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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의로운 자가 되는 길
로마서 3:21-28
법정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재판관은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어떻게 판결하느냐에 따라 수 천 만원에서 수십억의 재산이 왔다 갔다 합니다.
명예가 실추되기도 하고 지위가 상실되기도 합니다.
선거법 위반으로 100만 원 이상의 판결을 받으면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직이 상실됩니다.
100만원을 선고하느냐 90만원을 선고하느냐에 따라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직이 유지될 수도 있고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재판관이 어떻게 재판하느냐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재판관이 죄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법정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집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판결하시느냐? 에 따라 인간의 역사와 운명이 결정되어 집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이 귀족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 때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씁니다.
이 글을 해석하면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예언대로 이루어져 바벨론은 망하고 메대와 바사가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시는 재판장이십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보이면 왕을 폐하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7편)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벌에 들어갈 자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재판관이 되시고 나라와 민족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없는 의로운 자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간혹 보면, 법 없이도 살 사람같이 여겨졌는데 법정에서 구속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죄를 선언 받고 풀려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데요,
어째든 재판장한테 죄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없다, 의인이다.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을 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시고 그 재판의 결과에 인간의 운명이 갈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삶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유의 재판관으로 믿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과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죄인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고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이 별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했는데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도덕적으로 선행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아서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계에서 큰 존경을 받았던 성철 스님이 계셨는데요, 이 분은 출가하고 난 후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대단한 고행을 한 분입니다.
결혼 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한 후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십 육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습니다.
팔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이 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이 있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네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나니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나는 한 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고백이 평생 수행을 쌓았던 분의 솔직한 고백이며 이 분이 훌륭한 것은 이런 고백을 솔직하게 하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수양을 많이 쌓고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했던 사람의 마지막 고백이 이 정도라고 하면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도
성경에서 안 된다고 하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중세교회는 고행을 해라. 선행을 해라. 헌금을 많이 해라. 면죄부를 사라,
그러면 너희가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기에 그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런 것으로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절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외쳤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2. 성경은 인간의 노력과 고행으로 될 수 없는 의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했고요,
22절에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고 양심이나 도덕으로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의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예수님이 우리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속량은 대신 지불한 돈이나 대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제도가 있었을 때 값을 치르고 사면 그 노예는 산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면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주인이 노예를 해방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노예로 삼지 않고 해방시키겠다. 너는 이제부터 자유인이다’ 하면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되고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2-2, 이 속량을 다른 말로 화목제물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25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화목제물은 구약시대에 희생제사에서 연유된 말인데, 구약시대에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짐승을 가지고 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가 짐승에게 전가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나 대신에 짐승이 죽음으로 나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대신해 죄의 값을 치루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죄 값은 우리가 치루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대신해서 치러 주셨기에 우리는 치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죄의 대가를 받지 않고도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을 열어놓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의롭게 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의 값을 치루지 않고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법칙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의로운 자가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고행과 선행과 수행을 쌓아도 될 수 없는 의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의의 법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죄를 사함하고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를 믿을 때 만유의 재판장이 되신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를 믿을 때 의인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가장 복되게 사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자가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도 의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인의 삶을 살아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될 때 의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간단한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간암 말기라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당장 입원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고, 수술을 해도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서 병원으로 왔습니다.
너무 멍해서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남편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습니다.
가면서 ‘내가 회개하지 못한 게 무언가, 혹시 나한테 갚지 못한 빚은 없는가, 이대로 하나님 앞에 서도 괜찮은가,’
‘남은 6개월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대로 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온통 마음이 집중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골똘하게 하면서 병원에 도착했는데 또 한 번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습니다.
간호사가 남의 차트를 가지고 실수를 했다는 겁니다.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는 간호사를 뒤로하고 다행이구나, 살았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나이도 이제 50이 다 되어 가는데 오래지 않아서 자신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았구나 하고 끝난 게 아니라 언젠가 겪을 일을 연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이 집사님이 경험했던 대로 오직 하나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도 괜찮은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았는가?’ 그것밖에 다른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판단하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의인이 되시고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