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결의문] 저는 오늘 반성과 연대의 의미로 삭발을 합니다 / 김재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이 3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에 대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답변을 촉구하며 매일 아침 8시, 3호선 경복궁역 7-1 승강장(안국역 방향)에서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5월 6일부터는 장소를 바꿔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에 대한 기획재정부 답변을 촉구하며 삭발 투쟁을 이어갑니다. 장소는 윤석열 정부의 집무실이 있는 용산에서 가까운 지하철역 4호선 삼각지역 1-1 승강장(숙대입구역 방향)입니다. 5월 27일부터는 삼각지역 1·2번 출구 개찰구 근처에 설치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에서 삭발 투쟁을 진행 중입니다.
비마이너는 삭발 투쟁을 하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투쟁결의문을 싣습니다.
김재환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삭발하고 있다. 사진 이슬하
2009년 처음 우리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동지들은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탈시설-자립생활 지원을 요구하는 투쟁을 하고 있었고, 저는 먼발치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한 장애인단체와 인연이 돼 장판(장애인운동판)에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3년 전 처음 봤던 동지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장애인 당사자들이 처절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모습은, 그전의 제 삶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어디서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어쩌면 제 관심 밖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장애인은 ‘불쌍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느리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처음 마음도 ‘시혜와 동정’의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뚤어진 저의 생각을 바로잡아준 사람들이 지금 같이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입니다. 이들은 제게 세상이 알려주지 않았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해줬으며, 누구에게나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알게 해줬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해줬습니다.
문애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김재환 활동가가 삭발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이슬하
삭발 중 생각에 잠겨있는 김재환 활동가의 모습. 사진 이슬하
김재환 활동가가 김진석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의 연대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이슬하
항간에는 우리의 투쟁이 특정 장애인단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이야기가 떠돕니다. 만약에 우리 동지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활동해왔다면, 굳이 욕을 먹으며, 경찰의 방패에 가로막히면서까지,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 속에서나, 그 긴 세월 동안 지난한 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투쟁을 통해 한겨울 보일러가 터져서 혼자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의 이야기를 알렸고, 지하철역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어간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알렸고, 살인적인 업무 강도로 끝내 일자리도 자신의 삶도 꺾어버린 장애인의 이야기를 알렸고,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자신의 이름도 역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삶의 벼랑 끝에서 가족이 가족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참한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더 이상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아니 함께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발을 마친 김재환 활동가의 뒷모습. 질끈 묶은 머리띠가 보인다. 한 사람이 그의 앞을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사진 이슬하
김재환 활동가가 삭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이슬하
이런 일들은 자신의 안위와 욕망만을 좇는 어느 대표님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들이겠지요. ‘공정과 상식’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윤 대통령님! 당신이 보시기에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삶은 공정한가요? 이 사회 전 영역을 통틀어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요구하는 장애인권리예산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더 이상 이 나라가 장애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장애인의 삶에 꼭 필요한 예산을 보장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공정’이고 ‘상식’ 아닙니까?
우리는 기획재정부의 책임 있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과 장애인복지법이 명시하고 있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장애인권리예산으로 응답하길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삭발식을 마치고 혜화역으로 이동하는 지하철 안. 승객들은 저마다 스마트폰과 종이신문을 보느라 고개를 내리고 있다. 양쪽에 앉아있는 승객들 사이로 휠체어에 탄 활동가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그 줄의 끝 양옆 출입문에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의 모습이 보이고, 그 가운데 김재환 활동가가 정면을 응시하고 서 있다. 사진 이슬하
저는 오늘 장애인의 삶과 죽음에 무지했고 애써 외면했던 과거의 저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또한 장애인의 생존을 위한 권리예산이 보장되는 날까지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의미로 삭발을 합니다. 제게 동지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