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자들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주님께 초점을 두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성도의 삶은 세상의 비웃음을 사지만
주의 백성들만이 누리는 기쁨과 장차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의 종말을 알기에
노아처럼 묵묵히 방주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기주장의지와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판단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실 때,
정결한 마음이 되어 주의 말씀을 받아먹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 주해)
25~26절 : 이방인과 유대인 중에서 주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이 어떻게 긍휼의 그릇이 되었는가를 호세아서를 근거로 설명한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2:23)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호1:10)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므로 긍휼을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백성이 아닌 자였다. 즉 심판당하고 버림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거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이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이다.
그러나 한 날이 이르면 다시 ‘루하마’(긍휼을 얻다)와 ‘암미’(내 백성이다)라고 불러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나서야 불러주신다는 것이다.
27~29절 : 이사야서를 근거로 유대인의 남은 자가 구원 얻을 것을 말씀한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10:22~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1:9)
이 말씀은 주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한다. 즉 ‘남은 자’의 특징을 말함으로 ‘우리 모두가 남은 자가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겨진 씨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30~31절 : 그런데 의의 법을 쫓아서 달려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쫓아가지도 않은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의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행위로 얻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32~33절 :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여호와를 의지하여야 할 백성들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헛된 것을 의지하고서는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는 자들에게 대하여 심판하신다.
그 심판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한 돌을 믿어야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돌이 어떤 돌인가? 사람들이 볼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돌,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로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돌인 것이다.
이 돌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돌로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묵상)
‘남은 자’에 대한 나의 오해가 컸다.
처음 이 구절을 대했을 때 나는 자기의로 충만하여 내가 바로 ‘남은 자’라고 생각했었다.
행위적인 열심에 열을 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니, 내가 바로 거룩한 남은 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내심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누가 얼마나 대단해서 남은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남겨주시니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니 ‘남은 자’ 자체에 집중하여 그리될 것을 바라고 기대하고 우쭐댈 것이 아니라, 자격없는 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고 집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참으로 이 말씀에 아멘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남은 자의 모습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31:7~9)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면면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남은 자가 되는데, 이들이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선하고 의로워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남은 자들은 모습이 온전치 못하다.
그 온전치 못함은 신약 백성인 나에게도 드러난다.
걸림돌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로 충만했던 자가 이제 자신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진멸 받아 마땅한 자였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돌아온 자, 남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할 것은 나의 (의로울 것도 없는)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의 긍휼과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결과인 십자가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능동태의 남은 자가 아니라, 수동태의 남겨진 자임을 알게 하신 성령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묵상 기도)
주님,
모든 것 주님께서 하셨음을 오늘도 듣고 또 듣습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를 남겨진 자 되게 하셨습니다.
신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니 기쁨이 충만합니다.
날마다 어려운 일을 보는 성도의 삶입니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과 환경에 매이지 않고 주님 품속의 평안을 누립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