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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삼하 16:1~14 미국이 낳은 20세기 최대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라는 교수가 있다. 그의 본명은 ‘헬무트 리처드 니버’이다. 예일대 교수였고 그의 동생 ‘라이홀드 니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신학자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도덕적인 개인이 국가라는 조직 속에서는 비도덕적인 것을 낳는 것을 많이 보면서『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인 국가』라는 단어와 책을 썼다. 또 사람이나 국가라는 존재가 약자인척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동정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교묘하게 악을 저지르면서 자기의 악과 잘못된 것들을 정당화시키는 현상들을 보면서 『약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50년대 말 예일대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강의시간에 나온 이 말은 많은 충격을 주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이 전략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좌파진영의 사람들이 이 전략을 많이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들이 사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자기들은 ‘성소수자’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자기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의 성적 정상 취향자들에게 차별과 학대와 외면과 부당함을 당한다고 주장한다. 니버가 사용하는 이 말은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사용한 말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다가 지고나면 약자이기에 강자에게 다했다는 코스프레를 만들어 자기들의 악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시켰다. 일본도 그랬다. 자기들의 욕심과 야망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원폭을 맞고나서 교묘하게 자기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국제여론을 만들고,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피해 당사자국가로 둔갑시켜 미국이 당연히 자기들을 도와주고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다. 니버는 이런 모든 일들이 약자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묘한 폭력이라고 했다. 이러한 형태들이 가정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교화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약자와 피해자의 탈을 쓴 그들의 연약하고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 때문에 그들이 저지르는 교묘한 폭력에 대해 관용하고 동조함으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자기들은 깨어있고 다른 사람보다 깨어있는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간사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남편들이 아내에게 경제적 넉넉함이나 재정을 제공함으로써 큰소리 치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도 악의 일종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엄연한 폭력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의 수고와 노동의 대가로 벌어온 재화와 경제적 가치에 대하여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남편의 수고와 노동 가치와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존중하고 존경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다. 미국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 미혼모 생활지원 정책이 있었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이 18살이 될 때까지 1인당 약 90 여 만원의 생활비와 양육비가 지급되었다. 이 제도가 놀랍게도 미국의 국가 예산과 세금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일하기는 싫고 공부하기도 싫은 흑인이나 가난한 백인 여자이이들이 쾌락은 맘대로 즐기고 싶고 생활도 돈 걱정 없이 살고 싶고 그렇게 선택한 것이 계속적으로 결혼은 안하고 아버지 모르는 아이들만 잔뜩 출산시켜서 미혼모 생활지원비와 아이 양육 수당만 계속 빼먹었다.
이것이 대표적인 ‘약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다. 국가와 다수의 건전한 시민들에 대한 교묘한 착취와 폭력이다. 건강하고 건전한 시민의식과 국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을 사회적 약자나. 경제적 약자와 소외계층이라는 이름으로 갈취하는 경제적 폭력이다. 미 정부가 주는 이 미혼모 생활비 지원비들 70% 이상이 그 엄마들의 술값과 사치품과 마약 구입에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적 욕망과 욕심대로 살아 놓고선 버림받은 어린여자 내지는 피해자라는 인식을 미국 시민들과 대중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선 자기들은 당연히 국가의 도움과 경제적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에게 지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무엇을 배워서 자립하거나 직장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항상 피해자와 약자라는 코스프레와 프레임으로 자기들의 죄악과 게으름과 무노동의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시켰고 집단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언론들은 항상 그들의 논리와 주장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대변했다. 그 결과 미국의 세금은 수도 없이 새 나갔고 미혼모는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났다. 당시 대통령인 클린턴은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를 주장하는 민주당 출신이요 소속이면서도 이 미혼모 생활지원비를 과감히 없앴다. 그러니까 난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이 제도를 없애는 일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미국의 국가 예산의 낭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많은 미혼모들이 일하러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의 노인네들이 국가의 지원책을 받기위하여 토지와 여러 부동산을 미리 자녀들에게 다 넘겨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해서 국가의 생활지원비를 받는 것들도 일종의 약자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눈에 띄지도 않으면서 국가에도 교회와 가정과 개인의 무의식과 인생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쌓이게 한다. 저의 지난 30여 년간 목회 속에서 모두 8가정의 특이한 부부의 사례들이 있다. 이 8가정의 부부들은 모두 다 남편들이 아내를 강제로 성폭력하여 아이를 임신함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 가정들이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야 당연히 성폭력범으로 감옥에 가도록 했겠지만 50~60년대, 70년대, 80년대 까지는 당한 여성 자신들이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감추고 말을 못하는 시대에서 그 상처와 분함을 혼자 속으로 삭여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앓으면서 원치 않는 결혼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부부로 같이 살아도 자기 인생을 망치고 들어온 남편의 그 폭력에 대하여 맘속에서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8명의 부인들이 모두 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54년 동안 남편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정죄하고 저주했다. 그러니 그 결혼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둡고 괴로웠겠는가? 남편들은 그 일로인해 평생 동안 아내에게 저주와 멸시와 경멸과 비난과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 살았다. 아마 그 부부들의 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부인들은 평생 용서를 하지 않고 증오하고 미워했다. 남편의 행동이나 언어나 자세가 마음에 안 들면 과거에 자기에게 행한 일들을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낱낱이 이야기했다. 저도 수십 번씩 들었다. 그 남편들은 모두 다 아내의 종처럼 살았다. 정신적, 심리적 포로와 볼모로 잡혀서 살았다. 그 아내들은 항상 자기들의 아픔과 억울함만 이야기했다.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자기 인생을 망친 세상에 몹쓸 놈과 망할 인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얼마나 큰 폭력을 행하고 살아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약자와 피해자의 이름으로 한 인간에게 얼마나 심한 인격적, 정신적, 심리적, 영적 학대와 가학의 폭력을 저지르고 사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당한 아픔으로 약자라는 이름과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20~54년 동안 정신적, 인격적, 영적, 심리적 폭력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딱 한 분만, 한사람의 부인만 저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자기가 그런 사람, 곧 약자와 피해자란 이름으로 자신의 죄악을 당연한 일이요, 정의라는 인식의 지배하에 있던 사악한 폭력자임을 인정했다. 남편에게 찾아가서 남편의 최초로 시작된 성폭력에 대하여 용서를 선포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기가 행했던 모든 악들에 대하여 잘못을 구하고 용서를 구했다. 남편이 대성통곡을 했다. 대굴대굴 구르며 울었다. 아내의 정죄 속에 갇혀서 두려움과 눌림 속에 있던 그 영혼의 슬픔이 터졌던 것이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눌리고 두려움에 떨었던지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리고는 그 남편의 얼굴도, 아내의 얼굴도 꽃처럼 피어나고 해처럼 밝아졌다. 예뻐지고 아름다워졌다. 자연스럽게 가정도 밝아지고 경영하는 식당도 잘 되어 나갔다. 마귀는 ‘약자’와 ‘피해자’라는 의식 속에 우리의 마음과 영과 인식을 가둬놓고는 정의와 공의라는 명분으로 우리로 하여금 교묘한 폭력을 행하도록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폭력에 여론과 언론을 동원해 지지를 받고 정당성을 얻게 한다. 지속적인 폭력 행위에 합법성을 갖춘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분량을 쌓아왔는지를 모른다. 이것이 그들의 무지요 어리석음이요 슬픔이다. 성도가 주님의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려하지도 아니하고, 가르쳐도 듣지 아니하고, 주님의 것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을 배우려하지는 않고 자기의 불순종과 게으름을 변명하고 정당화 시키는 행위도 약하다는 핑계로 약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묘한 폭력이다. 조금 책망과 꾸중을 들었다고 자존심이 상했으니 마음이 상하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가 손상을 입었다고 자기편을 만들고 동조자와 심리적 공감대의 지지자들을 만들어가는 행위도, 피해자와 약자의 입장도 포장된 사악한 행위요 폭력이다. 그러면서 본인들은 자기들은 무슨 행위와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작금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데모와 폭력은 그 뒤에 엄청난 영적 어둠의 세력이 있다. 민노총의 정부 투쟁과 폭력 등은 약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형폭력이다. 사실 그들은 약자가 아니라 약자의 옷을 입고 약자라는 탈을 쓴 폭력자요 지배자요, 군림하는 자요, 여론과 사람들의 감정적인 부분들을 교묘히 조종하고 이용하는 사악한 자들이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의 잘못과 불순종과 거역함으로 책망과 치리와 꾸중을 듣고서도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상처와 아픔을 당했는지 만 얘기하므로 타인의 동정과 감정적 공감대를 끌어내어 변명하며 자기를 정당화 시키는 것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도가 행하는 대표적 약자의 이름으로 행하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폭력이라고 니버는 말했다. 북한이 미국의 폭력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말한다. 그들의 말과 언어는 스스로 자기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사용하는 사악한 무리와 집단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본문 속에 있는 모습도 바로 약자와 피해자의 모습을 탈과 거짓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사악한 폭력이다.
약자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의 대표성의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여론으로 마녀를 만들어 영구제명 하는 방법이다. 그의 약점이나 실수 등을 과장하거나 없는 소문을 뒤에서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서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그렇게 매장시킨다.(참고로 영화 「더 헌트」를 보라) 그들은 자기 약한 면을 악 이용해 군중들의 분노와 감정을 자극하고 격동케 만들어 집단 폭력과 광포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던 좌파진영의 시체 팔이도 그 전략이었고, 세월호 사건의 학생들의 죽음을 이용하여 어른들을 분노케 했던 것도 사악함의 숨은 얼굴이다. 만약 세월호의 죽음이 모두 어른들이었다면 그들의 약자 코스프레 전략은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 속에 사울의 집 족속 가운데 게라의 아들 시므이도 다윗의 약점과 아픔을 이용하며 공격하고 비난했다. 사울의 집안이 망한 것은 사울 자신의 죄와 불순종의 결과였지 다윗이 망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 집안의 피도 다윗은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다윗이 칼로 쳐서 죽였던 것처럼 크게 소리친다. 그것은 다윗 왕의 주위에 있던 새로운 신하들에게 다윗 왕이 그런 놈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심리전이었던 것이다. 자기들은 다윗에게 엄청난 학살과 학대를 당한 것처럼 약자와 피해자 코스프레의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중 시므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비난과 저주와 여론화시키고자 했던 모든 의도와 악을 그의 목숨과 피에 돌리셨다. 그것이 하나님이 집행하시는 정의였다. 하나님 앞에는 약자와 피해자의 코스프레와 거짓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교묘한 프레임 속에 끌어들이려는 마귀의 부추김에서 잘 분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항상 겸손하고 항상 따뜻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 (공유)세미나에서 받은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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