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래에 인용된 구절에 나타나듯, (대제사장에게) 매일 아침과 저녘마다 향을 피우라고 하십니다:
...
아침마다 ... 향기로운 향을 ... 사를지며
또 저녁 때 ...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 (출 30:7 – 8)
물론,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향을 피워서 올려 드릴 때—즉, 분향할 때—아무생각 없이 의식에 따라 분향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당연히 기도를 드리면서 분향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유대의 모든 의식은 기도와 함께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분향도 기도와 함께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분향에 드려지는 향은 성도의 기도를 의미 합니다—그래서 다윗이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시141:2, 표준새번역)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향이 성도의 기도를 의미 하는지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율법(의 제사법)에 의하면 분향은 아무나 해서는 안되고 아무데서나 해도 안됩니다—성소와 그 성소를 대체 했던 성전에서 제사장들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 했던 성소와 그 성소를 대체했던 성전은 다 천국에 있는 실제 성전의 모형이었습니다 (히 9: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셨던 그 실제 성전 대로 성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출 25:8 – 9, 40,
26:30, 27:8; 계 21:3).
그러므로 그 성소와 성전의 모든 기물들이 다 천국의 성전에 있는 기물들처럼 제작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즉, 그 기물들이 천국의 성전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에 의해 성소와 그 성소를 대체했던 성전에서 피워졌던 향과 그 향을 태우던 향로도 천국의 성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어딘가에 향과 향을 태우는 향로에 대한 언급이 있을 것입니다—있습니다: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5:7 – 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3 – 4)
그러므로,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나타난 것처럼, 제사장들에 의해 성소와 그 성소를 대체했던 성전에서 피워졌던 향과 그 향을 태우던 향로가 천국의 성전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 의하면, 천국의 성전에서 피워지는 향은 성도의 기도 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왕의 노래—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는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사실 입니다. 다윗왕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으로 상달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이 되기를 소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 아침마다 … 향기로운 향을 ... 사를지며 또 저녁 때 ...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 (출 30:7 – 8)라고 말씀 하십니다—매일 아침과 저녘마다 향을 피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과 저녘마다 향을 피우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와 그 의미에 나타나는 사랑을 이해 하실 것입니다 매일 아침과 저녘마다 기도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도 아니고 매일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그것도 하루에 두번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만큼 저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기 원하시는 이유에 대해 “사랑”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희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과 저녘마다 향을 피우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만큼 사랑하셔서 저희의 목소리를 자주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최소한 아침과 저녘에는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기도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사실 하루에 한번 하기도 힘듧니다. 특히 아침에—하루가 시작하는 싯점에—기도를 안하면 그날은 기도를 안하고 지나가게 됩니다—통계가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저녘에 기도하는 것은 더욱 힘듧니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침과 저녘마다 기도하면 더욱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 기도생활을 뒤돌아 봤습니다. 실제 아침마다 기도할 때보다는 아침과 저녘마다 기도할 때 더욱 깊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기도 했습니다. 실제 최근에 저녘시간에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가 아침보다는 힘들었지만 더욱 깊은 성령님의 임재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깨닭습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침과 저녘마다 기도하면 더욱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하루에 세번 기도한 사실이 성경에까지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하루에 세번 기도하기가 결코 말 같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받아서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일컫는 다니엘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부터가 기도생활을 재정비하기로 작심합니다.
물론…… 작심삼일이듯 그 작심이 오래 가지 않을 수 있어도…….
그 작심이 흐트러지질 때까지라도 저녘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심한 것이 흐트러지면 다시 작심하면 됩니다.
그렇게 ‘오뚜기처럼’ 일어서고 또 일어서면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번 기도하는 수준으로 자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최소한 아침과 저녘마다 기도로 분향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Dean
☞ 출처: Daum Café, ‘Dean’s Study (딘스 스터디)’ http://cafe.daum.net/deanjestory/CTuB/507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