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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세다의 맹인을 고치심
막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2-26 /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시다] 일행이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를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는 그 맹인의 손을 이끌고 마을 밖으로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셨다. 그러고는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자 24) 맹인은 주위를 살펴보며 `예, 사람이 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게 보이지는 않고 마치 나무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열리고 시력이 안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똑똑하게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벳새다에 들어가십니다. 그 곳에서 한 맹인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두 번의 안수를 통해 밝히 보게 하십니다.
한 맹인을 만나시다(22-23) 예수님은 제자들과 벳새다에 이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4절을 보면 빌립, 안드레, 베드로가 벳새다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벳새다는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벳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사람들은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고쳐주기를 구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에게 손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원했던 데는 과거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이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말 못하는 벙어리를 고칠 때(막 7;33), 나병을 고칠 때(마 8;3), 맹인을 고칠 때(마 9;29) 직접 손을 대시며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일반 서민들의 삶을 통해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삶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십니다. 소경의 손을 직접 잡아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맡겨도 되지만 예수님이 소경의 손을 직접 잡아 주셨습니다. 이 은혜의 접촉은 맹인에게 앞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게 합니다.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24-26) 23절에서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해 주십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침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 능력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최대한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얼마나 역사적인 질문입니까? 지금까지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맹인에게는 천만뜻밖의 질문입니다. 맹인이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맹인의 눈이 열렸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맹인에게 안수합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특이하게 예수님이 두 번의 안수를 통해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신앙의 성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히 모릅니다. 제자들은 점점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갑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사건이 반복되었지만 17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제자들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신 책망에는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 공동체에는 아직 모든 것을 밝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어떤 섬김이 있어야 할까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주어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값 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 설 교 >
무엇이 보입니까?
이용효 목사
어떤 회사에서 판매실적이 오르지 않아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사원들은 각자 나름대로 그 원인을 분석해 내 놓았습니다.
사장이 다 듣고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 그 위에 매직으로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 손수건을 자세히 보십시오. 여기에 무엇이 보입니까?"
사원들이 대답했습니다. "까만 점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여기에 무엇이 보입니까?"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말합니다.
"여러분! 왜 점만 보고 흰 바탕은 보지 않습니까? 항상 까만 점보다는 보다 큰 흰 바탕을 보는 눈과 자신감을 가져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른 안목과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적은 것을 보고 낙담하는 것보다, 넓은 것을 보고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검은 작은 점을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넓은 흰 바탕을 보는 사람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보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어 봅니다. 냄새를 맡아 봅니다. 옷을 입어 봅니다. 음식도 먹어 봅니다. 사랑도 해봅니다. 감정도 느껴 봅니다. 잠도 자봅니다. 꿈도 꾸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 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심 있는 분야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축구선수는 축구공을, 야구선수는 야구공을, 골프선수는 골프공을 바라봅니다. 곤충학자들은 곤충을 세밀히 바라보고, 천체과학자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 되고 그들의 성공이 됩니다.
따라서 무엇을 보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똑같이 밥을 먹고, 한 시대를 살아도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1. 지식의 눈을 열어 만물 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1. 자연 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깨닫기만 해도 이 땅에서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에 우리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편리하게 살고 풍성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하여 두셨습니다.
그것들을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자, 발명자가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보았습니다. 와트는 주전자에 물이 끓어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증기 에너지를 보았고 증기기관차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번개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 강력한 에너지인 전기를 보았습니다.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숨겨두신 선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눈이 열려도 이 땅에서 큰 인물이 됩니다.
일본의 <마쯔시다 고노스께>는 배우지 못한 무학자요, 산골출신입니다.
시골의 한 자전거 점포에 취직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전거 고치는 법을 배우며 기계의 신기한 작동법에 접근해 갔습니다. 어느 날 오사까 시내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시내 구경을 가는 것이니 흥분이 되었습니다. 번화한 거리들, 건물들, 사람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마쯔시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 막 오사까 시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전차였습니다. <마쯔시다>는 그 큰 쇳덩이 차가 전기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가 본 것은 전차가 아니라 전기의 힘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전기다!' 앞으로 자기 인생을 전기에 관한 일에 투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오직 전기 분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결국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파나소닉 회사의 창업주가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파나소닉 사원들은 <마쯔시다>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한 사람들은 보는 눈이 남다른 사람들입니다.
빌 게이츠는 그 당시 관공서에서나 사용하고 있었던 덩치가 큰 컴퓨터가 앞으로는 모든 가정의 책상 위에 놓여 질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전 세계에 PC시대를 열어 놓았습니다.
록펠러는 장래의 세계가 석유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세계가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미국에도 석유가 있었지만 더 많은 물량 확보를 위해 중동의 석유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제일의 석유재벌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소재라도 보는 눈이 있는 작가, 감독, 연출자가 만든 소설, 드라마는 훨씬 재미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안수하시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의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때 그의 눈이 떠져서 만물이 밝히 보였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질문하십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보는 만큼 살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멀리, 깊이, 높이 보는 사람은 깊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자신의 과거 상처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남의 잘못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 가진 것만 바라보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주님이여 나에게도 안수 하시어 나의 어둡고 희미한 눈을 뜨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주님이 다시 안수하자 이번에 주목하여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물을 주목하여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주목하여 바라보십시오.
지도자나 설교자를 주목하여 바라보십시오. 지식의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2. 비전의 눈이 열려 이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의 안목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진 것이 비전(vision)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비전이 없는 집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비전은 바로 텔레비전(tele+vision)입니다.
텔레(tele)는 '멀리' 라는 뜻이고, 비전(vision)'은 '본다.'라는 뜻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식들을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텔레비전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전은 멀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미국 알라바마주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병을 앓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 고통의 삶을 살다가 설리번 선생을 만나 사랑의 교육을 받고 난 뒤 전 세계인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력은 있는데 꿈이 없는 사람이다.” “꿈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 박물관의 그의 사진 밑에는 “그는 꿈꾸는 사람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흑인들이 존경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흑인들이 차별을 받고 사회로부터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의 의를 들고 일어나서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비폭력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1964년 노벨평화상 수상) 목사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분이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에서 설교하시는 내용의 제목이 "I have a Dream one day"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니다.
“나의 흑인 자녀들이 백인 자녀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꿈을 꿉니다. / 놀이터에서 함께 웃으며 노는 꿈을 꿉니다. / 나의 흑인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될 날이 올 것을 나는 꿈꿉니다. / 절망의 산에서 나는 희망의 돌을 캐냅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총탄에 맞아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믿음으로 바라본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가 꾼 꿈 그대로 지금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는 흑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 할 때 주님이 여러분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불어 넣어 주시는 소원이나 비전을 붙잡으시고 이 한 해 그 비전에 사로잡혀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의 눈이 열려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주시기 전 믿음으로 먼저 보게 하십니다.
롯이 요단 평야를 향해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3:14-15절에“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니 가나안 땅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땅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에게는 한 평의 땅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눈에 그의 자손이 그 땅에서 번성하여 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밤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5절에“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처음에는 하늘에 총총한 별들 만 눈에 들어왔지만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바라보자 그 수많은 별들이 자기를 향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이 힘들고 환경이 어둡다고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보이는 것 없고, 들리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꾸는 꿈은 반드시 현실이 됩니다.(막11:23,24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증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1-2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지금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 전에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4장18절 19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기록하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11:12에 보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같이 생육하였느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본 아브라함은 100세에 기적의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 몸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지금 세계 인구 중 30억 이상이 그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받은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에서 풀려나 부요하게 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 근면 성실하여 성공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눈이 열려 말씀이 당신에게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4. 영안이 열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지난 달 20일 할리우드 스타 <브리트니 머피>(Brittany Murphy)가 32살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해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지난 4일 세계적인 재벌 <존슨 앤 존슨>의 회장인 로버트 우드 존슨 딸이요 상속녀인 30살 <케이시 존슨>이 자기 집에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나이와 관계없이 다가오고, 세상의 성공과 실패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된 사람은 죽음의 준비를 잘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 바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굴 가운데 하나는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한 이집트의 왕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의 발견입니다.(1922년) 약 3300년 만에 처음 무덤의 문을 연 카터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나 점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무덤 안의 것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덤 안에는 황금이 번쩍이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의 시신은 세 겹의 관 속에 있었는데, 맨 안쪽 관의 순금만 해도 약 114kg이었습니다. 바로의 관에 사용된 순금이 모두 300kg 넘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관 이외에도 약 5000여 점의 전차(戰車), 아름다운 가구, 장신구와 공예품 조각 등이 발견되어, 당시 이집트 왕실이 얼마나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의 시신 옆에는 황금으로 만든 셀케트 신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무덤을 아무리 황금 보석으로 치장해 놓은 들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 속에는 생명이 없고, 죽음만이 지배하는 무덤일 뿐입니다. 시신이나 해골에서 무슨 행복이 있으며, 소망이 있겠습니까?
사실 이집트의 투탕카멘왕과 동시대의 왕인 이스라엘의 솔로몬은 그 보다 더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그가 말년에 고백한 전도서의 글을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삶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왕자로 있을 때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었습니다. “왕자님! 왕이 되신 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정복하여 통일 시키겠습니다.” “그 후에는 요?” “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요?” “이집트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요?” “인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요?” “음... 죽겠지요” “왕자님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을 필요가 뭐 있나요. 지금 여기서 죽으면 되지 않나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생이 정복자가 되고 강력한 권력을 가졌어도 하루아침에 죽음 앞에 무너지는 허무한 존재임을 알고 그것을 제자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죽음을 앞에 놓고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만 시한부 인생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들입니다. 조만간에 저도 가고 여러분도 갑니다. 문제는 죽음 후 영원한 세계데 대한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 하늘나라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자이고 진정 성공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14:1~6절)
고린도후서 4:18절에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은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서1:18,19절에“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존슨 목사의 회고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맏아들 하워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이 감도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녁 식탁에서 둘째 아들이 불쑥 말했습니다. “하워드형이 하늘나라에 가서 처음 크리스마스를 지내겠지?” 그랬더니 막내가 얼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형!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하늘나라에선 매일 크리스마스라고----” 어린 막둥이의 말을 듣고 존슨 목사는 잠에서 깬 듯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는 영영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는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존 뉴턴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망원경으로 수만리 떨어진 천체를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천국을 뚜렷이 본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잠깐 지나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하루아침에 사라질 세상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우리의 영원한 집인 천국에 고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식의 눈이 열려 자연 만물 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전의 눈이 열려 보다 나은 세상과 자신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egin Again
양은익 목사
Begin Again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많이 듣는 단어라 영어로 그냥 썼습니다. 제목 안에 오늘 본문의 뜻이 오롯이 들어있으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알고 받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 뭐하세요? 라고 묻는 문정희 시인의 시가 있는데 한 대목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누구나 다니는 길을 다니고, 부자들보다 더 많이 돈을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데 살아 있지 않아요. 화를 내며 생을 소모하고 있답니다. 몇가지 물건을 갖추기 위해 실은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어요. 충혈된 눈알로 터무니없이 좌우를 살피며 가도 가도 아는 길을 가고 있어요’(문정희, 요즘 뭐하세요? 부분)
요즘 뭐하니! 물으니까 돌아온 대답입니다. 누구나 가는 길 자신도 다니고 있고, 충혈된 눈으로 가는 길 매일 똑같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가는지는 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른 길도 있고, 다른 세상도 있는데 많을 것을 뺏기는데도 그 길만 고집하면서 사는 게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니냐! 하는 시인의 일갈(一喝) 입니다.
저도 물어보겠습니다. ‘요즘 뭐하세요’ 좋은 대답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만, 다른 길, 다른 세상이 있으니, 눈 환히 뜨고 보라는 주님의 도전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 보십시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안수 하심(touch)으로 보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 한번도 가지 않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새로웠겠습니까? 물론 이 사람은 단박에 새 길로 들어선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다가 나중에 가서야 환하게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환하게 보고, 새 길 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미련도 많고, 철도 늦게 들기 때문에 새 길 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사건의 자초지종을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뱃새다에 도착하셨는데, 뱃새다 오기 전에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들 때문에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셨습니다. 알만한 때가 됐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에 탄식하시다가 벳새다에 도착하신 겁니다.
그 상태에서 ‘보지 못하는 이’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귀먹고 말 못하는 이를 고쳤으면 보지 못하는 이도 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온 겁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이 반응해 주십니다. 안수하므로 고쳐 주시는 데, 처음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병자든 한번에 해결하시는데 이번에는 한번이 아니고, 두번에 나눠서 고치십니다.
첫번째 안수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보이긴 보이는데 희미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꼭 나무들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한번 더 Touch 하십니다. 25절 보십시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두 번째 안수에서 완벽하게 보게된 겁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한번으로도 충분히 될 일인데 두 번에 걸쳐서 한 이유? 제자들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보지 못하는 이’를 치유하면서 제자들을 향한 액션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떤 제자들입니까? 희미하게 보는 제자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눈먼 이를 고치면서 도전 하는 겁니다.
‘눈 활짝 떠 확실하게 보라. 이게 너희들의 모습이다’ 8:29절에 보면 유명한 주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내가 누구냐?’ 온전하게 알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의 소명은 따르는 이를 온전히 아는 것, 밝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지 못하면 헛발질 할 수 밖에 없는데, 주님은 헛발질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Begin Again. 다시 시작하라’ 이게 두 번 안수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뜻입니다.
25절에 나오는 ‘다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어떤 눈입니까? 사람인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는 잘 안보이는 눈인데, 바로 그 눈에 ‘다시 안수해서’ 밝게 해 주셨습니다. 속터지게 하는 제자들이 무너지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다시’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너질 때 마다 ‘다시’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이 ‘다시’라는 말을 우리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만 ‘다시’의 기회를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다시’의 기회를 주셨고, 앞으로도 주실텐데 다시를 가진 자의 삶을 우리도 살아내야 합니다.
‘다시’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다시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는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일어날 수 있고, 너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살아나지만,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살려내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단어들 보십시오. 전부 ‘다시’, 영어로 하면 Re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회개repentance-뉘우쳐서 새 마음 갖는 것, 중생,born again-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부활resurrection-다시 살아나는 것, 재림come again, return -주님 다시 오시는 것.
‘다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 ‘다시’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 활짝 떠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다시’라는 넉넉함과 인내와 용서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의 힘을 주시는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보게되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장면 잘 보게 되면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마음과 조건을 볼 수 있습니다.
(1) 동행하라(22절)
첫번째 조건은 동행입니다. 함께 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어야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만들어 집니다. 동행의 마음이 ‘1’도 없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은’ 힘들어 집니다. 22절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새번역). 눈먼 사람을 누가 데려옵니까? ‘사람들이’ 데려 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께 와서 도와 달라, 보게 해달라 간청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 영혼을 위해서 기꺼이 동행 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희생과 사랑으로 함께 동행해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동행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어떤 시작이든 시작 할 때는 동행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지금 ‘동행해야’ 할 사람이 누군가 살펴보시고 보이면 ‘화끈하게’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2) 익숙한 것보다 주님을 의지하라(23절 上)
다시 시작할 때 필요한 두 번째 조건은 2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주님께서 마을 밖으로 나가신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맹인의 입장에서 보면 마을 밖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입니다. 마을 안에서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겠지만 마을 밖은 낯설고, 위험합니다. 가기 싫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손 꼭잡고 마을 밖으로 가십니다. 의미있는 모습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새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불안이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방해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주님에 대한 깊은 의지와 믿음입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익숙한 것보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손잡아 주신다는 ‘아이’ 같은 믿음. 다시 시작할 일이 있는 분들은 이 믿음 꼭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는 일에 담대한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3) 감정을 주의하라(23절 中)
세번째 조건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어떤 다시 시작이든, 다시 시작할 때는 감정적으로 취약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하기 쉬운 때이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감정에 주의하고, 감정을 잘 다스려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3절 중간에 보십시오. 낯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신 주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손 꼭 잡고 가시니까 대단한 기대를 하고 갔을 것 같은데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두 눈에 침을 뱉어 버리십니다. 치유 과정에 나온 행동이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여러분이 당사자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에 침을 바르는 시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 침을 뱉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근데 주님은 이 사람의 가장 아픈 곳, 가장 열등한 곳인 안 보이는 눈에 ‘퉤’하고 침을 뱉어 버렸습니다. 갑자기 당하는 일에 기분 좋을리가 있었겠습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인데,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의도 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쉬운 순간인데 참아냅니다. 감정은 다시 시작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과 의례같은 복병입니다. 다시 시작하려면 자존심 상하는 일 많고, 속 상한 일들이 무궁무진 합니다. 이 순간을 믿음으로, 통 큼으로 견뎌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지면 마음이 닫히지만, 이겨내면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이 열리면 열린 만큼 기회가 많아집니다.
(4) 마음을 열어라(23절 下~25절)
이 사람 보십시오. 부정적인 감정을 이기니까 주님과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사람은 감정이 상하면? 입 다물고 말 안합니다. 근데 이 사람 보십시오. 모욕적인 감정을 이겨내니까 예수님과 주고받고 합니다.
침 뱉고 안수한 후에 주님 물어 보십니다. ‘뭐가 보이니? 보이는 게 있니?’ ‘예 보입니다. 근데 사람이 나무 같은 것들로 보입니다’ ‘그래 다시 안수할게’ 그래서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마음 열고 하는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막힐수록 마음 열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기도로 대화하고, 사람에게는 마음으로 대화하고. 그래야 Begin Again이 일어납니다.
다시 시작의 네 가지 조건 ① 동행하라 ② 익숙한 것 보다 주님을 의지하라 ③ 감정을 주의하라 ④ 마음을 열라. 담으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24:16)고 했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의인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