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대표들은 수석대표를 보좌한다.'고 했다. 내가 회담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주앉아서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 <적 이상조(북한측 대표)가 빨간 색연필로 낙서한 쪽지를
마주하고 있던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들어보였다.
'제국주의자의 심부름꾼은 상가집 개보다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주먹으로 그를 갈리고 싶었다>
* <국가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지고 비정의 피눈물을 금 할수 없었다.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투쟁에서는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1사단 전우의 시체가 묻힌 곧으로 휴전담판을 하러 가려니 피눈물이 났다.> |
* <밴틀리트는 '수석대표 조이 제독만 발언한다. | |
|
|
|
|
|
|
|
|
|
|
|
|
|
|
<1953년 1월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장군은 1951년 1군단장 시절, 휴전회담 대표로 참석해 비망록을 남겼다.> |
| |
6·25전쟁 중 1사단장과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한국군을 지휘했던 白善燁(백선엽·84·예비역 대장) 장군이 지난 반세기 동안 소장해 오던 휴전회담 관련 備忘錄(비망록) 등 문건을 月刊朝鮮에 최초로 공개했다.공개된 문건은 1951년 휴전회담 관련 기록물로 당시로서는 군사기밀 1급으로 분류된 것들이다. 「휴전협정 녹취록」, 「휴전회담장에서 작성한 비망록」, 「金日成이 리지웨이 장군에게 보낸 電文」, 「유엔 수석대표 조이 제독의 개회성명서」, 「회담대표들에게 주는 리지웨이 장군의 지침」 등의 자료들이다.白장군이 휴전 회담 관련 개인 비망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물을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白장군은 『1950년대 말까지는 정부의 문서기록이나 보존체계가 정착돼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소장해 왔다』고 밝혔다.「휴전회담장에서 작성한 비망록」은 白장군이 1군단장 재직시절인 1951년 7월7일부터 휴전회담 대표로 지명돼 활동하면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벌어졌던 「銃聲(총성) 없는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연한 하늘색 가로선이 그려진 미군 공식 노트 400장 분량의 비망록은 1951년 7월7일부터 8월26일까지 50일간의 현장기록이다. 평양사범을 졸업한 그는 평소의 메모습관을 살려 회담 현장을 생중계하듯 기록했다.누렇게 바랜 비망록은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먼지가 날렸지만, 회담 당시 양측 대표의 긴박한 舌戰(설전)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했다. 비망록을 기초로 당시의 상황을 원문을 기초로 재구성했다. 古語體 글은 현대적 표현으로 바꿨다.1951년 7월7일 李承晩: 『미국이 하자니 안 할 수도 없고…』
白善燁 제1군단장은 1951년 7월7일 美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에게서 電文을 한 장 받았다.<귀관은 停戰에 관한 談判에 있어서 공산군 대표단과 협의할 대표 5명 중 1명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이 선발하였다. 첫 회의 일정은 미정이다. 7월8일 정오까지 美8군 전방사령부까지 도착하라>李鍾贊(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白장군에게 「군단장 임무는 계속 수행하되, 부군단장 張昌國(장창국) 준장에게 군단장을 대리하게 하고, 즉시 부산으로 가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白장군은 이날 오후 속초 비행장을 출발해 釜山으로 내려가 李대통령을 만났다. 李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했다.<대통령 각하를 만났다.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이 동석했다. 대통령은 이렇게 훈시를 했다.
『美 군정 시대에 그네(미국)는 공산당과 합작을 강요하였다. 일이주 내로 해결됐으면 좋겠지만 미군이 직접 공산 측과 정전하겠다는 것은 웃음을 사고 있다. (白장군이) 정부와 민의를 반영하여야겠다. 중요문제는 허가를 받아라. 군인으로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받되, 정전대표로서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라. 미국 사람들은 휴전을 하려고 하는데 100만 중공군이 내려와 있는 마당에 휴전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통일이 목표야. 지금 휴전하자는 것은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대통령의 이야기에 『대통령 각하의 의도가 그러시다면 참가하지 않겠습니다』고 했다. 李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이 저러하니 안 갈 수도 없고… 미국 사람과 협조하는 뜻도 있고 하니 참석토록 하라』>7월8일 白장군은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수송기편으로 서울에 있는 美 8군사령부로 갔다. 白善燁은 밴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나서 휴전협정에서 한국과 자신의 역할이 별로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8군에서 호디스 소장, 8군 참모장, 8군 사령관을 만났다. 밴플리트 장군은 『유엔군측 수석대표는 조이 제독이며, 각 대표들은 이를 보좌하는 것이다. 발언은 수석대표만 한다』고 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내게 元山, 鐵原, 高城 삼각지대에 대한 공격계획도 설명했다>7월9일, 白善燁은 리지웨이 대장이 유엔군 측 대표들과 각 참모를 소집해 예비회담을 개최한다는 전갈을 듣고 현장으로 향했다. 白善燁은 조이 수석대표에게 대한민국의 「5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이 제독은 정전에만 관심이 있었다.『전우들의 시체 위에서 휴전회담을 하다니 착잡했다』
<휴전회담에 대해 정부는 5개항의 조건, 즉 ▶중공군의 한반도로부터의 완전철수 ▶북한 괴뢰군의 무장해제 ▶북한 공산당에 대한 유엔의 원조 금지 ▶한국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에는 항상 한국 대표가 참석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案이나 행동도 適法(적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5개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나, 조이 제독은 『잘 알았으나, 우리 단원은 오직 군사 휴전 담판을 위해 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1사단장 시절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부하들이 묻혀 있는 곳에서 휴전회담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착잡해졌다>정전협정 본회담 장소는 공산 측의 의도대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인 개성에서 열리게 됐다. 유엔군 측은 회담이 끝날 때마다 汶山里 동편 사과밭에 있는 「평화촌」으로 철수키로 했다. 白장군은 평화촌을 돌아봤다.<평화촌의 분위기는 「열흘쯤이면 휴전협상이 타결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어느 날 평화촌을 방문한 李鍾贊 참모총장이 六堂 崔南善이 쓴 「조선역사」를 건네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고 했다. 과거 國難을 당해 휴전회담과 유사한 講和를 해야 했던 민족의 역사가 있는 만큼 역사의식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라는 충고일 것이라 생각했다.>1951년 7월10일 오전 11시, 全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개막됐다. 첫 날의 긴장된 순간을 白장군은 이렇게 기록했다.<이날 아침,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우리는 강대국이다. 위신을 세워 정정당당하게 임하라』고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 일행을 격려했다. 우리는 헬리콥터 편으로 개성으로 향했다. 우리 대표 일행들은 출발전 손거울 하나씩을 받았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거울로 구조 항공기에 신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육군 1사단장으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던 白장군은 분단고착을 우려했다.<오전 9시경, 유엔군 기지인 「힐 카크타파」에서 수석대표와 동석해 汶山을 출발하려고 했다. 역사적인 회담에 참가하면서, 국가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지고 悲憤(비분)의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200여 명의 내외신 신문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고 서로 다투고 있다. 인간이나 국가나 모두가 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敵에 항복을 받으러 가는 것이 못 되고, 휴전 담판을 하러 가는 입장이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공산군 측은 협상장소를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공산군 측은 자신들이 수석대표 南日에게 큰 의자를 주고, 유엔군 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에게는 南日의 것보다 4인치나 낮은 의자를 주어 마치 승자가 패자를 내려다 보면서 「훈계」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북한군 대표들은 높은 칼라에 완전하게 갖춘 正服(정복)에 긴 가죽장화 차림의 정장을 해서 상대방을 압도하려 했다. 우리는 실무회담 분위기에 맞게 나는 전투복 차림이었고, 유엔군 측은 夏期(하기) 근무복을 착용했다.
공산군 측은 중립지대인 개성지역에 출입하는 모든 유엔군 측 차량에 「항복」을 의미하는 白旗(백기)를 달도록 하고, 대표 5명을 제외한 기타 인원들은 백색 완장을 착용케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방을 노려보는 일유엔 측 수석 대표 조이 제독과 공산 측 수석대표 南日(남일)이 중앙에 대좌했고, 조이의 오른쪽에 앉은 白善燁 소장은 李尙朝와 마주보게 됐다.<악수나 인사조차 없는 냉랭한 대면이었다. 각 5명씩 10명의 대표가 마주했으나 발언은 양측 수석대표에 국한됐다. 사용언어는 한국어·영어·중국어 등 3개 국어로 번갈아 통역하며 진행됐다>
<오전 10시 15분 회의가 시작됐다. 적측 대표 南日이 발언을 했다. 南日은 과거도 현재도 이치에 없는 주장만 한다. 소련 대표 말리크 선생은 38線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철수하고, 즉각적으로 쌍방 군대의 38선 후퇴를 주장했다. 적측은 외국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조선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막상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白장군은 이 휴전회담에서 자신의 역할이 별로 없다는 것을 현실로 느꼈다.<내가 회담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주 앉은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회담 결렬이 더 좋은 소식이 아닐까>양측은 의제 채택에 나흘을 소비한 끝에 개회 16일 만인 7월25일 유엔군 측의 案에 따라 ▲비무장 지대 설치 ▲군사정전위원회 ▲포로에 관한 사항 등에 합의했다.무초, 李承晩에 『당신의 실수요』라고 면박
7월16일 오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李承晩 대통령은 급히 美8군 사령부를 방문했다. 무초 주한 美대사, 李起鵬 국방장관, 리지웨이 장군, 白善燁 소장 등이 참석했다.<먼저 美8군사령부 참모장 호디스 소장이 李承晩 대통령에게 지도상을 가리키며 유엔군이 확보한 제해권, 제공권을 표시하면서 브리핑을 했다. 그는 비무장지대, 특히 방위선으로서 금화ㆍ철원ㆍ임진강 선을 표시했다. 또한 이것을 비무장지대 후보지로서 대통령께 건의했다. 대통령과 미군 지휘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李承晩: 『왜 좀더 전진하지 않는가? 압록강, 두만강 선까지 왜 올라가지 않는 것인가』
리지웨이: 『그러면 우리 군대는 포위당하고 맙니다. 이 이상 전진하면 부대가 分散(분산)되고, 좋은 보급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막대한 보급품에 대한 보급선, 교량이 더욱 필요한 상태입니다. 현재로선 전진이 곤란합니다. 정전 담판은 우리 미국 정부의 정책임을 말씀드립니다>미군 지휘부는 李承晩의 요청을 공개적으로 묵살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終始一貫(종시일관) 리지웨이 장군의 발언을 부인했다. 이에 대해 무초 주한 美 대사는 세 차례 李대통령을 향해 『Your mistake!』라고 말하며, 미국의 휴전정책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李대통령의 통일을 위해 애쓰는 苦衷(고충)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李承晩 대통령이 면박당하는 것을 보다못한 白장군이 유엔군 사령부를 공박했다.<한국군을 강화시키지 못한 것은 과거 美 군사고문단의 실책이다. 작년 가을 美8군 및 10군단이 작전 실패한 것을 상기해 보시오. 방어선으로서는 신안주~함흥을 기점으로 삼아야 하며, 다음은 원산~평양선으로 북진해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창조하고 있으며, 공산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白善燁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세계 최강의 강대국, 아니 온 세계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던 한 老정치가의 모습을 목격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를 제거하려고까지 했던 적대적인 사람들도 결국은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만들었다. 李대통령은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돈독했지만 정작 國益(국익)과 관련한 사안에서는 현지 사령관들과 치열한 舌戰(설전)을 마다하지 않았다>1951년 7월27일, 李承晩 대통령이 白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李대통령은 38선 획정이 임박한 것을 깨닫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38線에 대해 토의할 때만 참석하고, 38線을 결정지을 때는 참석하지 말라. 수석 대표 조이 제독에게 線을 결정지을 때는 미리 우리 측이 豫告(예고)를 받아야 한다. 線을 결정지을 때, 우리는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엔 측으로부터 보증을 받으라>작전상 리지웨이 장군의 명령을 받아야 하고, 軍 통수권자인 李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白장군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白善燁, 조이 제독에 휴전회담 불참을 통보
<7월27일, 평소 친분이 있는 버크 제독에게 나와 정부의 입장을 얘기했다. 『우리 정부가 이 회담에 반대하는데 내가 한국 측을 대표해서 계속 회담장에 앉아 있기가 어렵지 않은가?』 버크 제독은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과 상의하는 편이 낫겠다』고 권했다. 나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 李壽永(이수영) 중령을 대동해 그로 하여금 정확한 통역을 하도록 했다. 내 설명을 들은 조이 제독은 크게 당황하며, 『적에게 自中之亂(자중지란)에 빠진 것으로 비춰지지 않겠느냐』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白장군은 조이 제독과 휴전회담 참석을 둘러싸고 한 시간 이상 격론을 벌였다.<白善燁: 본관은 7월7일 UN軍 대표의 일원으로서 휴전 담판 개시 이래 성의 있게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일해 왔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한국을 횡단하는 非군사지대 설정과 일정한 선에서 정전함은 패망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유엔군 대표단의 단결이 파괴되었다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회의에 참석하여 왔다.
나로서는, 정부의 의도에 반하여 계속하여 참석할 수 없음을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이며, 개인으로나 군대 대표로서 정부와 국민의 의사에 배반할 수 없다.
조이 제독: 당신의 입장은 잘 알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하고 싶다. 당신이 회의에 나가지 않는 것은, 全세계에 연합군이 이렇게 단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을 共産黨이 알면 얼마나 그들의 선전 材料(재료)가 될 것인가. 앞으로 전쟁에서 流血이 계속 이어질 것인데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한국 정부는 정전을 위한 군사 담판이 「통일이냐 분단이냐」를 따지는 정치적 회담이 아니라 휴전을 논의하는 「군사적 회담」이란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이 대표단에서 탈퇴하면 큰 영향이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非군사지대 토의시 이 텐트(평화촌에 위치한 유엔군 측 대기장소)나 開城회의에 출석만 하고 참여하지는 마시오.조이제독과 白善燁의 격론白善燁: 참여하지 않으면 참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조이 제독: 非군사지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토의되기 때문이다.
白善燁: 우리 정부는 일정한 線에서 정전하는 것을 반대한다. 내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정책에 위반하는 것이다.
조이 제독: 한국 정부는 共産黨들처럼 「평화 해결」과 「군사휴전」을 혼동하는 것 같다. 정부는 軍人에게 명령할 수 없으며, 명령을 요구하지 않는다.
白善燁: 이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에 조정해 달라.
조이 제독: 당신 정부는, 토의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지, 회의에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白善燁: 회의에 가는 것은 정부 의도에 위반되는 것이다.
조이 제독: 귀하의 정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白善燁: 나는 잘 모른다.
조이 제독: 리지웨이 장군이 할 터이니 가만 있으라. 리지웨이 장군이 곧 귀하의 정부와 협의할 것이다. 당신의 입장은 잘 알지만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 정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유감스럽다. 이 결과로 남한이 유엔의, 특히 미국의 원조를 잃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白소장은 아직도 참석하지 못하겠는가.
白善燁: 정부의 결의를 듣고 싶다.
(이때 버크 제독이 한국 정부 결의 5개조 항을 낭독한다)
조이 제독: 한국 정부는 잘못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마치 내가 1군단장인 白장군에게 알리지 않고, 제1군단 군인에게 명령하는 것과 같다. 白장군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리지웨이 장군뿐이다>『이따위 會談이고 뭐고 어서 전쟁을 해야지』
7월30일 세 시간여에 걸친 회담에서 공산군 측은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하자고 지리한 주장을 폈다. 내키지 않는 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白장군은 약소국의 비애를 느꼈다.<공산군 측은 38線이 現 군사 實情을 가장 잘 반영하였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우리 해·공군의 폭격과 함포사격이 평화의 도시, 농촌을 파괴하고 무고한 人民을 학살한다고 주장했다.
공산 측은 『누구를 침략자로 보는가』라며 정치적인 질문을 꺼내며 辱說(욕설)을 퍼부었다. 저들이 하는 꼴을 보면 會談(회담)이고 뭐고 어서 전쟁을 하는 편이 낫겠다. 국군도 하루바삐 强軍이 돼야 겠다>
<8월2일 회담에서 적측은 유엔군 측이 주장하는 군사분계선이 자신들의 陣地(진지) 깊숙한 지점까지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다시 설명했다. 공산당과의 협상에서는 「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8월3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물러났다가 駐日 대표부 대사로 있던 申性模(신성모) 前 국방장관이 수송기 바탄號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李承晩 대통령을 찾아 유엔軍 총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의 서한을 전달했다.<리지웨이 장군은 「李承晩 대통령과 白善燁 장군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白장군은 군인으로서 명령을 지켜야 한다」 「나를 신뢰해 달라」면서, 「共産黨은 단결이 되었지만 우리들은 단결이 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편지에 담았다>8월3일 오후 9시, 李起鵬 국방장관이 평화촌으로 白장군을 찾아 李承晩 대통령의 親書를 전달했다. 1951년 8월3일자 영문 친서는 白장군의 휴전회담 대표 복귀를 요청한 리지웨이 장군의 요청에 대한 대통령의 答信(답신)이었다.미국, 停戰을 보이코트하면 원조 중단한다고 협박
「친애하는 白장군: 나는 유엔군 측이 우리를 분단하는 여하한 협정도 원하지 않으나 유엔군 측의 리지웨이 장군과 협력해 휴전회담에 계속 참석하기를 바란다. 비록 유엔 대표단이 군사분계선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나는 장군의 책임을 덜어 주기 위해 내 스스로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 편지를 받고 나는 李대통령과 무초 대사 및 리지웨이 장군 사이에 어떤 협의가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 이후 우리 정부의 입장을, 희망을 나의 판단에 따라 유엔 측에 전달해 회담에 반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리지웨이 장군에게 『공산 측이 38선 휴전을 고집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평양~원산선을 제시해야 하거나 한강을 살리려면 예성강까지는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월8일 리지웨이 장군은 38선을 휴전선으로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뉴욕 타임스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메모해 놓았다. 그 기사는 뉴욕 타임스紙 7월31일자로, 38선은 군사상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부당하다고 논평한 기사였다>8월13일, 휴전을 거부하겠다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은 강한 압력을 가했다. 조이 제독은 해군 총참모장 孫元一(손원일) 제독을 통해 白善燁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미국 측, 트루먼 대통령이 李대통령에게 전달한 서한에서 「한국의 통일」이라는 文句는 頭書와 頭尾에 강조되어 있다. 美 국무차관은 梁裕燦(양유찬) 주미대사에게 「停戰을 보이코트하면 원조를 중지하겠다」고 밝혔다>이상조, 白善燁에게「상가집 개만도 못하다」
8월15일, 25차 회의에서 양측이 한 시간 가까이 아무 말 없이 對坐하고 있던 도중, 공산 측 대표 李尙朝가 돌출행동을 했다.<적 이상조가 빨간 색연필로 낙서한 쪽지를 마주하고 있던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비추어 보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은 상가집의 개보다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화가 나 주먹으로 그를 갈기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 쪽지를 메모했다.
회의장 입구 電柱에 붙은 전단에도 「外軍은 조선에서 철퇴하라. 조선 문제는 조선인의 손으로 해결하자」는 문구가 보인다. 이들이 말하는 제국주의의 走狗(주구)는 누구냐, 침략자는 누구냐, 즉 그것은 너희들 아닌가>白善燁 장군은 『1989년 이산가족 방문차 서울을 찾아온 李尙朝를 만나서 「휴전 협상 때 상가집 개라고 써서 내게 보여준 기억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이상조는 「기억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8월16일, 白善燁 장군은 6·25전쟁 와중에 발생했던 軍의 불명예스러운 사건들을 거론하면서, 「힘만이 공산군을 물리친다」고 기록했다.<대한민국이 반성하고 진실한 애국자가 다수 나와야 된다. 정부 시책, 국군의 진로 ,국군의 강화, 힘만이 공산군을 물리치는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 居昌 양민학살 사건, 기타 대소 사건이 국군에게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 하극상은 더욱 우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한국의 전도를 생각하니, 군사 대표로서 나의 苦衷(고충)을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다. 이 회의가 끝나는 대로 나는 국군, 국가, 민족에 경고하여야 되겠다>8월18일 白善燁 소장은 李承晩 대통령과 면담, 회담 개요에 대해 설명했다. 李 대통령은 『지금까지 잘하여 왔다』고 白장군을 치하했다. 이튿날 白善燁은 유엔군측 대표단과 함께 오후 1시30분 김포공항을 출발, 오후 5시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한다.<최초의 일본 여행이다. 내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도 할 수 있으며, 국가 없는 민족은 노예와 별 차이가 없다. 국가는 반드시 가져야겠다. 제국호텔에 머물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日本의 재건을 보며, 우리도 합심협력해서 전후 재건에 매진하여야 되겠다. 駐日대사 申性模 각하와 대면해서 舊情(구정)을 나누며 現 시국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모처럼 회담장에서의 설전을 벗어나 東京 시내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사관 비서와 같이 산보했다>白善燁 장군은 이 무렵 휴전선이 당시 전투선보다 훨씬 후방으로 그어지고, 포로문제에서 유엔군 측이 양보할 기색이 농후하다고 판단했다.<8월22일 분과위원회에서 「전투선을 조절함에 있어서 현재선보다 철수할 수 있다는 점」에 합의했다. 나는 이 사실을 김정평 준장편에 李承晩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에게 전달했다>인수인계 없이 1군단장으로 복귀회담이 결렬된 직후인 8월24일, 당시 서울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본부건물에 들어갔던 美8군사령부에서 밴플리트 사령관이 평화촌의 白善燁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함께 1군단으로 갑시다』두 사람은 동대문밖 신설동 舊경마장에서 L-19형 비행기를 타고 간성으로 날아가 곧 바로 11사단 사령부로 향했다.휴전회담이 소강상태였지만 동부전선의 요충인 「펀치볼」만은 탈환해야 한다는 게 밴플리트의 생각이었다. 적도 6개 사단을 배치시키고 거점공사를 서둘러 요새화하고 있었다. 수도사단, 11사단이 투입돼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열흘 만에 고지를 점령한 상태였다.밴플리트는 白善燁 소장의 전선 복귀를 결정하고 있었다. 조이 수석대표가 회담기간 중의 일기를 모아 발간한 「전쟁 중의 협상」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8월27일=리지웨이로부터 김포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리지웨이는 白善燁 1군단장이 전투에 요긴하므로 회담장에 복귀하지 않고 1군단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통고했다.9월1일=…무초(주한 한국대사)가 도착했다. 점심 후 白善燁의 대표교체를 언론에 어떻게 발표하는 것이 좋을지 토의했다. 리지웨이에게 白善燁의 후임 李亨根의 임명을 발표하면서 白善燁의 1군단 복귀는 직접 언급하지 말자고 건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무초 대사는 白善燁의 교체를 발표할 경우, 한국민의 안목에서 오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白善燁은 후임자와의 인수인계의 절차도 없이 전선에 복귀했다. 휴전회담은 白善燁이 평화촌을 떠난 지 약 2년 후인 1953년 7월27일 조인됐다. 白善燁은 참모총장으로서 휴전을 맞이했다.● |
◆ 휴전 협상에 착수하기까지의 과정
미국의 조지 캐넌이 소련에 休戰 타진
1951년, 전선에 봄이 찾아오자 유엔군은 반격에 나섰다. 3월6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리퍼(Ripper)」 작전으로 불리는 총반격을 명령했다. 유엔군은 3월14일 서울을 7일 만에 再탈환했다.
중공군은 결전을 피하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全전선에서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해 동부에서는 38선을 돌파했다. 미국 정부는 서울 再탈환과 38선 돌파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1951년 중반부터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은 고착됐고, 전쟁은 지리한 高地戰ㆍ消耗戰(소모전) 양상을 띠게 됐다. 양측은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더이상 自國 국민에게 出血을 강요할 명분을 잃게 된다.
중공의 경제적 봉쇄, 만주 폭격, 대만군의 대륙공격 등 확전을 주장하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美 행정부의 제한전쟁 정책에 비판적인 것으로 비쳐 결국 1951년 4월9일 해임당한다.
소련 역시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이 전쟁에 계속 자원을 소모할 수 없었다. 1951년 3월, 美 국무부는 다시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휴전案을 작성했다. 그리고 5월 중순 그것을 공식정책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美蘇 어느 쪽도 체면 때문에 먼저 휴전제의를 내놓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소련문제 전문가 조지 캐넌이 나서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 한국戰의 휴전문제를 협의했다. 6월23일, 말리크는 유엔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교전 당사자 간에 대화가 시작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틀 후인 6월2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6월30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원산항에 있는 덴마크의 병원선 「유틀란디아」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7월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 회담이 열리고, 본회담 개최장소를 개성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틀 후인 7월10일, 쌍방은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열었고, 10월에는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협상을 계속했다.
회담은 2년간 계속됐고 정규 회담만 575회가 개최됐다.
◆ 휴전회담 대표들
유엔군 측은 직업군인, 공산군 측은 정치군인 中心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태평양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美 극동지구 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해군 중장)이었다. 8군 참모부장 헨리 호디스 소장, 극동지구 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지 공군 소장, 극동지구 해군참모부장 알레이 버크 제독(해군 소장), 白善燁 한국군 제1군단장이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군 측 대표가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반면, 공산군 측 대표들은 정치 장교들이 많이 포함됐다.
공산군 측은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 南日이 수석대표였다. 북한군 정찰국장 李尙朝(이상조) 소장, 북한군 1군단 참모장 張平山(장평산) 소장, 중공지원군 부사령관 鄧華(등화) 중장과 중공지원군 참모장 解方(해방) 소장이 대표로 나왔다.
수석대표 南日(사망)은 소련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다. 북한으로 귀환 후 교육 副相과 外相, 인민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휴전 후 당 중앙위 위원, 정치국 위원을 역임했으며 1976년 사망했다.
李尙朝(89)는 1915년 부산 동래 출생으로 중국의 남경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45년 入北,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휴전회담장에서 냉소적인 어투로 악명을 날렸다. 1956년, 당 중앙위 후보위원에 올랐고,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하자, 북한內 연안파와 손을 잡고 金日成 중심의 개인숭배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평양수비 사령관 張平山 중장의 쿠데타 음모가 적발돼 처형되었고, 李는 본국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으나, 망명했다.
1989년 2월, 소련을 방문한 연세大 崔平吉(최평길) 교수에게 金日成이 南侵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그해 9월 한국을 방문해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북한은 金日成 사상에 최면이 걸린 非정상적인 나라』라고 하는 한편, 38년 만에 회담장에서 마주했던 白善燁 장군과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