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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 성사가 되게 하는 감사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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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26 00:31
- 성사가 되게 하는 감사 기도
한번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환갑 되던 해가 서품 3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 지난 삶을 진지하게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었다.’가 성찰의 결과였습니다.
제가 잘못 산 것 가운데 하나가 형제들에 대해 늘 불만이 많았고,
형제들에게 감사하고 형제들에 관해서 감사할 줄 몰랐던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찰과 반성 후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나 같은 사람과 살아준 형제들과 살아주는 형제들에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뿐 아닙니다.
제 주변에서 저를 참아주고 도와주고 사랑해주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많이 무심하고 건망증이 심하고 허점이 많고 그런데도 일을 많이 저지릅니다.
며칠 전에는 너무 미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글을 그분이 보실지 모르지만, 너무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 협동조합을 통해 의료보험이 없는 불법 체류자를 위한
무료 의료 봉사를 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 의료 현장의 혼란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서도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주셨는데 제가 보지 못한 적도 있고,
시간 날 때 전화를 드려야지 하고는 까먹어 답을 드리지 못했지요.
저 같으면 돕겠다는데도 이렇게 무성의한가 하며 포기하셨을 텐데
이분은 포기하지 않고 입만 벌리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일을 진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을 포함하여 제 주변의 많은 분께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를 잘 표하지 못하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고서 또 다른 반성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지 않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 그렇게 감사드린다는 편지를 그들에게 씁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하느님께도 감사드리고 신자들에게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엄마, 저의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딸, 내 딸이 되어줘서 고마워!
이 표현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더 멋질 것입니다.
그것도 모녀가 같이 기도하며 이렇게 표현하면 더더욱 멋질 것입니다.
하느님, 저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딸을 제 딸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 남편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 아내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딸은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사가 됩니다.
저도 자주 이렇게 여러분에 대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을 저의 성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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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습니다.
“남자를 시험해 보고 싶으면 아주아주 잘해주면 됩니다. 그릇이 큰 자는 감사할 줄 알고, 병신 새끼는 가면을 벗기 시작하지요.”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상대방의 호의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부족해서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함부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책을 통해 ‘병신 새끼’라고 작가는 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일까요? 당연히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릇이 큰 사람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더 많은 만남을 갖게 되고 그래서 감사할 일을 더 많이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 감사의 인사를 듣는 상대방은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인정과 보람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릇이 커야 도움도 많이 받고, 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순간의 만족과 자기 욕심에 집중하면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 살기가 훨씬 수월해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선언의 대상자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이였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과 실천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의 대부분은 이들이 하느님과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위선자이고 눈먼 인도자라며 꾸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철저히 자기의 모습만을 세상에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을 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감사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니 당연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을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감사할 수 있으며, 그 감사의 표현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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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타심은 누구에게나 늘 열려 있으며, 단순함과 평온함,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진 선한 심성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다(마티유 리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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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마태 5,3-12)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 곧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인도, 곧 그들의 행실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사실, 이미 신자 된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 곧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임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경건함을 과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결국, 이 모두는 그들이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8)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19.). 곧 일을 잘 하는 것이냐,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냐?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내 자신이냐, 주님이신 하느님이냐?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냐? 그러니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마태 6,33)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 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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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에 눈떠라
한 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기만 옳은 양 틀에 갇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어서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가 이런 책망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제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자비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 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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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킬과 하이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누가 이길까요? 먹이를 많이 주는 쪽이 이깁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난처한 일도 있었고 보람된 일도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단합대회를 갔었습니다. 젊은 혈기와 적당한 취기에 타 대학 학생들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사의 실수가 명백했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저의 결정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교사들을 보듬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늦은 시간 사제관에 도착하니 빗장이 잠겼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신부님이 열어 주시면서 지금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시간을 묻지만 왜 늦게 다니는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말했지만, 문 앞에 세워놓고 말씀하시니 서운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이야기를 듣고 생활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분 좋았던 일도 많았습니다. 소공동체 연수가 필리핀에서 있었는데 추천받아서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습니다. 부족한 저를 추천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필리핀에서 복음나누기 7단계, 아모스 프로그램을 배웠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에 교포 사목으로 가 있던 친척 신부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도 미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큰 싸움으로 벌어질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본당신부로 있던 저를 생각해서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도축장은 칼을 사용하는 곳이니, 늘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었고,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한 형제님은 ‘신사부일체(神師父一體)’라고 후배에게 말하였습니다. 후배가 무슨 뜻인가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신부님과 스승과 부모임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없던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돌아보면 부족한 저를 과분하게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한 권위로 사목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시대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선포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나친 음주와 가무로 본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하는데 게임과 놀이로 세상의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먼저 만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죽비’가 되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사제들이 있습니다. 33년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요셉의원의 고 선우경식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알리고 있는 구수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성당 마당의 눈을 쓸던 바오로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드린 루시아 자매님도 생각납니다. 교포사목의 시작도 그랬습니다. 교우들이 몇 시간씩 운전하고 와서 공소예절을 했습니다. 기쁨이 넘쳤고, 사제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땀 흘려 벽돌을 날랐고, 물건을 팔았고, 눈물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사제를 모시고, 첫 미사를 드리던 날은 모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민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씨를 뿌렸고, 사제가 함께 하면서 5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고, 예수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악에게 먹이를 주고, 악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또다시 주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고, 선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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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전과 제단은 중요하지 않으나 금과 예물은 중요하다고 말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
사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과 제단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지만 그 안에 봉헌된 금과 예물은 그들의 소유로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성전과 제단은 소중하지 않고 물질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잠시 찾아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실수하는 부분은 없는지요.
사람과의 약속과 하느님과의 약속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사람과의 약속을 우리가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언 중천금’이란 말도 있듯이 약속을 쉽게 어긴다면 우리는 가벼운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한 약속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은 나와 하느님만이 아는 것이기에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어긴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두 번 그 거룩함을 저버린 사람은 이내 쉽게 하느님을 저버리는 습관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점점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볍더라도 거룩함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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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사람의 강화도 음식
‘젓국 갈비’라는 음식을 아시나요? 강화도의 토속 음식입니다.
젓국 갈비를 하는 식당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중 제가 좋아하는 집이 있습니다.
어느날 손님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저는 강화도의 토속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찾았던 그 집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메뉴에 젓국 갈비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장님 말씀으로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메뉴에서 지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장님께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만 해달라고 말입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 사장님께서는 강화분이 아니셨습니다. 경상북도 안동분이었습니다. 차려져 나온 젓국 갈비는 역시 맛있었습니다. 비록 안동분이 만들었지만 말입니다.
음식의 맛은 지역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내는 것입니다. 고향과 관계없이 그 사람의 손이 맛을 내는 것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이라는 손맛을 가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는 주님의 참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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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
오늘부터 3일간 복음은 마태복음 13장, 일곱 개의 불행선언을 다룹니다. 오늘은 그중 셋입니다. 한결같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로 예수님의 격렬한 꾸짖음의 뒤를 잇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위선적 삶을 혐오하시는지, 위선적 무지의 삶이 얼마나 힘든 영적 불치병인지 깨닫습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삶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자기를 모르는 눈먼 위선적 무지의 삶입니다.
이는 비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보편적 현상임을 깨닫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전반부, “행복하여라”라는 8개의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7개의 "불행하여라" 입니다. 역시 어제 강론에서 강조했다시피 우리는 “행복한 삶이냐 혹은 불행한 삶이냐?”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한몸이니, 겉을 보면 속을 알수 있고 속을 보면 겉을 이해할 수 있다.”<다산>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거칠어지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겉치레가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리는 후에야 군자답다.”<논어>
참으로 안팎이 같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이 참행복한 삶이겠습니다. 안팎이 다른 표리부동한, 위선적 무지의 삶이 아닙니다. 위선적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흡사 가면을 쓰고 가아假我를 진아眞我의 참나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가면없이 안팎이 같은 참나로 사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제 강론이 길다는 젊은 형제들의 개선 권고에 심히 불쾌했지만 참다가 후에 마음을 돌렸습니다. 강론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젊은 형제들 조언에 따르는 것이 사랑이요 해결의 첩경이다 싶었습니다. 공동체의 주인공이자 희망이요 미래인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작은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 싶어 올리는 강론은 다소 길겠지만 아침에 미사때 하는 강론은 많이 줄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소였습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니 애당초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겸손히 진실을 받아들이니 모든 것이 감쪽같이 해소되어 기뻤습니다.
이를 문제화했다면 미풍을 폭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무지의 꼰대의 모습이 됐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고 이런 깨달음의 이해와 치유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매일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기도와 공부, 회개와 깨달음, 치유와 해소의 은총의 시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세 사례가 제시됩니다.
첫째는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 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 하늘 나라 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된 이들입니다. 참 위선적 무지의 개탄스런 이들입니다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둘째 불행선언의 경우는 개종자 한 사람이 생기면, 자기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입니다. 앞서와 대동소이합니다. 위선적 무지의 삶을 보고 배우니 그렇게 될 수 뿐이 없겠습니다.
셋째 불행선언의 경우는 분별의 지혜 결핍을 보여줍니다. 표리부동,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위선적 무지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익숙해 마비되면 회개의 가능성은 요원해집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하느님 중심의 지혜롭고 겸손한 삶만이 해결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진실하고 지혜로운 삶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과 지혜의 사랑공부가 얼마나 절실한 평생공부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복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독서에서 제시되는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교회를 통해 우리는 참교회, 참사람을 만납니다. 바오로의 인사말도 겸손과 은총이 넘칩니다. 복음의 불행선언의 대상자들과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카 신도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바오로 사도는 축복기도에 이어 이들의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자랑스러워하며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바오로가 신자들에게 목표로 제시하는 삶은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기를 빕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위선적 무지의 부패하고 병든 삶을 치유하는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회개와 감사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 참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위선적 무지의 병을 치유해 참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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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걸으며>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3)
길을
걸으며
앞선 이보다
뒤선 이를
헤아려야지요
앞선 나
길인 듯이
나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이 말이지요
길을
걸으며
뒤선 이를 헤아리며
지금 걷는 내 길을
살펴야지요
뒤선 이에게 늘
새 길이 되는
함께 닿아야 할
그곳으로 이끄는
참 길인지 말이지요
앞선 이만
바라보다
혹여 길 잃어
이리저리 헤매는
나의 어리석음이야
누굴 탓할까마는
앞선 나를
오롯이 따라 걷다
오히려
막다른 곳에 닿아
더 이상 갈 수 없는
벗은 어찌하나요
그러니
길을 걸으며
앞선 이보다
뒤선 이를
헤아리는 겁니다
그러니
길을 걸으며
뒤선 이를 헤아리며
지금 걷는 내 길을
살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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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신자들의 타락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람들의 무거운 짐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얻는 것에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당하게 유리한 지위를 얻었음에도 온화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제들에게 두 가지를 꾸짖으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주의했을 뿐 아니라 배반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악한 삶과 타락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나쁜 이들로 만드는 점에서 사실을 이 확인합니다. 자기 스승이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을 본 제자는 더욱 타락합니다. 스승만큼 타락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이제 첫째 본분, 곧 이사야 예언자가 한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진실로, 진실로 꼭 그렇게 하십시오. 하느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신하는 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천사는 물론이고 하늘과 땅의 모든 성인도 지극히 작은 선행이나 지극히 작은 호의나 지극히 작은 선한 바람에도 기뻐 뜁니다.
이 세상은 그와 같은 기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인이 저마다 높임을 받을수록, 저마다의 기쁨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쁨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선행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비하면, 그 모든 기쁨은 눈동자만큼이나 작은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선행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고 소리 내어 웃으십니다.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 다른 모든 행위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재와 같을 뿐입니다. 예언자가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셨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22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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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그리고 눈먼 자들아!” (23,16.17)
예전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도 그랬지만 언제 어디서나 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자한 미소와 단순한 몸짓 그리고 따뜻한 말씀은 교회 안에 사목과 봉사 직분에 임명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참으로 엄청난 도전이고 단호한 초대라고 봅니다. 형식과 관습에 깊이 베여 있는 비복음적이며 세속적인 권위를 내려놓은 교황님의 존재와 행위는 교회를 그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새로운 기운과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봅니다. 교황님의 말씀과 행위는 당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적 나비효과’를 교회 안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분명 성령께서 교황님과 함께 하심이며, 하느님의 뜻이 교황님을 통해서 드러났다고 봅니다. 무릇 교회 안의 사목과 봉사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은 그러기에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만이 ‘위선자와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23,15)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그들을 위선자라고 호칭하는 그 표현 안에 예수님의 깊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즉 겉으로는 양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늑대가 들어 있는 그러한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착하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검은 욕심과 이기심의 덩어리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위선자는 선행의 동기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칭송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하는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이익과 보상을 얻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너는 위선자야! 라고 호칭하는 까닭은 그 사람의 의도가 자기기만뿐만 아니라 타인을 기만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피해와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경고라고 보입니다. 다만 오늘 복음에서 그 대상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지요. 왜 예수님은 그토록 강경하게 그들을 향해 불행하다고 선포하셨을까요?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모세의 가르침인 율법을 해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릇되게 율법을 해석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그들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23,13참조), 아울러 그들의 잘못된 인도 때문에 선량한 이들을 그들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3,15참조) 이처럼 지도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 지도자들 역시 심각하게 고려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어서 나오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 그들의 그릇된 궤변적인 해석과 가르침을 세 번째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23,16.17)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조상들의 전통에만 사로잡혀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인도하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눈먼 인도자라고 명명하셨습니다.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렁이에 빠질 것이다.”(15,2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참된 인도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흔히 인도자는 ‘길을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자신의 길을 알아야 하고,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길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인도자가 자신이 가는 길을 모른다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길로 이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인도자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모두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겪게 될 것을 심히 안타까웠던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서 인도자(=스승, 아버지, 선생)로 선택된 교회 내의 모든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막중한 영적 책무를 깊이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든 영적 인도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 의식, 사명 의식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참된 길을 찾고 있는 양들에게 가야 하고, 갈 수밖에 없는 진리와 생명의 길인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선 먼저 그 길을 걸어야 하고 그 길로 나아감에 있어서 야기되는 위험과 장애를 잘 넘어갈 수 있도록 참된 열린 눈과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10,2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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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만 관심두면서 /
박윤식 [big-llight] 240825 20:10 ㅣNo.175373
어떤 이가 아주 상기된 얼굴로 불평불만을 거창하게 품어낸다. 이에 상대는 온화한 얼굴로 가로막으며 “당신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과연 알고는 있기는 하요? 당신이 말하는 걸 어디 ’체‘로 걸러나 보았소?”라며 되묻는다. “체라니요?” “그렇소. 체요. 겸손과 배려의 삶,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인지를 골라주는 체요. 걸러지지 않는다면 그 말은 잊어버리시죠.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까지 불평불만만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네요.” 꼭 새길 말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들어가려는 이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나.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말과 행동만을 하기에. 과연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과연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단 말인가? 복음적이고 사랑의 소리여야만 한다. 또 해야 할 행동 역시나 복음적이며 사랑의 행동이라야 하리라. 이렇게 우리 신앙인은 저마다 고유한 행동반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에 걸맞게 말과 행동에서 품위를 꼭 갖추어야만 할 게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삶이 진실해야 한다고 강하게 꾸짖는다. 그렇지 못한 지도자들은 백성을 불행하게 하며 자신도 불행해진다면서.
그들은 눈먼 이들이라 백성을 그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도 한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을 향한 곧은 목소리를 내는 삶을 늘 할게다. 그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자나 깨나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 못된 행실을 아주 심하게 꾸짖는다. 사실 알고 보면 그들도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일 게다. 나름대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성경 지식도 해박하고 그 많은 율법마저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늘 비난을 받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율법에만 늘 집착하였기 때문일 게다. 율법은 단지 하느님 뜻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매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너무나 율법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만 하느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천하기보다는, 그저 그들 눈에만 보이는 율법 지키는 일에만 얽매인 것이리라.
우리 역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쉬울게다. 자신보다는 이웃이 계명을 지키는지만 따지니까. 그러기에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녕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이웃을 중히 여기는 삶을 살자. 자신의 권위나 위신만을 중시하는 위선적이고 교만한 자세는 이제는 벗어 버리자. 하느님과 이웃에 사랑을 관심두지 않는 삶을 과감히 청산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보다 사람을 아끼고 이웃이 주님의 구원에 맛들이도록 ‘배려하는 사랑’의 그 마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일 게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만 하리라.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거다. 이를 위해 애쓰며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자세야말로 하늘 나라에 초대받은 이의 모습일 게다. 이웃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막아서는 이가 혹시 우리가 아닌지를 스스로 되돌아보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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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부터 사흘 동안 마태오 복음서 23장을 읽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실천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며(마태 23,2-3 참조)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세리와 창녀, 온갖 죄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보여 주시고, 그들을 하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거의 가장 강한 비판이 이 장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23,13).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합니다.
누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누가 들어갈 수 없는지,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들의 기준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거룩한 구실을 내세우기 때문에, 그들만큼 율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처럼 사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위선이라는 것, 겉으로는 선하여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이중적인 태도이지요.
율법을 잘 지키는 충실한 삶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믿도록 만들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다른 무엇을 좇고 있습니다.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중시하고, 제단보다 제단의 예물을 중시하는 것이 그들의 속마음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전의 거룩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구실을 내세울 때, 그것은 숨김없이 드러나는 죄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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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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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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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라난 잡목과 잡풀들로 마치 밀림처럼 변한 골짜기를 예초하다가 뜻밖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예초기를 돌리던 어느 순간,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어여쁜 배롱나무 군락을 만난 것입니다.
비록 잡목들에 가려 크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족히 스무 그루가 넘는 진홍빛 꽃이 어여쁜 배롱나무들이 거기서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는 ‘이게 웬 횡재냐?’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십 수 년 전 그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묘목을 심었을 선배 회원의 노고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진귀한 보물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우리 선배들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도 우리 가까이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허세로 따지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두 그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그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위선자들!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 야단맞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치를 떨고 이를 갈 정도로 강한 질책입니다.
매사에 진실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이중적인 처신과 위선적인 삶을 그리도 강경하게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볼썽사나운 위선과 이중성이 잔뜩 들어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 또 성찰해야겠습니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여도 동고동락하는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깥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인정, 칭송과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에게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위선으로 가득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분명합니다.
이중성의 극복의 중요성에 대한 교부들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었다면, 바다와 세상의 모든 강물에서 몸을 씻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보실 때
더러움으로 시커멓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로 씻어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기도로 씻어야 하는 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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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른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경건하게 준수한다든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도문, 성구를 적은 것을 옷 속에 넣는다든지 옷 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한다. 율법을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지 않고, 교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의 문을 자기 자신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는 자신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마태 6,10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세상이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도 그들이 만든 규칙과 율법을 준수하였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라고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 예수께서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토록 불행하여라! 라고 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그 진노를 받을 만한 허물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가? 특히 하느님 앞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불림을 받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하면서, 실생활은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오늘날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까지도 내 악한 표양으로 막고 있지는 않은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참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 앞에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경외하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체험하면서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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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전은 돈까지 거룩하게 만드는 곳이다
금쪽같은 내새끼 186회에서는 엄마의 과도한 절약 습관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나왔습니다.
엄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이 잘사는 길이란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변기 물을 내리는 것도 금지합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도 공공장소에서 받아와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절약의 방법은 너무 엽기적이고 많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 엄마와 따로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이런 아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받지 못했던 유산을 많이 남겨주려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빚도 없고 자가 아파트도 있습니다.
남편은 1,000만 원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벌어오는 착실한 직장인입니다.
이 엄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일까요? 엄마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는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 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가 중요할까요, 돈이 중요할까요? 아이들도 이런 분위기 안에서 자기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래서 싸움이 많이 일어납니다.
엄마는 그 싸움이 아이들이나 돈을 적게 버는 남편 탓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엄마는 성전, 곧 무언가를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 아니고 그냥 무덤과 같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자신이 허물어져 가는 무덤이 이곳저곳을 땜질하는 데 씁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은 그 안에 들어오거나 그 위에 올라오는 것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들어오는 돈이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사 안에서도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로 들어오는 돈을 성당을 크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고, 그런 건축 과정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돈을 착복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들어오는 신자들이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오는 돈부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에게 은 촛대까지 준 주교님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어떻게 금과 은을 거룩하게 하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성당 안에 들어온 이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이 거룩해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금도 거룩해지고 사람도 거룩해집니다.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황제에게 가서는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라고 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감하게 그렇게 사용하는 돈의 액수가 너무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전 성심당을 본받읍시다.
그냥 빵집이지만, 실제로는 성당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돈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돈들은 직원 복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냥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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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로 내가’ 그들보다 더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3-22).”
1)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얼마나 심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위선자들’이었는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무슨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옛날 일에서 교훈을 얻는 정도의 의미는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2)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누군가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라는 함정에서(‘죄’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깨닫지 않는다면, 남이 어떻게 해 주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만 점점 더 크게 키우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내부의 박해를 겪은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부를,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비판을 할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고, 거의 항상 “너나 잘해라.”, 또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도 위선자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리고 남의 위선을 비판하는 일을 잘하는 그 사람이(바로 내가) 더 위선자인 경우가 많긴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선을 비판하고 꾸짖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겸손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4) ‘위선자들’과 ‘위선’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나의 위선’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부터 해야만 ‘남의 위선’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바오로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사도단의 대표이며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데도,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뉘우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먼저 위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판한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떤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칠삭둥이 같은 나,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위선’은 항상 ‘교만’과 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게, 진심으로 자기를 낮춘 바오로 사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맹세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꾸짖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맹세의 원칙’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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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굉장히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야훼’라는 이름 대신, ‘주인, 주님’이라는 뜻을 지닌 ‘아도나이’라고 불렀지요. 그런 경향은 ‘약속’이나 ‘맹세’처럼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신뢰’, ‘신용’의 영역에서도 드러납니다. 자기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드러낼 때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제2계명’을 거스르는 죄이기에 해서는 안되며, 굳이 맹세의 보증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하느님 대신,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식의 대처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허용한 ‘임기응변’을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혹은 자기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이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할 때에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며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한 뒤 자기들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누군가 그런 점을 지적하면 자기는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맹세한 게 아니니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가려 했지요.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누리고 싶은 이익만 실컷 누리고서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돈은 또 얼마나 밝혔던지 성전 안에 있는 금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께 약속한 것과 같으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대방이 하느님을 두고 한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몰아가서 그들이 약속의 보증으로 삼은 금과 예물을 꿀꺽하려는 속셈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그런 식으로 가다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상태에서 그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난처한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다른 말들을 입으로 내뱉는 정도지만,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양심이 너무 찔리고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기에 자기들이 입으로 내뱉는 그 말이 맞다고 자기 자신을 세뇌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하는게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 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만, 남들이 자기를 볼 때에만 하느님 뜻을 잘 지키는 척 ‘위선’을 떨게 되지요. 그럴수록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기에,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두고 ‘불행하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들처럼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하느님 나라를 눈 앞에 두고도 엉뚱한 곳을 헤매는 ‘눈 뜬 장님’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에 심어주신 양심,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말씀들에 비추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즉시 실행에 옮기고 그르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죄를 짓는 일도, 다른 이가 나로 인해 죄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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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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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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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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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 삶
<2024.8.26>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5:1~11절)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 삶❞
❚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시고 그 얼굴의 광채가 우리를 비출 때 가장 복되고 형통한 인생입니다.
✔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1~4절).
105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찬송하는 찬양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그가 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리고, 노래하면서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기이한 일들을 전하라고 명령합니다(1~2절). ‘그가 하는 일...’ 즉, 이스라엘을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일이며,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특별하고 놀라운 일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에게 그분의 능력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겁고, 능력이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3~4절)라고 명령합니다. ‘그의 얼굴’은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로,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옵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며 신뢰의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안에 큰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응원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능력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로부터 항상 온전한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감사가 고백 되어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 삶입니다.
➲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5~7절).
시인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이라 부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구원이 그들의 자격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입의 판단’은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셨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에서 하나님은 과거 아브라함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백성이 된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공포하고 있습니다. ‘판단’은 통치개념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합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금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의 영원함에 대하여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진정한 소망으로 삼고, 주님의 완전한 통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고,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 삶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8~11절).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그가 하신 말씀을 대대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삭에게 맹세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백성에게 언약을 법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주신 것입니다(8~10절,쉬운성경).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11절)...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공평하게 취해야 할 공동 재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 대상은 족장의 후손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걱정과 근심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들은 마음에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평안과 위로, 소망과 격려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골리앗을 보지 않고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안겨 주는 환난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인생에서 참된 평강과 신령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과 현실에 직면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5: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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