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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민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조청일
황병학(黃炳學) 선생
(1876. 1. 11∼1931. 4. 23)
1908. 전남 광양에서 의병활동
1919. 군자금 모집활동 후 만주 망명
1923.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입국 중 피체
징역 3년 수형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 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1908년 7월 창의 당시 선생의 하신 말씀 중에서 -
선생은 1876년 음력 1월 11일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비평리에서 아버지 황재모(黃在模)와 어머니 순흥(順興) 안씨(安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字)는 영문(英文)이다.
일제침략을 보고 항일 민족의식 성장
선생이 태어난 1876년은 바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력으로 치외법권과 무관세 무역 등을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맺고 개항을 한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생은 운명적으로 조국과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할 책무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마치 같은 해에 태어난 김구(金九)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 또한 평생 그같은 민족적 책무를 잠시도 잊지 않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당과 향교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 총명함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과 화살을 둘러메고 백운산(白雲山) 정상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즐기는 활달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불의를 보면 비분강개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른이 되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됨에 충분하다고 입을 모으기도 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전 생애를 보면 이같은 기대는 조금도 그릇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달리 총명하고 숭무적(崇武的) 기상까지 갖추었던 선생은 개항 이후 더욱 노골화된 일제의 침략을 몸소 보고 느끼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성장시켜 갔다.
개항 이후 일제는 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정변에 개입하면서 한국에서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운동이요 반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더구나 이듬해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펴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이른바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단발령을 강요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반(半)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나아가 우리나라를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었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여순항(旅順港)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런 다음 일제는 같은 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다. 그리하여 일제는 같은 해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카스라·태프트 밀약, 같은 해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오츠머드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 받았다. 그 뒤 곧 바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케 함으로써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여 갔다. 즉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우리나라를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러일전쟁 중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법 주둔시킨 2개 사단의 일본군을 무력적 기반으로 하여 군사 계엄통치까지 자행하면서 우리나라를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었다.
더욱이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경운궁(慶運宮) 중화전(中和殿)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하여 당시 반일 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였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그런 다음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케 하고,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케 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분담케 하는 소위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하였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군대해산 조칙을 융희황제(隆熙皇帝)로부터 재가받는 형식을 취한 뒤, 곧 바로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는 물론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국방력을 말살하여 무방비 상태로 만든 다음 우리나라를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취한 예비 조치였다.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병부대 조직
이같은 일제의 침략과정을 보면서 선생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는 길은 무력투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러일전쟁 중인 1905년 5월부터 백학선(白學善)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일제가 친일내각을 사주하여 을미개혁 당시 선포했던 단발령을 재차 강행하여 반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가자, 선생은 이 때야말로 의병 봉기의 호기임을 인식하였다.
특히 광양군에서도 군수로 있던 서상붕(徐相鵬)이 온 고을 사람들을 위협해서 상투를 자를 것을 강요하여 반일 감정이 높아가던 사실에 주목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상투는 단순한 머리털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화 정책에 대항하는 의미를 내포한 민족적 상징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단발령의 강제 시행은 일련의 매국조약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을 증폭시켜 갔는데, 선생은 이같은 민족정서를 의병 봉기로 결집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털조차 보전 못하게 하는 불의(不義)를 우리는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아니된다. 우리나라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외교권조차 박탈되었다. 우리는 힘으로 일본을 격퇴하여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의병부대를 조직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8년 7월 26일 종숙(從叔) 황순모(黃珣模와 백학선·한규순(韓圭順)·고견(高堅)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조직한 뒤, 호남창의대장기(湖南倡義大將旗)의 기치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 때 선생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 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격문을 사방에 붙여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에 따라 선생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각처에서 모여든 의병이 200여 명을 훨씬 넘었는데, 그 대부분은 산포수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날마다 산을 타고 넘으면서 짐승을 잡아온 사냥꾼들이라 산악지리에 밝을 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능해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의병 구성원의 특성이 선생의 의병부대가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광양군 망덕만 전투에서 대승
봉기 후 선생의 의병부대가 최초로 일본군과 접전한 것은 1908년 8월 5일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望德灣) 전투이다. 선생은 망덕만에 일본 선박 1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격과 수영에 능한 의병 150여 명을 뽑아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백운산 본진에서 야간행군을 하여 일본 선박이 정박해 있던 망덕만 근처의 미리 정해둔 집결지에 도착한 뒤, 기습작전을 벌였다.
우리 선생은 80여 명으로 제1대를 편성하여 왜선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제1대는 10여 척의 일본 선박을 기습 공격하여 잠에 취해 있던 일본인 다수를 사살하고 수 척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선생은 나머지 병력으로 제2대를 편성하여 망덕만 부근의 일본인 주거지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2대는 10여 채의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파괴·소각하면서 4명의 일본인을 사살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군과의 첫 접전에서 승리한 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사기충천하여 백운산 본진에서 전투력 강화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초순경 선생은 순천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분대 병력과 새로이 설치된 광양헌병분견소 병력이 합동작전으로 망덕만 전투에서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해 백운산 의병주둔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00여 명의 정예 의병을 특공대로 편성하여 광양군 옥곡면 옥곡원(玉谷院) 뒷산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일본 헌병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곧 그들이 나타나자 선생은 기습 공격을 단행하여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다수 사살하여 퇴각시켰다. 이 때 선생은 전투를 지휘하다가 불행히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전투 대열을 갖추기 전에 쳐부셔야 한다. 기운을 내라”고 의병들을 독려하여 결국 승전을 거두었다고 한다.
광양헌변분견소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림
이후 선생은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최춘명(崔春鳴)의 집에서 한 달여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백운산 의병부대로 되돌아가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특히 이듬해 1월은 예년에 비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자, 선생은 이같은 기상의 악조건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선생은 일본군이 백운산 아래에 진을 치고 의병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주력하여 광양헌병분견소 본대에는 몇 명의 경비병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광양헌병분견소 본대를 공격하기로 작정하고, 백운산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두 개의 이동경로를 설정하여 하나는 공격로, 다른 하나는 철수로로 이동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런 뒤 50여 명의 정예 의병으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1909년 1월 23일 야밤을 이용하여 광양헌병분견소 근처까지 이동하였다. 그리고는 적들이 졸음에 빠져있는 시간에 은밀히 잠입하여 전혀 총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헌병들을 전원 포박한 다음, 무기고에서 10여 정의 총기를 노획하여 무사히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군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어 전투활동은 물론 의병 근거지인 백운산 식량을 조달하는 것 조차 어려워졌다. 이에 선생은 앞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스스로 피신하도록 보내주고, 나머지는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앞바다에 있는 묘도(猫島)로 이동하여 그곳을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재기를 도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들을 하산시켜 각자의 뜻에 따라 피신하거나 새로운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결정된 묘도로 가도록 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도 모색
선생 또한 1909년 7월 19일 동지들과 함께 광양읍 황금동 나룻터에서 배를 구하여 묘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거의 도착할 무렵 일본군에게 의병부대의 묘도이동 계획이 탐지되어 집중 사격을 받고, 1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피살되는 희생을 당하였다. 이 때 선생은 배에서 뛰어내려 잠영(潛泳)으로 여천군 삼일면 군장동 부근에 상륙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병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이어 같은 해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재기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후 친지들의 집을 찾아 이리저리 피신하면서 국권회복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던 중 선생은 을사 5적 가운데 하나인 이근택(李根澤)을 저격하였던 기산도(奇山度)를 1918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견한 독립운동 밀사인 김철(金澈)을 만나, 그의 권유로 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선생은 물론 김철·기산도·김종택(金鍾澤)·이인행(李仁行)·박은용(朴殷容)·김영탁(金永鐸)·민치환(閔致煥)·이문복(李文復)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지방 자산가들을 찾아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군자금 모집활동 후 만주로 망명
그러나 그 해 10월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택이 자금을 모집하다가 종로경찰서에 피체되어 조직이 탄로나고 말았다. 때문에 기산도·이인행 등 다른 동지들 또한 잇따라 피체되자 선생은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국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해 11월 상해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일제의 사슬로부터 벗어났지만 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 사건으로 결석재판을 통해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력 3년을 받았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일본군과 맞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한 것같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입국 중 피체
약 4년 동안 선생은 만주에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함께 영고탑(寧古塔)·용정(龍井), 그리고 흑룡강(黑龍江)과 흥개빈(興開濱) 등지에서 독립투쟁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생은 1923년 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던 중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재차 만주로 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의병전쟁 중에 입은 총상의 악화, 일경에 당한 고문의 휴유증, 그리고 4년여에 걸친 옥고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 4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