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1
4월18일[부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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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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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JmOlHdVGyiY
[인천교구 김준희 대건안드레아(상1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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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식탁에서 특별한 숫자를 자주 셉니다. “8,000!”“7,999!” 아직 남아있는 살아갈 날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적으로 좋은 노력입니다. 남아있는 날수를 헤아리며, 죽음을 묵상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기에 더욱 충만한 하루를 살고자 하는 짧은 피정입니다.
저도 작년 종합건강 검진 후에 기대 수명 몇 살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헤아려 보니, 남은 날은 이제 겨우 7000일 남짓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뜨뜨미지근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날 하루를 돌아보고 나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한 날입니다. 이제 남은 날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이걸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보다 더한 하루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날입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좌충우돌 이웃들과 부딪치고, 나나 상대방이나 크게 상처 입은 마이너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주로 사랑을 만난 날입니다. 크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날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몸 바친 날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루를 살아도 영양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것, 하루를 1년같이,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 지상에서의 모든 순례 여정을 내려놓고 드디어 하느님을 뵙는 결정적 순간의 영원한 삶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내 헌신과 내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체 순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합일하는 너무나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 결정적 구원을 미리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머나먼 훗날, 젊음이 지나가고,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후에야 맛보기보다는,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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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화’는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 어색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저도 그랬기에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방법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 5가지를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말하는 것보다 들어라 –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내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오늘 좋은 대화였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2.상대의 말에 관심을 가져라 – 보통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정서이고 우리는 인중 쪽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해주고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신나게 말할 수 있습니다.
3.상대를 긍정하라 – 옳고 그름은 사실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압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다가는 상대가 가진 나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상대는 지금 상담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4.질문하라 –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화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있고 그 대화가 계속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를 흐르게 하려면 나의 대화 다음에 반드시 상대의 대답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5.상대가 관심있는 것을 질문하라 – 질문이 취조가 되면 안 됩니다. 상대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면 상대는 신이 나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 주제를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사실 대화의 기술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면 내 말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알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입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라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고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묻는 것이 없다면 하느님도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의 신비에 대한 믿음까지 오지 못하는 이들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알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친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요즘은 하늘나라 신비에 대해 알려고만 하면 그 정보를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를 따로 하지 않더라도 SNS나 유튜브만 봐도 수많은 정보와 가르침들이 흘러넘칩니다. 그런데도 표징만을 요구하며 배우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참 구원과 진리에 무관심해지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2007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워싱턴 D.C의 기차역에 서서 여섯 곡의 바흐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바이올린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조슈아 벨로였습니다.
조슈아가 바쁜 직장인들로 가득한 기차역에서 350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2,000여 명이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45분간 계속해서 연주했습니다. 단 6명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20명가량이 돈을 냈지만 이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기차가 내는 소음 외에는 정적이 흐를 뿐이었습니다. 박수갈채도, 군중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진행한 이 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마저도 치열한 경쟁에 휩쓸리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 자신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주님에 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먼저 그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 뒹굴고 있는 우주에 관한 그림책을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친밀해집니다. 더 많이 알고 싶을수록 더 많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지금 하느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체 안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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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신기한 현상을 봤습니다. 둥근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하늘에 여명이 생기면서 점차 밝아졌습니다.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이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마침내 태양이 붉게 떠오르자,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자연현상이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6월 24일입니다. 이는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까지는 낮이 길어지지만, 하지가 지나면 낮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까지는 낮이 짧아지지만, 동지가 지나면서 낮은 점차 길어집니다. 둥근 달이 태양이 떠오르자, 자리를 양보했던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시자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셨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달과 태양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태양이 주는 강렬한 힘도 좋지만, 달빛이 주는 은은한 감성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는 ‘파묘(破墓)’를 댈러스에서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월광에 물드는 신화가 생각났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무당집 아들이 친구였습니다. 친구 집에 가면 굿을 하는 것을 보았고, 먹을 것도 많았습니다. 벌써 50년이 넘은 기억입니다. 친구 집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여름에도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예전에는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풀이하였습니다. 길과 복은 청하고, 흉 화는 멀리하도록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가 채워주지 못했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굿판이었습니다. 태양과 달, 바위와 나무, 곰과 호랑이, 혼과 영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던 월광에 물들던 신화였습니다. 영화 파묘는 무당과 지관이 함께 어우러져 신명 나는 굿판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서사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있고,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옹골찬 연기가 있습니다. 디지털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태양에 바래진 역사와 월광에 물든 신화가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결국 남는 게 없습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요리해서 음식의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 것보다 지치고 힘든 우리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하고, 해석할 필요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사도와 공동체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살아냈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가 직접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만져봐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낳은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낳으신 어머니를 믿습니다. 어머니의 젓을 먹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햇빛에 바래진 역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모든 걸 버렸던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던 신앙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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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죽음을 취하셨고, 죽음을 이기도록 돌아가셨다. 이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이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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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뜻과 생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예를 한 가지 소개합니다. 에티오피아의 관리로서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고관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였던 필리포스에게 “성령께서 ……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라고 지시하시는데, 이때 ‘바싹 다가서라’라고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콜라오’는 매우 가까이에서 마치 하나가 되는 것처럼 바짝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답답해하는 관리에게, 바로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알아듣다’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 현실을 굳게 믿음으로써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내재화하는 ‘구원적 앎’을 뜻합니다. 필리포스의 설명으로 구원적 앎을 얻게 된 관리는 기뻐하며 말합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면, 살아가는 데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으로 접근하지 않을 때 매우 심각한 오류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말씀을 정보와 지식으로만 접근하였기에 끝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경 연구가 그저 이해되지 않는 고대의 문장을 붙들고 있는, 억지스럽거나 고단한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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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4-51)
1)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구원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한 6,37) 따라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다.”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마지막 날의 다시 살아남’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6,40)
2)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에게 온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누구든지 ‘나에게만’ 와야 한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1코린 8,6) 만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메시아(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뒤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3)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 번 강조된 말씀인데,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선언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계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고, 그 생명력은 당신에게서만 나온다는 선언이고 계시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라는 말씀은, ‘만나’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이긴 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를 언급하신 것은 사람들이 먼저 ‘만나’를 언급하면서 ‘만나’처럼 평생 날마다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날마다 배불리 먹는 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시는데, 이것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만 믿음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47절)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과(50절)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은(51절), 뜻은 같은데, 표현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내 몸 안에서 소화가 되고 흡수되어서 내 몸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온전히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엄마의 몸이 제공하는 생명력을 받아먹으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주는 생명력을 태아가 받아먹는 것은, 엄마를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을,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당신이 곧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먹는 일이, 또 예수님의 살을 먹는 일이 같은 일이고 큰 은총이라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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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가톨릭 교회가 그 주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는 유럽의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분야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또 모든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큰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지요.
이렇게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또 앞으로도 끌어갈 그리스도교의 태동과 전개 과정을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시작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으며 또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지를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여실히 느낄 수가 있지요.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던 사도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방대하고 거룩한 조직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이야기되어 있고 오늘 독서를 통해서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대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초대 교회의 놀라운 열성과 성령의 섭리를 동시에 느낍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초대 교회를 세우고 죽음 앞에서, 또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증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환난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면서 박해 또한 기쁘게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노력 속에 초대 교회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지요. 요즈음 독서가 사도행전 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은 사도행전보다는 성령행전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중심에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그 열심한 활동 뒤에, 그리고 그들의 역할 앞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의 부활 체험을 더욱 증폭시키시고 그들 활동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도들이 순리대로 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이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은 몇몇 개인의 체험으로 머물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자 노력할 때 그 체험은 더욱 깊어지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발걸음에 함께 했던 성령께서 풍요로운 결실을 이루어주시고 또 우리에게 깊은 체험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부활의 기쁨은 그것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 중의 한 사람인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곳 저 곳을 다닌 필리포스에게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주님의 천사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시지요. 지금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은 필리포스가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단지 도구이며, 복음을 전하고 결실을 맺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는 그저 성령께서 시키신 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필리포스는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놓았으며 성령은 그 결실을 풍요롭게 열매 맺어 주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이 부활의 기쁨을 성령의 풍요로운 열매로 연결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독서가 그 답을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을 우리 삶의 교과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 언변이 부족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진하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언변에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에 겁 많은 배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뛰어난 언변과 지혜를 보여주지요. 바로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놓는 순간 베드로는 놀라울 만큼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체험을 더 깊게 하는 바탕은 사도들이 그랬듯이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 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원하시는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그리고 나를 도구로 쓰시도록 기도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의지만 남고 인간적인 의지는 아주 작은 걸림돌에도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 앞서서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또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뜻을 세웠다면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가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시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나를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선교를 하면 자존심을 다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선교를 하려다가 상처를 받고 오히려 본인의 신앙까지도 움츠러드는 안타까운 결과를 만들 수가 있지요.
주님께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고 진실 되게 기도하고 자신을 내 맡기면 상처는 이미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좀 우습게 아는 것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사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를 그들의 특권으로 생각했듯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시련이 보람과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쁨이 가득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고 상처를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요.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한 번 복음을 전하고서 그 사람이 바로 ‘OK!’하고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때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망설였으며, 계산하고 주춤거렸습니까? 시간이 필요했지요. 관심이 없어서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출발하기까지가 어려운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인간적인 것부터 서서히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담 없이 성당 구경을 시켜줄 수도 있고, 함께 성당에 와서 차를 한 잔 마실 수도 있으며, 마침 우리가 하고 있는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소개하며 추천된 책을 한 권 선물해도 좋겠지요. 굳이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은 책을 함께 나눠보며 인간적인 친분과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날 그는 자연스럽게 하느님 옆에 가까이 와 있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선교를 해야 한다고 하면 교리 지식도 풍부하고 경험도 많으며 언변이 뛰어나서 그 사람보다 모든 면이 월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가 제일 선교를 잘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치부 어린 꼬마들이 제일 잘합니다.
꼬마들에게 제가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한 번 얘기하면 다음 주에 분명히 친구들을 한명씩 데려옵니다. 유치부 꼬마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친구 하나씩 데리고 오랬어. 가자.” “그래.” 그리고는 손잡고 같이 옵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 어른들은 “가자”는 소리를 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립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혹시 그 사람이 부담을 느끼면 어떻게 할 것이며, 안 온다고 딱 잘라 거절하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요. 머릿속 계산이 너무 복잡합니다. 내 의지대로 하려고 하고 내 자존심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복잡한 것이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차 한 잔 하자고 권하고, 좋은 책이니 같이 보자고 권하면서 서서히 계기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가장 큰 이웃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면 나의 목숨까지도 그리고 나의 미래까지도 다 맡길 수가 있으며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얻을 수가 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이웃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가 없지요.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언행 속에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사도행전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난과 박해를 당하고 목숨까지도 위험에 처하지만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읽으면서 사도들의 그 열정과 성령의 놀라운 결실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속에서 사도들을 이끌었고 초대 교회로 만들었던 성령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들이 기쁨과 보람으로 승화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를 실천함으로써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이끌었던 성령을 여러분 모두가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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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서 6장의 전체 맥락 안에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성체성사에 대한 언급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 안에서 그 표징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몸은, 구약 성경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고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은 만나의 신비로움을 하느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선물인 율법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참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들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공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 참조)을 율법을 통하여 배우고 믿었던 이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선택을 재촉합니다.
유다인들처럼 듣기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될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그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세로 늘 성경을 읽고, 또 그 뜻을 풀이해 준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이 부활의 시기를 보내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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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생명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성체다.>
어제 복음(35-40절)과 오늘 복음(44절-51절)을 함께 보면 바로 연결되지 않고 41-43절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빠진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41-43절) 하시고는 44절의 말씀을 계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 자신에 있다.
예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와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20년 이상 목수의 아들로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출처를 밝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기보다는 이를 일축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신비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시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립하였다.
이 점을 예수께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계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내심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성체인 것이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결국 육체의 생명을 영위할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인 것이다.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를 받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성체는 '찾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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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6,51)
부활 2주간 금요일부터 미사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이 낭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곧 성체성사의 심오한 신비를 설명하고 있고 반복 중첩되는 표현이 많아서 무척이나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회에 예수님의 독특한 식사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식사법엔 두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분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둘째 그분은 누구하고라도 특히 소외된 이들과 함께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두 가지 활동을 한데 묶어 그것을 예수님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빌미 거리로 쏟아냈습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11,19) 와서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죄인들을 책망했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은 언제나 먹고 마셨고 죄인들을 식탁의 벗으로 환영하셨습니다. 혼자 먹는 것이 그렇게도 예수님께는 불편하셨나 봅니다.
예수님은 종종 홀로 기도하시고 혼자 활동하시기도 하셨지만 혼자 드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기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였고, 누가 초대하든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예수님에게서 식탁은 아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아빠 하느님의 혼인 잔치(루14,15~24)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람들과의 친교와 사랑에 굶주리고 계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양식’(요4,38)으로 집약하셨던 것입니다. 영적 양식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할 때면 메뉴에는 언제나 빵이 있었으며 그 빵은 바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십니다.”(6,51.48)와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6,50.51)라는 말씀은 훗날 최후 만찬에서 완성하셨으며, 부활 이후 당신의 발현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빵을 땔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바로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이며 참여입니다. 당신 부활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살아가도록 주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6,47)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씀하신 뜻을 우리는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6,51)이며, 당신의 몸과 생명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까닭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구원된 인류를 영원한 생명이신 아버지께로 이끌기 위해 생명의 빵인 당신의 몸을 교회에 남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보이지 않는 당신 은총의 손길로 우리를 예수님께 이끌어 주시며 당신 눈길로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한순간이라도 우리에게서 눈길을 돌리시고 손길을 멈추신다면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엔,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인 필리포스는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이끌립니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8,30) 하고 필리포스가 묻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8,31)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필리포스는 그에게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이사야서)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습니다.”(8,35) 그러자 그 내시는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습니까?”(8,37)하고 세례받기를 청하자, 필리포스는 그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자 이내 사라지신 것처럼,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고 물에서 올라오자 홀연히 사라집니다. 이 이야기는 놀라운 하느님 은총의 작용이며 아버지의 이끄심의 섭리입니다. 내시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다음 아버지의 이끄심에 의해 홀연히 사라져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영원한 생명의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전한 필리포스의 발길이 너무 거룩해 보입니다. “온 세상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시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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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로마제국의 정치인인 세네카는 ‘모든 바보의 한 가지 공통점은 항상 살아갈 준비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고,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는 ‘나는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끊임없이 왼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명언을 읽으면서 얼마나 미루지 않고 지금 즉시 행동했는가를 떠올려 봅니다. 사실 미루지 않고 25년 가까이 해 온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글 쓰기입니다. 의무감을 느끼기 위해 매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써왔습니다. 우연히 2,000년 초반에 썼던 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25년을 계속해서 쓰다 보니 지금 역시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25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루지 않고 지금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더구나 행동해야 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루는 것은 지금 훌륭해질 수도 있는데, 굳이 내일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절대로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윤택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자기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주님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고 해서 지금 특별한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지금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데, 굳이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나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양식이라며,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떤 형제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성당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주말에는 자기 취미 활동하느라 시간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자기 취미 활동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나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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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있는 생명의 빵>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그때 이미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응답을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드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고 선언하시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있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모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람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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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되고 싶다>
요한 6,44-51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되고 싶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세상을
먹고 사는
사람보다
세상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되고 싶다
우리 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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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꽃’같은 삶>
-영원한 삶-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알렐루야!”(입당송;탈출 15,1-2참조)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아 닮아갈수록 예수님처럼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온 누리가 파스카의 봄꽃들로 가득한 파스카의 축제시기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할 바, 파스카의 꿈, 파스카의 삶입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늘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 바로 영원한 삶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바로 영원한 삶,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꽃’이란 시의 발견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 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 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인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파스카의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 일이다”-2005.4
2005년 수도공동체와 제 자신이 참 곤경중에 처해 있을 때 수시로 선물같은 시들이 저를 위로하고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개나리, 배꽃, 수선화...등 봄꽃들이 지자 라일락, 영산홍이 뒤를 이어 만발합니다. 파스카의 축제시기, 파스카의 꽃처럼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께 보내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살라 보내신, 하느님의 선물같은 우리 믿는 이들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우리의 고귀한 신원이 밝혀집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께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기에 나를 모르고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방황하다 아까운 인생, 허망하게 끝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 참나를 아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하고 공부해야할 하느님이요 예수님이요 나임을 깨닫습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참나를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닮아갈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의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우리의 구원이 생명의 빵이신 당신께 있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예수님과 함께 살라 주어진 참삶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사랑의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인생들이요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참삶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이자 참사람으로 하느님이 보내신 선교사의 빛나는 모델이 혜성같이 등장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 에티오피아의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이끌어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리포스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내시에게 성경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내시를 최종 목적지인 예수님께 성공적으로 안내하는 선교사의 모범 필리포스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내시의 자발적 청에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이어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고, 필리포스는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들임을 깨달을 것이며 참된 선교사들이라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데 온힘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내시는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길을 갑니다. 복음선포자이자 주님의 제자, 주님 파스카의 꽃인 필리포스를 만나 예수님께 인도되어 주님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된 내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주신 제자중 으뜸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가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임을 엄숙한 선거 과정을 통해 새롭게, 깊이 깨닫습니다. 선거현장의 묘사가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2013년 3월13일, 전 세계가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의 굴뚝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경당 안의 풍경들이다. 추기경들은 차례로 자기 자리에서 투표용지에 교황 후보의 이름을 적은 다음 네 겹으로 접어 손가락에 꼽아들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제단 앞으로 나아간다. 인류의 종말을 선고 내리려고 오른팔을 높이 쳐든 그리스도의 눈이 선거인을 내려다보는 그림이다. 제단에는 투표참관인 추기경 2명이 서있었고, 제대 위에는 접시로 덮은 투표함이 놓여 있다. 제대 앞에서 투표자는 모두가 듣게 큰 소리로 선서한다.
“나는 나를 심판하실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불러 나의 투표가 하느님 대전에 마땅히 선출되어야 할 분에게 갔음을 선서합니다.”
이어서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제대에 무릎을 꿇어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간다.”(성염 칼럼, 가톨릭프레스 2017.3.6.).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 교황선거 장면인지요. 민심이 천심입니다. 추기경들의 진실한 마음이 하느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중에서 교황직무에 마땅한 이를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잇는 주님의 제자를 뽑는 엄중한 선거이기에 선거결과에는 누구나 승복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선물답게, 예수님의 제자답게, 영원한 삶을 살게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에 생기를 주시고, 우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네.”(시편6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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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갈림길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께서 끝날까지 애쓰신다는 나눔을 어제 했는데 그 나눔을 하고 어제 내내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반성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이끄시려 이렇게 애쓰시는데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런 반성을 하다 보니 이런 거창한 질문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강의하러 정동에 가고, 내일 회의하러 지방에 가고, 모레 월례회를 하러 가고, 이렇게 매일 여기저기를 가는데 나는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가다 보면 갈 데까지 갈 것이고, 갈 때까지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가고, 갈 때까지 갔는데 그곳이 엉뚱한 곳이고 낯선 곳이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럴 리 없습니다. 저는 지금 머리로는 갈 곳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안전하게 가려면, 부산 갈 때 경부선을 타듯이 아버지께 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신 아드님께 올라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올라타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올라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경부선은 안 타고 서울 시내 여기저기만 왔다 갔다 하듯 주님이라는 길을 올라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성찰도 해야 합니다. 곧 우리의 길에 대한 성찰과 함께 우리의 양식에 대한 성찰입니다. 가는 길뿐 아니라 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진정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라고 하신 다음,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인데 가나안까지 가는 길에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 나라 가는 길에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몸이요, 미사로 치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고, 성체를 매일 영하지 않으면 가는 길에 힘을 잃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유튜브만 보면 길을 잃을 것이고, 성체를 영하지 않고 맛집 기행만 하면 힘을 잃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길도 찾고 힘도 얻는 길을 갈 것인가, 길도 잃고 힘도 잃는 길을 갈 것인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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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51)
<하느님의 일꾼!>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인,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51절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점점 더 구체성이 드러납니다. 이는 육적인 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군중에게 당신의 몸(살)과 피에 대한 말씀의 구체성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오늘 독서(사도 8,26-40)는 주님께서 필리포스를 통해 에디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를 하느님 자녀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말합니다.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필리포스가 달려가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는 내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그러자 내시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내시에게 전하고,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필리포스를 통해 내시를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를 통해서, 천사인 너를 통해서. '천사(天使)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꾼'입니다.
나의 천사는 누구인가? 나를 죽지 않게 하는 나의 천사, 나를 생명의 빵으로 인도하는 천사는 누구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의 천사를 따라가는 복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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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lLTzEwSV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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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하느님 사랑은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생명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실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 생명을 먹고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은
무엇을 우리가
먹어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을
먹는 것입니다.
빵을 만드신 분이
빵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생명을 주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과 빵처럼
생명과 하느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마시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 생명의
가족입니다.
오늘도 하느님
사랑을 먹는
은총과 감사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하느님의 빵을
먹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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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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