 있습니까?
하고 있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리면 좋겠는데, 꼬이고 꼬입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럴 때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요즘 ‘영적 동반’이란 용어가 유행입니다.
기꺼이 내 고민을 들어주고, 신앙 안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좋은 영적 스승을 찾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그래서 세상 편한 절친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차 한 잔 하면서 훌훌 다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분처럼 혹시라도 이상야릇한 분위기의 철학관이나 도사님을 줄창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의 시험 철이 다가오면 어디를 찾아갑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위 덩어리를 찾아가지는 않습니까?
승진을 앞두고, 선거철을 앞두고 어디를 찾아갑니까?
결코 기대서는 안 되며, 절대로 찾아가서는 안 될, 그리고 언젠가 허망함만을 느낄 ‘유력인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큰 실수를 하는 것이며, 잘못 찾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 이면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좋다는 곳, 정말 대단하다는 사람, 참 진리를 가르쳐준다는 스승, 효험이 있다는 곳...
세상 곳곳을 다 찾아 다녀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그분만이 내 존재 전체를 내어 맡겨도 괜찮은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찾아갑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명쾌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한한 것, 잠시 지나가는 것,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데나 찾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잠시의 위로 정도겠지요. 감언이설이겠지요. 거짓된 공약이겠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오류투성이입니다.
괜히 잘못 찾아갔다가는 패가망신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갈 곳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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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당신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는(참조: 요한 6,54-56) 확실히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를 통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빵과 포도주라는 형상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께 반감을 품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집중시키기 위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다시 입게 하려고 당신의 말씀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살) 대신 영(성령)에 의탁한다면 더 위대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육으로는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4절) 하신다.
그러므로 육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발심과 배척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육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음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이며,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을 점차 드러내고 계시다. 이 말씀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질 때, 영이며 생명이 된다.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그 말씀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들이다.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성사로 이해한다. 말씀과 성사는 그리스도의 실재 전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대답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68절) 그러나 곧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원천임을 깨닫고는 기쁨과 확신에 차서 확실하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고백한다.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고백한 것이다. “믿고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앎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앎의 최고 형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의 위기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결핍이 무엇보다도 사랑할 능력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신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우리가 성령 안에 살고 있다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누어주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저버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기억하고서는 주님을 선택한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면서 항상 그분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사는 항상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요구는 당시의 상황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면 누가 첫째이고 누가 나중인가를 따지지 않는다. 바오로는 첫째가는 사람이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셨듯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 간에 사랑의 대상으로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특히 남편과 아내가 상호 신뢰심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폐쇄적인 태도와 이기주의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위대한 신비가 되어야 한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이러한 혼인 생활은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와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편에서 살아가면서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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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성체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 ‘말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열두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고 실천하려는 이는 성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며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요? 그는 말씀을 생명으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해석’하려 듭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은 말씀을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입니다.
마치 의대생이 죽은 시신을 해부하듯이 말씀을
자신 뜻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실행하는 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 개의 성경의 다른 해석과 종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체의 역할이 사라집니다.
루터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 성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말씀을 통해 늦게나마 사제 성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힘차게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 주시는데 내가 뭘 드린다고 유세를 떨었던가?’라며 크게 회개하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하려고만 한다면 성체는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마치 거울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거울은 말씀이고 물은 성사입니다.
거울을 보면 물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굴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로 씻으면 다시 거울을 찾습니다.
잘 씻겼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체는 마치 자전거의 두 페달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라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떨까요? 순종하지 않고 해석합니다.
‘그건 그때 당시나 그런 것이고, 또 개신교나 하는 것이지 이젠 그런 율법은 없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을 주시는 성사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 주신 분을 성사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소득의 십분의 일 바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삼식이 삼촌’(2024)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사람은 세 끼니를 다 먹인다고 하여 별명이 삼식이라고 붙여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장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아들이 수장을 맡자 그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죽게 됩니다.
삼식이 삼촌은 말합니다.
“저는 평생 청우회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사냥이 끝났다고 사냥개를 잡아 먹습니까?”
“사냥이 끝나서 잡아먹는 게 아니죠. 사냥개가 지가 사람인 줄 알더라고. 왜 자꾸 식탁 위에 올라와? 잡아먹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에 비해 가나안 여인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니까 성사, 곧 마귀 들린 딸이 낫습니다. 개에게 주인의 말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하.사.시.』를 읽고 매일 하루를 살 한 문장을 공유하며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결코 성체성사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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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0-69)”
1)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즉 약속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라는 말씀에서 ‘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앞의 47절에 있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히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일,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내 말을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60절의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수 없다, 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말씀의 ‘표현’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살과 피’ 라는 말과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말씀 등의 표현이 듣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2) 그래서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라는 말은,
뒤의 8장에 있는 논쟁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유대인들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2. 종말에 부활하더라도 영혼만의 부활이다.
3. 마지막 날에 부활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이고, 한낱 사람일 뿐인 예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떠나버린 제자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 예언자’가 죽지 않고 승천한 일을(창세 5,24; 2열왕 2,11)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1테살 4,17).
그리고 우리는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믿음은, 예수님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전권(全權)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요한 5,22).
4)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는,
“저희는 주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입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는, “주님께서 저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저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입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는,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입니다.
5)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 배반자를 언급하신 것에 대해서 ‘갑자기, 왜?’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몸이 함께 있어도 마음이 떠나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지만, 그때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떠나간 사람들처럼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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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사리의 옳고 그름에는 관계 없이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는 인간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통해 빵을 배부르게 먹고, 치유의 은총을 입으며, 심지어 죽었던 사람까지 되살아났을 때에는, 자신도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이용하여 원하는걸 이룰 수 있겠다고 기대하여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추앙하던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바람대로 물질적 번영과 정치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왕’이 되시기를 거부하자 크게 실망합니다. 게다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며, 자기들이 지닌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니 실망을 넘어 반감까지 지니게 되지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먹는다’라는 의미를 표현하시기 위해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로 적당히 순화할 수 있는 동사를 쓰시지 않고, ‘씹어먹다’라는 과격한 뜻을 지닌 동사를 쓰셨으니 그들이 느끼는 거북함과 불편함이 꽤나 컸을 겁니다.
그런 모습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는 그분의 진짜 제자였다면, 그분의 가르침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배척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때까지 묻고 또 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들 잇속만 채우려고 했을 뿐 그분 말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안에 담긴 의도와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도 의지도 없었기에, 그 말씀이 자기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분께 등을 돌립니다. 그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그것이 몸과 마음에 가져다주는 유익함을 제대로 누릴 수도 없지요.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여기서 ‘거슬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알아듣기 어려운 말, 의미가 모호한 말을 하셔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신 게 아니지요. ‘좋고 나쁨’을 자기 기준으로 따지는 교만함 때문에, 입맛에 맞는 말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협함 때문에, 그들 스스로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편식이 심한 아이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 건 엄마가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입에 맞는 것만 골라먹은 그 아이의 고집 탓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몇 주 동안의 가르침에서 세속적인 물질로서의 ‘빵’이 아니라 당신의 ‘살’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명에 따라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면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듯이, 우리가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곱씹으며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실천한다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인간의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 생기기도 했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쓸 모 없다고 하신 건 ‘몸’(body)’이 아니라 ‘살’(flesh)에 해당합니다. ‘몸’은 머리 가슴 팔 다리 같은 우리의 ‘지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 종말의 날에 이 지체들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살’은 우리가 다이어트를 할 때 빼는 바로 그 살을 가리킵니다. 음식에 대한 과한 욕심 때문에,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한 나태함 때문에, 몸을 필요한 만큼 움직이지 않은 게으름 때문에 내 몸과 영혼에 달라붙어 나를 비대하게 만드는 살은 구원에 아무 쓸모 없을 뿐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에도 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몸과 마음에 그런 살들이 달라붙지 않도록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영혼의 다이어트’는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억지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강한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열심히 노력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너희도 저 사람들처럼 나를 통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고 싶으냐? 그러다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며 나를 떠날 것이냐?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신앙을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믿음은 본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니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한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무나 당신 사랑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스스로의 의지로, 철저한 순명으로 응답하며 따른다면, 그분께서 풍성하게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받아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깊이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리 떼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양떼인 자신은 참된 목자이신 주님 곁에 딱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신 예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며 그분께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금새 실망하여 떨어져 나가는 ‘어중이떠중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예수님 곁에,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된 ‘제자’가 될 것인가는 베드로처럼 참된 믿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요. 군중들은 먼저 예수님이 표징을 통해 ‘알려주시면 믿겠다’는 태도로 임했기에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먼저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따랐기에 그 안에서 구원의 진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섭리는 알아야 믿어지는게 아니라 믿는 만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만큼 내 안에서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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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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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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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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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연중 제21주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삶
<2024.8.25> 아침을 여는 묵상 (렘 52:12~34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삶❞
❚ 최후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성경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려야 합니까?
➲ 하나님의 동행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12~23절).
바벨론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성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는 백성과 항복한 자들과 유다의 다른 지역에 남은 자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과 밭을 가꾸는 농부가 되게 하였습니다(12~16절).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서 금과 은, 보석, 값나가는 좋은 물건들을 모조리 약탈해 갔습니다(17~19절). 솔로몬이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은 장대하며 아름다웠습니다. 귀한 보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으며 예배에 쓰이는 도구들 조차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20절).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신기루 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21~23절).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했던 예루살렘은 이제 이방인 군대의 발아래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증한 행동들로 인하여 성전에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마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파괴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분명히 선언되었지만, 믿음이 없던 그들은 말씀을 외면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더욱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부귀 영화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더욱 값지고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이 떠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파괴와 약탈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의 참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24~30절).
바벨론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파괴한 후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지도자들을 모두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때 잡혀간 사람들은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 성전 문지기 세 사람, 일부 고관들 및 평민 60명입니다(24~25절). 바벨론의 왕은 그들을 하맛 땅 리블라에서 모두 처형하고 살아남은 백성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26~27절). 세 번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백성은 총 4,600명에 달했습니다(28~30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었으나 죄로 인해 이방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느낀 치욕과 모멸감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권세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하나님과 죽음 앞에서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의 긍휼하심이 임하여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31~34절).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 간지 37년째 되던 해에 에월므로닥이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습니다(31절). 에월므로닥이 여호야긴에게 친절하게 말했고, 다른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32절). 그는 죄수의 의복을 벗고 평생 동안 바벨론 왕과 함께 식사를 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죽는 날까지 채워 주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33~34절).
완전히 멸망하고 초토화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화야긴 왕의 회복은 기적 가운데 기적이고, 민족 회복의 새 희망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에 피어난 꽃처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 인생의 처음과 나중을 완전히 설계하시고 운행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까지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넘어지고 쓰러질 때라도 하나님을 믿고 일어설 때에 참된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아침이 오기까지 하나님의 돌보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인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원한 세계의 주인이 되시며, 인생에 참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다가오기까지 하나님의 돌보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인내하므로 소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52:12~3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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