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이는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의 선물인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는 것을 뜻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알면서도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신다. 그리고 늦기 전에 화해하라고 촉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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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행복을 위한 ‘삶의 지혜’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인생살이에서 참으로 중요하지만 흔히 빠질 수 있는 ‘인식의 함정’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깃한 ‘처방’만 찾다가 정작 ‘지혜’의 가장 깊은 측면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고정 관념에 더 심하게 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이탈리아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고대 ‘삶의 지혜’의 가장 뛰어난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풀이하면서, 사람들이 자주 간과하는 진정한 ‘삶의 지혜’를 위한 두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저 이론적인 지식이거나 자신의 ‘인격’과 무관한 차원의 능숙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의지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하는 ‘실천적인 앎’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하고 체험하는 도덕과 행복은 본디 불완전하며, 오직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에서만 ‘완전한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적 지혜’와 ‘인간의 행복’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그의 이러한 통찰과 함께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징조를 잘 알면서도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으로 지식은 있으되 삶의 지혜에는 무지한 자들을 딱하게 여기시는 한편, 교묘하게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려는 그들 마음속의 유혹을 날카롭게 벗겨 내십니다. 그러시면서 ‘삶의 지혜’를 가진 이는 오히려 화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화해의 힘의 근원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있음을 언제나 말씀하고 계심을 잘 압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힘입어 일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화해와 일치와 사랑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이, 주님의 은총이 인간적 불완전함을 채워 나간다는 것을 믿고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이야말로 참으로 행복을 위한 지혜를 깨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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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사상의 핵심 내용들 가운데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주재하는 하늘의 때에 딱 들어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역』(周易)은 이 ‘시중’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참고 도서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이 개념은 어느 것이 하늘의 뜻이고 아닌지를 잘 식별하여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르침이지요. 굳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더러는 운명 철학관에 가서 이른바 ‘사주팔자’나 ‘운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현실은 답답하고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철학관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약해 흔들리거나, 주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거나, 희망을 주님께 두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무엇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지 아닌지를 식별할 줄 알면,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따위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이 시대에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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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내일의 삶’은 왜 덮어 두느냐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앞날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돈과 물질이 넘쳐 나고 있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현실을 풀이할 열쇠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애정 결핍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쉽게 빠져듭니다. 물질로 영혼을 달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답이 아닙니다. 갈증만 심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란 말인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행위’가 화해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입니다. 늘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소송 중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재판관이신 주님께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사랑도 깨달음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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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잘 내다봅니다. 세상이 주는 사인 역시 잘 읽습니다. 경제적 상황이나 미래의 예측 또한 정확합니다. 그런데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서툽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요?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머리만 믿고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늦기 전에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화해입니다. 가족과의 화해요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돈과 재물이 많다고 노년이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똑똑하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과의 화해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꾸짖고 계십니다. 시대의 요구는 언제나 화해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건 화해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말에 공감하는 여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웃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말씀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시대의 ‘아웃사이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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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참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빠지고, 또한 그것으로 메마른 영혼을 달래려 합니다. 사랑이 목마른 탓입니다. 그럼에도 원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불안과 허무감이 더해집니다. 젊은이들이 스피드와 폭력과 성적 놀이에 빠지는 주된 이유입니다. 치유의 지름길은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화해는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걱정해 주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과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랑 역시 십자가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시대의 뜻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은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뉴욕의 운전 면허증 관리 사무실에 특이한 편지가 한 통 왔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지요.
“나는 이제 곧 91세가 된다.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운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진해서 면허증을 반납한다. 그러나 25세부터 운전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를 내거나 벌금을 낸 적이 없다. 60여 년 간 무사고로 운전하고 이제 스스로 면허증을 반납하게 되어 대단히 자랑스럽다.”
이 할아버지처럼 60여 년 간을 운전하면서 벌금도 안 내고 사고 없이 지내다가 자진해서 면허증을 반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 역시 운전을 한 지 10년 정도가 되었는데, 그 동안에 커다란 사고도 한 번 있었으며 벌금을 낸 경우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할아버지처럼 무사고에 무벌금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의 무사고 무벌금 운전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비결을 할아버지에게 묻자 할아버지는 아주 단순하게 답변하셨습니다.
“항상 교통 규칙을 잘 지키고, 먼저 양보하고,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것이다.”
무사고 무벌금 운전의 비결은 사실 그 자체로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꾸준히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만큼은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또한 바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참고 인내하며 교통 법규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운전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 삶 전체 안에서 철저히 기본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 빠른 결과만을 추구하는 성급함, 나의 욕심을 먼저 채우려는 이기심 등을 없애는 기본적인 원칙들이 내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무사고 무벌금 운전의 비결은 간단한 규칙을 철저하게 지킬 때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님을 따른다는 것 역시 간단한 규칙인 사랑의 법규를 철저하게 지켜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라면서 꾸짖고 계시지요. 바로 세상 안에 묻어나는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실천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말 자체로는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다시 열심히 실천해 나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쁜 아이디어가 지름길로 가라 해도 넘어가지 마라. 인생은 커브 길이니 때로는 돌아서 가야한다(빌터 뫼르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양승국신부-
<축제와 환희의 시대>
오늘날 우리가 해마다 세고 있는 연도(서기, 西紀)의 첫출발점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참으로 의미 있고 가슴 벅찬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 탄생 이전의 시대는 기다림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류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은 암흑의 시대였지만 탄생 이후는 광명의 시대입니다. 그전은 슬픔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축제와 환희의 시대입니다. 이전의 시대는 죄와 죽음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구원과 생명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통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와계시며 우리 매일의 삶을 동반해주십니다.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조차 우리를 지켜보실 것이며, 죽고 나서까지 확실하게 애프터서비스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과 함께 매일 매일 축제를 벌여야 할 새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주실 것이니 매일 그분께 맡기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현상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풀이해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해석(예수님으로 인한 새 세상에 관한)은 뒷전인 군중들을 향해 쓴 소리를 한 마디 던지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풀이해야 할까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이자 축복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 비천한 죄인인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따라 우리도 이웃 사랑에 투신하는 것, 그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안에서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슬픔이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하느님의 위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풍랑 앞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불운과 실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것입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입니다.
분의 손에서 빚어진 작품
- 박향숙 수녀 -
모든 것이 하나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천지의 창조주가 하느님이시고 나 자신이 피조물임을 겸허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근원을 아는 것이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 할 줄 모르느냐??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운다. 인간은 삶을 다하고 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깊이 이해한다면 바로 인간의 존재가 자연과 하나이고 한 분의 손에서 빚어진 작품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겠다고 너를 죽일 때, 결과는 죽음이다. 더불어 같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하시는 너와 나의 화해다.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이다. 그 처지를 조금씩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나에서 떠나 너를 아껴주는 마음이다. 이것이 너와 나를 살리는 더불어 같이 사는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이 사람을 살리고 있음을 잊은 지 오래다. 사람이 뱉어낸 오물로 병들어 가고 있는 지구의 아픔을 의식하지 않은 지 오래다. 자연 순리대로 흘러가는 강을 막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년만년 살겠다고?….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무언가, 어디엔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며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김찬선신부-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시대를 풀이한다. 이 무슨 뜻인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얘기하곤 합니다. 바뀐 세상을 모르고 옛날 생각대로 할 때 하는 얘깁니다. 이 때, 이 시대를 풀이한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풀이할 줄 아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것이겠지요.
작년인가,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 젊은이들의 톡톡 튀는 말과 행동이 매체에서 흥미롭게 다뤄졌습니다. 눈치 보지 않는 것. 그래서 자유분방한 것. 세계 다른 젊은이들에게 절대 기죽지 않는 것. 국가와 사회를 위한 희생을 당연시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성취를 당당히 내세우는 것. 강압과 타의에 의한 것을 싫어하고 즐기면서 하는 것.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이요, 감성 시대의 특징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풀이할 줄 안다는 것은 프리모더니즘 시대에 태어나 모더니즘 시대를 살던 우리가 이제 이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이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것이고 이 시대가 무엇을 요청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를 아는 것뿐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이 시대 사람들에게 맞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어제는 교육 회관에서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수도원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 가운데 여자 아이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젊은이들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아직도 제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살 때 많이 봤기 때문에 왜 젊은이가 어른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문제이고, 남자가 피우는 것은 괜찮고 여자가 피우는 것은 문제냐고 제법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척 하였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저의 속 감정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젊은이들을 만나면 나무라지는 않지만 그들이 담배를 피우면 제가 살며시 자리를 피합니다.
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저의 세대와 다른 이 시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저, 그래서 아직도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이 시대를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단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는 받아들이면서 사람들의 변화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은 위선자라고 하시며 나무라시는데, 그런데 제가 바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시대에 맞는 올바른 일을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나무람을 들을 그 위선자입니다.
사랑에로의 부르심 -김찬선신부-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영어가 ‘Vocation'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① 직업, 생업, 장사, 일. ② 신학? 신의 부르심, 신명(神命)(에 의한 종교적 생활). ③ 천직, 사명감. ④ (특정 직업에 대한) 적성, 재능, 소질이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직업이 ‘하느님의 부르심’, 즉 성소가 아니고 자기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직업이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일체를 이루시는 그 삼위일체의 사랑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에로 달려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로 달려가 하느님 사랑으로 물들은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또 다른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오늘의 서간이 애기하듯 우리로 하여금 같이 한 성령으로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고 같이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같이 하나의 세례를 받고 같이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겸손과 온유와 인내입니다. 코린토 전서 13장에서도 얘기했듯이 참 사랑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가 밑받침되지 않는 사랑은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무장하고 사랑하러 달려갑니다.
<독서> :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는 믿음 -경규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며,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참조)라고 말씀하시며 믿음을 실천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신앙이란 다만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실천해야만 한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다.”(야고 2,20-26 참조) 참된 신앙이란 사랑의 삶으로 드러난다. 사랑으로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셨고, 새로운 생명에로 초대하셨으니(1,4-5.12-13), 그리스도인은 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신앙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 안에서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마태 3,8; 10,38; 사도 26,20).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은 먼저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이다(필립 2,3).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듯이(필립 2,6-11; 1베드 5,5)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한다.
둘째로 온유이다. 온유란 온화하고 부드러움, 이해심과 사려 깊은 배려를 뜻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2고린 10,1) 성령의 열매이다(갈라 5,22.)
셋째로 인내이다. 인내는 죄인인 사람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성품이며(로마 2,4; 9,22; 1베드 3,20; 2베드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이다(1고린 13,4; 2고린 6,6; 갈라 5,22; 골로 3,12). 인내란 참고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의 덕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주시는 새 시대의 능력으로(1고린 13장; 갈라 5,14.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며, 무조건적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사랑으로 실천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즉, 참된 믿음이란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나아가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일치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구원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의덕(義德)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음으로써 믿음을 통하여 구원된다. 그러나 믿음이란 단순히 주님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어 주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며, 주님처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갈라 2,20) 이러한 믿음이 참된 믿음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다.
오늘,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자. 주님께서 내 안에 계서서 주님의 힘과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요즘 아이들은 뭐 하고 노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평일 낮에 성당 앞 동네 골목을 걷다보면 아이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저의 어렸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때 동네 골목은 어린이들의 땅이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별의 별 놀이를 다 했지요.
구슬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천당집기, 얼음땡, 땅따먹기, 총싸움, 오징어, 찜뽕 등등……. 그때 했던 놀이를 적어보니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놀이를 하다가, 누구의 엄마든 상관없이 “밥 먹어라.”라는 소리만 들으면 아쉬움 속에 그날의 놀이는 끝이 났지요.
어렸을 적에 학교 수업이 기다려졌던 이유는 수업 이후에 있었던 놀이 때문에 그랬고,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9시 뉴스 직전에 나오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구절을 보기도 전에 꿈나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나게 놀았던 어린 시절, 그래서 그때가 지금도 많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그때가 그립다고 옛날의 놀이를 지금 하면 어떨까요? 우리 본당의 꼬마들과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과 ‘얼음땡’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최고의 놀이였으나, 지금은 시시하고 유치한 놀이가 되고 만 것이지요.
자기 나이에 적합한 놀이가 있는 것처럼, 지금 나에게 맞는 행동거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어하고, 혼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함을 말씀해주십니다. 즉, 그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적합한 행동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통해서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간절하게 원하는 행복의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 반드시 필요한 사랑의 실천.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징표임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 만큼, 우리의 노력에 주님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정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페트라르카)
시대를 읽는 눈
- 신한열 수사-
과학 발전과 대중매체, 특별히 인터넷 보급으로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지식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보다 훨씬 자유롭고 자율적이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현대인들이 오늘의 사회와 사건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얼마나 쉽게 포기하는지를 보면 때로는 아찔해진다. 대중매체, 그것도 방송의 힘은 참으로 강력하다. 은연중에 사람들을 움직이는 ‘유행’이라는 것도 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수고가 귀찮아서 혹은 혼자 외톨이가 되거나 따돌림당하기 싫어 무리를 따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시대에는 각 분야에 많은 전문가가 있다. 이 전문가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유명인사나 전문가의 말이 방송 매체를 통해 전해질 때, 그 내용과 사리를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무섭다. 동서고금을 통해 보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조건적 추종을 강요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사이비 종교, 신흥종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건전한 상식을 중시하신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에게 ‘네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 일깨워 주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가능성이, 다른 사람을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는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징조를 알아채지 못하는 동시대인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왜 스스로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은 재판정에 가기 전에 고소인과 합의를 보고 화해하라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미루지 말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전문가나 학자 또는 성직자의 말이라 해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장 큰 계명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온갖 주장이 난무하고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숨결에 귀 기울이며 상식과 양심, 평상심을 잃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세상에 이미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스림, 고요한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징조에 민감하라
-전삼용신부-
얼마 전 한 젊은이가 사회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고시원에 함께 살고 있던 조선족들을 비롯한 여자들을 살해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정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 국보 1호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또 길거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살해를 당하는 많은 사건들도 뉴스에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 착했다가 한 순간 갑자기 변해서 그런 사건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성인이 되는 사람도 없고 한 순간에 살인자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살인자가 되었다면 그 이전에 그런 징조가 나타났을 때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도 한 순간에 변하여 예수님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한 순간에 회개하였다고 하면 오산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화살은 겨냥하는 방향으로 날아가듯이 지금의 나의 모습도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들이 징조입니다.
이 징조에 둔감하면 결국 큰일을 당하고 맙니다. 얼마 전에 이태리 아퀼라 지방에서 큰 지진이 있어서 이례 없이 수백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미 땅에서 솟아나는 징조를 눈치 채고 정부에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질을 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또 산사태로 수십 명이 매몰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이것도 예고 된 재난이었습니다. 산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고치라고 이미 돈이 지불 된 상태였는데 그 액수가 터무니없이 작아서 고치지 않고 그냥 방치하였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풍백화점도 이미 예고되어져 있었다고 하고 미국의 911 테러도 정부엔 이미 보고가 되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고되지 않은 재난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징조라도 잘 캐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성적으로도 민감한 일일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일도 결코 작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 허락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마치 500미터 전부터 계속 속도 카메라가 있다고 가르쳐주는 도로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굳이 인정하려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씩 나빠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예측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바꾸려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뻔한 일은 누구를 미워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도 신자들의 많은 경우 아직도 미움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당장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그 미움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미움이 지금 이대로 지속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는 미움을 지니고 계속 살다가 마지막을 맞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 우리들도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 구원을 받을 확신 속에 살고 있습니까? 나를 돌아보고 지금 이대로 계속 되어도 괜찮은지 항상 되물으며 큰 재난을 당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으면 바로바로 고쳐나가야 하겠습니다.
시대의 징표 읽기
-김찬선신부-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종종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연말이 되면 늘 글라라 봉쇄 수녀원으로 갔습니다. 저 개인적인 한 해 돌아봄과 새 해 설계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시대의 징표를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관구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 할 사람으로 시대 상황과 현상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 시대가 우리 프란치스칸에게 무엇을 요청하는지, 요청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을 아는 것은 머리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의 영역이요, 믿음의 영역이요, 헌신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의 눈을 가져야만 보이고 알게 되고, 하느님의 가난을 지녀야지만 보이고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지녀야지만 요청이 눈에 들어오고, 요청에 응답할 사랑의 의지를 지녀야지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이 앞서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自己愛로만 가득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밖에 안 보이고 욕심내는 것 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도 아니 보이고 사람들의 요청도 아니 보입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자, 의로운 자인 냥 하니 위선자라고 질책 받습니다.
<소래포구>
-양승국신부-
날씨가 꽤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10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함께 살다보니 요즘 제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르는 단어가 "월동준비"란 단어입니다.
난방을 위해 한동안 때지 않았던 보일러도 시험 가동해봐야 합니다. 각 방 라디에터에 에어도 빼야하지요. 슬슬 김장 준비도 해야겠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소래 포구에 가서 새우젓이랑 멸치젓도 사와야 하지요. 올해 배추 값이 금값이라고 하는데, 벌써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런 저런 당장 먹고 살 일에 집착하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또 가슴이 철렁합니다. 가슴이 찔리기 시작합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일에는 그리도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 성령의 이끄심이 무엇인가를 찾는데는 어찌 그리도 둔하냐?’는 음성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내일 당장, 이번 달, 올 겨울 당장 먹고 살 걱정은 태산같으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걱정, 영원히 사느냐 못사느냐에 대한 걱정, 영혼을 위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느냐?"는 그분의 음성에 몹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수시로 벌어지는 세상의 여러 사건들 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여러 모습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징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다양한 체험,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표징을 포착해내는 일, 그리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수도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갈등상황이나 상처, 고통들 안에 긷든 하느님의 뜻과 징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다가오는 상처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크다면, 일단 제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침묵으로 몰입하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유 없이 오해받는 일이나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제 자신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의 비참함이 커져만 갈 때, 바닥으로 빠져 들어감을 느낄 때면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으로 여깁니다.
삶의 모든 국면,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 순간 목든 사건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찾아나가는 영적인 하루가 되길 빕니다.
얼마 전에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부부간의 대화시간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하는 대화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대화시간이 부부 사이에 하루 얼마나 됩니까?”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 하루 평균 고작 2분 37초라고 합니다. 컵라면 익히는데 필요한 시간이 3분인 점을 기억할 때, 컵라면 하나도 익히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대화가 없는데 부부간의 사랑이 제대로 싹틀 수도 없을 것이며, 그 사랑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 사이에서 이렇게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쉽게 사랑이 발견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피시려고 했는데, 과연 사랑은 얼마나 활활 타오르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은 점점 커지고, 대신 남에 대한 사랑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지요. 미국의 어떤 학자가 신자들의 신앙 상태를 조사해서 연구 발표했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를 우리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퍼센트의 교인이 주일 미사에 불참하고 있고, 25퍼센트의 교인이 기도를 안 하고 있고, 30퍼센트의 교인이 기도를 할 줄 모르고, 35퍼센트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40퍼센트의 교인이 헌금을 안 하고 있으며, 60퍼센트의 교인이 신앙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퍼센트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75퍼센트의 교인이 교회에서 책임진 것이 없고, 85퍼센트의 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을 인도해 본 일이 없는데 반하여 100퍼센트의 교인들이 하나같이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고 입으로는 떠들지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고 대신 십자가를 앞세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얌체처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면서 꾸짖고 계십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자기라는 틀 안에 갇혀서 다른 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지요.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얌체족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히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거든요.
가족과 대화를 합시다.
시대의 징표
-김인옥 수녀-
수녀원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지난해 10월에 열렸던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총회의 결의 사항을 모아 만든 ‘2008년 한국여자수도자들의 기도’를 성무일도 후에 바치고 있다.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기회와 상황으로 저희를 부르시는 하느님 온 인류가 희망과 생명을 살도록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한국 수도자들이 각자의 독특한 소명을 깨달아 알고 세상의 필요한 상황에 응답할 수 있게 하소서. 특히 이주민과 다문화 가정 문제를 저희 민족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생태계 보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계속 연대하게 하소서. 또 본당 사도직을 수행하는 저희가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며 교회 내 소통의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교회와 세상에서 당신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도문 안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주민·다문화 가정·생태환경·본당 사도직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시대의 여성 수도자들이 읽어 낸 ‘시대의 징표’들이다. 지난봄 장상연합회에서 일하는 수녀님의 부탁으로 기도문을 다듬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담당 수녀님은 우리가 다듬어서 제출한 기도문을 보고 며칠 고민하다가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며’라는 문구를 넣었다고 한다. 기도문이 비로소 제 꼴을 갖춘 느낌이 들었다. 매주 이 기도문을 바칠 때마다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며’라는 문장이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도 미지근한 삶을 살아가는 나를 재촉한다.
귀를 기울이다 -서인덕 신부-
눈치가 참 빠른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저 사람 눈치 100단이야.” 태권도도 1단을 따기가 참으로 힘들고, 바둑 또한 그렇습니다. 100단이면 어느 정도일까? 하고 뜬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눈치 100단인 사람은 상대방에게 한두어 마디를 건네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에 맞추어 대화를 이끌어나갑니다. 또한 상황 판단을 잘해서 자신이 이야기해야 할 순간과 하지 말아야 할 순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저는 100단 정도는 안 돼도 한 5단 정도는 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상황판단이 잘 되고, 상대방의 심리상태를 금세 알아차립니다. 때로는 이런 저의 모습이 상대를 배려한다는 생각에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괜한 것까지도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저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서운해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위의 것들에는 신경을 쓰지만 정작 예수님께 눈길을 돌리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결심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매순간 제에게 주시는 그 메시지를 잘 읽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라. -차성현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땅과 하늘의 징조는 살필줄 알면서 시대의 징표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부터 혼이 납니다. 위선자라고 까지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면 보통 역정이 나신게 아닌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시대의 징표 뿐아니고 땅과 하늘의 징조를 살피는 것도 쉽지 않은데 너무 크게 혼이 나는 것 같습니다.
석포 본당 공동체에서 생활한지가 1년이 되었습니다. 그 1년동안 운동회를 겸한 야외행사가 3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된 운동회는 이번달 초에 있었던 본당 체육대회가 처음이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가 모두 다 신나게 비가 왔습니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날씨가 아침에 돌변하여 심술을 부리는데 따로 대책이 없었습니다. 처음은 서먹서먹하고 해서 서로가 위로하고 격려하고 잘 넘어갔지만, 두번째 비가 왔을 때는 거의 모든 책임이 본당신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꼼짝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세번째는 땅과 하늘의 정말 잘 살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예상이 빗나가면 보따리를 싸야할지도 모를 형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날씨가 아주 좋았습니다.
햇빛이 구름에 살짝 가리는 보너스까지 받았습니다. 땅과 하늘의 징조를 잘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본당공동체 모두가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과 하늘의 징조를 잘 읽었던 예수님시대의 사람들이 혼이 납니다. 이유인즉, 그것만 읽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징표도 꼭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부터 매우 큰 칭찬을 받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습니다. 땅과 하늘의 징표를 매번 잘 읽지 못하는 것처럼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는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지않다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은 큰 시대의 징표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이미 왔으니 준비를 서둘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시대의 징표를 읽고 방향의 큰 줄기를 잡았으니 그안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징표들만 읽고 살아가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것, 공부하는것, 그리고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것, 가족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존중하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고자 하는 것 등, 이 모두가 하느님나라를 향한 큰 시대의 징표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할 때 그때 그때 읽어야 할 자신들의 시대적 징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렵지 않게 읽혀질 것 같습니다.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백번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교통사고가 난후 서로 화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대로 되지않아 서로 얼굴을 붉힌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개는 경찰이 개입하게되는데 그러면 서로가 피곤하고, 그리고 잘잘못을 떠나 민간인 신분으로 경찰서에 가야만 하는것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재판을 말씀하시며 법원까지 언급하셨는데, 제가 알기론 법원은 경찰서에서 더이상 할 일이 없을 때 가는곳인데 그러면 더더욱 가지않는 것이 백번 천번 다행일 것입니다. 살다가 얼굴 붉힐 일을 피할수 없다면 반드시 화해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회안에서 화해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무조건 해야 합니다. 좀 이기적인 것 같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해야합니다. 그래서 화해할 때 자신이 상대보다 조금더 손해보고 양보해도 조금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얌체같은 일같지만 눈딱 감고 해야만 합니다.
한번 해보십시요. 상대와 상관없이 자신만 그렇게 마음먹으면 화해가 한결 수월합니다. 인연이 있어서 같은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화해를 하게 되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의 화해를 늦추지 말고 빨리하라고 하십니다.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 않으면 바보입니다. 우리는 밑져야 본전보다 낫습니다.
최소한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직접 보여 주셨지만, 우리와의 화해에 있어서 하느님은 무조건 손해를 봅니다. 조건 없이 양보하십니다. 그래서 안하면 손해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하느님. 또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멘............◆
하느님과의 화해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지난 며칠 동안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오늘은 그 때문에도 항상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살다보면 잘못한다. 그래서 법정에도 갈 수 있으나 잘못하였을 경우에는 가는 도중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잘못한 점들이 많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 서게될 날이 임박하니 어서 빨리 화해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서게된다는 말은 마치 사람들이 구름과 바람의 변화를 보고 "비가 오겠다" "날씨가 덥겠다"는 것을 미리 알고 판단해서 그러한 날씨에 대비하는 것처럼, 자신의 구원사정을 미리 준비하여 그에 맞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죄 중에 있지 말라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단절은 하느님을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이 단절을 우리의 노력으로 즉시 없애도록, 즉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매 순간 하느님 앞에 다시 돌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의지를 꺾고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희생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다. 항상 잘못할 수 있지만 즉시 회개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다. 기후나 시대의 징조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가졌다 해도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불행 할 수 있다고 하신다. 내가 나 자신을 정확히 알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닮는 것, 즉 나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의 징표를 읽는 능력보다도, 다른 사람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볼 수 있는 능력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모습이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인의 삶은 넘어질 수 있지만, 즉시 일어나는 오뚝이 와 같아야 할 것이다. 오뚝이를 쓰러뜨릴 수 있지만, 오뚝이는 즉시 일어난다. 항상 꼿꼿이 서있는 것이 오뚝이의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우리는 자주 우리의 결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언제나 그 앞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나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를 항상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항상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있을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새벽을 열며
옛날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가장 잘생긴 노예를 골라 3일 동안 왕으로 삼고 그가 원하는 모든 일을 다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왕이라는 위치에 올라간 이 노예들은 인간으로서 구가할 수 있는 모든 욕망을 다 추구할 수 있었지요. 이 노예들이 3일 동안 추구하는 욕망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성적 쾌락. 동물적인 본능에 따른다고 합니다.
둘째는 좋은 음식. 굶주려 왔던 자신의 배를 위해 좋은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으려고 합니다.
셋째는 도리에 어긋난 권력남용. 억눌렸던 생활을 보상받으려는 듯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마구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3일 후 이들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다시 노예의 모습으로 돌아가 비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만다고 하네요.
여러분들에게도 3일간의 자유만 주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사실 것 같습니까? 단 3일밖에 남지 않은 자유를 위해서 허둥대는 노예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우리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의 인생이 길어봤자 8~90일 텐데 그 시간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특히 주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의 인생이 그렇게 길다고 느끼실까요? 영원한 생명 가운데에서 아주 일부의 시간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찰나의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서 그 시간을 순간의 즐거움과 동물적인 쾌락에만 쓰려고 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아쉬워하실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바로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 노릇하던 노예들이 겨우 3일 만에 처형되듯이, 우리들도 겨우 몇 십 년 뒤에 또 다른 의미의 처형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허무하고 서글프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이며,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합시다.
빠다킹신부
이제 더이상은 안 된다.
-고병수 신부-
·11테러로 촉발된 죽고 죽이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끝간 데 없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귀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평생을 쌓아온 삶의 터전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백성들이 부르짖는 신음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제 더이상은 안 된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예서 그쳐야 한다. 이는 시대의 뜻(루가 12,56 참조)이며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준엄한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반전여론이 드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시한’이란 중년 여인 때문이란다. 그는 2004년 4월 바그다드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라크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설립한 ‘평화를 위한 전사자 유가족 모임’ 대표로 반전운동에 앞장서 왔는데 올 8월 6일부터 야만적인 전쟁 종식을 위해 부시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아예 크로포드 목장 앞에서 홀로 밤샘 시위를 한다고 한다.
그런 그의 행동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이곳저곳에서 동조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치고 있다.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전쟁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임을, 또한 세상의 참된 평화는 싸움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국 이는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요, 시대의 뜻을 헤아리는 의로운 행위이자 주님께 받은 은혜를 되돌려 갚는 참된 신앙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오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마태 5,38 참조)가 아닌 참된 화해와 용서를 통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자녀로 거듭나겠노라고 다짐하자.
-손태성 신부-
오늘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에 대해 말하면서 묵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지율스님입니다. 저는 지율스님을 통해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스님께서는 천성산 구간 고속철도 관통반대를 위해 목숨을 거셨던 분입니다. 저는 스님의 고행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그 분을 옆에서 조금 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투쟁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가녀린 비구니 한 분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온몸으로 받으시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의 세력을 보았고 그 악의 세력에 짓밟히는 선하고 약한 존재들의 아우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시대의 징표를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저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저는 사제로서 비가 오겠다, 날씨가 몹시 덥겠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 시대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향한 목숨을 건 투신이 없다면 사이비 점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자기와 관련된 일들은 그토록 빌면서 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그토록 둔한 것입니까? 오늘날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경제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더 연결되어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인간성은 더욱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운 노동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고,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은 아쉬움을 더해갑니다. 사람이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악순환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자기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질서아래 같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나라, 힘있는 사람들은 그런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를 올바로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을 밝히고 짜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종교도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고 세상의 논리에 젖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신앙인 각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종교인들이 지율스님을 욕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덥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냐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제논리를 위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다른 것들을 죽여가며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좋고 고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을 위해 더 귀한 것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기양 신부-
손발이 쑤시는 것을 보니 곧 비가 올 모양이라고 이야기하는 신경통 환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일기(日氣)가 우리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체험하고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가지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험을 토대로 한 예측은 대부분 맞아떨어지지요.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루카12,54-55)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징조를 보고 일기를 읽는 사람들이 정작 당신의 활동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시지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6)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심판을 예측하여 무서운 징벌을 피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화해”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지요. 화해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12,58-59)
우리는 죽으면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은 죄 값을 다해야 형벌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지은 우리의 죄와 벌이 용서와 화해로 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도 없어지지 않는 죄가 있다면 죽은 후에라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가며, 보속할 것이 남은 사람은 연옥에 간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연옥에서 죄의 대가를 다 치르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살아 생전의 용서와 화해가 죄를 없애는 길이고 연옥 벌을 줄이는 길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이지요.
또한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기도합니다. 수시로 묵주기도를 하고 또 매번 식사 후에는 반드시 죽은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하지요. 이렇게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나의 기도를 통해서 연옥 영혼의 벌이 사해지고 천국에 가기를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한번 묻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가?’ 살아 생전에 죽은 사람을 위하여 봉헌하고 기도하는 이 모든 행위는 내가 죽어서 연옥에 갔을 때 나를 위한 기도로 다시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편 내가 죽었을 때 기도해줄 사람이 있는가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식이 있더라도 냉담을 하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내가 죽어서 아무리 연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더라도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었을 때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있고 없음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녀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죽은 후에 기도할 수 있고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자녀가 냉담을 하거나 아예 신앙을 갖지 않거나 신앙이 다를 때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살아생전에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후에 나를 위해서 기도 드리고 또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줄 사람이 많은 것처럼 축복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12,59)
그렇습니다. 살아생전에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내가 지은 벌을 없애고, 혹시라도 남은 부분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으며 나의 기일에 연도를 바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평상시에 이러한 신앙의 삶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고 자식을 위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알아들음, 알아봄, 나의 관심
-이성우-
자,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같이 들어가봅시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겉으로 드러난 땅과 하늘의 모습, 겉으로 드러난 현실세계의 모습뿐입니다. 관심이 없는데 어찌 알아보고 알아듣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계시인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관심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는 생명수에 가 있습니까? 아니면 이 현실세계에서 현실적인 가치들에만 매여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고 올바른 곳에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입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과 행실은 현실적인 가치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도 못하느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내려와도 너희는 또 다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가장 귀한 선물
-최명숙 목사-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론도 결론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어서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어떤 증거로 믿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성경 말씀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했으니까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믿는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복잡하고 차원 높은 이론과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의 말씀에의지할 수 있으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징조를 아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정치적인 역사와 전망, 과학적 증거 그리고 경제학적인 비전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석학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과학이나 역사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분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지식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학문을 많이 섭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오만과 아집에 갇혀 진정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화해를 이루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는 삶이란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물질이나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8).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야말로 하느님께 받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참으로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믿음이라는 보화를 주신 것은 크신 능력이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그렇게 이 땅에서 화해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선물을 다른 이들도 받기를 간구하고 있는지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양승국신부-
<게임중독의 원인 한 가지>
요즘 저희 수도회에서는 총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총장신부님의 요청에 따라 모든 나라, 모든 관구, 모든 공동체에서는 약 1년여에 걸쳐 총회 분위기 안에서 생활합니다.
총회를 개최하는 목적은 지난 6년간의 수도자적 삶이라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목적 봉사 등을 심도 깊게 점검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향후 6년간 중점적으로 노력할 목표나 이정표를 세우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다양한 청소년 문제(파행적 입시제도, 피 말리는 경쟁구도로 인한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고통, 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청소년자살 등등)는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돈보스코께서 이 시점에서 이 땅에 다시 오셨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최근 자녀들의 심각한 인터넷 중독 증세나 게임 중독 증세로 인한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닌 몇몇 부모님들의 애타는 마음 앞에 저 역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 아이와 피시방에 갔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평소에는 잔뜩 주눅이 들어 늘 위축되어 살던 아이였는데, 피시방에 들어가면서 얼굴이 변하더군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환해졌고,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뭘 하는가, 가만히 봤더니, 전투를 하더군요. 현실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꼬이고, 모든 것이 불만족이었는데, 가상전투가 벌어지는 게임세계 안으로 들어가니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제왕이 되었습니다. 무수한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 가상 세계 안에 있는 동안은 정녕 얼굴 빛깔이 고왔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가상세계를 벗어나는 즉시 우리 청소년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암담한 현실입니다. 짜증나는 일과입니다. 부담스럽기만 한 분위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청소년들은 자기만의 세계, 모든 것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가상세계 안에서 마지막 탈출구를 찾는 청소년들임을 알고 나서 무조건 막는 것도 무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미칠 것입니다.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잘 파악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상황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종적인 바람인 세상과 인류 전체의 구원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홀로 완수하고자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소망하십니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들의 신속한 개입을 필요로 하신다는 신호입니다.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열렬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슴 흐뭇한 경사가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기라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현존해계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취와 그분의 뜻을 조금씩 찾아나가는 우리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동틀 무렵
-최영균 신부-
해가 쨍쨍하게 뜨면 사람들은 비가 올 것을 예측하고, 구름의 형세를 보고 날씨를 알아맞힙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여름에 비가 많이 안 오고 햇살이 강하면 포도 농사가 아주 잘 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사물과 자연의 형세를 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의 징표로서 간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비단 물리적 세계에 대한 예측을 위한 징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도 미래를 예견해주는 징표가 있습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와 같은 옛말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관련된 일의 징표를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주변에 제법 많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고, 이런저런 악재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소위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징표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어둡기 때문에 징표를 보지 못하는 일은 불가항력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 중 가장 어두운 때는 바로 동이 트기 전이라고 합니다. 새벽을 맞이하기 전의 그 어둠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해가 뜨면서 어둠을 산산조각냅니다. 내 삶이 어둔 밤이라면 어쩌면 그 어둠 자체가 너무나 희망적인 징표가 아닐까요?
돌이킬 수 없는 실형
-박상대신부-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하신 첫 말씀이다. 바로 이 "오늘"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실존은 역사의 새로운 시간으로 돌입하였다. 이 시간은 인류역사의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이 시간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기 때문이다.(루가 11,20)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류역사의 마지막 위기이자 동시에 그 완성을 의미한다. 문제는 사람이 과연 이 시대의 징표를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루가 10,22),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는 능력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23-24) 예언자들과 제왕들은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역사의 다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지금 보고 듣는 것을 그들도 보고 듣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때와 지금은 전격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인류역사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아는 제자들에게 곧 들이닥칠 마지막 날에 대하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다수가 섞여있는 군중을 향하여 시대의 징표를 깨닫지 못함을 한탄하신다. 당대의 사람들은 구름과 바람의 변화를 보고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시대의 징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통하여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었건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다. 오히려 예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들이었다.(루가 11,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기적, 즉 회개의 설교 외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으며(11,29-30),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12,31)고 하셨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거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하나 하나가 이미 충분한 기적이요 표징이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거나 얄팍한 자존심으로 일상을 재촉할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탓하며 나쁜 습관에 소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판단을 앞세워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57절) 타인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정에 이르러 실형을 받기 전에 서둘러 화해하여야 한다.(58절) 마지막 심판에서 실형(實刑)을 선고받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59절) 실형이 연옥(煉獄)이라면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이고, 실형이 지옥(地獄)이라면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의 모습은 풀이할 줄 알면서(루가 12, 54-59)
-유 광수신부 -
예수님께서 군중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모습은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다 알려 주셨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려 주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여 영원히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이미 다 알려주셨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서이다. 따라서 성서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장차 착하게 살면 어떤 상을 받게 되고, 악하게 살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는 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제멋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적혀 있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언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성서를 모르면 일반 사람들과 똑같다. 그리스도인이 예언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성서를 알아들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성서를 알아들으면 이 시대를 풀이할 줄 안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줄 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표징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인 것을 보지만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나라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눈이 뜨인 사람이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육적으로는 보고 보고 듣고 들어도 영적으로는 귀머거리요, 장님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만 이 세상의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4)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1고린 2, 14-15)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비가 오겠다.'하고 말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라는 것만을 아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징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보고 그이상의 것 즉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것을 보고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하나의 징표이다. 그리스도인은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 2)라고 말씀하신 삶을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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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