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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새 글이 아니고 2018년에 쓴 글입니다만
은사중지론자들이 중지론을 주장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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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내용인 비밀(고전14:2), 그리고 이에 대한 중지론의 이해
이지끼을
고전 14: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비밀(신비, mystery)은
현재까지 숨겨져 있다가 드러나는 비밀, 또는 미래에 드러날 비밀 (1)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숨겨져 있었다가, 알려져서 지금은 알고 있는 비밀 (2) 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비밀이고, 이미 알려진 비밀입니다.
곧 사람이 알게된 비밀입니다.
비밀을 (1)로 생각하면 고전 14:2절에 따라, 방언은 (현재까지) 숨겨진 비밀(1)을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겨진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숨겨진 비밀을 드러낸다는 것이므로
방언은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방언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수단 중의 하나가 됩니다.
비밀을 (2)로 생각하면, 고전 14:2절에 따라, 방언은 (이미) 알려진 비밀(2)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방언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려 주신 계시, 곧, 사람이 알게 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gotquestions 라는 웹사이트 ( https://www.gotquestions.org/mystery-of-God.html ) 에
What is the mystery of God referred to in the Bible?(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한 답이 있는데,
그 중 신약성경에 기록된 ‘비밀’에 관하여,
이런 ( A “mystery” in the New Testament is something that had at one time been hidden
but is now revealed to God’s people. -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라는 것은 한 때는 감춰져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진 것을 말한다) 답이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 중 (2)의 경우입니다. (이미 계시된 비밀, 알려진 비밀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 The apostle Paul used the word mystery 21 times in his Epistles. In each case, the “mystery”
involved a wonderful declaration of spiritual truth, revealed by God through divine inspiration.
A mystery is that “which was not made known to people in other generations as i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Spirit to 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 (Ephesians 3:5).”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비밀(mystery)이라는 단어를 21 번 사용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비밀”은 신성한 영감에 의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revealed) 영적진리의
놀라운 선언을 포함합니다.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에베소서 3:5) "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감추어져 있다가, 바울에게 알려져서
바울 자신이 "알게된 비밀”을 말합니다.
감추어져 있다가 현재 알려지거나, 장래 알려질 비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gotquestions에 이렇게 설명된다고 하는 것은
전세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비밀”이라는 단어를 (2)의 경우(알려진 비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gotquestions 의 설명에는 엡3:5절만 언급되는데
엡3:3,4절을 함께 살펴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엡 3:3-5절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한 것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비밀은, 알게 하신 것(엡3:3), 깨달은 것(엡3:4), 그리고 나타내신 것(엡3:5)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골1: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 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1:26절에서는, 이 비밀을 성도들도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를 엡3:3-5절과 함께 생각하면,
비밀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어, 기록(엡3:3)이나 그들의 말을 통하여
성도들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바울은 “비밀”이라는 말을,
"감추어져 있는 (숨겨진) 비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알게된) 비밀”의 의미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전 14:2절에서 “비밀”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게 하신 비밀, 계시하신 비밀(2)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아닌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으로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 주신 비밀”(엡3:3-5)을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에는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또 어떤 일을 하셨는지,
특히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셨는지 등이 포함되는 데
이는 성경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셔 알게된 비밀(진리)들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같은 내용을 담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성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여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방언도 이미 알려주신 비밀, 계시된 비밀을 하나님께 그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우리의 기도와 찬송처럼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이미 알려주신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해 주신 성경말씀, 우리가 알고있는 성경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은사에 의해 통역되더라도 이미 계시해 주신 말씀을 말하게 되는 것이기에
성경에 추가될 계시를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에 계시의 수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서 “비밀”이라는 말은
계시되는, 계시될 숨겨진 비밀(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비밀, 알려진 비밀(2)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은사중지론에서는 이 “비밀”(고전14:2)을 달리 이해합니다.
각각의 이해를 살펴 보겠습니다.
(1) Richard Gaffin 의 이해.
Richard Gaffin 의 글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중에서
“방언은 어떻게 되었는가?” 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글입니다.
“방언은 어떻게 되었는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 다른 신약의 구절들에 비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간단히 훝어보면, 사람의 척추와 같이 예언과 방언은 이 전체 장의 구조물이다.(2-3절에서
시작하여 진행되다가 39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사도의 주장의 전반적 관심은
방언에 비하여 예언이 갖는 상대적 우수성과 장점을 말하고 있다. 예언은 더 놀랍다
왜냐하면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다.
반면에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단 조건은 방언이 통역이 될 때 예언과 같이 남들에게 덕을 세울 수 있다.(4-5)
방언은 통역만 된다면 예언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통역된 방언은 기능적으로 예언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과 방언을 거의 일치시 한다.
우리는 방언이란 - 통역이 가능하며 통역되어야 하므로(13,27)- 예언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이 두가지 은사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들이 대비되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모두 다 은사라는
것이다. 특별히 둘 다 계시라는 것이다.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고도 가지침 없이
교회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30절은 분명하게 예언이 계시임을 밝히고 있다. 다른 논의보다 신약의 예언의 경우에서 볼 때
이 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가보의 예(행전11:27-28,21:10-11)와 계시록의 예(계1:1-3)가
그것이다.
방언이 계시임은 14-19절에서 분명하다. 그들은 가장 즉각적으로 내려오는 영감받은 말씀이며,
누구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행사에 있어서, 방언의 은사는 완전히 '생각'이 배제된
상태에서 흘러나온다. 말하는 사람의 지성은 그 말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입술을 도구로 이용해서 쓰시는 것이지 화자의 말이 아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비밀(mysteries)'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방언이 완전히 계시적인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예언에 대해서도 마찮가지이다 13:2을 보라)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별다른 예외사항이 아니라면 이 말은 계시를 의미했다- 더 특별히 말한다면 계시의
구속사적 내용을 말한다.(예, 마태13:11, 롬16:25-26, 딤전3:16)
이러한 명확한 관련구절들로부터, 방언과 예언의 폐지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끌어낼 수 있다.-(리차드 개핀)
(밑줄은 제가 한 것입니다)
Gaffin 은 위의 글에서 방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내용 역시 '비밀(mysteries)'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방언이 완전히 계시적인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방언이 계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비밀”을 제가 드린 설명 중 (1)의 경우로, 즉 숨겨진 비밀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계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Richard Gaffin 은 “그 내용 역시 '비밀(mysteries)'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방언이 완전히 계시적인 것 임을 확신하고 있다.“ 라 말하여
고전 14:2절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말하면서
같은 절, 바로 그 앞에 있는 “하나님께 하나니”는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방언이 계시적이다 라는 말은, 방언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이는 또한,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이 아닌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Gaffin 의 글에서 Gaffin은,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Gaffin)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다 라고 말하므로,
Gaffin 이 방언을 마치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으로 이해하는 것 같지만,
Gaffin 은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이해합니다.
그의 글, “리차드개핀의 성령은사론” ( http://blog.daum.net/byk2739/489 )에서
“ (3) 오순절의 방언은 분명히 당시에 통용되던 언어였다(행 2: 6, 8, 11).
그러나 고린도의 방언도 역시 당시의 언어였는가?
고린도의 방언은 사람들이 모르는 천국언어였는가?
이에 대하여 우선 고전 12-14장에서 고린도의 방언현상이 당시의 통용어가 아니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 (Gaffin) 라고 합니다.
이처럼 Gaffin은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Gaffin 에게 있어서 방언은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계시적인 계시를 사람에게 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논리적입니다.
“비밀”을 현재까지 감추어진 비밀, 숨겨진 비밀(1)로 이해하면서 방언에 대한 이해나 해석을 하면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는 성경본문(고전14:2)에 따라 방언을 계시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에 따라, 사도행전 2장 오순절의 방언도 계시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수단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방언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에 맞춰서 고린도전서 14장을 해석 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성경계시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기에,
성경계시가 완성된 이후로는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주장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나니”(고전14:2) 라는 성경의 진술을 뒤집어서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으로 이해하여,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숨겨진 비밀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Gaffin의 예언에 대한 이해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을 방언과 연관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면, 예언에 대해서도 바른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2) Palmer Robertson 의 이해
팔머 로버트슨은
그의 글 “오늘날에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http://blog.daum.net/7gnak/15728021 에서
비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약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스물여덟 번 사용됐다. 우리가 오늘날 숙고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잠시 제쳐 두고 본다면, 나머지 스물일곱 번 사용된 경우들에서
'비밀'은 한때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것으로 언급되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 (팔머 로버트슨 “오늘날에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Twenty-eight times the term ‘mystery’ is used in the New Testament.
If we set aside for a moment the occurrence in 1 Corinthians 14 presently
under consideration, twenty-seven cases explicitly talk about a ‘mystery’
as something once hidden but now revealed.)
팔머 로버트슨은
신약에서 비밀은, 28번 사용되었다고 하면서, 고전 14:2절의 “비밀” 을 제외한 27번은
비밀이라는 말이 알게된 비밀, 계시된 비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곧, 제가 말씀드린 것들 중, (2)의 경우로, 즉, 계시된 것, 알려진 비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방언과 관련해서는, 곧 그가 잠시 제쳐 둔 고전14:2절의 “비밀”을 설명할 때는,
제가 말씀 드린 것들 중 (2)의 의미(알려진 비밀, 알게된 비밀)와 관련있는 것처럼 말하다가
(1)의 의미(숨겨진 비밀)로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넓은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비밀'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비밀을 말함이라."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 (팔머 로버트슨 “오늘날에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이 말은 팔머 로버트슨의 전제이고 또한 주장 입니다. 곧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을 다른 말로 한 번 더 말합니다.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이 말을 영어로 된 원문과 함께 보겠습니다. ( https://www.the-highway.com/tongues_Robertson.html )
(They were a means by which God disclosed redemptive truth once hidden but now revealed.)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진리(truth)는 감춰져 있었는 데(hidden) , 하나님께서 방언으로 드러내셔셔(discloded)
알려진 것(revealed)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진리를 드러내시는 수단이 방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비밀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말하면,
방언은 숨겨진 비밀(진리)(1)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팔머 로버트슨은 신약성경에서 비밀(mystery)이 28번 쓰인 것을 알고 있고
그가 고려한 27번의 경우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숨겨진 비밀(1)이 아니라
알려진 비밀(2)로 27번 쓰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전14:2절의 “비밀”이, "알려진 비밀"의 의미가 아니라
“숨겨진 비밀”의 의미로 쓰여져 있다고 주장하려면 성경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팔머 로버트슨은,
“지금까지 살펴본 넓은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비밀'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비밀을 말함이라." 라고 말한 후에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라고 바로 말하면,
자신이 그 의미를 근거없이 주장하는 것이 쉽게 드러나니까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는 말을 그 사이에 넣었습니다.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분명치 않아 보이지만
(비밀'이라고 말하면서)를 제외하여 ‘바울은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 만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인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와 함께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알게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방법은 인간의 말과 글을 통하여 한 것이었지,
방언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팔머 로버트슨도, 바울이 알게된 진리를 방언으로 전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도 없습니다.
만약 바울이 알게된 진리를 방언으로 전달했었다고 말한다면
고전 14:2절의 비밀이 알게된 진리(비밀), 알려진 비밀의 의미가 되므로 못합니다.
팔머 로버트슨의 목적은,
고전 14:2절의 비밀이 숨겨진 비밀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팔머 로버트슨은
방언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말인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는 말을
방언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문장들 사이에 넣어 마치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된 진리를
방언으로 전달했었다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입니다.
또한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They were a means by which God disclosed redemptive truth once hidden
but now revealed.) 라는 자신의 주장과
그 근거가 되는 말인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Instead he communicates the truth that has been made known to him by divine revelation.) 라는
문장에 같은 의미를 갖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는 말에서
알게된 진리(the truth that has been made known)라는 말은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라는 말의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진리"(truth once hidden but now revealed)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진리"라고 번역되었는데,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알려진 진리"라는 말입니다.)
"알게된 진리"(the truth that has been made known)는
(숨겨져 있었다가) 알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알려진 진리"(truth once hidden but now revealed)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라는
팔머 로버트슨의 주장이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논리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Instead he communicates
the truth that has been made known to him by divine revelation.) 는 말은 말씀드린 대로
방언과는 관련이 없는 말 일 뿐만 아니라 알게된 진리(알려진 비밀)를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팔머 로버트슨의 주장인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방언으로 숨겨진 비밀을 계시하셨다는 말입니다.
얼핏 보면, 알게된 진리(알려진 비밀)를 계시하셨다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알려진 진리가 과거에는 숨겨져 있었는 데,
이 숨겨진 진리(비밀)를 하나님께서 드러내신(알게 하신) 방법이 방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방언은 숨겨진 진리(비밀)를 계시하신(알려주신) 수단이었다는 말입니다.
팔머 로버트슨은 이렇게 두 문장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 근거가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알려진 진리(비밀)를 전달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숨겨진 진리(비밀)를 방언으로 전달하셨다(알려주셨다)는 말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부분에서 비밀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려진 비밀에서 숨겨진 비밀로, 근거가 없는 데도
근거가 있는 것처럼, 바꾸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팔머 로버트슨의 의도는, 고전 14:2절의 비밀이 숨겨진 비밀(1)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으로 비밀을 말한다(고전 14:2)는 말은, 방언이 숨겨진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숨겨진 비밀을 말한다 는 것은 계시를 뜻하게 되고
또한 계시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하는 것이니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신약 시대의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결론은 누적된 증거가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 (팔머 로버트슨)
“계시”, “사람에게” 그리고 “외국어(인간의 언어)” 란 말들은 중지론의 주장에서 항상 함께 하는 데,
팔머 로버트슨도 같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팔머 로버트슨은 고전 14:2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란 말씀을 뒤집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3) 존 맥아더의 이해
https://www.gty.org/library/sermons-library/1871/the-truth-about-tongues-part-1
"And here you have the anarthrous construction, the absence of an article. Not the God
or the true God, but better translated, I think, “a god.” In other words, “You are out of
yourselves, connecting to some god, speaking your pagan mysteries. And you have
violated principal number one of spiritual gifts,” which is they're to be others,
other people, other humans.
God doesn’t need you to talk to Him in some ecstasy.
Listen. It’s amazing to me that the modern Charismatic falls short at this very point.
They repeat the Corinthian error and they teach that the essential use of tongues is as
a private prayer language to God. That is just what Paul is condemning here.
He is saying, “You have missed the point. The point is the gift are to speak to men.
But yours are some kind of communion with a God and nobody knows what you’re saying
if you're speaking in pagan mysteries. God doesn’t want to be talked to like that.”
It was never God’s intention to be addressed in some speech incomprehensible to the
speaker. "-(존 맥아더)
존 맥아더의 경우는 고전 14:21-22절을 통해서, 성경적인 방언은 외국어방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근거로 고전 14:2절의 하나님께 하는, 그리고 비밀을 말하는, 방언(영언)을 부정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있는 하나님(God)이란 단어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으니 이방신(a god)으로,
비밀(14:2)은 이방 미스테리(pagan mysteries)로 읽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방언은 이방신에게 황홀경에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존 맥아더는 “비밀”을 숨겨진 비밀(1)이나 알려진 비밀(2)로 이해하지 않고
이방 미스테리(pagan mysteries)로 이해합니다.
(4) 노우호목사, 이창모목사, 그리고 “ㄷ”목사의 이해.
이 세 사람의 고전14:2절에 대한 해석은 비슷합니다.
세 사람 다 공통적으로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가르”가 있는 데 한글번역에서는 빠져 있다며
“가르”를 넣어서 해석하면, 고전 14:2절은 방언에 대한 바울의 정의가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을 부정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고전 14:2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중시하는 γὰρ (가르, 왜냐하면) 와 δὲ (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분명히 하여 이해하면,
(고전 14:2-1) 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 14:2-2)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왜냐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고전 14:2-3)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 입니다.
(고전 14:2-1)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는 말씀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고,
(고전 14:2-2)는 (고전 14:2-1)의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14:2-1)과 (고전 14:2-2) 를 통하여 바울의 말씀이 다소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고전 14:2-3) 에 “그러나”가 있어서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는 말씀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고전 14:2절 전체가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노우호목사는 고전14:2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 (-노우호)
γὰρ (가르, 왜냐하면)가 한글번역에서 빠져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노우호목사는 (고전14:2-1)의 “왜냐하면”은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고전14:2-2)에 있는 γὰρ (가르, 왜냐하면)를 “하지만”이라고 바꿔
이해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어떻게 고전 14:2절 전체가 부정된다는 것인 지 알 수 없지만,
노우호목사는 고전14:2절을 바울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창모목사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전후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2절의 방언 이야기는 바울의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이창모)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395
이창목목사도 고전 14:2절은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하면서 부정합니다.
노우호목사와 이창모목사의 경우
고전 14:2절은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이고 바울이 이를 부정했다고 합니다
Gaffin 이나 Robertson 과는 다르게 고전 14:2절 대부분을 부정하는 해석을 하므로
“비밀”에 대한 어떤 이해는 드러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ㄷ”목사에게는 제가 직접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복음에서 비밀은 "뮈스테리온"으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secret 라기보다 mystery로 다같이
보기는 보는데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으니 그래서 신비하다는 의미로 저는 봅니다.”
- (“ㄷ”목사) 라고 하였습니다.
비밀에 대한 “ㄷ”목사의 이해는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1)과 (2)중 어느 것으로 이해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ㄷ”목사는 노우호목사, 이창모목사 등과 같이, 고전 14:2절 대부분을 부정하는 해석을 하므로
특별히 “비밀”이란 말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은 것 같습니다.
“ㄷ”목사는 자신의 youtube 강의에서 고전 14:2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문맥에서 맞지 않는다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아니다 이말이지.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사람에게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비밀을 말해야 하는 데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한다고 하니 틀렸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Richard Gaffin, Palmer Robertson, 존 맥아더, 노우호목사, 그리고 이창모목사의 경우도
그 이유가 다 같습니다.
모두,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말씀을 전하는) 방언”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 그대로 고전 14:2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근거로,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알아듣는 자가 없는 말(영언)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ㄷ”목사의 주장은 한편으로 이러한 중지론자들의 주장이 성경적이지 않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 입니다.
“ㄷ”목사의 해석은,
바울께서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아니다” 라고
바울이 의미하셨다면,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바로 그렇게,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고 하나님께 비밀로 말하는 것”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곧, 이런 주장은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이런 생각을 부정하고,
대신에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을 성경적인 방언으로
말씀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그 반대입니다.
고전 14: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을 보면,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통역없이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방언을 듣는 사람들이 통역없이 알아들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듣고 이해했던 사람들은 통역없이 방언을 이해했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인들이,
자신들의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 듣는 언어, 곧,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전 14:28절에서, 바울은,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나님께 하라고 권면합니다.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께 방언을 말하고 있기에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방언을 하지 않기에 이런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나님께 하라는 말씀은
고린도교인들이 통역없이 방언을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자신들의 방언을, 방언을 듣는 사람들이 통역없이도 알아 듣는 방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하는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을 하면서도,
사람에게 말하는 외국어방언을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또한 자신들의 방언을 계시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외국어방언을 할 수 있게 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고, 또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니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통해서 불신 이방인(외국인)들에게 그들이 알아듣는 외국어로 전해진다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외국에서 태어나 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게 되고 믿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그 자체가 전도는 아니지만, 전도에 큰 도움을 준 표적이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바랐던 것은 바로 자신들의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처럼,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는 불신자들에게 자신들의 방언이 표적이 되면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복음을 전해 불신자들을 믿는 자들이 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곧 고린도교인들은 자신들의 방언으로 불신자들을 전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처럼,
자신들의 방언을 사람에게 하는 계시적인(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방언으로 이해했고
그리고
방언을 듣는 불신 이방인(외국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통역없이 알아 들을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들(Richard Gaffin, Palmer Robertson, 존 맥아더, 노우호목사 이창모목사, “ㄷ”목사)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 으로 이해하여
바울의 고전 14:2절 말씀을, 자신들의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이, 이들이 성경적이라 주장하는 방언에 대한 생각과 같습니다.
고린도교인들도, 자신들의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 중지론자들이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로 부터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방언에 대하여 배우기 전,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도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에 대하여 이들 중지론자들의 생각과 고린도교인들의 생각이 같아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을
이들 중지론자들(Richard Gaffin, Palmer Robertson, 존 맥아더, 노우호목사 이창모목사, “ㄷ”목사)이
부정하는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영언)로,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방언(고전14:2)”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들 중지론자들이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방언과 같은,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이해 때문에,
바울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고전14:2)이라 말씀하여 그들의 방언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알아 듣는 자가 없는 방언(고전14:2),
그리고 방언들 통역함(고전12:10)을 말씀하여 그들의 방언이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영언)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또한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표적이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표적이라는 의미로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14:22)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방언에 대한 고린도교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이해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 중지론자들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의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로
바울의 신학(고전 14:2)을 비성경적인 신학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고전 14장에서 바울의 논쟁상대가 고린도교인들입니다.
이들 중지론자들은 방언에 관한 논쟁에서 바울쪽에 선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고린도교인들쪽에 선 것입니다.
이들 중지론자들은 바울의 반대편에 있는 고린도교인들의 생각으로 바울의 말씀을 해석하여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께 말하는, 알아 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거꾸로 읽어, 제대로 읽어 영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Richard Gaffin 은 “이러한 명확한 관련구절들로부터, 방언과 예언의 폐지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끌어낼 수 있다.” 라고 하여 폐지를 말하는 데, Gaffin 의 글에서 방언은 외국어방언입니다.
성경적인 외국어방언도 그 임무를 다하고 중단되었는데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은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Palmer Robertson은 “이런 결론은 근거가 확실한 신약 시대 경험에서 오늘날 방언으로 말하는
행위 대부분은 처음부터 제외해 버린다.” 라 하여 현대의 방언이 근거가 없음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방언을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 으로 이해하므로
성경계시가 완성된 후로는 중지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악한 영에 의한 것이다 라고 하고
노우호목사는 귀신의 방언, 거짓방언이다,
이창모목사는 거짓방언, 변태방언이다,
“ㄷ”목사는 옹알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존 맥아더와 이창모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정이철은
자신이 성경을 거꾸로 읽어, 틀린 것은 모르고, 오히려 제대로 이해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비난하고 제소한다고 난리였습니다.
또한 위에서 예로 든 사람들 뿐 만이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인정하는 방언이 외국어였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에 대한 생각으로 바울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계시였다고 하는 것도, 그리고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대한 잘못만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계시해 주신 말씀과 같이, 오늘날에도 그 뜻에 따라 은사를 주시는 데
이들은 성령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들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방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은사론은 중지론과 지속론으로 나뉘는 데
저는 이 지속론도 둘로 나눕니다. 성경적인 지속론(A)과 비성경적인 지속론(B)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중지론, 지속론(A) 그리고 지속론(B)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
비성경적인 지속론(B)은 은사에 성경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성경의 지시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방언같은 은사로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지속론을 성경적인 지속론(A)과 비성경적인 지속론(B)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중지론에서는 지속론(A)와 지속론(B)를 모두 비성경적인 것으로 봅니다.
자신들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외국어)로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인데,
하나님께,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영언)을 한다고 하니 그에 해당하는 지속론(A), (B) 모두를
비성경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나 토론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중지론은 제가 설명드린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mystery)”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대부분 고려하지 않았고
당시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성경을 거꾸로 읽어 자신들의 주장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중지론을 지지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런 중지론에서 벗어 나서 은사에 관하여 바른 신학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언이 더이상 혼란을 주고, 분열케하는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복이 되고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되는 은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왜 위와 같이 무리한 해석을 하며 은사의 중지를 주장하는 것일까요?
비성경적인 지속론(B)에 대한 반발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인 것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령세례는 은사를(능력을)주는 성령세례인데.
많은 이들은, 성령세례를, 은사를 주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사를 인정하는 순간,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는 정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말은,
성령세례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하여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 12 사도가 아니라 120명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더불어 그날 구원을 얻은 유대인 삼천명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아 중생한다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순절에는 120명이 아니라 12사도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믿는 사람들 모두가 받는 중생케하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은사를 주는 성령세례입니다.
여기서 중생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곧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중생론이 다르다는 것을, 곧 구원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원론은 신학의 시작이고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인정하면 자신들의 모든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은사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저의 글 "성령세례로 중생한다(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오해"
( https://cafe.daum.net/1107/Y4PX/1164 ) 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연구보고서"에 있는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에 관한 모순,
그리고 그 모순으로 정의한 성령세례] 를 보시면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주장이 성경과 모순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1107/Y4PX/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