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0
4월17일[부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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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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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44CYmB09pU
[서울대교구 김남혁 대건안드레아(자양2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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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에는 더 이상 참척(慘慽)의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어르신들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느낌이 든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슬픔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 참혹하고 깊은 슬픔을 일컫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으로 낙화한 지 십 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냐?'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거냐?'며 투덜거립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돌아다니는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아있는 부모나 가족은 아직도 참척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잠 못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헤아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섣부른 위로의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옆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혹독한 고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발산하며 애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가 막히는 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이를 앞세우는 큰 슬픔에 힘겨워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한줄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그 슬픔 그 고통 위로가 안되니, 어떻게든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위로를 받으시고,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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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신부님의 기도레슨(2)
<무엇을 청할 것인가?>
기도하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청원기도’가 아닐까요? ‘과연 무엇을 청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 보았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청하기만 해 왔습니다.
때로 그 청하는 바가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어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청해서 하느님을 곤혹스럽게 해드린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어떤 청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너무나 이기적인 청이어서 슬펐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 내용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우선 내 가족, 내 자녀, 내 부모의 안녕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 학업, 내 사업의 번창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입니다.
내 앞길, 내 건강, 내 계획을 보살펴 달라는 청,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지요. 우선 ‘나’의 만사형통, 내 가족의 안녕, 우리 가문의 번성, 우리고장의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이웃을 위한 봉사도 가능하고, 보다 나은 세상 건설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기도 지향이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기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번에 구입한 열 장의 로또 복권이 꼭 당첨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9일기도, 목 좋은, 그래서 투자 가치가 높은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 했는데 꼭 당첨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미사예물,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에 매몰된 세상이 아니라 영으로 무장되었기에 건강하고 건전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구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청하십시오. 부익부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극으로 치닫는 요즘, 마음이 너무 착해서, 약아빠지지 못해서, 약삭빠르지 못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십니까?
가슴이 많이 아픈 몇몇 신자 분들과 소주잔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모질지 못해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한 번 더 양보하고, 한 걸음 더 물러나다보니 결국 일이 커지고 말았더군요.
착해빠져 탈인 형제들, 모진 마음먹지 못해 괴로움을 홀로 떠안고 가는 순박한 형제들의 눈망울 앞에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그저 힘들 내시라고, 언젠가 이 시련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하겠노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왕 기도할 바에 보다 열렬한 기도, 강렬한 기도를 바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7-8)
바람직한 청원기도가 지녀야 할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적극성이요, 열렬함이요, 간절함입니다. 기도하면서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 주시면 어쩔 수 없고 하는 식의 뜨뜻미지근한 기도는 바치나 안 바치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리는 청원기도는 이왕이면 뜨겁고 열정적이면 더 좋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하고 감정과 이성과 정신이 혼연일체가 된 최선을 다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현실에 맞부딪쳐 보십시오. 반드시 은총의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의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한 나병환자의 기도>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으로 판명되면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는데, 그가 추방되는 날은 장례식 날과도 같았습니다. 그날은 부부간의 인연, 부모자식간의 인연이 다하는 날로 간주 되었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크게 외치는데, 그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기도, 기도 중의기도, 기도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8,2)
나병 환자의 외침 안에는 우선 굳은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렬한 믿음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뜨거운 희망과 앞뒤 가리지 않는 집요한 청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외침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결과 즉각적인 예수님의 응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정녕 필요한 것은 바로 뜨거움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진정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감동입니다. 열렬함입니다.
이런 자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기적같은 치유가 선물로 주어지며 급격한 삶의 변화가 뒤따릅니다. 인간적 논리나 사고구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현상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 안에 있는 ‘기도심’을 깨닫게 되나 봅니다. 나병 환자는 하나의 큰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 안에 기도를 담고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기도는 바위로 막아 놓은 샘과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를 치워 버리셨으며 그때부터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마음 안에 놓여있는 큰 바위 하나를 치워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나병환자는 자신 안에 이미 형성 되어 있던, 그러나 막혀있던 기도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줄기는 나병 환자의 입에서부터 콸콸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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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HpxAnPi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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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이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 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워진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고,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이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 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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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분들과 대화 중에 ‘서울 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서울 신학교를 나온 신부님들이 인품이 좋고, 사목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서울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군인들 중에도 해병대, 특전사, 공수부대 출신들이 있습니다. 일반 군인들도 나라를 위해서 복무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특수한 부대에서 복무한 군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과 명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는 전역 자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 중에서 ‘청년성서공부’를 했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먼 미국까지 와서 열심히 봉사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청년성서공부를 통해서 얻었던 신앙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꾸르실료를 체험했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분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원동력은 청년꾸르실료에서 신앙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에 근거한 교리와 신학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교계제도를 설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이단을 구별하였고, 세상의 논리에 대응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확립한 분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신앙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에 근거한 영성과 은사입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차원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에는 많은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 베네딕토,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영성과 은사를 정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영성과 은사를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영성과 은사가 없는 교리와 신학은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영성과 은사는 활력을 주는 기운과 같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없는 영성과 은사는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의 세력도 영성과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에서 벗어난 영성과 은사는 때로 이단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교리와 신학이라는 그릇은 견고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성과 은사라는 활력은 충만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신심단체와 함께 한다면 신앙생활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영성과 은사의 날개가 튼튼한 신앙인은 두려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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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35-40: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시다. 본래 죽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께서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참 생명을 주셨다. 그들은 성경도 알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37절)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37절)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명하신다. 당신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고 그 권능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하며 당신을 닮도록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바치셨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응답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유대인들은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 사도들은 정확하게 증언해야 했기에 보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완성될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께로 인도하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다시 살리시며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죽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주신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믿음, 곧 생명으로 넘어감이 첫 번째 부활이며,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음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고, 마지막 날에 참으로 부활하는, 구원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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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도대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오늘 복음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영원’으로 옮겨진 히브리 말 ‘올람’은 단순히 미래와 연결된 시간적 개념만을 뜻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충만을 뜻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충만함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이를 위하여 하늘에서 ‘생명의 빵’으로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충만을 체험하도록 움직인 이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교회의 성장과 함께 일어난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일곱 부제가 선발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하나였던 스테파노가 순교하였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는 스테파노의 장례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박해를 이야기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는 좌절과 끝이 아니라 교회의 단초를 견고히 다지는 시작임을 선언합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복음을 전하고, 이로써 하나도 잃지 않고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하느님의 뜻이 온 세상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역경과 박해, 걱정과 갈등 없이 사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사도들처럼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경이롭고 찬란한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 그 충만함이 곧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삶입니다. 복음의 ‘잃고 싶지 않다’(39절 참조)는 표현은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37절 참조)는 의미이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임을 알고 믿을 때 이러한 충만함(영원)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에게서 그 누구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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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6-40)
1) 여기서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보았다면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5장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라는 말씀이 있고(요한 5,36), 뒤의 10장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명합니다.
2)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은,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초대”입니다.(요한 3,35-36) “나에게 올 것이고”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0장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15)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가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에도 적용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3) 여기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따라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인데, 당신의 신성과 권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유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버렸습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자격 제한’은 있습니다.>
40절의 말씀은, 39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원’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영원’의 반대말은 ‘찰나’, 또는 ‘허무’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의 17장 3절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하느님,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고,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뒤의 8장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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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슨 뜻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내 뜻이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 뜻이라고 많은 말을 했고 또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뜻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뜻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다.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즉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만이 안다. 나는 내 뜻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이 무엇인지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의 성소요, 찾은 그 뜻을 사는 것이 나의 성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펼쳐야할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경우가 많이 있다.
나의 뜻이라고 고집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뜻일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리는 일이요,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게 하는 일이다.
유다인들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표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 동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혜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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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인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의 순명입니다. 곧 예수님의 뜻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합니다.
그렇게 당신께 오는 이를 물리치지도 않으시며,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순명 안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을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요한 6,40)이라고 말씀이 덧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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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주님!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그토록,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취미와 기호에 맞지 않다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그토록,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주며
그토록,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미처 믿지 못하여도 저를 믿으시고 아직 사랑하지 못하여도
저를 사랑하시니, 오늘, 제가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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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박해의 위기 상황에서도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교회의 간절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없애 버리려는 사울의 움직임이 대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되어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신자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이곳저곳에서 전하였고 뜻밖의 지역인 사마리아에서 큰 기쁨이 넘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 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서로 다른 곳에 지어 예배도 함께 드리지 않던 사이였습니다. 예루살렘을 갈 때도 일부러 돌아서 갈 정도로 멀리하던 사마리아 땅에 생명의 말씀이 전하여집니다. 일곱 봉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돋보입니다. 필리포스의 말에 사마리아인들은 귀를 기울여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들으면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되새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없애려는 사울의 악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부활을 체험하고 또 늘 희망하며 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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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빵은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밀 재배가 시작되면서 6천 년의 세월을 인류와 함께해 오고 있습니다. 빵은 서양의 표현에서 식량 전체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등장할 만큼 일반적인 음식이 되어왔습니다. 농토는 ‘빵이 나는 땅’으로, 농업은 ‘빵의 수확’으로, 가족은 ‘같은 빵을 먹는 사람’을 뜻합니다. 기근이란 빵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며, 밀밭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농업국인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발생 15년 전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일기 불순으로 수확이 감소 되어 곡물 위기를 맞아 빵 가격이 급등하자 베르사유를 향한 대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빵집 주인, 빵집 여편네, 빵집 사환놈’이라고 욕설을 해대며 ‘빵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를 들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는데 왜 이 난리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파리 시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평등·박애를 구호로 내건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으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아네트 왕비는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절대왕정 체제가 붕괴되었습니다. 당시 파리 시민에게 빵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먹거리가 아닌 목숨 줄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빵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로,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장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서 빵을 한 조각 훔친 죄로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여러 차례 탈옥으로 무려 19년 기간 감옥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인생의 막장과도 같은 감옥에서 가난과 배고픔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장발장이 범죄자로 낙인찍힌 빵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 엄청난 삶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빵 한 조각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빵이 바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뒤, 당신을 찾아 따라온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하고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고 알아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지 빵의 기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 물질에 갇혀 있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칠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애처로워하셨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다만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를 알아듣고,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6,27) 하고 묻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6,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6,39-40)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나를 받아들인 사람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받아들인 것이다, 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중적이고 반복적 강조법과도 같습니다. 즉,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과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 그리고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과 누구나, 라는 말 그리고 끝으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이며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내가 생명의 빵이다.”(6,36) 하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몸과 피가 바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며 음료이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의 음식이며 음료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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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영화 아이언 맨, 셜록 홈즈, 오펜하우어를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 것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때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고 하네요. “나는 마약의 힘으로 창의력을 높이려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와 마약치료센터에 반복적으로 드나들었고, 당연히 결혼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갱생 불가’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는 마약을 완전히 끊었고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끊기 힘들다는 마약을 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그는 버거킹 ‘치즈버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좋아해서 매장에 가서 주문한 버거를 입에 넣는 순간, 버거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버거 맛도 제대로 못 느낄 지경까지 몸이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가지고 있던 마약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면서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버거 중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마약을 선택했다면 순간의 쾌락에만 의존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버거를 선택했기에 건강해질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자주 서게 됩니다.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라는 선택입니다. 세상의 것은 분명 순간의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순간의 만족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선택하라고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을 통해 다시 살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 것에 눈길이 더 많이 가고,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욕심과 이기심만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에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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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서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의탁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아! 이 말씀이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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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가는 길>
요한 6,35-40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당신께 가는 길>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믿음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믿음입니다
희망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희망입니다
사랑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사랑입니다
정의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정의입니다
자유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자유입니다
해방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해방입니다
진리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진리입니다
평화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평화입니다
함께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함께입니다
살림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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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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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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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끝까지, 믿을 때까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어 하시는 말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이런 마지막을 우리가 좋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니, 저에게는 이중 감정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좋으나 마지막은 싫은, 천국은 좋으나 이 세상에서 이별은 싫은.
이는 마치 제주도에 가고 싶다면서 집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결국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이런 선택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선택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행이 되겠지요. 왜냐면 그것은 영원한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시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신 다음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주님 의지의 표시이고, 이는 최후 만찬 때에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마지막까지이고, 끝까지이며 우리가 믿을 때까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뜻이고, 그때까지 애쓰시겠다는 뜻이니 그 사랑과 사랑의 의지를 크게 느끼고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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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6,40)
<영의 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40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 때문이고, 이를 실천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믿는 이들을 이제와 영원히 살리는 것입니다.
세례 예식 때 사제와 예비신자들이 주고받는 첫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인데, 이는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영적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권고1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6-7절)
이번 주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의 말씀(6,1-8,8)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뽑힌 봉사자인 일곱 부제 중에 한 명인 스테파노에 관한 말씀입니다.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과 성령이 충만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뵙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죽지 않고 사는, 마침내는 영원히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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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w030yAaZH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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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 40)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용서와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을 바치십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영원한 믿음을
실천하십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참된 믿음을
보게됩니다.
뜻과 실천
믿음은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의 중심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시 살리려는
생명의 뜻입니다.
생명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믿음으로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끝내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늘도 믿음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영원한
믿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믿음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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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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