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안동 번남댁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 검토
이장희 추천 0 조회 405 17.11.17 15: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 안동 번남댁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 검토

 

 

. 제안사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소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번남댁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신청 건에 대하여 부의하오니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제안사유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1973.08.31)번남댁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 신청한 사항에 대한 지정가치 여부 검토하고자 하는 사항임.

. 주요내용(신청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문화재 신청명칭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 일원

소유자/관리자 :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문중

수 량 : 일곽(건물 1, 토지 3,369<1필지>)

- 건축물 지정 : 1

구분

안채

안행랑채

사랑채

행랑채

양식

?자형 평면

팔작 및 맞배지붕

홑처마

자형 평면

맞배지붕

홑처마

?자형 평면

팔작지붕

홑처마

자형 평면

맞배(반박공)지붕

홑처마

구조

5, 목조와가

3, 목조와가

5, 목조와가

3, 목조와가

면적

120.85

(정면5.5×측면5)

57.61

(정면7×측면3)

138.46

(정면5×측면5)

135.84

(정면11×측면6)

연대

1857년 이전

1857년 이전

1857년 중수

1857년 이전

 

- 토지 지정 면적 : 3,369

소 재 지

지 번

지목

지적()

지정()

소유자

비 고

도산면 의촌리

108

3,369

3,369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문중

지정구역

합 계

1필지

3,369

3,369

 

 

 

. 현지조사의견(‘11. 5. 12) : 세부의견 별첨1 참조

<문화재위원>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임

<문화재위원 >

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당시의 주생활과 건축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임. 소유자가 거주하면서 지속적인 경상관리가 필요

<문화재전문위원 >

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시대성, 안동의 지역성, 진성이씨 문중의 시작이라는 목적성을 건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일부 소실된 점이 아쉬움. 민속학적 가치가 추가적으로 밝혀질 필요가 있음

. 참고사항

(1) 경상북도지사 의견 : 별첨 2 참조

이 집은 순조 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현 소유자의 고조부인 이휘부(李彙溥, 1809~1869)의 선친(先親)인 번암(樊庵)이 이동순(李同淳, 1779~1860)위해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좌산(左山) 이만윤(李晩胤, 1834~1906)이 중건하였다고 함.

이 가옥은 원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99칸이었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여칸 정도만 남아 있음. 평면구성은 성자(成字)를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하회 충효당이나 양진당처럼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번남댁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신청함.

 

(2) 지자체 전문가 의견( 2008. 5. 30) : 별첨 3 참조

6.25당시 건물의 상당부분이 무너지고 없으나 그래도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무너진 건물지도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

이 건물은 안동에서 가장 큰 집중의 하나로, 조선 고종(高宗) 대에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어진 가옥으로 전함.

순한 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음.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부자집의 삶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3)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 2009. 10. 27) : 별첨 4 참조

번남댁은 퇴계 이황 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서, 대단히 규모가 큰 고택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집임.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하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확인됨.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함.

 

. 의결사항

가결

별첨 1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지정조사 개요

대상문화재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조사일자 : 2011. 5. 12()

 

지정조사 결과(조사보고서)

문화재위원

1. 문화재 현황(연혁·설명·유래 등)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신청한 안동 번남댁은 197383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지정 당시는 민속자료) 7호로 지정된,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에 있는 저택이다. 의촌리는 진성 이씨 의인파의 집성촌으로 번남댁은 전통사회에서 저택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99칸의 집이었다. 그러나 현재 99칸의 저택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너른 집터, 여러 건물을 통해 99칸의 위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의인파는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의인마을을 중심으로 한 진성이씨의 한 파를 말한다. 의인파의 파시조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손자 3형제 가운데 둘째 손자인 장사랑공(將仕郞公) 이순도(李純道, 1554-1584)이다. 장사랑공의 증손인 수월헌공(水月軒公) 이집(李集, 1672-1746)82녀의 자녀를 둠으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진성이씨 상계파(上溪派)에서 분파된 문중이 의인파이다. 의인마을은 장사랑공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진성이씨 집성촌이다.

번남댁의 여러 건물은 3대에 걸쳐서 지어진 것이다.

정침(안채)은 주손(이동익)6대조인 이동순(1779-1860, :번엄, 호조참판)이 문과급제(순조7:1807) 후 고향으로 이주하기 위하여 내직에 있을 때 건축(200)한 것이다. 그 뒤 삼척도호부사를 지낸 아들 이휘부(1809-1869, :치옹)가 아버지를 위해 영천군수 재직 시(1853: 철종4) 북편 사랑채를 지어 바쳤다(160년 전). 또한 소실된 남쪽 사랑채(삼호당)는 상주목사를 지낸 손자 이만윤(1834-1906, :좌산)1870년경(140) 건립한 것이다.

가옥의 전체적인 모습은배치 형식으로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을 당시 99칸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지금은 70여칸만 남아있다. 특히 퇴계가 시로 읊은 바 있는 태평연화의인지촌(太平煙火宜仁之村)의 유지앵소지지(柳枝鶯所之地)”에 터를 잡은 상류주택으로서 3이상 대가족이 거주할 수 있도록 배치와 평면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뒤편 전석으로 쌓은 굴뚝은 집 전체 연기를 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영남에서 제일 건물 규모가 크고 구조가 특이한 조선후기 반가 주택이다.

번남댁의 현 주손인 이동익(李東翼)의 증조 때까지 4에 걸쳐 참판, 승지 및 각지의 목·부사를 지내면서 문벌을 기리던 집이었다. 또한 현 주손의 5代祖인 삼척부사 치옹 이휘부는 선성유림(宣城儒林)에 제안하여 유생(儒生) 50여명을 모아 사비(私費)를 기울여 퇴계선생 전서인 도산전서(陶山全書)70여 책을 편찬하였다. 이것이 세칭 도산전서번남본(樊南本)이다. 도산전서75책은 198012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도산전서1,2,3,4권으로 간행하여 제현(諸賢)에게 널리 배포하여 退溪學 연구 활성화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번남댁은 당초 자 집으로 시작되었다. 집은 정침과 사랑채 별당 그리고 행랑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보통 건물에서는 굴뚝을 두 개의 방도 연결할 수 없다. 그런데 번남댁은 정침과 사랑채 등 별당과 행랑채를 제외한 6개의 부엌을 한 통로로 아우르는 굴뚝이 하나 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성은 어떠한 고건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지금 형태로는 알 수 없지만, 당초 자형 고택에서 출발했던 번남댁은 가세가 번성해지면서 범위를 넓혀 이룰 성()자형의 고택으로 완성되어 궁궐과 같은 위용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는 안동만의 독특함이며 전국 어느 고건축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별당과 사랑채, 방앗간 말 마굿간 등과 목욕탕, 정침 내당 화장실 사랑채 화장실, 북편 담에 설치되었던 삽문과 담에 설치되었던 삽문, 그리고 정원과 호수는 물론 사랑채와 행랑채로 통하던 삽문은 메워져 버렸고, 굴뚝은 소실되고 형체를 찾아볼 수 없다.

정침에서 북쪽 사랑채로 연결되는 문살 속의 긴 통로 등은 중국 송대의 건축 양식을 가미하고 있으며 현대 고건축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건축형태라 한다.가세가 번성했던 그 옛날 99칸 집을 돌아볼 때는, 비나 눈이 와도 우산과 우의 없이 다닐 수 있는 건축 구조였다. 안채와 사랑채 내부로 통하는 복도를 기능적으로 독특한 서비스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인 듯 하다.

번남댁은 의인마을의 많던 고가옥 중에서도 76년도 안동댐 건설 당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는 유일한 고가이다.

그러나 번남댁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서 생활문화를 찾아볼 수 없다는 취약점이 있다. 그러나 예전, 이를테면 사람이 거주하던 1970년대까지는 다양한 생활문화가 99칸의 저택 답게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번남댁은 문중 대소사를 하기 위한 회의, 吉祀 준비회의, 대동보 또는 파보 편찬 회의 등 문중회의를 하는 공간이었다. 회의는 여러 가지였다. 가을 추수 후 음력 9월 중으로 문중재실 위토 관리를 위한 사전 회의를 열고, 음력 10월 중에 시제를 올리기 위한 회의를 한다. 이런 회의는 연례적인 회의로서 번남댁에서 여는 대표적인 회의였다.

선조 3년 탈상 후 길사(吉祀)가 다가올 때는 문중회의를 열어서 길사 준비에 대하여 논의했다. 대동보 또는 파보 편찬을 위한 사전 회의도 번남댁에서 열렸다. 번남댁의 주인 치옹 이휘부가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오던 ?퇴계선생 유집 초고?를 번남댁에서 비용을 대고 ?퇴계선생전서?로 편찬한 일은 바로 이런 회의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번남댁은 봉제사 접빈객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진성이씨 의인파는 퇴계의 가계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유교적 덕목의 실천을 대단히 중시했다. 재산이 넉넉하였기 때문에 유교적 생활이념을 실천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따라서 봉제사 접빈객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인마을 주민들에게 유교적 실천 덕목을 은연 중에 보급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기여했다. 번남댁의 주인이었던 이휘부가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고 ?퇴계선생 전서?를 편찬한 사실은 성리학과 가례 보급에도 앞장섰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마당마다 풍속이 달랐던 것도 99칸 집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번남댁에는 별당 마당을 제외하고도 3개의 마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당마다 행해지는 민속적인 행사가 따로 있다. ‘봉제사 접빈객을 중시하던 그 옛날 명문가의 법도 또한 민속으로 남아있었다.

정침 즉 내당에 있던 네모반듯한 마당은 자 정침 속의 마당이어서 햇빛을 많이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방이 막혀서 바람 또한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부엌이 모두 6개가 마당을 향해 있고, 정침 중에서도 문간채와 연결되는 곳에는 곡간이 있다. 행랑채 곡간에는 도정을 하지 않은 조곡을 보관하였고, 정침의 곡간에는 도정을 한 정곡을 보관하였다.

정침 마당 역시 길흉사 때에는 인절미와 가래떡, 다식을 만들고, 명절에는 떡국 등을 집에서 만들 때 이용된다. 또한 사랑채의 네모반듯한 마당은 봉제사 접빈객의 마당이었다. 손님이 찾아 들면 항상 마당에 나가서 맞이하고 봉제사 시에는 많은 대소가에서 제사에 참석하기 때문에 마당에 도열하여 제사를 올리기 때문이다.

행랑채 마당은 한 없이 넓다. 말과 소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많은 공간에는 가을에 추수한 조곡 즉 노적봉과 난방용 화목을 쌓아 놓는 장소로 활용되는 공간이었다. 음력 5월이면 산야초를 배어 모아 퇴비를 만들고 가을이면 도리깨로 탈곡하고 겨울이면 넓은 공간에 멍석을 펴 놓고 윷놀이를 하는 공간이었다.

수몰 직전 의인마을은 20촌 이내 혈족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종기 살면서 명절마다 조상님을 모시며 세시풍속을 지켜왔다. 섣달 그믐날이면 어른들께 묵은세배를 다녔다. 마을의 집집마다 부녀자들은 설 차례 제수와 음식 장만에다 식구들의 설빔을 챙기느라 밤을 새곤 하였다.

의인마을에서는 설날 아침에 아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대문을 열고 우물가는 길을 쓸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사내아이들은 서로 먼저 일어나 대문을 열고 우물가는 길을 쓸고 왔다. 이어서 아들은 물을 데워 사랑방에 가서 할아버지, 아버지의 세숫물을 떠다 놓은 다음 세수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랑방에 나가서 세배를 올렸다.

설날 아침이면 지손가에서 각자 집집마다 세배를 한 다음 오전 9?10시경에 번남댁으로 모여서 세배를 하고, 함께 차례를 지냈다. 번남댁에서 음복을 한 다음 자기집으로 되돌아가서 차례를 지낼 필요가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비로소 차례를 지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하루를 번남댁에서 보냈다.

설을 지내고 나서 정월보름까지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놀았는데 주로 윷놀이를 했다. 이 때에도 먹거리 풍부하고 공간이 넓은 번남댁이 가장 널리 활용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주민들이 마을을 거의 다 떠나고 없어서, 그 옛날 무리를 지어 세배 다니던 풍습은 이제 볼 수 없어졌다. 설날이면 수십 명의 제관이 세배와 제사를 올리려 번남댁으로 몰려가는 모습도 사라진 것이다.

번남댁 뒤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는 일월산 지맥으로 원거리에서 봐도 주먹을 불끈 쥐어놓은 형태의 산세이다. 성황당은 번남댁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m이고, 집에서 석천이라는 우물까지의 거리 또한 200m이다. 그래서 성황당, 번남댁, 석천은 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구도를 이룬다.

그 봉우리 정상에는 유난히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있다. 1976년 안동댐 건설 전만 하여도 이곳에 땔감을 하러 갈 때면, 두 손을 모아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화평을 기원했던 성황당의 동신목이 자리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황당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려서 산야초만 무성한 상태이다.

안동댐 수몰 전까지는 주민들이 해마다 정월 열 나흗날 밤 이곳 성황당에서 당제를 올려 가정과 마을의 안위를 기원했다. 당주는 진성이씨와 타성 구별 없이 맡았으며, 대체로 진성이씨와 타성의 당주 비율은 2 : 1 정도라고 하니 가구수에 어느 정도 비례하였던 것이다.

성황제(동제, 당고사)를 올리기 보름 전(섣달그믐께)성황님이라 하던 서낭대를 마을로 모셔서 지신밟기를 하고 액운을 물리치는 의례를 행했다. 지신밟기를 할 때 가장 먼저 오는 집이 번남댁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번남댁의 가세가 마을을 압도하여 제수 비용을 번남댁에서 우선적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지신밟기를 하면서 걸립을 하기도 했지만, 제수비용 전액을 번남댁에서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황당이 있는 산도 예부터 현재까지 번남댁 소유인데다 너르기 때문에 성황님을 모시고 마을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번남댁을 찾았던 것이다. 종손과 종부는 초석을 펴놓고 에다 쌀을 올리면 그 앞에 성황대를 세워놓고 정중히 큰 절을 올린 후 풍물패와 함께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통해 액운을 몰아낸다.

집안 한 바퀴를 돌아 본 성황님은 바로 집의 남쪽 산 밑 석천이라는 우물로 향한다. 우물 바닥은 돌로 울퉁불퉁한데, 성황대가 사람 손을 받치지 않는데도 신기하게 우물 중앙에 똑 바로 서 있었다. 그것은 성황님의 영력으로 믿었다.

이어서 마을 각 가구를 배회하며 지신밟기를 했다. 성황대를 잡고 선두에 선 사람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성황대를 잡은 사람이 가고자 하지만 성황님이 마음에 없으면 성황대가 앞으로나 뒤로 뉘어 버린다. 바로 그런 가구는 흉사나 가정에 불협화음이 많은 가구였다.

대개 보름 정도 성황대를 앞세우고 낮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밤에는 성황대를 마을의 당주 집에 모셔둔다. 이런 지신밟기를 하다가 정월 14일 밤에는 성황대를 모시고 성황당에 다시 반환하고 성황제를 올렸다. 대보름 새벽 2시경에 성황제를 마치면 당주집으로 가서 음복을 하고 대보름 날이 새면 의인마을 모든 집에 음복을 돌렸다. 이 때 번남댁에는 가장 많은 양으로, 가장 먼저 음복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황제를 통해 동민들의 마음을 서로 결속하는 데 번남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번남댁에서도 음력 2월 초하루 영등 할머니 내려오는 날이면 안동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손빔을 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삼신바가지에는 첫 수확한 햇곡으로 갈아 넣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성주단지도 모신 것 같은데 그 속에 넣은 곡식도 함께 갈았다고 한다.

수몰 이전까지는 해마다 봄철 부녀자들이 화전놀이를 성황당이 있던 산에 서 했다. 화전놀이를 크게 할 때는 도산서원에 가서 했다.

단오절에는 주민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궁궁이를 꽂고 그네를 탔다. 그네를 뛰는 곳은 번남댁 담밖에 위치한 솔마당이었다. 여기에 있는 소나무나 느티나무에 짚으로 꼰 그네를 매고 혼자서 뛰기도 하고, 쌍그네를 뛰기도 하였다.

번남댁은 건물이 웅장할 뿐만 아니라 임야, , 답 등도 넓었다. 마을의 집 주변과 번남댁이 위치해 있는 산골짜기를 가리키는 번남골전역은 물론, 안동 임동을 지나 영덕으로 가는 길목인 황장재 넘어서 바로 좌측 산골부터 영덕 시내 장옥을 이어 가는 도로에 이르기까지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선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이러한 가세를 유지 했던 과거에 번남댁은 마을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번남댁 옆과 뒤편은 고송과 참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옛날에는 과원이라 할 정도로 밤나무도 많았다. 이러한 고목나무 밑은 마을 주민들의 회의 장소로, 쉼터로 사용되어 왔다.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모내기 후에 지루한 논매기를 마치고, 마을의 일꾼들이 모여서 한바탕 잔치판을 벌인다. 이른바 음력 7월에 하는 풋굿(호미씻이: 草宴)인데 풋굿을 하던 곳이 번남댁 담 밖의 솔마당이었다. ‘솔마당은 고송이 우거진 솔밭으로 번남댁 소유이다.

풋굿을 먹을 때는 진성 이씨와 타성(김씨, 신씨, 권씨, 조씨, 박씨 등)이 구분 없이 어울려서 놀았다고 한다. 이 때 집집마다 농주와 감주 그리고 각종 음식을 마련해와 마을 주민들이 즐겁게 나누어 먹고 하루를 놀았다. 당연히 농토가 가장 많았던 번남댁에서는 가장 많은 음식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제공하였다.

번남댁 역시 다른 사대부가처럼 가양주와 내림 음식이 있었다.

의인마을이 수몰될 때까지는 대표적인 가양주로 가루주가 전승되었다. 가루주(가루술)는 멥쌀을 불려 곱게 갈아 쌀가루를 만든 후 누룩, 엿기름을 넣어 만든 뽀얀 술이다.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아서 술인지 음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어서도 여인들도 먹었다. 주로 여름에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지금도 문중에서 몇 사람의 할머니들이 빚을 수 있다.

청주(淸酒)는 쌀과 누룩으로 빚으며 용수를 술 단지 안에 넣고 그 안에 고인 것을 걸러 낸 맑은 술이다. 청주는 주로 제주나 접빈용으로 썼다.

번남댁에는 언제나 손님이 많았기 때문에 손님을 위한 음식, 넉넉한 제사음식을 손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수란, 명태보프름, 문어숙회, 송화다식, 송화다식, 시루떡, 경단, 조약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시루떡은 제사음식의 기본이 되는 떡이었다. 큰 시루에 떡을 쪄내는 기술이 번남댁에 대대로 전해왔었다.

번남댁 뒷산에 이르는 산기슭에는 남근석이 남아 있다. 남근의 형태로 된 남근석은 부녀자들이 아이 갖기를 빌던 곳이라고 한다.

번남댁과 의인파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번남가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이동순 등, 의인가에는 이집 등이 있다(상세한 인물 소개는 생략한다).

인물들이 많은 만큼 고서류(古書類), 고문서류, 고서, 목가구 등 많은 유물과 전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고서는 대구 가톨릭대학교에 목가구는 안동민속박물관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

지금 의인마을에는 江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수월헌(水月軒) 이집(李集)이 지은 것이다. 그는 마을 동쪽 끝 절벽 위에 강정을 짓고 그 아래 큰 바위가 흩어진 강변과 그 주변을 관어암(觀漁巖), 조은대(釣銀臺), 백화단(百花壇),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지금의 강정은 수몰 이후 이건한 것이다.

8형제를 낳아 의인파를 형성시킨 수월헌 이집(李集)이 낙향하여 유유자적하고자 건립한 강정(江亭)은 수몰지로 인해 1975년 현 위치인 솔마당에 옮겨 보전되며, 애초 99간 기와집인 번남댁(樊南宅)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지방 문화재)가 되어 옛 터전에 남아 있다.

그에 반해서 교리댁(校理宅)은 안동민속촌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다례원이 되어 관광객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주고, 진보댁(眞寶宅)은 영남대학교의 민속원에 옮기어 의인정사(宜仁精舍)라는 당호를 얻어 후학들의 공부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입지환경

번남댁이 있는 의인은 의촌리의 동쪽지역으로 도산서원 앞의 안동호를 건너서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의인은 애초 아름답고 운치있는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된 비운의 마을이 되어 버렸다. 거촌이던 의인마을의 저지대에 살던 대부분 주민들이 외지로 떠났고, 고지대에 살던 일부 주민들만이 지금의 의인마을에 남아서 살고 있다.

의촌리는 의인마을과 섬촌마을로 구성된다. 안동댐 수몰 전에는 의인마을과 섬촌마을에는 모두 120여 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진성이씨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섬촌마을이 별도로 성황제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별도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몰 전에 의인마을에는 모두 50여호가 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진성이씨가 30여 호였고, 그 나머지는 타성이었다.

수몰 전 의촌리 120여 가구 가운데 40여 호가 고가옥이었다. 그러나 수몰 전, 애초의 자리에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고가옥은 번남댁 뿐이다. 안동댐 물이 만수위에 차더라도, 번남댁과는 물이 100m 정도 거리라 하여 이주하지 않은 것이다. 영남대학교 교정으로 옮긴 의인정사(宜仁精舍), 안동댐 아래 조성된 안동민속촌에 이건된 와가 등이 본래 의인마을에 있던 것이다.

의인마을은 안동댐 건설 후 섬이 아닌 섬이 되어서, 더더욱 고립되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정책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바로 이 고립된 소외지역에서 우뚝하게 남아 있는 고가가 번남댁이다.

의인은 태백산이 남으로 흘러 일월산에 우뚝하고 다시 북으로 가지를 뻗어 청량산의 곁가지를 친 다음 서쪽으로 내려와 앉아 야산을 이루고 남쪽은 부포를, 북쪽은 의인을 만들었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나가는 모양이어서 하회마을과 같이 풍수지리상으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 동쪽 끝에서 싹실골로 가는 길을 배로’[船路]라 하고 마을 서쪽 강변에 돌을 모아 무덤같이 쌓았던 곳이 있었다. 또 마을 앞 들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확인된다. 마을 뒤 계곡의 지명이 신씨 묘구멍라고 전하는 곳이 있어 진성이씨가 들어오기 전에 신씨(申氏)들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의인마을 앞은 물이 사시사철 유유히 흐르며 각종 물고기가 놀고 뒷산은 높지 않게 수목은 우거져 기화요초가 저마다 철철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고즈넉하게 자리 잡아 평화롭게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수월헌(水月軒) 이집(李集)은 마을 동쪽 끝 절벽 위에 정자 강정(江亭)을 짓고 그 아래 큰 바위가 흩어진 강변과 그 주변을 관어암(觀漁巖), 조은대(釣銀臺), 백화단(百花壇),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퇴계선생과 청안 이병순(李秉淳: 行 淸安縣監, 1751-1818)은 일찍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드넓은 들판과 맑고 시원한 강물에 넘치는 좋은 경관을 간직한 의인은, 의인파가 입향 이래 320여년을 세거한 곳이었다. 안동댐의 축조로 물이 들면 만경창파이고 물이 빠지면 잡초가 우거지는 폐허가 되어 섬 아닌 섬으로 몇몇 집들이 산 아래로 옮겨져 있다.

의인과 의인 주변에서 정답게 부르던 신선바우, 가랑골, 호수골, 바른골, 도장골 등등 지명이 여럿 남아있다. 골과 산과 도랑은 변하지 않고 있지만 웅굴(우물)과 연지메(연자방아)는 묻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고색창연하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간 데 없고 그 터에는 방초만 우거졌으나, 강바닥의 마당 방구와 액바우는 그래도 물이 줄면 나타나니 놀던 바위를 다시 볼 수 있다.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서낭째 웅굴’(城隍峴泉)에 아직도 변함없이 맑은 물이 솟구쳐 오르고, 주민들이 삶을 의지하고 길흉화복을 빌었던 당집[城隍堂]이 폐허가 되어 쓰러지기 직전에 있다. 번남댁 뒷산이 일월산에서 이어지는 청량산 지맥에 자리하고 있다. 일월산 지맥에 자리하면서 앞으로는 낙동강이 S자로 흐르고 식수로 사용했던 샘이 바로 집 남쪽 산자락 바위 밑에 자리하여 산과 물이 융합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현지조사 의견

번남댁은 퇴계 이황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 99칸이라는 규모가 대단히 큰 고택이다. 99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대 저택을 말하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오늘날에도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99칸 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99칸 집이었던 번남댁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특히 그 안팍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생활형태를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현재는 비록 99칸 건물은 아니지만 너른 집터와 다양한 건물을 통해 그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번남댁의 중요성을 요약해 본다.

첫째 비록 지금은 없어진 건물도 있지만, 애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사랑채가 두 채이고, 별당채까지 갖춘 고택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는 외부와의 교류가 증진되는 상황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더욱 강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을 보인다. 전형성이 더욱 강화된 내용은, 접빈객과 장유유서의 덕목을 더 엄정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채를 북쪽 사랑채와 남쪽 사랑채로 나눈 점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외부와의 교류가 중시되고 가족 구성원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랑채가 둘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비록 남쪽 사랑채와 별당채, 사당이 지금은 없지만, 현존하는 안채와 북쪽 사랑채, 행랑채만으로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요건을 잘 간직하고 가족원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의례가 고택 안에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행해졌다는 점에서도 99간 사대부가의 생활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넷째 유교 이념에 앞장 선 종택이지만 성주와 삼신과 같은 가신(家神)을 섬겼다는 점은 민속문화와 유교문화의 공존현상을 찾아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대부라 할지라도 유교문화 정착 이전에 조상신에 대한 신격에 대한 신앙과 의례가 전승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섯째 안동에서 대표적인 퇴계 이황선생 문중(퇴계문중은 상계파, 의인파, 하계파로 나뉘어져 있다)의 지파 가운데서 의인파의 종택으로서 우수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기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섯째 안동댐 건립으로 번남댁 인근 전통가옥들은 철거과정을 겪었는데, 번남댁은 당시 주변 환경과 변화를 지켜본 건물로서 그 자리에 남아있으므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번남댁은 별도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인근 문화유산을 연계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 활용가치가 높다고 본다.

번남댁은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은 기간이 무척 오래되었다.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마을이 거의 소멸되어 사실상 이같은 저택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남댁은 살아있는 생활문화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다양한 건축물을 통해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현재 주손인 이동익씨가 거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번남고택의 미래가 우려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거주하기 위해서는 복원해야 할 부분도 있으리라 보는데 그 기준은 1973년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모습을 토대로 해야 할 것이다. 지정 당시처럼 70여간이 되더라도 번남댁은 ‘99간의 저택이었다는 역사성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 지속되리라 본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번성하던 의인마을은 이제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마을이 되었다. 더구나 의인마을은 안동댐 건설 후 섬이 아닌 섬이 되어서, 더욱 고립되었으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정책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번남댁은 의인마을의 많던 고가옥 중에서도 76년도 안동댐 건설 당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는 유일한 고가이다. 그런 점에서도 번남댁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각별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재위원

1. 건축연혁

번남댁은 퇴계 이황의 둘째 손자 계열의 집으로 3대에 걸쳐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주손 이동익의 6대조인 樊庵 李同淳(17791860, 호조참판)이 문과급제(순조 7: 1807) 후 고향으로 이주하기 위하여 내직에 있을 때 건립한 것이다. 북편 사랑채는 삼척도호부사를 지낸 아들 李彙溥(18091869)가 아버지를 위해 영천 군수 재직 시(철종 4: 1853) 지어 받쳤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건물 중 남편 사랑채는 상주목사를 지낸 손자 左山 李晩胤(18341906)1870년 경에 건립하였고, 별당?행랑채?방앗간채의 연대는 미상이다.

이렇듯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전체 99간 이었던 이 집의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안채?북편 사랑채?행랑채의 50간 정도는 유래와 건물의 구조양식으로 미루어보아 19세기 중후반 이전에 건립한 조선 후기 주택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번남댁이 자리 잡은 의촌리는 원래 의인?섬촌마을과 두 마을 사이의 작은 샛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두 마을에 살았던 120여호가 거의 대부분 수몰되고 지금은 의인마을의 번남댁과 샛터마을의 일부 가옥만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몰전의 120여호 가운데 반 이상과 의인마을의 50여호 중 30여호가 진성이씨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사대부가는 번남댁이 유일하다.

번남댁은 나지막한 야산을 등지고 서향으로 앉아 있다. 옛 의인과 섬촌 마을의 가옥들이 들판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서측과 북측의 낙동강변 쪽은 모두 들판으로 바뀌었고, 동측과 남측으로는 옛 모습 그대로 야산이 둘러싸고 있다. 행랑채의 대문 앞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보면 들판 끝자락 강가에는 조선시대 별시를 행했던 시사단(경북 유형문화재 33), 강 건너에는 도산서원의 건물들이 바라보인다.

의인마을은 태백산이 남으로 흘러 일월산에 우뚝하고 다시 북으로 가지를 뻗어 청량산의 곁가지를 친 다음 서쪽으로 내려와 앉아 야산을 이루고 남쪽은 부포를, 북쪽은 의인을 만들었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나가는 모양이어서 하회마을과 같이 풍수지리상으로 行舟形이라고 하여 마을 동쪽 끝에서 씩실골로 가는 길을 배로라고 한다. 퇴계는 의인리를 태평하게 연기를 피우는 곳, 의인이라는 마을이라네 고기잡아 요역을 대신하니 배부르고 따뜻하네라고 하였다.

이런 의인마을은 江居 可居地 명당으로 수몰로 가옥들이 사라졌을 뿐 옛날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잘 간직하고 있다. 번남댁은 명당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기에 안동댐 물이 만수위에 차더라도 물과 100m 정도 떨어져있어 이주하지 않고 의인마을의 옛 터에 홀연히 남아서 초점경관을 이루고 있다.

번남댁은 99간 이던 당시에는 안채?남쪽 사랑채?북쪽 사랑채?행랑채?별당?방앗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북쪽 사랑채?행랑채만 남아있다. 맨 앞에 놓인 ?형 행랑채의 대문간을 들어서면 행랑마당 건너 좌측에는 ?형 북쪽 사랑채가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는 안채와 안행랑채가 형을 이루며 놓여있다. 안채 남편에는 남쪽 사랑채와 방앗간채가 각각 앞뒤로 배치되어 있었고, 북쪽 사랑채 북편에는 별당이 있었다. 99간 건물 모두가 있었을 때는 형의 배치형태로 전국 어디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당시는 여느 사대부가와는 달리 궁궐과 같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사당이 없지만 원래 안행랑채와도 접한 남쪽 사랑채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독립된 건물의 일반적 사당과는 아주 상이한 것으로 번남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별도로 지어서 조상을 모시던 亡者의 공간’(사당)을 후손들이 기거하는 生者의 공간’(살림채)에 포함한 예는 조선조 고종 때의 신분제도와 服制 등에서 나타난 간소화 과정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채 뒤편의 동남쪽 언덕 위에 굴뚝이 우뚝 솟아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굴뚝은 별당과 행랑채를 제외한 안채와 사랑채 등의 6개 부엌을 한 통로로 아우르는 것으로 이 집 고유의 뛰어난 온돌구조의 과학적 기술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안채 부엌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신동아 19733월호 田溶種 사진)

이러한 번남댁은 건물들이 모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옛 건물터와 함께 각기 영역을 구성한 담장이 거의 대부분 남아 있어 기능별로 다양하게 세분하고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내외공간 구분을 명확히 한 분리형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채 북쪽의 뒷마당은 여성전용공간으로 독립성을 높인 점이 눈에 띈다.

 

2) 건 물

?안채 및 안행랑채

안채는 튼자형으로 앞쪽에 형 안행랑채가 앉고 그 뒤에 ?형 안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골방?찬방?부엌이, 우측에는 상방과 작은방?부엌이 안채 공간을 이루고 있다. 곳곳에 툇마루와 쪽마루를 설치하여 동선 편의를 도모하고 다락과 벽장 등의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마련하였다. 안방 뒤쪽에 비교적 큰 2칸 찬방이 안대청으로 1칸 돌출하게 한 모습은 흔치않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양측을 직절한 보아지를 끼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 홑처마 집이다. 안대청 상부가구는 5량 가로 4분변작 하였는데, 안대청과 양측 방 위쪽은 대량 위에 아주 낮은 동자주를 세워 종보?중도리와 주량작하고, 안대청의 중앙 위쪽은 종보 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 없이 중도리 장혀를 통 넣고 그 위의 중도리를 승두형 부재로 결구하였다. 종보 없이 가구한 수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키 낮은 동자주를 사용하고 종보 없이 상당히 높은 제형판대공을 세운 것은 4분변작을 하면서 3분변작처럼 삿갓 보꾹을 솟게하여 상승과 안정감을 더해 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방 앞 툇마루 서쪽 끝 벽장의 정교하고 섬세한 장식과 맞춤, 안방과 상방의 부엌 쪽 벽장의 통부재 까치발 등은 이 집의 높은 격조를 읽게 한다.

안행랑채는 행랑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 동쪽에는 곳간이, 남쪽으로는 봉당과 몸종방??헛간?옛 사당 공간이 차례로 놓여 있다. 안채로의 출입은 내외법에 따라 중문간을 들어서 안채가 직접 바라보이지 않도록 봉당을 거쳐 꺽어 드나들게 했다.

구조양식은 민도리형식의 3량 가로 대량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고 홑처마 맞배지붕을 얹었다.

?북쪽 사랑채

북쪽 사랑채는 ?형으로 서쪽으로부터 사랑마루?주인방?정지를 두고, 남쪽으로 꺾이면서 사랑찬방?손님방을 앉혔다. 사랑마루 앞의 툇마루는 손님방 앞을 지나 안채까지 이어지도록하여 동선의 편의를 도모하였는데, 주인방 동쪽 끝 칸 앞에서 안채까지는 문을 달고 판벽을 설치하여 은밀한 통로가 되게 꾸몄다. 사랑채에도 안채처럼 여러 곳에 다락과 벽장 등의 수납공간을 많이 마련하였다. 손님방의 툇마루 쪽에는 머름을 두고 굽널띠살과 미닫이 문의 이중 창호를 설치하였는데, 겨울철의 서북쪽 삭풍 때문인지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보아지는 안채보다 좀 더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외진주는 안팎을 각각 직?사절하고, 내진주는 안팎을 초각하였다. 사랑마루 상부가구는 5량 가로 4분변작 하였는데, 안대청처럼 대량 위에 동자주 없이 중도리 장혀를 통 넣었으나 종보를 걸고 중도리를 얹었다. 이 역시도 동자주를 사용하지 않고 상당히 높은 제형판대공을 세워 3분변작처럼 삿갓 보꾹을 솟게하여 상승과 안정감을 더해 주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판대공에는 소로 수장한 뜬장혀를 걸고 초각한 첨차형 부재를 끼웠다. 사랑마루 앞 4분합굽널 띠살 들어열개 문 위쪽에는 양측 교살 사이에 숫대살을 베푼 고창을 두었는데, 흔치 않은 살 문양이다. 북쪽 사랑채의 팔작지붕?보아지?뜬장혀?고창 등은 안채보다 상위인 사랑채 공간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다.

?행랑채

행랑채는 ?형으로 좌로부터 고방?가마고방?고방?대문간?농사꾼안방?창고?외양간이 차례로 자리 잡고 꺾이면서 정지?농사꾼사랑방?통래문간?헛간?마구간이 동쪽으로 놓여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대문짝은 문간 중턱에 달았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상부가구는 3량 가로 대량 위에 동자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3. 조사자 의견

번남댁은 퇴계 이황의 둘째 손자 계열의 집으로 3대에 걸쳐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19세기 중후반 이전에 지은 독특한 형태의 99간 사대부가로 당시 영남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50여간 정도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건물만 두고 보더라도 규모와 배치 및 평면형식 등이 안동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옛 건물터와 내외법과 기능별로 다양하게 세분한 영역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독립된 건물로 짓지 않고 조성한 사당, 안채의 모든 아궁이를 아우르는 통합 굴뚝, 안대청과 사랑마루의 상부가구 수법, 손님방과 사랑마루 고창의 창호형식, 안방과 상방의 벽장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격조 높은 수법이 돋보인다. 또한 19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로 나타나는 수납공간?쪽마루?고창 등이 발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랑마루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툇마루 통로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한편, 번남댁은 江居 可居地行舟形명형국지의 의인마을 옛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대부가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초점 경관을 이루면서 강건너의 도산서원과 통경축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번남댁은 모든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의 주생활과 건축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여러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민속적으로 손색이 없으면 중요민속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 거주 관리한다는 조건이 있어야하며, 지정할 경우 명칭은 안동 번남댁이라 함이 타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문화재전문위원

 

1. 건축연혁

좌산 이만윤 공이 세운 집으로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조선 고종 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99칸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 소실되었고, 1970년 이후에도 몇몇이 소실되어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 있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형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굴뚝은 안채 뒤로 벽돌을 막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굴뚝 하나로 빠지도록 만들어 주목받고 있다.

조선 후기 주택으로 규모가 크고 구조가 특이해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번남댁은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의인마을의 북쪽에 솟은 해발고도 234.1m산봉(山峰, 성황산의 줄기) 아래의 구릉 끝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번남댁은 물론 마을 내에 위치한 대부분의 반가는 서향(西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영지산(靈芝山)을 주산으로 하려는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이 영지산은 진성이씨의 중조로 추앙되는 퇴계 이황이 기거하며, 유유자적하던 산이기도 하다. 이황의 호()가 퇴계(退溪)외에도 영지산인(靈芝山人), 지산(芝山)으로 불린 것이 이를 잘 말하여 준다.

의인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북동-남서로 흘러가고 지금은 상당부분이 안동댐의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지만, 안동댐 축조 이전에는 낙동강변의 전답이 마을 앞(서쪽)에 펼쳐져 있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었다.

그리고 번남댁의 북쪽 가까운 곳에는 조림(造林)되어 관리되어오던 숲이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 상 우백호(右白虎)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지맥을 보완하는 조림은 강릉의 선교장 등 여러 반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번남댁의 배치는 자형 안채의 왼쪽에 자형 사랑채가 연접하여 있고, 그 앞에 자형으로 꺾인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각 채가 연결되는 부분에는 담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각 채들 옆에는 그에 딸린 마당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특히 행랑채 주변의 마당들이 크고 다양한데, 이는 조선후기 부농형 반가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작업마당에 해당한다. 이를 볼 때, 번남댁은 반가와 부농형 주택의 건축특성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2) 건 물

사랑채 : 번남댁의 사랑채는 안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나누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안채의 북쪽에 위치한 북쪽사랑채뿐이다. 이 북쪽사랑채는 안채로부터 서쪽으로 연결된 부엌과 광(수장고)을 제외하고 나면 자형인데, 자의 모서리에 있는 부엌을 기준으로 남쪽에 마루 1칸과 온돌방 2칸이 있고, 서쪽에 온돌방 2칸과 마루 2칸이 있다. 남쪽의 온돌방은 담으로 둘러싸인 뒷마당과 이어지고, 서쪽의 온돌방은 북쪽의 별당마당과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특히 동쪽의 뒷마당은 여러 개의 담으로 둘러싸인 내밀하고도 비밀스러운 마당인데, 이는 구례 운조루(雲鳥樓) 큰사랑채의 뒷마당과 유사하다. 사랑채의 내부 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가 있는데, 그 일부는 전면에 띠살문이 달려 있어 내밀한 궁중의 복도처럼 느껴지고, 이것은 안마당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서쪽 온돌방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마루 2칸이 있는데, 행랑마당에 비하여 약 1m정도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멀리 낙동강이 시야에 들어오는 등 루()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감과 경관적 특성을 보여준다. 즉 사랑채의 남쪽방은 매우 폐쇄적이고, 이에 비하여 서쪽방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동()의 사랑채에서 이처럼 상반되는 구성은 여느 반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실(消失)되고 없는 남쪽사랑채는 안채의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안채와 남쪽사랑채 사이에는 안채 영역과 나누는 담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에도 담이 있었다. 따라서 남쪽사랑마당은 담으로 위요되고 남쪽의 햇볕을 받던 양기(陽氣)가 충만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 남쪽사랑채의 영역이 위치함으로써 번남댁의 남쪽은 안채바깥마당, 남쪽사랑마당, 행랑옆마당 등 3개의 공간으로 나뉘게 되었다. 즉 대지의 가운데에 건물이 놓이고 그 주변으로 여러 외부공간들이 감싸는 구성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번남댁의 사랑채는 안채의 남쪽과 북쪽을 위요하여 안채를 더욱 내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안채 : 번남댁의 안채는 대지의 동쪽 상부에 위치하여 있다.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자형의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모습인데, 지금은 남쪽 사랑채가 소실되고 없기 때문에 튼자형으로 보인다.

안채의 핵심 실()의 구성은 북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안방(2.5), 찬방(2), 안대청(4), 작은방(1.5), 마루(1), 상방(2) 등인데, 온돌보다 마루가 깔린 공간이 더 많은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안채와 북쪽사랑채 및 남쪽사랑채가 만나는 부분에는 부엌을 두어 서로 다른 영역이 어색하게 만나는 것을 완충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북쪽사랑채 모서리에 부엌을 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안채에 마루를 많이 두고, 안마당에 면한 부엌 주변에 다시 벽을 두지 않은 공간의 배치함으로써 좁고 긴 안마당을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채의 서쪽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는 안행랑은 대부분 판벽으로 구성하여 안채에 딸린 수장고 및 서비스 공간이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안대청의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찬방은 안방에 딸린 내고(內庫)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역시 부농형 반가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안채의 대청은 정면 2, 측면 2칸 등 4칸 이지만, 그 앞쪽 좌우에 마루가 각 1칸씩 붙어있어 정()자 형의 6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자형으로 꺾여 있는 안채의 각 방이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며, 안채 뒷마당 및 옆마당과도 원활히 연결된다.

한편, 각 방의 남쪽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를 두어 문을 별도로 달지 않았는데, 이는 북쪽 사랑채의 서쪽 방도 마찬가지 이다. 이러한 실()과 마당의 구성은 번남댁이 비록 가문과 풍수적 이유 때문에 동쪽에 솟은 산봉(山峰)에 기대어 서향(西向)하고 있지만, 주거의 실용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외부공간을 열어 햇볕 및 양기(陽氣)를 받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행랑채 : 번남댁의 행랑채는 대문이 있는 바깥행랑과 중문이 있는 안행랑으로 구분된다. 바깥행랑채는 솟을대문의 좌우에 광을 여러 칸 두었고, 온돌방과 부엌을 둔 청지기의 공간을 만들어 총괄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면, 토석담과 같은 벽을 만들어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정읍김동수씨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26)과 닮아있다. 조선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한 치안은 주택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번남댁 및 김동수씨가옥의 행랑채 외벽 구성은 그 결과로 이해된다.

바깥행랑채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꺾여 안행랑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행랑마당이 남-북으로 둘로 나뉘었다. 이렇게 행랑채는 그 고유한 기능도 있지만, 정침의 공간들을 나누는 요소, 즉 담의 역할도 겸한다.

 

주목할 만한 요소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번남댁에는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건물과 건축요소들이 있다. 북쪽사랑채 북쪽의 별당마당에 자형의 별당이 있었다고 하며, 안채의 남서쪽에도 남쪽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채 주변의 마당을 위요(圍繞)하였던 담도 있었데, 지금은 상당부분 소실된 상태이다. 그리고 안채의 뒷마당 남동쪽 축대 근처에 집안의 모든 군불의 연기를 모아 한곳을 빼내던 굴뚝이 있었는데, 그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이 외에 안채 남쪽 바깥에 있던 방앗간, 북쪽사랑채 뒷마당에 붙어 있었던 내측(안변소)도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번남댁은 각각의 채[]들이 실()의 구성에 의하여 고유한 특성을 일부 보여주고는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여러 마당과 건물들이 서로 감싸고 겹(layer)을 이루던 내밀한 모습은 상당부분 와해되었다.

 

3. 조사자 의견

전기한 바와 같이 번남댁은 퇴계의 한 분파로 퇴계가 활동하고 머물렀던 영지산 및 도산(陶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선후기의 반가이다.

특히, 번남댁은 조선후기 부농형 반가, -서로 구릉이 뻗어 내린 의인마을의 지형적 상황, 퇴계가 활동한 영지산을 주산으로 하였던 가문의 상황 등을 반영하여 독특한 계획방법으로 풀어낸 주택으로 이해된다.

이는 조선후기라는 시대성과 안동의 지역성,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문중의 시작이라는 목적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불리한 지형과 향()을 극복하기 위한 실의 구성과 수법은 건축적으로 매우 우수하고 독특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줄 건물과 관련 건축요소들이 상당부분 소실(消失)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원형이 가지는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번남댁은 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건축의 상태에 의한 평가로 보여 지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민속적 가치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별첨 2

경상북도지사 의견서

 

이 집은 순조 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현 소유자의 고조부인 이휘부(李彙溥, 1809~1869)의 선친(先親)인 번암(樊庵)이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을 위해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좌산(左山) 이만윤(李晩胤, 1834~1906)이 중건하였다고 함.

이 가옥은 원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99칸이었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여칸 정도만 남아 있음. 평면구성은 성자(成字)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좌산(左山)의 편액인 번남” 2자가 전하는데 거기에정사추구월상량(丁巳秋九月上樑)”이라 했으므로 1875(철종 8)에 중건한 사실과 일치.

''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그 사이에 행랑채가 들어 서 있음. 원래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었으나 없어졌음. 굴뚝은 본채 후면에 전석으로 쌓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 나가게 되어 있.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하회 충효당이나 양진당처럼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원래는 몸채 남쪽 편에 4칸의 안사랑이 있었다고 하므로 현존하는 상방 정지 끝이 그 구지(舊址) 라면 몸채는 온전한 ''자형을 이루게 됨. 몸채의 칸수는 5칸이며 안방머리 골방에 이어서 대청 쪽으로 돌출한 고방(찬방) 때문에 대청의 길이가 한 칸 축소되었으나 건너편(건너방자리)의 고방이 안방과 같은 2칸통의 긴 구조가 아니어대청의 칸수는 결국 6칸이 되는 셈임. 그러나 실제로는 상방 뒤로 연하는 대청 끝마루에 약간의 증폭이 있고 툇마루도 있어 대청의 전면은 상당히 넓어 보임. 안채의 끝머에서 ''자로 꺾어 연장된 바깥채는 사랑채의 전면에 이르는 줄행랑이며 기능은 고, 행랑방, 마구간, 헛간 등임.

안방 부엌 뒤쪽으로 역시 ''자로 꺾어 지은 사랑채 ''자 전면에서 안채에 이르는 일정한 복도가 놓여 있다.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음.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번남댁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신청함.

별첨 3

안동시 학예연구원 의견(송승규)

 

지정조사 개요

대상문화재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

조사일자 : 2008. 5. 30.

건립연대 : 조선후기

 

현 황

도산서원 건너편 마을에 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6.25당시 건물의 상당부분이 무너지고 없으나 그래도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무너진 건물지도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

 

구조·형식·규모·형태

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그 사이 행랑채가 들어서 있으며 원래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었으나 없어졌.

굴뚝은 본채 후면에 전석으로 쌓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음.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원래는 몸채 남쪽 편에 4칸의 안사랑이 있었다고 하므로 현존하는 상방 정지끝이 그 구지라면 몸채는 온전한 구자형을 이루게 됨. 몸채의 칸수는 5칸이며 안방머리 골방에 이어서 대청쪽으로 돌출한 고방(찬방?) 때문에 대청의 길이가 한칸 축소되었으나 건너편(건너방자리)의 고방이 안방과 같은 2통의 긴 구조가 아니어서 대청의 칸수는 결국 6칸이 되는 셈임. 그러나 실제로는 상방뒤로 연하는 대청 끝마루에 약간의 증폭이 있고 툇마루도 있어 대청의 전면은 상당히 넓어 보임. 안채의 끝머리에서 자로 꺾어 연장된 바깥채는 사랑채의 전면에 이르는 줄행랑이며 기능은 고방, 행랑방, 마굿, 헛간 등임.

안방 부엌 뒤쪽으로 역시 자로 꺾어지은 사랑채 자 전면에서 안채이르는 일정한 복도가 놓여 있다.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음.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 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작자·유래·전설

이 건물은 고종 연간에 지어진 가옥으로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함.

99칸이었는데 6?25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있으며 평면구성은 성자를 이루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이 집의 창건자는 고종때 좌산이라고 전하며 그의 수적편액 번남자가 전래함. 거기에는 丁巳秋九月上樑이라 했으므로 대략 1875(哲宗 8)의 정사일 가능성이 있음.

 

조사자 의견

이 건물은 안동에서 가장 큰 집중의 하나로, 조선 고종(高宗) 대에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어진 가옥으로 전함.

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와 왼쪽에 자형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행랑채가 있으며, 원래 왼쪽으로 안사랑채가 있었으나 없어졌음.

본채 뒤쪽에 굴뚝을 쌓아서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등 다양한 공간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음.

또한 이 집은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구조와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큰 사랑, 작은사랑) 각각 부엌을 두었다.

이렇듯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부자집의 삶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별첨 4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안동대 교수 정연상, 배영동)

 

지정조사 용역개요

용역기간 : 2009.7.30 ~ 2009.10.27.

참여연구진

- 전통건축분야 : 책임연구원 ㅇㅇㅇ

- 생활 및 민속분야 : 연구원 ㅇㅇㅇ

 

조사자 의견

번남댁은 퇴계 이황 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서, 대단히 규모가 큰 고택으로 현재 사람이 살지 않지만,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집임.

1) 소실건물을 포함하면 안동지방에 유일하게 사랑채가 두 채이고, 별당채까지 갖춘 고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큼. 이는 외부와의 교류가 증진되는 상황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더욱 강하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

2)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하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확인됨.

3)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강화된 내용은 접빈객과 장유유서의 덕목을 더 엄정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채를 북쪽사랑채와 남쪽사랑채로 나눈 점을 들 수 있음. 아마도 외부와 교류가 중시되고 가족구성원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랑채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닌가 함.

4) 비록 지금은 남쪽사랑채와 별당채, 사당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 현존하는 안채와 북쪽사랑채, 행랑채만으로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요건을 잘 간직하고 있음.

5) 가족원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의례가 종택 안에서 일정한 질서를 갖고 행해졌음.

6) 20세기까지도 성주, 삼신과 같은 家神을 모셨는 바, 이는 사대부가라 할지라도 유교문화 정착 이전에 조상신에 해당하는 신격에 대한 신앙과 의례가 전승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큼.

7) 안동에서 대표적인 퇴계 이황 선생 문중의 지파 가운데서 의인파의 종택으로서 대대로 우뚝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함.

8) 안동댐 건립으로 번남댁 인근 전통가옥들은 철거 과정을 겪었는데 이 고택당시의 주변 환경 및 사회 변화를 지켜본 건물로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므로 중요한 가치가 있음. 번남댁은 별도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인근 문화유산을 연계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 활용 가치가 높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