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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광 염산에 김장용 젓갈을 구입하러 갔다가
함께 간 우리 자오쉼터 삼촌들과 함께 두 장로님께 대접만 받고 왔다.
점심 식사 자리에 염산교회 담임이신 임준석 목사님도 함께 하셔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 단일 최대 순교자 77명이 생긴 염산교회를 견학하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임준석 목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소중한 자료들을 견학할 수 있었다.
먼저 영상실로 안내하여 약 15분 정도의 영상을 관람했다.
77명의 교인들이 석달에 걸쳐서 순교를 당했는데,
피난을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당한 77인.
그 배경에는 사랑의 원자탄인 고 손양원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오셔서
전 교인에게 순교자의 정신을 심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다섯의 옥자가 세 살된 막내 동생 미자를 업고 끌려가는데
세 살된 미자가 등 뒤에서 울자
“우리지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는 증언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상을 감상하고 2층에 올라가 수많은 자료들을 견학했다.
잘 정리된 순교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며,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발생하면 안 되도록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우리에게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 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조만간에 일정을 조율하여 한국기독교 최대 순교유적지인
염산교회 순교성지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염산교회 담임이신 임준석 목사님이 지으신 ‘천국소망 순교신앙’에 나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순교의 영광에 동참하고픈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순교의 은혜를 주신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다.” 는 내용이
저절로 마음으로 다가왔었다.
염산교회의 77인 순교성지에 대해서는
‘천국소망 순교신앙’과 인터넷에 잘 정리되어 올라와 있기에 따로 기록하지 않고
인터넷에 올라있는 내용을 인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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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산 교회 77인 순교성지
영광 염산 교회는 한국 최대의 순교자 피가 흐르는 곳이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설도 마을은 작은 어촌인 설도항에 위치해 있다. 6.25전쟁 당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인 77명의 순교자를 낸 곳으로 단일 교회로는 최대의 순교지이다. 염산 교회 1대 담임이었던 허상 전도사, 2대 원창권 목사, 3대 김방호 목사 모두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신앙적 절개와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77인 순교기념비, 이들의 시신이 합장된 묘소, 순교자 기념예배당, 각종 유물들과 자료 등을 보관하고 있다.
전남 영광군 내에 194명의 순교자 중 무려 77명이 이곳 염산 교회에서 나왔다. 임준석 담임목사가 나와 순교자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주고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교자들은 북한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찬송을 불렀다. 후손들은 그 가해자들을 사랑으로 하나님에게 인도했다. 한국 기독교의 순교신앙과 오직 예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세계적인 순교 유적지이다. 이곳에는 기독교 순교 체험관이 있다. 그 당시에 물에 수장하기 위해 사용한 장비와 돌들이 진열되어 있다.
염산 교회는 1939년 8월 허상 장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2대 원창권 목사에 이어 3대 김방호 목사가 6.25전쟁 당시 시무 중이었다. 김방호 목사는 경북 경산 출신으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가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벽지와 오지만을 섬기면서 1950년 3월 10일 염산교회에 부임했다. 그의 부임 이후 염산 교회는 날로 부흥 발전했다. 그러나 6.25가 나고 공산군이 이곳에 진입하면서 교회당과 목사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김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을 전전하면서 비밀 예배를 진행했다. 그해 9.28 서울 수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나주와 함평을 거쳐 영광읍내로 진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 지역 기독청년과 우익 청년들이 영광서 열리는 만세 환영대회를 주도했다.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공산군 잔당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시작했다. 그 해 10월 7일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기삼도(당시 목포 성경학교 학생)는 죽창에 찔려 불타는 교회 앞에서 순교 당했고, 동료 노용길 등 3명은 새끼줄에 굴비처럼 묶여 돌멩이를 매단 체 교회 옆 바닷속에 수장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은 노병제 집사 부부 및 어린 자녀들을 포함해 9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바닷 속에 참살됐고, 동생 가족도 모두 참살됐다. 노 집사는 찬송을 부르며 먼저 뛰어내렸다. 모두 22명의 일가족이 굴비처럼 엮여서 수장되었다. 시체들은 썰물을 따라 바다 위에 떴다가 가라앉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하다가 사라졌다. 13일에는 허상 장로 부부가 가까운 산골에서 죽창에 찔리고 돌무더기에 깔려 숨졌다. 허 장로는 숨이 끊어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군은 이 지역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수장시켰다.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울자 업고 있던 언니가 "울지 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단다."라고 달래기도 했다. 어린아이까지 신앙의 정조를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순교를 당했다.
이후 가정집에서 비밀 예배를 계속하던 김방호 목사는 10월 27일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일가족 8명이 순교를 당했다. 공산군은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장작으로 때려죽이면 너희들은 살려주겠다."라는 등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녀들은 도리어 "주님, 주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교의 영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김 목사도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절대로 이들을 미워하지 말라, 이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고 외치고 찬양을 부르며 피를 토하고 순교했다.
2대 목회자인 원창권 목사도 영광에서 순교하였다. 이로 인해 염산교회는 1,2,3대 교역자 전원이 순교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전 교인의 3분의 2가 순교를 당했으나 누구 하나 비겁하지 않았다. 모두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순교를 당했다.
국군에 의해 완전해 수복된 1951년 2월 24일 수요일 밤, 살아남은 자들이 목사관에서 첫 예배를 가졌다. 몰래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 속에 숨겨 두었던 찬송가를 들고 한겨울 추위도 잊은 채 타버린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이 마을 신학생인 안종렬 전도사가 인도한 예배는 눈물과 통곡으로 진행됐다. 안 전도사는 순교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 매장하는 일과 가족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 위로했다.
이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됐다. 그 해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순교한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가 아버지에 이어 제4대 교역자로 염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김 전도사는 신안 비금 덕산교회에 있어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김 전도사가 부임하자 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의 상처받은 교인들의 가정, 특히 공산군에게 가족을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성도들의 가정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했다.
"저는 가족을 다 잃은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시작한 그의 차분한 전도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니 그렇게 가족들을 다 잃고도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교의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공산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해 교인들을 순교하게 한 가해자들은 김 전도사의 행동을 숨어지내며 살폈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아버지 김방호 목사의 성업을 완수하기 위해 부모와 형제를 죽인 가해자들을 용서하기 위해 염산 교회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가해자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했다. 이곳 마을에서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질 당했다. 그는 부친을 비롯한 교인들을 학살하는데 가담했거나, 협력한 좌익 인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보냈다.
부모를 죽이고 가족을 처참하게 죽인 가해자들을 모두 용서한 것이다. 김 전도사는 매일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부모 형제 동포를 죽인 가해자들은 그의 뜻밖의 사랑을 받고 너무 놀랐다. 그러나 곧 진심을 알고서는 진정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사랑의 사도가 염산 교회에 부임했다고 영광 지역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의 목회는 삽시간에 수많은 신도들을 불러 모았다. 교회는 다시 부흥의 등불로 죄악을 태워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됐다. 이후 염산교회는 사랑의 교회로 불렸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시력이 계속 떨어져 목회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부득이 염산 교회를 잠시 사임했다. 그러나 끝내 치료하지 못하고 실명한지 11년 만인 42세의 나이로 천국으로 떠났다.
그 후로 염산 교회에서는 순교라는 단어를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다. 서로 쉬쉬했다. 60여 년이 흘러 관련자들도 대부분 사망했다. 피해자 후손과 가해자 후손들도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순교의 위대한 사역은 완전히 잊혀 가는 듯했다.
염산 교회 제19대 교역자는 김태균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체 이곳에 부임했다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땅이 엄청난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임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한국 기독교가 짧은 기간 동안 유례없는 성장을 한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순교자의 피'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념을 갖고 순교 신앙의 정립에 매달렸다. 자료들을 모아 종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반발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묻혀가던 사실은 서서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교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순교공원, 순교 탑, 순교 체험관 등을 만들었다. 순교자 유해도 모아 교회 앞 마당 큰 묘지에 합장했다. 77인 중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는 32명이다. 또 수많은 순례객들에게 순교신앙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임준석 염산 교회 담임목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뿌려진 순교자의 피들은 오늘도 쉬지 않고 한국 교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그 수난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1939년부터 오늘까지 복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염산교회의 순교 역사는 영원히 한국 기독교 역사에 빛날 것"이라고 강조하며 "
한국 기독교 최대 순교성지인 염산교회는 6.25 전쟁 때 77인의 순교자가 3개월에 걸쳐 나왔는데. 3개월간 순교하였다는 뜻은 피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다."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지하에 계량 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예배당 종을 빼앗기는 박해를 당했다.
그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역사를 지닌 영광 염산 교회이다. 예수를 믿는 신앙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목숨을 내놓은 77인 순교자의 희생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하였다.
예수께서 믿는 사람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며 열매 맺는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무화과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잎이 아니라 열매이다.
오늘 염산 교회에서 기도한다. 죄지은 마음에 회개하며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한다. 내 마음이 옳은 데로 오게 한 오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첫댓글 어린아이가. 어린동생에게 울지말라고. . 천국가는거라고. . . . 어떤말이 필요할까요. . . 감동이라. . 말하기조차 나의믿음. . . 부끄러울뿐이였습니다.
천국소망...
언제 한 번 방문해보고 싶네요.그분들의 희생 마음이 아픕니다. 77인의 합장 묘까지 있네요....
여기서도 역시 재구 삼촌 웃음과 엑스맨이 튀네요...ㅎㅎㅎㅎ삼촌들은 저 곳이 어떤 곳인지 알랑가 몰라
추천합니다.
오호호 그런 귀한 장소가 있었군요. 저도 꼭 한번 가보겠습니다.
노회 목사님들과 11월 8일에 한 번 더 다녀오려고요.
감동이네요~~
담에 꼭 가보세요. 적극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