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 (1471-1541)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으며,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의 건설자이다.
그는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이다. 피사로는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살게 되었다.
피사로는 1509년 11월에, 1513년에 또다시 항해단에 입단하여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1513년에는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들 중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모험을 통하여 식민지의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되었고,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한편,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1524년과 1526년에 각각 한 번씩 원정대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는데,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향해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여 나선다. 그는 지원부대 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일부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모두 불러모은 후 1530년에 파나마를 떠난다.
당시 잉카 제국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1532년 11월에 피사로 일행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되며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에 가득 들어찰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으나 1533년에 피사로에 의해 사형당하고 만다. 1535년 1월에 그는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를 세웠으며 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다. 알마그로와 내분으로 그를 죽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이 1541년 6월에 피사로를 리마에서 살해함으로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도 끝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묻혔다.
(피시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당시에 남미로 모험을 떠난 사람은 모험가가 아니고, 일확천금을 꿈꾸고 배를 탄 양아치에 가까운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만행이 오늘까지도 남미에 비극의 역사를 만든다.)
**남미와 미국
1) 먼로 독트린
남미가 1810년 이후, 독립을 이루어 갈 때 미국은 조금 일찍 독립하였다고 강국이 되어 있었다. (강국 행세를 한다.)
1823년 — 미국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가 ’남,북 아메리카에 대해서 유럽은 간섭하지 말라‘라는 선언을 한다
.(먼로 선언)
==> 이것을 잘 읽으면, 미국이 유럽분쟁에 끼여들지 않겠다는 것이기보다는 남미는 나의(미국) 밥상이니, 유럽은 숟가락 들고 껄떡거리지 말라는 선언이다.
’먼로 선언‘은 미국이 미주에서 치루는 몇 차례 전쟁에서 유럽의 간섭을 물리치는 지침이 되었다.
예로서, 니카라과가 미국을 벗어나려고 할 때 미국은 마음놓고 행패를 부릴 수 있었다.
(입맛에 맞는 친미 정부를 앉혔다. 친미 정부는
대체로 군인이고, 폭압정치를 했다.)
(*니콰라과의 경우 미국의 식품회사가 니콰라과 농업의 80% 가까이를 장악하고(면화, 커피 등), 착취에 착취로 피를 빨았다. 농민들이 저항하자 미국의 식품회사는 CIA에 부탁하고, CIA가 우익 군부를 움직여서 강제로 진압하여 —폭압정치를 편다.
이것은 미국정부의 정책이 아니고, 식품회사와 CIA가 저거끼리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고 한다.)
보수 군사정권이 폭압 정치를 하자 — 민심이 떠나고
게릴라가 설쳤다.(반미, 반 군사 독재가 구호이다.)
==> 20세기에 남미가 반미 사회주의 열풍이 거세게 분(게릴라 전, 반정부 투쟁 등) 원인이 되었다. (이후의 미국-멕시코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은 나중에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