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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첫 번째 수난예고
막 8:27-9:1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8:27-9:1 / [베드로의 고백;마16:13-.20,눅9:18-2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의 여러 마을로 가셨다. 가시는 도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0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을 침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31)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마16:21-28,눅9:22-27] 그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셨다. 32) 예수께서 이 같은 일을 사실대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선생님이 그런 일을 당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34) 그러고 나서 제자들과 군중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37) 사람이 자기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38)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9: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또한 베드로를 책망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고백(27-30)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관계하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론 가장 가깝게 살아가는 부부도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길을 가면서 물었습니다. 심각한 질문이나 대화일수록 강의실이나 교육관보다는 어쩌면 이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주고받는 것이 좋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자들은 28절에서 보는대로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출석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 단지 출석만 하고 예배만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축복해 주십니다.
죽으심과 부활하심(31-9;1)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이 고백을 들으신 후 비로소 많은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적을 행해왔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항변하며 나섭니다. 32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헬라어로 ‘가까이 데려오다’라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신의 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또한 ‘간하다’라는 말은 ‘꾸짖다’ ‘나무라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리스도, 자기가 기대했던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광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 먼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1)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보는 견해, 2) 예수님의 부활로 보는 견해, 3)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적용: 바른 신앙은 성령의 은혜와 바른 신학으로 세워집니다. 신학적으로 더 채워져야 할 부분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계시다면 그 자녀는 천하를 다 얻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가 보살이었으면 나도 보살이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무당이었다면 나도 무당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신다면 그 가정은 분명히 형통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막 8: 27-30 / 한태완 목사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헐몬산 가까이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이 질문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요, 본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 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반대하며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답변으로 예수는 이단자요 선동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는 답변입니다. 셋째로 사도 베드로의 장엄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답변입니다.
W H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가 쓴 『기독교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사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를 연구하는 것이 신학이고, 그 핵심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핵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유대교에서도 믿고 이름은 다르지만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Allah)은 믿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과 차이점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불교를 보면 붓다(Buddha)가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니고 이슬람교도 마호메트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나 이슬람교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기독교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고 본질이 되며 모든 세부적인 것도 그리스도와 연관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기독교 가르침의 저자요, 교리의 대상이요, 구원의 근원이요, 소망의 성취요, 권능의 근원이요, 교회의 설립자요, 성령을 보내어 믿게 한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정체성은 그의 사역의 핵심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론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입니다. 20장 31절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그의 목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은 서론에서 예수님을 로고스(Logos,말씀이란 뜻)라고 언급한 점입니다.
그러면 이 로고스란 말은 무슨 뜻인가?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을 로고스라고 지칭한 적은 없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만 나옵니다(요1:1,요일 1:1, 계19:13). 요한은 로고스란 말을 통해서 예수님의 선재성과 신성, 창조의 대행자 및 계시자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누구십니까?
1.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개인과 가정, 나라와 민족과 우주를 주장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아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 연설이나 국회의 정당대표 연설, 그 어디에도 예수께서 왕이시라고 암시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정당이 모든 것을 할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 되심은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오겠느냐』며 조롱조로 말하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49). 빌라도로부터 『당신이 왕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긍정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마27:11). 베드로와 사도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고 증언했습니다(행 5: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것을 알고 고백할 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2.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분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세상이 나를 허물 많고 연약하고 쓸모 없다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재산의 유무나 성공, 실패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관계없습니다.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믿음으로 구원하여 주십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 4:8)
3.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미국의 대부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Vanderbilt)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신앙이며 존재 이유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흑인 하녀가 그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주었습니다. 그 곡은 찬송가 96장(통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밴더빌트는 조용히 찬송가 가사를 음미했습니다. 찬송가에는 예수의 속성이 아주 쉽게 표현돼 있었습니다. 『우는 자의 위로, 없는 자의 풍성, 천한 자의 높음, 잡힌 자의 놓임, 죽을 자의 생명, 추한 자의 정함, 죽은 자의 부활….』 그때 밴더빌트의 입술이 조금씩 떨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과 지식, 명예를 포기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겸손한 약자가 됩니다. 그리고 쥐고 있던 것을 모두 놓는 순간 인생의 새로운 빛을 찾습니다. 신앙은 사망을 삼킵니다. 신앙은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찬송가 96장 <통>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2.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4.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만국인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되고 우리 영광 되시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을 받고,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입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자인 『메시아가 오리라』는 기록이며, 신약성경은 그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가 곧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신 제사장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신 우주적인 왕이시며, 하나님을 떠나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여신 선지자입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성인들과 교주들은 하나의 구도자였고 길의 안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고, 석가는 길을 찾기 위해 가출하여 10년간을 방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내가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입니다. 꼭 한번 밖에 갈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입니다. 이 삶의 길은 유일한 생명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두 사람이 해변에서부터 500마일 떨어진 대양 한 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올림픽 수영선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아무리 훌륭한 수영선수라도 500마일을 헤엄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구명 헬리콥터가 그들 위에 나타나 생명줄을 내려드렸다고 가정해보자. 누가 구조될 것인가? 생명줄을 잡는 바로 그 사람이 안전하게 구조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안에서 500마일이나 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처럼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었으며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3)
5.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치고 마음과 육체의 쉼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쉬고 싶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갖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았습니다. 혼자서 싸우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이세벨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는 하나님에게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죽을 시간이 이 때가 가장 적당하다고 간구합니다. 갈멜산에서 승리한 엘리야가 이런 나약한 말을 하다니 말이 됩니까? 승리 후에 그는 더 힘을 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세벨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사명도 잊었습니다. 죽여달라고 합니다. 마치 아이가 다 자라서 제 뜻대로 안되니까 어머니에게 『왜 나를 낳으셨나요?』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성경의 그 어떤 인물들이 백전백승했던가요? 어떤 인물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함과 완전함을 견지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 되는 투정을 하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어린애이며, 항상 낙담의 로뎀나무 아래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엘리야에게 로뎀나무 아래의 한탄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었듯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로뎀나무는 너무나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로뎀나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답답한 한숨과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용납하십니다.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로뎀나무이신 주님은 우리의 그늘이 되셔서 우리의 눈빛을 살피십니다. 우리의 눈빛이 의인을 찾아서 오늘도 이 땅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눈빛과 마주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과 절망으로 주저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낙망한 엘리야를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힘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하심으로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엘리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영육의 피곤함으로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떡과 물을 주시고 또한 누워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육이 피곤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쉼은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쉼이 아닙니다. 로뎀나무이신 예수님의 날개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우리는 비로소 보호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힘이 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만드신 양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로 들어온 엘리야에게 위로와, 쉼을 주시고는, 힘을 내어 다시 일어나서 사역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로뎀나무 아래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모른 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살다가 인생에 힘이 든 분들이 계시다면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힘이 드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은 주님께서 당장 가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에는 정황에 맞는 떡과 물이 들려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로뎀나무이신 예수님 아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고 은혜의 날개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6.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이십니다.
어떤 집사가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은 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왔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 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고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은 우리의 생수이십니다.
오랜 가뭄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한 줄기의 비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풍요와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를 향유하면서도 여전히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죄인들의 목을 축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물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생의 생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11) 세상의 음료가 일시적으로 갈증을 해소할 뿐입니다. 그러나 참 음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샘물을 마신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또한 이 생명수는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고 값없이 마실 수 있는 음료입니다. 주님의 생수는 주님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깨뜨리심으로 주신 귀하고 거룩한 음료입니다. 이 귀한 음료를 마신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희생하며 또 다른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마시게 해야 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8. 예수님은 우리의 모퉁이 돌이십니다.
TV를 통해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동안 나를 찾지 않았어?』 헤어져 있는 동안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찾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떠나 고독하게 슬피 울며 길을 잃고 헤매는 불쌍한 우리 인류를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나를 찾으러 오신 주님 품에 안기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 품에 안기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춥고 배고프고 외로울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모퉁이 돌은 집을 지을 때 아주 중요합니다. 튼튼한 집은 모퉁이 돌을 기초로 할 때 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모퉁이 돌은 모든 건물을 연결시킵니다. 어떤 건물이든지 모퉁이 돌에서 시작하여 계속 연결되어 지어집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시작과 기초는 무엇입니까?
창조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능력과 지혜와 영광이 무한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위에 삶을 세우면 든든합니다. 가정, 기업, 국가, 무엇이든지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위에 올려놓으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면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건강으로 연결이 됩니다. 행복으로 연결이 됩니다. 기쁨으로 연결이 됩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이 됩니다. 또한 예수를 모퉁이 돌로 삼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난에서 오는 부끄러움, 질병이나 실패에서 오는 부끄러움, 환난이나 시험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모퉁이 돌이 되신 주께서 막아주고 지켜주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인류의 영광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것 하나가 노벨상입니다. 노벨상 중에서도 노벨 문학상이 최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품과 그 작가가 쓴 모든 책들이 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문학상을 받고도 행복하게 살아간 작가는 없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알콜 중독에 걸리고 4번의 결혼 생활 끝에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까뮈나 모파상이나 다 불행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은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날도 자살해 죽었습니다. 모퉁이 돌이 없는 삶은 인기가 많을수록 더 허무해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퉁이 돌이 있는 상을 받아야 기쁨이 있고 행복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상을 받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갔습니다. 잘 먹고 잘 입지 못해도 아프리카의 병들고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서 평생 살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유는 모퉁이 돌인 예수와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도 노벨상을 받고 다시 인도로 갔습니다. 가난한 마을에 가서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분은 행복하게 장수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허무하고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못 배워서, 못 입어서가 아닙니다. 모퉁이 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시면 축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나라든지 예수를 모퉁이 돌로 모시면 축복을 받아 세계의 1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모시어 시편 23편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행4:10- 12)
9. 사람과 같이 되신 분입니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큰 돌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돌을 들어 다른 한적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치운 돌 밑에 살던 개미들이 서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져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개미들을 해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개미들에게 몹시 미안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개미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그의 마음을 개미들에게 전해지게 하려면 자신이 직접 개미가 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이와 같은 것에서 연유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10.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해결사 즉 불가능 해결 전문가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자주 반복해서 실존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살아야 맹목적이지 않고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대한 답변서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신 이적,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이적, 두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자를 고쳐주신 이적 등이 나옵니다. 이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부유한 관리도 있고 질병 때문에 걸인이 된 여인도 있습니다. 슬픔에 젖은 아버지도 있고 인생의 소망을 잃어버린 어머니도 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시각장애 거지도 있고 귀신들려 말을 못 하는 자도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문제해결사이십니다. 나이, 성별, 소유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믿음으로 주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토록 괴롭히던 문제로부터 평안케 해주십니다(마11:28). 예수님은 어떤 동기로 나아가든 모두 해결해주십니다. 구경꾼으로, 습관적으로 혹은 구도자의 심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찌됐든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평안케 하시는 것입니다(요14;27).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때 해결해 주십니다.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가장 적절한 때에 해결해 주십니다(히4:16).
이처럼 주님은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누구의 문제든지, 어떤 동기로 왔든지 간에 상관없이 가장 적절한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는 예수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심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불가능 해결 전문가이시다. 그에게는 2가지가 없으시다. 너무 어렵다가 없으시다. 너무 늦었다가 없으시다.”예수, 그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는 구원의 하나님, 생명의 주 나의 왕이십니다.” 이제 때를 따라 도우시는 불가능 해결 전문가이신 하나님께 지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에게는 너무 어렵다가 없으시다, 너무 늦었다가 없으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마9:28)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교회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 즉, 자연인, 종교인, 신앙인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전혀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활하는 자연인,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봉사도 하지만 신앙고백은 없는 종교인, 마음과 입으로 확실하게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사람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에 따라 그 신앙과 인격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고백이 있는 자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이 나의 영혼을 구원해주신 구원자일 뿐 아니라 이 땅위의 내 삶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부터 계신 분입니다(요1:1).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요 1:3). 그분은 전능하셔서 시공간을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분입니다(마 8:5∼13).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십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임마누엘의 주이십니다(마 1:23).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잉태의 과정을 통하여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점입니다(마 1:20). 그리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롬 4:25).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첫째로 우리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요(막 10:45) 둘째는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함이고(요 10:10) 셋째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요 5:24). 그러므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예수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예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급변하는 사회 적응에 대한 두려움 등입니다. 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두려움과 근심이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요 구원자이시며, 진리요 복음입니다. 이 진리와 복음을 널리 전합시다.
제자의 도
양인순 목사
2010년 2월 24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국내 유명 사립대 물리학과 L 교수가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국내 초전도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L교수는 유서에 “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잘 못해서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힘들다”는 등의 내용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6일에는 삼성전자 부사장급 임원 이모(51)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그룹 내 최고 엔지니어에게 주어지는 ‘삼성 펠로(Fellow)’에 선정되는 등 반도체 분야에선 손꼽히는 인재였습니다.
최근에 잇따른 중년 엘리트의 자살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식과 능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성공한 사람일수록 작은 실패에도 자신을 쉽게 ‘패배자’로 낙인찍는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작은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성공했다고 추켜세우지만 정작 자신은 연구와 실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훨씬 큰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결국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남성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의 힘든 삶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어제 다비식을 치른 법정 스님을 통해 삶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밀리언셀러인 『무소유』를 통해 진정한 구도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설파한 법정 스님은 78세를 일기로 폐암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은 입적하기 전날 밤에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棺)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 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삶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추켜세우는 유명세 속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자신의 생명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웰빙(well-being)의 삶은 웰다잉(well-dying) 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인기나 명예나 부나 성공을 좇는 웰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하루하루의 삶을 웰다잉으로 채워갈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길’ 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가는 두 맹인의 눈뜸 기적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22절 이하에서 벳새다에서 손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심으로 맹인의 눈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고난과 버림받음,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합니다. 동시에 제자들의 몰이해와 제자의 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 후에 다시 여리고에서 맹인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예고를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사이에 집어넣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가 얼마나 중요한 깨달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죄에 신음하는 모든 생명의 해방을 위한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키는 승리의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주님이 보여주신 제자의 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조명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제자의 도는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는 삶입니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국어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네 주제를 알라!” 수학 선생님은요? “네 분수를 알라!” 지리 선생님은요? “네 위치를 알라!” 이민국에서 일하는 사람은은? “네 신분을 알라!” 그러면 동네 아저씨는요? “네 꼬라지를 알라!”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묻습니다. 제자들이 “세례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직접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을 찌른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바르게 인식하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맘껏 축복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꾸어 주십니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생에서 반석 같은 든든한 인생으로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십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천국의 마스터키를 주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처음으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3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정도라면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 줄 진정한 해방자로서의 메시야를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높은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고난을 받고 가장 처절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가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때 주님께서 강경한 어조로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조금 전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칭찬하셨던 주님의 모습과는 완전 대조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방해하는 자를 주님은 사탄과 같은 존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북쪽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에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황제의 이름을 아무 곳이나 붙일 수 없습니다. 적어도 황제의 이름을 붙이려면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규모를 갖추고, 도시의 가장 중심부나 높은 곳에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도시에 갈릴리 빈민 출신의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웅장한 황제의 도시 앞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❶, 힘입니다. 권력, 군사력, 경제력입니다. 이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도시나 건물을 세울 때면 항상 웅장한 석재와 화려한 대리석을 동원했습니다. ❷ 지식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을 자랑하기 위해 도시마다 대형 도서관을 건립했습니다. ❸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도시에는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상이나 우람한 근육의 남자 조각상을 즐비하게 세웠습니다. 이런 곳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메시야는 권력과 지식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해주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비록 걸인 같은 몸골이지만 예수님이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듣고 싶은 한 마디 고백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베드로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거부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경쟁자를 가차 없이 짓밟고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경쟁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성공제일주의,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황금만능주의를 배격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도는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 하느냐 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서의 고백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았지만 아직 행동으로 예수님을 따를 준비는 되어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정한 왕이시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심을 믿으며 행동으로 따를 준비는 부족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성숙은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날마다 주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황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 한 복판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기 있게 황금만능주의 사고를 거부해야 합니다. 성공제일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경쟁주의와 성공제일주의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성공과 명예라는 이름아래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삽니다.
주님은 진정한 내 삶의 주인이시오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거할 때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경험할 때 비로소 참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한 젊은 철학도에게 어느 날 참된 지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플라톤의 가르침을 받은 이 철학도는 지금까지 자기가 진정으로 배울 만한 철학자를 만나 보지 못했으나, 드디어 당신과 같은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고 플라톤에게 고백했습니다. 이 젊은 철학도의 고백을 듣고 난 후 플라톤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섬겨왔던 그 모든 스승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젊은이에게 플라톤은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참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분이십니까? 베드로처럼 머리로만 깨닫고 있는 메시야의 모습은 아닌지요? 진정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과의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머리로 아는 예수님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체득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왕이시오 제사장이시오 선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연합이 삶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제자도의 출발인 줄 믿습니다.
둘째, 제자의 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두 가지로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부인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자기의 자존감을 버리고, 자기를 비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단순한 자기의 욕망이나 욕구를 부인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의 잔이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가지셨지만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현대인의 삶의 목표중의 하나는 ‘자아실현’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이 만든 꿈을 이루기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물론 그 꿈을 이루기위해서 달려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꿈이나 야망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들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단호히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인간의 꿈은 모래위에 세운 성과 같습니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악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중심의 황제의 논리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제자의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려면 세상의 욕망이나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황제의 도시 한 복판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어그러지고 패역한 도시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중심의 바른 가치와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고백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는 날마다 자신의 옛 사람의 모습, 옛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지배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힘의 근원은 바로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이요 제자의 도(道)인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제자의 도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느 여자청년이 반짝거리는 멋진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교회에 왔습니다. 이것을 본 목사님이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는게 아니라 등에 지고 다니는 거야!” 그랬더니 눈치 빠른 여자청년이 “목사님 저도 잠 잘 때는 십자가를 지고 잡니다. 잠 잘 때는 십자가를 등 뒤로 넘기거든요”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겪고 있는 아픔이나 고통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속을 썩이면 ‘내가 져야할 십자가지 뭐’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겪는 고통이라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눈 한번 감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바른 길이 아니면 주님을 믿는 자로서 용기 있게 거부함으로써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십자가 앞에서 넓은 길로 갑니다.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 있습니다. 신학생이나 목사들이 제일 힘들게 부르는 찬송중의 하나입니다.
3절에 보면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여기서 우리는 이 찬송가를 이렇게 부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존귀영광 모든 권세 제가 홀로 받겠습니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주님 계속 져주십시오’
■ 어느 시골교회 장로님이 교회를 혼자서 섬기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목회자가 없어서 교회 살림도 혼자 해야 하고, 설교, 심방까지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로 가서 쉽게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이제 내일 떠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자는데 재산을 정리한 돈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시나 도둑맞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돈을 숨겨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짚단 속에다 넣어 마루 밑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자다보니, 추워요. 그래서 부인이 나가서 방에 불을 땝니다. 불을 때는데, 나무가 좀 모자랐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보니, 마루 밑에 짚단이 있어요. 그래서 그 짚단을 갖다가 불을 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난리가 났습니다. 마루 밑에 넣어둔 짚단과 돈이 없어졌습니다. 부인에게 물어보니, 지난밤에 다 불땠다는 거예요. 결국 장로님은 이사를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장로님은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려고 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겨서 존경받는 장로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고전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라. 십자가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곳에는 더 무거운 십자가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달게 지면 그 십자가가 너의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여 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제일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무 무겁다고 불평합니다. 작은 십자가로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피하면 더 무거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신다면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생명을 얻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지만 주님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저 썩어야 삼십 배, 육식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처럼 우리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날마다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그 속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영혼들이 빛 가운데로 나옵니다. 두려움 가운데 있던 자들이 기쁨과 평화의 자리로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제자의 도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제자의 길로 함께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가수 하덕규 씨의 노래 중에 ‘풍경’이란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
오늘 우리의 모습은 제자의 도에 제대로 머물고 있는지요? 제자의 길이 아닌 세상의 헛된 길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전히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넓은 길로만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나 자신이 제자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요, 제자의 길로 돌아오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 한 주간 더욱 깊이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바른 이해
막 8:27-34 / 이정익 목사
성경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일생과 3년 사역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하였는데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이 마가복음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장에서 9장으로 갈릴리 중심의 사역 즉 병자 고침, 가르침, 천국을 전파하는 사역내용들입니다. 또 하나는 10장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16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주로 고난주간에 벌어진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마가복음8장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준비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실 때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도시로 알렉산더가 이 땅을 정복한 후 재건하여 이름을 파니아스(paneas)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성읍을 헤롯대왕에게 하사하였는데 헤롯이 그 도시에 대리석으로 큰 신전을 짓고 성을 크게 확장하여 로마 황제의 이름을 기려서 “가이사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헤롯이 죽자 아들 빌립이 자기 이름을 넣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지로 인식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더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역을 마칠 때가 되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가이사랴 빌립보 도시에서 이런 질문을 했는가 하면 이 도시에 대해서 사람들은 찬란한 도시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디도장군은 전쟁승리를 이 도시에 와서 개선 퍼레이드 벌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제왕의 도시요 승리의 도시요 찬란함의 도시로 로마의 중심 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기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요한이 살아났다 하고 엘리야가 살아났다고도 하고 선지자 중 한사람이라고도 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유대인들이 아직 예수가 메시야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들도 벌써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막 1:24, 3:11, 5:7).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고 궁금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궁금한 것은 지난 3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 제자들은 나를 누구라고 이해하는가 그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죽어야 합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마 16:16)를 보면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예수님 마음에 아주 쏙 드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은 오늘까지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무식한 제자로 생각하고 이해하지만 그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족하게 칭찬받는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직후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1급 비밀의 말씀이었고 천기를 누설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1절을 보면 “이제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였고 31절 끝 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비로소 감추어졌던 비밀스런 사명을 공개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최후의 카드를 공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드러내놓고 예수를 붙잡고 항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6장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정색을 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졸지에 칭찬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사탄으로 몰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이해
뭐든지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은 예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자꾸만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장차있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였습니다.(막8:31) 지금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예루살렘 행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생각이 크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이제 죽어야 하리라, 3일 만에 부활하리라” 그런데 제자들은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보란 듯이 예수님이 크게 되고 기적을 행하여 마침내 군중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리라,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고생이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성공하게 된다, 너희들 이제 고생 끝났다.” 제자들은 그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꾸만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좋은 리더십, 기적의 능력, 권위, 초능력 등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 시대에 왕 될 자격이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죽는다고 말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보란 듯이 기적을 행하면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 받을 것인데 또 왕도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올 것인데 자꾸만 죽는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행착오를 겪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항변
시행착오 중 가장 큰 착오는 제자들의 오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는 죽어야 하리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절대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죽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라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도 속으로 가장 불평스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3년 동안 왜 이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죽다니,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잘 되어야 우리도 한몫을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높아지게 되면 행동도 자기 혼자 마음대로 못하게 됩니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한사람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오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 그 식솔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싫다고 포기하고 내려오고 사표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독재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타의에 의해서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모 월간잡지를 보면 “명계의 대화”라는 픽션이 나옵니다. 박정희,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명계에서 서로 만나 대화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는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는데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명분도 없었고 마땅한 이유도 없어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날 내려오도록 기회를 줘서 얼마나 어깨가 가벼운지 모릅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노무현대통령도 “그동안 대통령 못 해먹겠다.” 그만두고 싶다고 한 말들은 진심이었습니다, 나는 탄핵 때 정말 탄핵안이 가결되어 통과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싶었는데 다시 하게 되어 낙심 했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에 제자들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예수님 한 몸에 기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만 하면 우리들은 모두 한자리씩 할 것으로 학수고대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조차도 예수께 찾아와서 이다음에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시행착오들 입니다. 예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제자도 정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의 도를 정의해 주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크게 환영받고 예수님은 왕이 되고 우리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는 누구인가”, “제자는 어떤 역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부터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부탁을 두 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두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힘든 일입니다. 이 말은 자존심이나 체면이나 자기를 비하하라는 뜻이 아니고 또 금욕하고 자기욕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이 되지 말고 내 의지를 내 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왜 기도가 필요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매일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그것이 자기부정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자아가 너무 강한 시대입니다. 오늘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되기가 힘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의미를 아십니까.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최대의 혐오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죄수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갔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지금까지 저지른 행위나 죄를 뉘우치고 이제 로마에 충성하겠다는 복종하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나는 없고 로마에만 충성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은 지금부터 나는 나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나 제자도는 나를 버리는 생활입니다. 내가 강하면 예수가 축소되고 작아집니다. 내가 부정되어야 예수가 부각되고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축소될 때 예수가 커지고 내가 부정될 때 예수가 긍정되고 인정됩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작아져야 하고 축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이 크게 부각됩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내가 복을 받고 건강해지고 형통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그런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복도 주어집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그것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어머니조차 예수께 찾아와서 아들을 위해서 청탁을 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겨우 그 수준이라면 그것은 예수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만 부각되게 됩니다. 그것이 제자의 모습이고 정신이고 삶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너무 내가 강하고 부각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담되어도 이 신앙의 길을 떠나고 교회를 버리고 조금만 희생이 요구되면 쉬운 교회로 찾아갑니다.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하면 회피하고 다른 교회로 가 버립니다. 가보니까 그 교회도 건축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 지은 교회로 갑니다. 가보니까 그 교회는 교회 건축하느라 진 빚을 갚기 위해 헌금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삶에도 신앙생활에도 내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내게 주어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 십자가를 내가 회피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져야 합니다. 내가 안한다고 그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운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나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내게 주어진 소명들, 할 일을, 직분을 잘 감당해 내는 삶입니다.
저도 이 전도자의 길을 많이 회피해 보려고 했었습니다. 이 전도자의 길에 가장 힘든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초라함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자의 길은 초라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사들은 결혼하기도 힘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결혼은 해야 하겠는데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폭탄입니다. 그런데 맘에 드는 사람은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모처럼 각오하였다가도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길을 가려면 세상의 기준에 맞추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길 가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초라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원래 초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초라해 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초라하다, 가난하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빈천하고 초라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한 자요 유식한 자요 다 가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확실한 자아상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바울 자신도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대 라이벌이었던 아불로는 아폴로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화려하게 웅변하고 박수를 받을 때 바울은 박수도 없이 소아시아의 비탈길을 걸으며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제자의 길은 세상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처럼 융통성을 크게 발휘해도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융통성을 크게 발휘하면 이 길의 의미가 퇴색하고 빛이 바랩니다. 이 세상은 때로 적당히 타협해야 살아가기가 쉬운 세상입니다. 철저하게 십자가를 지는 삶은 왕따 당하고 내 몰리기도 합니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성공의 지렛대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숫한 시행착오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이해함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제자 됨은 나를 부인하는 일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