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21일 고달사지를 다녀 왔습니다.
이글은 2002년 9월 23일 고달사지를 다녀와서 쓴 글을 수정하였습니다.
문화재를 만나는 순서는 작년 답사때 쓴 순서입니다.
벅찬 감동의 시간 "여주 고달사지를 다녀와서"
고달사지 가는길
"여주.. 살기 좋아. 골프장도 많고.........................."
그런 소리를 듣고 얼마나 씁쓸했는지........................
고달사지 마저 폐허가 되어 그렇게 서러운데
현대에 사는 우리는 또 하나의 폐허를 창출했으니
이곳을 지키는 산신령께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길고 좁다란 길을 차창으로 농촌 풍경들을 음미하고 있는데
'고달사지'라는 표지판이 우리 일행을 환영한다.그만큼 이곳이 첩첩산중임을 말해준다.
고달사지 전원일기에 나옴직한 농촌풍경이다.
기전 매장 문화재 연구원이 한창 발굴 중이다.
4차 발굴 조사라고 누군가 이야기 해준다.
여느 향촌처럼 마을입구엔 400년이 넘는 커다란 보호수가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뒤 산인 혜목산이 절터와 마을을 품고 있어 아늑하게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어디를 가든지 절터는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펼쳐진 고달사지. 와...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다니....
나뒹군 돌멩이 사이로 우린 그나마 성한 기와장 찾아내는 것이 폐사지(閉寺址)의 맛이다.
황폐한 가운데 생명을 찾는 것이라고 할까?
저 멀리 발굴자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허허벌판의 스산함을 더욱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럴수록 생명력을 발견하기 쉽고 또 이 땅의 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달사(高達寺)' 라? 도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서 '高達'이 아닌가?
실은 이곳의 석조물은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고달은 가족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유명한 고승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가족의 피폐함을 알면서도 부처님을 향한 정성을 이 땅에서 찾아야 한다.
고려때 사방 30리가 절땅 이었 다는데
아마 남겨진 절터와 찬란한 석물들만 유추해 보더라도 그 장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종대사 혜진탑
오솔길을 걸어 오르니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7호)가 보인다.
섬세하고 역동적이지만 워낙 고달사지 부도가 뛰어나다보니 상대적으로 눈길을 덜 받는다.
위의 작품이 팔각의 지대석을 가진 반면 이곳은 사각의 지대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북이와 용이 서로 머리를 길게 빼어 돌리고 있어 해학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걸 보는 순간 경복궁 마당에 있는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이 생각난다.
역시 사자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탑신부의 사천왕상이 멋지게 조각되어 있다
약간은 심술 굳은 얼굴이지만 조각이 생동감이 넘친다.
역시 지붕 돌엔 귀꽃이 둘러져 있고 그 밑엔 구름 문양이 새겨져있다.
상륜부는 훼손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고달사터 부도
이 부도(국보 4호)를 영접하려면 약간의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중간 중간에 산초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감미롭게해 주어
흥겹게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조금씩 커 보이는 부도의 모습들... 목을 쭉 내밀어본다.
'와..이럴 수가...' 입에서 탄성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랄까?
우선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높이 3.4미터) 그리고 자세히 뜯어보면서 그 정교한 조각솜씨에 다시금 놀래본다.
감은사 삼층 석탑을 보았을때 감격,
그 이후에 또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니...
오늘 참 행복한 날이구나 .
이 부도는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부도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지대석, 기단부 ,탑신부, 지붕돌 모두가 팔각형으로 신라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가장 조각이 화려한 부분은 중대석이다.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이 구름에서 노닐고 있다.
거북도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러나 근엄함은 잃지 않고 있다.
돌의 양감도 풍부하여
금방이라도 돌을 깨부수고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마술상자에 갇힌 것 같다.
마술이 풀리면 '펑'하고 터지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할 것 같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위에 돌려진 앙련들. 현대조각의 기하학적 모습이 아닌가?
분청사기의 문양에서도 그걸 느꼈는데 돌 조각에서도 그런 발견을할 수 있다니...
정말 아름답다.
아까 보았던 원종대사 부도의 앙련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혹시 같은 도공?
탑신부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짝과 창살문, 사천왕이 번갈아 조각되어있다.
이곳에 스님의 사리와 경전 등이 들어 있으니 자물통으로 잠근다는 의미이며,
사천왕은 그걸 지키는 신이다.
그리고 나타난 지붕돌.
약간은 커서 전체적인 비례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날렵하게 솟아오른 귀꽃이 어색함을 없애준다.
귀꽃이 한쪽이 부러저있다. 도굴꾼들이 무지 막지스런 장난이란다.
능지처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도굴꾼들이 내 피를 끊어 오르게한다.
어찌이런 무지 막지한 생각이 드는걸까?
많은 이들의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닐까 ?
지붕 돌 밑에 숨겨진 '비천상'을 보라.
어떻게 이곳에 이 비천상을 새길 생각을 했을까?
빈신사지 지붕 돌 밑에도 구름문양이 보였었지.
역시 명품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기를 두드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라.
간결하면서도 넉넉함을 주는 천상의 모습이 아닌가?
에밀레종의 흐느끼는 비천상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지붕 돌 위엔 보개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지붕 돌이 보인다.
아마 상륜부는 더 화려했을 텐데 남아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다.
이 자리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보고 또 봐도 지루함이 없다.
우리네 질그릇 같은 느낌이랄까?
화려하고 안정감 있고 흠나지 않은 질그릇,
그것이 바로 이 고달사지 부도인 것이다.
원종대사 부도비와 이수
'봉글봉글'이란 파마머리를 의미한다.
바로 '원종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6호)를 본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원종대사부도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귀부와 이수'다.
용의 머리를 한번 보라.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이다.
코구멍이 깊숙히 파여 있고 코를 벌름거려서 콧등까지 주름이 잡혀있다.
무서운 얼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그나마 해학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바로 하얀 이빨을 내민 미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입에 여의주를 물지 않는 것이 더 특이하다.
사실 눈알 자체가 여의주인데 입에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그럼 여의주는 2개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거북의 등 껍질을 보라.
얼마나 견고하고 예쁜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발톱. 마징가제트에서 나오는 적의 로봇이 지닌 흉기 같지 않은가?
이 발톱을 땅을 처박고 꿈적도 안한다.
다른 돌 조형이 다 쓰러져도 이 돌조각이 천년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발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대 거북선의 강인함은 이런 정서를 현실로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이무기를 나타내는 이수다.
전면에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라 쓰인 전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름과 용이 꿈틀거리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이수의 측면을 가장 사랑한다. 용의 비늘을 바라보라.
분출하는 생명력 때문에 비늘이 떨어질 것 같지 않은가?
이 거대한 귀부와 이수는 한 개의 돌로 만들어진 단일석이라는데 다시 한번 놀라본다.
한번 정을 잘못 때리면 헛수고로 돌아가는 돌
조형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참, 중간에 끼여야 할 비는 어디 있을까?
1915년 봄에 비신이 넘어졌는데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웬만하면 보수해서 이곳에 옮겨야 하지 않을까? 반쪽만을 보는 것이 아쉬워서 그렇다.
석불대좌
탐방객을 흥분시키는 것이 바로 석불대좌(보물 8호)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생긴 대좌다.
보통 원형이나 팔각모양인데 이곳은 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가 1.57미터. 그 넓은 곳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얼마나 컸을까?
고려 시대라면 거대한 철불이 아닐까? 상상을 해본다.
아마 국립박물관에 있는 보원사 철불이나 춘궁리 철불 만큼 컸겠지...
지금은 구름이 부처님 대신하여 앉아있다.
하대석엔 안상(眼象, 코끼리 눈)이 4개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복련을 둘렀는데 이것이 참 명품이다.
우선 조각의 입체감이 뚜렷하고 가지처럼 늘어진 것이 부처님의 자비가 분출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타난 중대석. 큼지막한 안상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그 위에 새겨진 앙련. 하대석에 새겨진 복련이 부처의 넘치는 자비라면
이는 부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불꽃처럼 보인다.
활활 타오르는 화신이랄까?
이 멋진 돌 조각을 보고 한참을 되새김해본다.
석공의 망치소리가 생명력을 심어주는 호흡기였구나...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282호) 국립 중앙박물관
아쉬운 작별
아쉽게도 고달사지를 떠난다.
비록 폐사지가 되었지만 거기에 깃든 정신은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선다.
내려올 때는 왼지 마음이 씁쓸해진다.
동네아이들이 뛰어 논다. 고달사의 후예들인가...........
일행중 누군가가 내게 먹울것을 건내 준다.
그래 나누는 기쁨이 사랑이고 행복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실천하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그 정겨운 모습을 힐끔 처다 보며 미소를 지어본다.
마침말
고달사지.
누군가가 고달사를 '천상의 꿈'이라고 표현했고,
부도에게 "당신이 이렇게 굳굳이 버티고 서 있어 주어서 눈물 겹도록 고맙다" 라는 말을 하고 오지 않았던가?
나는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찾을 수 없어 묵묵히 돌아서야만 했다.
따뜻한 봄날.. 다시 고달사의 님을 찾아야겠다.
그때는 무슨 말이든 해야하는데.....
천서리 막국수집 2003년의 이야기니 2008년인 지금 식사 메뉴표는 많이 변했으리라.
첫댓글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사진 박느라 고생,까페 운영 고생, 사진 올리랴 고생.....
잘읽고갑니다. 눈에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차 한잔 대접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수고하십니다.고생하십니다네요.잘 보고 갈께요.
모든 자료 잘 챙겨 놓고계시지요. 다 소중합니다 언제 우리 책만들어요 다양성과 동질성이 공존하는 모임이라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회원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2005년 3월3 일 8명이 고달사지를 찿았습니다. 잔설이 간간히 남아있었습니다.그래서 다시한번 공부하고저 끌어 올려 봅니다.
2005년7월8일 여주방면 답사라서 끌어 올렸습니다.
예습 잘 하고 갑니다. 높은 눈 높이에 맞추려 뒷발꿈치를 올려 볼까 합니다.