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와 청정고원의 도시 강원도 태백시 사진출사기
강원도 태백시 이곳은?
강원도 동남부에 있는 시로 시의 남쪽에 봉화군과 접하여 도계를 이루고 있다. 1920년대에 태백탄전 탄층이 발견되면서
한국 최대의 탄전지대로 성장하였으나 1980년 이후 석탄합리화정책으로 위축되고 있다. 1981년 장성읍·황지읍을
통합하여 태백시로 승격했다. 광산도시이긴 하나 자연관광자원을 활용하여 관광휴양도시로 변모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인구수 줄고 관광객도 줄었다
훌륭한 자연경관이 산재함에도 홍보부족 석탄도시 이미지 탓인지 2018년 4/4분기 태백시를 방문한 관광객은 12만7000명으로 전년 동기 13만9000명에 비해 9.2% 감소되었다고 한다
태백산국립공원을 찾은 관광객은 전년대비 3.2% 감소, 용연동굴 23.7% 감소, 고생대자연사박물관 16.3% 감소,
365세이프타운 16.8% 대부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걸로 집게되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홍보가 필요해 보이는지역이다
운해와 태백시전경
산으로 가로막힌 태백 전경
전국에서 가장작은 시 지역이면서 인구가 가장작은 태백시 시내모습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 황지연못
태백 도심에 있는 연못으로 옛 문헌에 낙동강의 발원지라 기록되어 있다. 실제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이 주변에 여럿 있기는 옛문헌의 기록되어 있고, 워낙 많은 물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사실상 인정받고 있다. 못은 상지,중지,하지 3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지 남쪽에 깊은 수굴에서 엄청난 수량의 샘이 솟아나고 있는데, 가뭄에도 하루 약 5,000t 이상의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한다. 황씨 성을 가진 사람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며, 조선시대에는 관아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물이 바위를 뚫은 구문소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면서 큰 석문을 만들고, 그 아래로 깊은 소를 이루었다는 뜻의 구문소
‘태백시 동점동의 혈내천은 본래 마을 쪽으로 크게 휘돌아 흐르는 감입곡류 핵에 해당하는 연화산 자락 암벽에
오랜 동안 침식을 가해 지금의 구문소 자리에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을 통해 혈내천이 직류하게 되자 과거의
물길 즉, 구하도에는 유수의 공급이 차단되었다. 이후 구하도는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다.
한편 구문소의 형성과정에서 지질조건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구문소 일대에는 석회암이 넓게
분포하는데, 석회암은 물에 잘 녹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통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구문소의 암벽이
유수에 쉽게 녹아 새로운 물길이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문소 지나는 도로길
해발 1,572.9m 백두대간 함백산
함백산은 태백시와 정선군 사이에 우뚝 솟은 해발 1,572.9m의 산으로 정상에서는 태백산, 일월산, 백운산, 가리왕산을 조망할 수 있다.
태백,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백두대간 한 가운데 위치하여 사방이 산으로 겹겹 둘러 싸인 땅. 함백산은 태백의 진산이다. 함백산 정상에는 고산수목인 주목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새해 해맞이 관광 코스로도 많은 산행객들이 찾고 있다
은하수와 별이 쏫아지는 함백산
함백산 정상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들의 성대한 잔치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달도 낮시간에 뜨고 지는 지라 파란 밤하늘은 금새라도 별들이 쏟아질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은하수도 둥둥 떠나니고 있었습니다. 별사진을
찍기 전까지만 해도 의식하지 않았던 함백산 중계소 앞의 가로등은 너무 환해서 또 다른 별사진의 복병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야생화의 천국 함백산
바람의 언덕 귀네미 마을
강원도 태백과 삼척의 경계에서고냉지 배추와 감자를 재배하고 있는 귀내미골 마을.
해발 천미터가 넘는 이 마을은무더위를 식히며 별자리 감상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단위 배추밭 풍경은 이색적인 풍경자아낸다
배추밭 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귀내미골
태백의 해바라가 축제로 유명한 구와우 해바라기 마을
태백 삼장동 벽화마을
80년대, 석탄사용이 가장 활발하던 시절, 전국 340여 개 탄광 중 강원도에 170개의 탄광이 있고 이 탄광들에서 3교대로 석탄을 캐 올릴 정도로 바빴다는 태백. 대졸 초임이 5만원 남짓이었던 시절 광부의 월급은 20만원가량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월 350만원이 넘는 고 수입을 올리는 직업이었으니 광부의 위상은 참으로 높았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일러의 등장으로 인해 연탄 사용량이 급감하면서 탄광촌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고 번성했던 탄광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청년들은 도시로, 젊은이들이 떠나간 마을은 화려했던 당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삶의 터전이었던 탄광촌과 우리네들의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는 듯 2011년부터 뉴-빌리지 태백운동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들의 재능기부와 마을주민들의 힘이 합쳐져 태백 상장동에는 탄광촌의 애환, 추억, 에피소드 등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진 탄광이야기 길이 마련됐고 탄광이야기, 전설이야기가 그려진 벽화마을이 탄생했다.
400여 명의 주민과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인 상장동은 탄장에서 탄을 실어 나르던 문곡역에 자리 잡은 번화가로 과거 최대의 민영탄광이었던 함태탄광과 동해산업 등에서 일하던 4,000여 명의 광부가 살던 사택촌이자 대포집과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던 번화가이자 큰 마을이었다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모태가 되는 과거의 흔적 철암 역사촌
읍에 불과했던 이곳이 태백시로 승격된 것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던 탄광산업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때 13만 명이 넘는 거대한 탄광도시였던 태백은 산업구조의 변화와
소득수준 향상과 같은 이유로 석탄 수요가 줄면서 불황을 맞게 되죠. 동시에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고령화가 진행됩니다.
탄광산업, 특히 성탄 산업을 바탕으로 부흥했던 철암과 통리지역을 가보면 소위 ‘잘 나갔던’ 태백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철암의 ‘철암 탄광 역사촌’은 태백 최대 호황기의 생활사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철암 천애 들어선 이 건물들은 하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건물의 하층부 구조가 마치 까치의 발과 비슷하다고 하여
‘까치발 건물’이라고도 불립니다.
철암역 선탄시설의 영향으로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자,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물이 연이어 들어섭니다.
이곳 ‘철암 탄광 역사촌’도 당시 주거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들로, 1층에는 상업시설이,
그 위에는 주거시설이 갖춰진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입니다.
건물에는 1970-80년대에 들어서 있던 다양한 종목(슈퍼, 치킨가게, 다방 등)의 상업시설의 외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내부는 박물관과 전시실 및 복합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철암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전시물과
예술작품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석탄산업의 근간이 되는 철암의 과거의 마을의 모습들
철암의 삼방동마을
태백의 탄광촌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